참외 먹고 죽은 2천 100년 전 미라

프리즌킹왕짱 작성일 07.11.03 22: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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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난성박물원 마왕퇴 유물 탐방

(창사=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2007년 10월23일, 1천년 역사의 악록서원(岳麓書院)을 잠시 뒤로 하고 택시를 타자마자 '湖南省博物院'(후난성박물원)이라고 쓴 취재수첩을 내미니 택시는 쏜살같이 내달리기 시작한다.

창사시(長沙市)를 남북으로 가로지른 샹강(湘江)을 지나 동쪽 도심을 향해 매캐한 매연 속으로 빨려들어가듯 질주한지 20-30분만에 혁명열사공원(革命烈士公園)이란 거리 명패가 보이고 그 뒤로 각종 수목이 울창한 숲이 나타난다.

숲이 끝나는 공원 북쪽 기슭에 바로 목적지인 '후난성박물원'이란 큼지막한 간판을 가로지른 대문이 나타난다. 1951년 3월에 주건(籌建), 즉, 박물관 준비기관을 발족하고 1956년 2월에 정식으로 개관했다니 올해로 이 박물관은 51살 완연한 중년이다.

입장료는 성인 개인 기준 50위안. 한국돈 6-7천원 가량이나 된다. 그럼에도 이 박물관 관람실에는 한시도 사람이 빌 틈이 없고 관광버스는 연신 단체 관람객을 쏟아낸다. 그들이 내는 요란한 소음 중 절반은 한국말이다. 그만큼 이곳은 창사를 찾는 한국 관광객이면 어김없이 들른다.

하지만 대개 한국 관광객에게 최종 목적지는 창사가 아니다. 창사에서 버스로 4시간 가량을 가야 하는 장자졔(張家界)로 오가는 길에 스쳐가는 곳이 바로 후난성박물원이다. 장자졔로 향하는 한국 관광객이 오죽 많은가? 그렇게 많은 한국인 관광객이 이 박물관에 쏟아붓는 돈은 과연 얼마나 될까?

후난성박물원에는 어떤 매력이 있을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시체, 그것도 미라가 된 인체를 트레이드마크로 내세운 박물관은 아마도 이곳이 유일할 것이다. 각종 홍보 책자를 보면 대지 5만여㎡에 건축면적 2만㎡인 후난성박물원은 소장유물이 11여만 건에 달하며 이 중 1급품은 763건에 이른다.

신석기시대 석기와 도기(陶器), 상주(商周)시대 청동기, 초(楚)나라 시대 문물, 동한(東漢) 이후 수당(隋唐) 시대에 이르는 각종 도자기, 당나라 사람이 모사했다는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 명말(明末)-청초(淸初) 시기 저명한 사상가 왕부지(王夫之)의 글씨 등을 수작으로 꼽기는 하지만, 이곳을 찾는 관람객 대부분은 실상 이런 유물에는 오래 눈길을 줄 틈이 없다.

이곳에 처음 들어서는 사람이면, 특히 관광객이라면 거의 어김없이 '시체실'로 달려간다. 기자가 꼭 1년만에 다시 이곳을 찾아 진열실을 관람하는 와중에도 곳곳에서 "시체가 어디 있어? 저게 시체야?" 라는 한국인 관람객의 웅성거림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후난성박물관은 후난성을 대표하는 성급 박물관이지만 실제는 마왕퇴(馬王堆) 한묘(漢墓) 전문박물관이다. 마왕퇴 유적 출토품이 아니라면 그 어떤 명품도 적어도 이 박물관에선 찬조 출연자일 뿐이다. 그만큼 후난성박물관에서 마왕퇴가 차지하는 비중은 가히 절대적이다. 굳이 우리의 사례를 비교한다면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무령왕릉 유물이 차지하는 비중과 비슷하다.

무령왕릉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1971-1972년은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고고학상 기념비적인 해로 기록된다. 1971년 7월 공주에서 기적적으로 백제 무령왕릉이 발견되더니, 그 해 12월28일 중국 창사에서는 마왕퇴 한묘가 발견돼 세계 역사고고학계를 진동케 했다. 이어 이듬해 4월 일본에서는 다카마쓰즈카라는 고대 벽화고분이 발견됐다.

무령왕릉이 그랬듯이 실로 우연히 마왕퇴란 언덕에서 전쟁 대피용 방공호를 파다가 한나라 때 묘를 뚫고 들어가는 바람에 기적적으로 출현한 마왕퇴 한묘는 1974년까지 장기간에 걸친 조사 결과 고분 2기를 리스트에 더 추가했다. 조사 결과 이들 무덤은 한고조 유방이 한 제국을 건설할 때, 그에 협력해 지금의 후난성 일대를 지배하는 장사국(長沙國)이란 제후왕에 봉해진 오예라는 사람 밑에서 승상을 지낸 이창(利倉)이란 사람과 그 일가족 공동묘지로 밝혀졌다.

구체적으로는 발견된 순서에 따라 가장 먼저 발견된 1호묘는 그의 아내 신추(辛追)가 묻힌 곳이며, 2호묘는 기원전 193년에 죽은 이창 자신, 그리고 3호묘는 아직까지도 확실치는 않으나 이창과 신추 부부의 아들이 묻힌 곳으로 추정된다.

이 마왕퇴 발굴이 진시황 병마용갱 발굴에 비견될 정도로 세계를 경악케 한 까닭은 무엇보다 풍부한 출토 유물 때문이었다. 죽은 이를 위해 함께 매장한 각종 물품 품목을 적은 견책(譴策)이나 목간(木簡)은 물론이고 아마도 명정으로 사용됐을 대형 t자형 백화(白畵. 비단에 그린 그림), 각종 병기와 악기, 칠기류는 휘황찬란했다.

하지만 출토품 중 백미는 28종, 총 12만자 분량에 이르는 죽백서(竹帛書)와 여자 미라다. 이곳에서 발견된 죽백서 대부분은 그동안 이름만 전해졌거나 아예 그 존재조차 알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또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각기 다른 시기에 필사된 두 종류 판본이 동시에 발견됐다.

수천 점에 이르는 마왕퇴 출토 유물이 고스란히 후난성박물원 차지가 된 것은 1971년 이 유적 발견 직후 조사를 담당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마왕퇴 유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시실 배치가 '마왕퇴 한묘 진열'과 '후난 역사문물 진열' 두 곳으로 구분된다는 점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후난성박물원은 '마왕퇴 진열관과 기타 등등'의 전시관인 셈이다. 전시공간 역시 절반 이상이 마왕퇴 유물 차지다.

마왕퇴 진열관은 전시품별로 특화해 놓았다. 입구에는 발굴 과정이나 유적 전모를 엿볼 수 있는 각종 도판이나 일반 유물을 전시해 놓았으며, 이곳을 지나면 악기류 코너를 만나고 다시 그곳을 통과하면 각종 칠기류 그득한 공간이 맞이한다. 사람을 본뜬 나무 인형, 가야금 비슷하지만 현이 25개인 악기, 바둑이나 장기 비슷한 놀이기구 일종인 박국이 특히 볼 만하다.

이어 관람객은 직물 코너로 들어선다. 무덤에서 무슨 비단이 그리도 많이 출토됐는지 놀랍다 . 총길이 128㎝에 어깨길이는 190㎝나 되지만 중량은 겨우 49g인 직물 '소사의(素紗衣)'도 있다. 이것이 중국이 세계를 향해 자랑하는 '세계에서 가장 가벼운 옷'이다.

빛에 민감한 직물 보호를 위해 조명을 어둡게 한 직물 코너를 지나면 각종 죽백서(竹帛書)가 열을 지어 나타난다. 그 중에는 노자도덕경 두 가지 판본은 물론이고 '합음양(合陰陽)'이라 해서 정기를 소모하지 않고도 *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설파한 성 교과서도 있다. 군사지도와 괴물들을 잔뜩 원색으로 그려넣은 그림도 보인다.

이런 마왕퇴 한묘 진열관에서 시신은 가장 후미진 공간을 차지한다. 그곳에 이르기 위한 길목에서 거대한 목곽(木槨)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마왕퇴 1호 한묘에 있던 목곽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규모가 장대할 뿐만 아니라, 2천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목곽이 이토록 생생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 이 거대한 목곽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2층으로 올가가야 하는데, 사진을 촬영할 수 있도록 박물관 측에서 세심한 배려를 한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이 거대 목곽 뒤 한 켠에는 시신을 안치했던 관 3점이 전시돼 있다. 이들 관은 모두가 겉에 화려한 구름 문양을 원색으로 수놓았다. 그래서 이들 관을 채회관(彩繪棺)이라 부른다.

'시체'는 그 맞은편에 안치돼 있다. 지하에 마련한 관에 하늘을 보며 반듯이 누운 시신. 발견 당시에는 피부가 살아있는 듯 윤이 났다고 하지만, 보존을 위해 방부처리를 한 까닭에 지금은 그런 흔적은 어디에도 없고 그냥 회반죽으로 만든 마네킹같을 뿐이다.

미라가 된 시신을 이렇게 만천하에 꼭 전시해야 하는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마침 기자가 이 미라를 찾았을 때, 영국식 영어 발음이 완연한 서양인 일가족이 미라를 관람하며 키득키득 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시신을 두고 농담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1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와 비교할 때 이 '미라실'은 확연히 달라진 데가 있었다. 그 때는 미라 뿐만 아니라 그 주변으로 이 미라를 해부하면서 떼낸 각종 장기, 심지어 자궁까지 용액에 담아 전시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미라 주인공은 1호묘에 묻힌 신추, 즉, 초대 장사국왕의 승상을 지낸 이창의 아내다. 내관(內棺)에서 발견될 당시 신추 미라는 신장 154㎝에 체중은 34.3㎏이었다. 관 속에 있은 지 무려 2천100년이 더 지났건만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해 전신에 윤택이 났고 피하 조직 또한 유연했으며 탄력이 있어 관절이 살아 숨쉬는 듯 했다고 한다.

눈썹과 코털도 여전히 남아 있었으며 왼쪽 귀 속에는 고막이 완전했다. 나아가 손가락 발가락도 완연했다. 해부를 해 보니 장기 또한 보존 상태가 좋았고 폐부 신경 조직 또한 몇 가닥이 남아있었다. 혈관에는 응고한 상태의 핏덩이가 남아있어 검사했더니 혈액형은 A형이었다.

병리검사를 해 보니 신추는 생전에 관심증(冠心病)이나 동맥경화 같은 각종 질병에 시달렸으며 직장과 간장에서는 편충란과 요충란, 혈흡충란이 발견되기도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식도와 위에서 참외씨 138개가 발견됐다는 점이다. 이로써 신추가 죽은 계절이 참외가 익는 여름철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인은 관심증 발작, 죽을 때 나이는 50세 안팎으로 추정됐다.

이 미라는 고대 이집트의 미라가 내장을 발라내고 방부처리를 거친 것인데 비해 시신에 손상을 전혀 내지 않은 상태에서 보존된 결과라는 점이 세계 의학계에서도 하나의 사건으로 평가된다.

1년 만에 재회한 미라 신추. 그래서 반갑긴 했지만, 다음에 이곳을 찾았을 때는 만나지 못하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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