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생제르망 백작은 지금도 유럽에서는 불로불사의 인간으로 간주되며
여러 가지 신비한 일화를 많이 남기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의 생애는 출생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고 아직도
그가 생존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의 출생에 관하여 맣은 논란이 있는데 일부의 사람들은 그가 프트란실바니아의 지배자였던
프란시스 라코치 2세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또 스페인 찰스 2세의 미망인이 낳았다든지, 포르투갈의 유대인의 아들이라는 등등의 설이 분분하지만
확실히 입증될만한 증거는 없습니다..
단 그는 5개 국어에 능통했고 학문,예술 분야 에서도 뛰어났기에 예술가의 자식이
아니냐는 설도 있습니다..
여러 분야에서 활동한 그는 1740년 경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던 전력이 있고
1750년대에 루이 15세와 그의 정부인 마담 퐁피두와(루이15세의 정부로 12년간 프랑스를 좌지우지 한 여자)
의 추천으로 사교계로 진출하였다고 합니다..
생제르망 백작은 학식과 재능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뛰어났다고 알려집니다.
바이올린 연주나 화가, 연금술, 화학 등등의 다양한 재주를 과시하여 일약 사회적인 명사가 된
그는 특히 자신이 연금술로 만들어 냈다는 보석을 뭇 여성들에게 아낌없이 뿌려대 신망을 얻었습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생제르망이 현자의 돌(엘릭서-연금술사가 꿈꾸는 궁극의 물질)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런던 연대기>에는 '불가사의한 이방인에 관한 일화'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탁월하고 고귀한 연금술사로서의 명성을 가지고 독일에서 프랑스로 왔다.
그는 비밀의 가루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만능약이기도 했다.
이 이방인이 금을 만들 수 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그의 끊없는 지출이 이러한 소문을 뒷받침했던 것 같다.
소문이 커지자 당시의 프랑스 대신이 이를 의심하여 그의 비밀을 밝히려 했고
그는 생제르망이 어디로부터 송금을 받고 있는지 조사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현자의 돌이 어디서 생기는지 그 출처를 곧 알게 될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비밀을 밝히려는 그 고관의 의도는 매우 사려 깊고 현명한 것이었지만
오히려 수수께끼만 더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게 2년 동안 감시하였지만, 생제르망은 평상시와 같이 생활하며 모든 것을 현금으로 지불했는데,
그 동안 프랑스에 있는 그에게 들어온 송금은 일체 없었다.]
생제르망 백작이 연금술사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는 애인인 귀족부인 라모아 제르지의 하녀에게
저택을 사줄만큼 씀씀이가 컸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문도 돈을 벌데도 없는 그가 어디서 그런 많은 돈이 났는지는 지금도 수수께기 입니다..
생제르망은 일부 귀족들 앞에서 변성실험(금속을 다른 물질로 바꾸는 연금술의 한 종류)을 하여
보통의 주화나 은화를 금으로 변화시키기도 하고,
왕이나 외교관에게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며 큼직한 다이아몬드와 보석을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파리의 자택에서 마련한 연회에서는 보석을 디저트 접시에 담아 참석한 귀족들에게 선물로 주었다고도 전해지죠.
한번은 어떤 공작부인의 청에 못이겨 생명의 약이 든 작은 병을 주었는데,
그것이 술인줄 알고 마셔버린 하녀가 몰라보게 젊어졌다는 믿기지 않는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게다가 그가 더 신비한건 그가 불사의 능력을 가졌다고
추정 되기 때문입니다..
생제르망의 애인이였던 라모아 제르지 백작부인의 회상록에 의하면,
1710년 무렵 베네치아에 있던 생제르망의 나이는 50세쯤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1660년경에 출생한 것이 되죠.
그런데 그는 1737년에서 1746년 사이에 페르시아와 영국, 빈 등에 머물렀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7, 80세는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이지만 오히려 더 젊어 보였다고 합니다..
이후에 1749년에는 파리에 도착하여 루이 15세와 퐁파두르 후작부인을 만났으며,
1756년에는 인도에서 목격되었습니다.
또 1762년에는 성 페테르스부르크의 쿠데타에 참가하고,
이후로는 프랑스의 샹보르성에서 연금술과 화학실험에 종사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리고 1768년에는 베를린에 있었고, 그 다음해는 이탈리아, 코르시카, 튀니스를 여행하였으며,
1770년에는 러시아 해군이 이탈리아에 입항했을 때 오를로프 백작에게 초대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때 그는 러시아 장군 복장이었고 외모는 변화가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1770년대에는 독일에 체류하면서 샤를 왕자와 함께 프리메이슨과 장미십자단 일에 종사하였으며,
1780년에는 런던의 출판상인 왈시 사에게 찾아가 자신이 만든 바이올린곡을 출판 하도록 했답니다.
독일의 에케른푀르데의 교회에는 "소위 생제르망 웰돈 백작.
1784년 2월 27일 사망. 3월 2일 매장됨"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1710년에 그가 50세까지 함게 했다는 라모아 제르지 백작부인의 말을 믿으면,
그는 124세 정도에 죽은 셈이 됩니다.
그런데 그 다음 해 그는 프리메이슨 모임에 당당히 출석 했다고 합니다.
1787년에는 프랑스 루이 16세 앞에 나타나서는 지금처럼 사냥만 하고 다니면(루이 16세는 사냥과 열쇠 수리외엔 전혀
다른일엔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2년뒤엔 비참하게 목이 잘릴거라고 말하고 사라 졌다고 합니다..
그후 2년뒤인 1789년 시민 혁명이 발발하며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는 사형 당합니다..
또 한 라모아 제르즈의 증손녀인 엘리메아는 1821년에 생제르망 백작을 빈에서 만났는데 할머니는 편안히 가셨냐고 물었다고 했습니다,
주 베네치아 프랑스 대사도 같은 해에 산마르코 광장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기록 했습니다
생제르망의 친구이자 제자인 헤세 카셀의 샤를 왕자는 그의 저서에서
"지금까지의 철학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 중의 하나"로 생제르망을 추켜세웠으며,
주브뤼셀 오스트리아 대사인 코벤츨도 그를 높이 평가하여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존경할 수 있는 결백하고 착한 영혼의 소유자"
라고 하였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왕(프로이센의 국왕)은 생제르망을 "이해할 수 없는 남자" 라고 말하였으며,
프랑스의 볼테르(프랑스의 작가이자 계몽 사상가)는
생제르망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
그리고 "결코 죽지 않는 남자" 라고 평하였습니다.
현대 심령학 에서는 생제르망이 불로라기 보다는 시간 이동을 자유로이 할수 있다는 능력을 가진것
같다고 추정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