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 영국 정보기관 M15소속인 라이오넬 크랩 중령
★버스터 크랩 실종사건의 진상은?
제 2차 세계대전 후의 영국 제1급 잠수전문사인 라이어넬 크랩 퇴역해군중령이 SIS(영국특수정보부) 스파이인 버나드 시드니 스미스와 같이 포츠머스항의 셀리포트 호텔에 투숙한것은 1956년 4월 17일 이었다.
그 이튿날 소련의 순양함 오르조니키즈호가 두 척의 구축함을 이끌고 포츠머스항에 입항했다. 함상에는 영국을 공식 방문하는 소련 수상 니콜라이 불가닌과 공산당 제 1 서기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타고 있었다.
영국의 수상관저에서는 소련에서 온 국빈에 대해 스파이 활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지시를 내린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닌과 흐루시초르가 런던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에 크랩중령은 SIS요원의 부추김을 받아 여러차례 항구내의 바닷물 속으로 잠수하여 소련 전함의 선체를 살폈다.
★바다로 꺼진 스파이
소련의 순양함이 입항한 바로 그날, 크랩은 시험잠수로 행동을 개시했다. 그리고 4월 19일 날이 새자 곧 그는 항구의 물속으로 들어갔으나 이내 올라와서는, 배 밑으로 내려갔었으나 잠수복의 호흡장치에 이상이 생겨 숨쉬기가 어려웠다고 보고했다. 잠수장치는 영국해군에서 지급된 것이었으며 해면에서 10m 이하의 곳에서 사용하는 것은 위험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크랩은 탄산가스가 과도하게 차 있는 공기를 바꾸기 위해 부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잠수했다. 그 후 스미스는 영영 다시 크랩을 볼 수 없었다.
순양함과 두 척의 수행 구축함은 4월 29일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 이튿날 영국 해군성은 크랩이 모종의 잠수기구를 실험하던 중 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공식성명에는 크랩이 4월 20일 소련 함선들 부근에서 실종된 것으로 되어있었다.
소련 대사관과 영국정부 사이에 외교각서들이 교환되었으며 영국정부는 크랩이 정부의 허가 없이 활동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웨스트브롬위치 출신의 하원의원 존 더그데일이 하원에서 좀더 자세한 정보를 요구하자, 수상 앤터니 이든 경은 추정되는 크랩의 사망 경위를 밝히는 것은 국익에 위배된다고 답변했다.
이든 수상은 여왕폐하의 각료들의 허가도 얻지 않고 또 알리지도 않고서 그런 일이 단행되었기 때문에 징계조치가 취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건 그렇다 치고 도대체 크랩은 어떻게 되엇을까? 만약에 정말로 그가 죽었다면 그를 죽게한 임무를 지령한 사람들이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셈이었다. 어떤 극비의 수중방위장치가 그를 죽였을까? 소련의 잠수부들이 죽였을까? 소련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소련으로 끌고 간 것은 아닐까?
결론을 서두르기 전에 크랩의 전력에 눈을 돌려 그가 어떤 인물인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는 2차 대전중 영국해군의 폭탄 및 기뢰처리반원으로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는 수영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나 우수하고 대담한 스킨 다이버였으며, 이 분야에서는 공인된 전문가였다.
★훈장 받은 용사
전시중 그는 지브롤터 해역에서 이탈리아군의 기뢰를 처리하고 이어 지중해에서 적의 함선들을 교란하는 파괴 공작을 도왔다. 그는 조지훈장을 받아서 4급훈장(OBE)소유자가 되었다.
그는 1953년에 퇴역했다. 군대생활을 마치자, 그는 정신이 빠진 사람 같았다.
항상 우울했고 친구들에게는 자살하겠다는 이야기까지 하곤 했다. 크랩은 또한 점점 폭음을 하게 되었고 술에 취하면 그가 수행했던 비밀임무에 관해 아무에게나 마구 지껄이기 일쑤였다. 마지막 잠수를 위해 호텔을 나서기 전날 밤에도 그는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괴짜였다. 평상시의 옷차림 속에 심지어는 침대에서도 고무로 만든 잠수복을 즐겨 입었다. SIS는 왜 이런 괴짜에게 복잡하고 어려운 임무를 맡겼을까??
이에 대한 한가지 해답은 현역장교에게 맡겼다가 실패할 경우 빠져 나갈 구실을 찾기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민간인인 그에게 맡겼을 것이라는 것이다. 스킨 다이빙이 오늘날처럼 인기있는 스포츠로 보급되지 않았던 당시, 크랩은 그 많지 않은 전문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SIS가 필요로 하는 경험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돈이 궁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설득하기도 쉬웠다.
이것은 물론 중요한 사실은 아니다. 공작이 실패하자, 정보요원 스미스는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들을 피해서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와 동시에 스미스와 크랩이 서명한 호텔 숙박부의 해당 페이지도 누군가 없에 버렸다. 그 후 1년 이상이 지난 1957년 6월 9일 포츠머스에서 몇 Km 떨어진 치체스터항의 어부들이 고무 잠수복을 입은 남자의 시체를 발견했다. 편리하게도 시체에는 머리와 손이 없었다. 시체의 한쪽 다리에 상처가 있었다. 크랩의 다리에도 같은 부위에 같은 상처가 있었다. 잠수복은 크랩이 애용하던 이탈리아제였다. 그리고 크랩처럼 심하지는 않았으나 시체의 발가락도 크랩이나 마찬가지로 갈고리처럼 안으로 굽은 기형이었다. 결정적인 신원 증명이 된 두개골과 이빨, 지문 등은 없었으나 치체스터의 검사관은 크랩의 시체가 틀림없다고 단정했다.
이 검시판정은 사건에 종지부를 찍기는 커녕 일반의 관심에 부채질을 하여 또다시 갖가지 추측이 난무하게 되었다. 이 무렵 소련 소식통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짐작되는 이상하고 어지러운 소문들이 영국으로 전해지기 시작했다. 소련의 어느 해군장교가 크랩은 소련의 포로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는 기사가 서독의 한 신문에 실렸다.
★붉은 군대에 입대했나? 총살당했나?
그는 모스크바의 형무소에 갇혀 있으며 스파이로 총살을 당할 것인가 아니면 소련해군에 입대할 것인가 양자택일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결국 영국 해군에 불리한 임무에는 가담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후자의 길을 택했다고 전해졌다.
베를린 주재 소련 무관들에게서 나왔다는 또 하나의 소문에 의하면, 크랩은 소련 순향함 아래에 장치한 강력한 자력장치에 걸려들어 수중에서 익사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소문은 크랩이 광신적인 소련망명집단이 순향함에 부착한 수뢰가 터지는 바람에 죽었다고 했다. 그는 용감하게도 수뢰를 제거하여 그 뇌관을 뽑아내려고 하다가 폭사했다는 것이었다.
★잡지에 실린 사진
그러나 가장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 소문은 정치문제에 관해 극단적으로 우익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던 영국 전쟁영웅 크랩이 결국 소련 군대에 들어갔다는 소문이었다. 국외에서 들어온 뜻밖의 정보로 말미암아 이 소문은 더욱 신빙성을 갖게 되었다. 서방세계에 흘러 들어온 소련의 군사잡지에 소련해군 장교들의 사진이 게제되어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수중작정 교관인 르보프 르보비치 코라브로프 중위였다. 사지은 희미했으나 크랩의 전 부인 마가레트와 전우 중 한 사람이 코라블로프가 실종된 크래벵 틀림없다고 단언했다.
크랩이 소련에 나타났다는 추측은 또 하나의 보고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오르조니키지호가 영국으로부터의 돌아갈 때 선내의 병원에 신원불명의 환자가 엄중한 감시를 받으며 입원해 있었다고 이 순향함에 타고 있던 수병들이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약 크랩이 소련에 살아 있다면 소련당국이 어째서 그것을 선전 재료로 이용하지 않았을까?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코라블로프가 크랩이라면 치체스터항에 파도에 밀려 올라온 시체는 도대체 누구의 시체란 말인가? 이것은 결코 만족할 만한 해답을 얻어낼 수 업을것 같은 수수께끼 이다.
★가짜 시체였나?
크랩의 생존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소련이 적당한 시체를 입수하여 다리에 상처를 만들고 상당기간 바닷물에 담가서 부식시킨 후 머리와 손을 잘라내고 해안에 놓아 두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만약에 공작이 계획대로 추진되면 수상의 노여움이 자기들에게 떨어질 것을 알아차린 SIS가 계획을 포기하고 불쌍한 크랩을 처치했다는 다소 멜로드라마 같은 해석도 있다. 결국 가장 단순하고 가장 신빙성이 높은 해명은 라이어넬 크랩 퇴역해군중령이 잠수장치의 결함으로 수중에서 익사했다고 하는 해명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