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문명에 대해

easts 작성일 08.03.14 1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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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아포칼립토 영화애기도 나오고 마야문명의 잔인한 면이 나와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를 서술한 경희대학교

 

송영복 교수님의 글을 발췌하였습니다. 원문이 좀 깁니다. ^^~ 참고하길...

 

마야사람들은 잔인한 미치광이가 아니다.

영화 아포칼립토를 보고...

 

나는 소위 마야문명 전공자이다. 마야문명을 공부하고 싶다는 극히 비현실적이고 무모한 생각으로 멕시코로 유학을 갔고 우

 

여곡절 끝에 그놈의 마야에 대한 애정을 무기로 근근이 학위 논문을 고대마야의 사회제도에 대하여 썼으니 말이다. 한국에 와

 

서 철밥그릇 교수를 하게 되었고 ‘마야’라는 책도 냈다. 물론 별로 안 팔려 출판사 눈치 보느라고 힘들지만 말이다. 그래도 마

 

야문명 전문가랍시고 여기저기 약을 팔러 다닌다. 그래서 마야문명을 다루고 있는 영화가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 개봉하는 날

 

밤 열두시에 심야로 그 영화를 보고야 말았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동안 그리고 영화를 보고나서의 나의 심정은 참담했다. 내

 

가 그렇게 쫓아다니며 어루만졌던 마야문명을 어떻게 저렇게까지 만들어 놨을까. 한마디로 갑갑했다. 짜증도 나고, 무기력하

 

게도 느껴지고 뭐 그런 복잡한 심정이 오고갔다.

 

이 영화를 보고나서 갑갑하게 느낀 이유는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역사와 문명에 대한 거짓과 왜곡에 대항하여 사실을 말하기

 

에는 나의 힘이 턱없이 부족하다’이다. 그래서 갑갑하고 짜증나고 자포자기의 심정이 드는 것이다. 거대한 자본이 거대한 여

 

론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마야문명에 대한 보편적인 시각 앞에서 내가 마야문명의 억울함을 변호해야하는 중차대한 임무

 

를 맡은 것 같다는 책임감마저 느껴진다. 그러나 단순하고 명백한 사실부분의 왜곡을 바로잡기에도 나의 목소리가 너무도 초

 

라하고 미약하기 그지없다. 자본과 흥미의 논리를 바탕으로 초호화 스탭과 감독 등이 동원되어 만들어진 멀티미디어의 왜곡

 

에 맞서 ‘그건 아니다’ 라고 말한다는 것이 너무도 무기력 할 뿐이다. 더군다나 역사를 통해 이미 오래전부터 승패는 기울어져

 

서 어찌해 볼 수조차 없음을 항상 확인해 오지 않았던가.

 

먼저 이것은 영화이기 때문에, 즉 픽션이기 때문에 굳이 사실을 재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의 왜곡이 불가

 

피하다는 점은 백번이고 인정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논쟁은 피하고 싶다. 그렇지만 이것이 영화이고 다큐멘터리이고를 떠나

 

서 그 배경과 결과가 만들어내는 왜곡의 현상이 너무도 명백하고 그것이 그들의 권력이나 자본의 힘으로 의도적으로 이루어

 

졌다는 점은 논쟁의 거리가 아니라 당연히 비판받아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이다.

 

힘을 가진자, 즉 이긴자가 쓴 역사 속에는 그들을 위한 사실의 왜곡이 항상 있기 마련이다. 그 좋은 예가 ‘1492년에 콜럼버스

 

가 신대륙을 발견했다’라는 명제이다. 이것은 아주 극명한 왜곡이다. 그 연대와 콜럼버스라는 이름 등도 모두 문제가 있지만

 

그런 저런 상대적으로 미미한 것들은 놔두고라도 ‘신대륙’이라는 엄청난 거짓말을 우리는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다. 이것은 바

 

로잡아져야 한다. 어째서 신대륙인가? 메소아메리카(마야, 메시까 등) 그리고 안데스문명(띠아후아나꼬, 잉까 등) 등이 번성

 

하여 당대 세계의 다른 그 어떤 곳보다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아메리카대륙에 침략해 들어와서 유럽인들이 한 소리

 

가 “신대륙”이다. 원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기가 막힐 일이다. 자신들의 부정한 침탈행위를 합리화시키기 위한 침략자들의

 

억지가 아닐 수 없다. 멀쩡한 주인이 잘 살고 있는 땅을 신대륙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소유와 존재 등을 모두 철저히 부정하

 

고, 자신들이 그 땅을 모두 차지한 것을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대륙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우

 

리는 오늘날까지도 계속하고 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잘못 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강대국의 학문, 자

 

본, 메스미디어 등이 신대륙이라는 말을 거듭하고 있고 그 결과 우리는 여전히 ‘신대륙’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많은

 

학자들이 ‘만남’이나 ‘침략’이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소수일 뿐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더욱 그렇다. 서구중심적인

 

백인우월주의가 만들어 놓은 말을 그에 추종하는 다른 나라사람들이 비판 없이 반복하며 당연히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다.

 

아포칼립토란 영화에 비춰지고 있는 마야문명은 이런 맥락에서 신대륙이라는 말과 호응하며 정확히 그러한 사상의 한가운데

 

를 관통하고 여기에 한발자국 더 나아가고 있다.

 

이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서양이외의 문명들에 대한 시각의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나는 그 영화 평들을 통해서 다

 

시 한 번 확인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영화평은 일단 접어

 

두고 영화의 배경이 되고 촬영이 이루어졌던 멕시코에서도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 비평의 소리에서 역

 

사적인 인식이 별로 없다는 데에 나의 놀라움이 있다. 즉 그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역사가 왜곡되어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 조

 

차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일제가 우리나라의 역사를 왜곡하여 당쟁의 부정적인면 만을 강조하며 한국인의 열등함을 말하였다.

 

그리고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져서 한국인의 역사관 속에 그대로 남아 반복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가장 결정적인 왜곡은 뭐니 뭐니 해도 마야문명의 야만성과 잔인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웨스턴 풍의 영화에 나오

 

는 아메리칸인디언에 대한 시각과 비슷하다. 미국인디언은 우리에게 어떤 이미지로 그려지는가? 안장도 없는 야생마를 타고

 

달려와 선량한 백인 여인의 머리를 도끼로 내리치는 장면이 생각난다. 혹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죽은 사람의 머리가죽을 벗기

 

는 상상이 된다. 그것이 서양인이 만들어 놓은 왜곡된 아메리칸 인디언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내가 과장을 하고 있는 것인가?

 

영화에서 인디언을 그렇게 그리고 있는 이유는 아주 극명하다. 잔인하고 원시적이고 무식한 인간들을 문명화 된 서양인들이

 

구제해주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인디언들을 살육했던 서양인들의 잔악함은 영웅적인 개척정신이

 

되어 세계 만방에 알려지고 거기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최후의 저항을 했던 인디언들은 잔인하고 야만적인 모습

 

으로 항상 감정 없이 죽어가는 엑스트라가 된다.

 

남미나 북미를 가리지 않고 서양인들이 처음 들어왔을 때 원주민들은 그들을 도와서 먹을 것을 주고 호의적으로 대해주었다.

 

꼴론(콜럼버스)의 경우가 그렇고, 영국의 북미 이주사가 그렇고, 멕시코를 정복한 코르테스의 역사가 그렇고, 남미에 십자가

 

를 꽂은 삐사로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다. 원주민들은 호전적이지 않았다. 다만 생명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저항을 한 경

 

우를 빼고서는 서양사람들에 의하여 철저히 약탈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인을 도와준 우호적인 절대다수의 인디언은

 

없고 겨우 가릴 곳 만 가린 잔인한 인디언의 이미지 만이 우리의 머릿속에 들어있다.

 

아포칼립토 영화에 보여지는 잔인하게 전쟁을 일삼는 마야사람, 더럽고 야만적이며 무식한 원주민의 모습은 서양인들이 만들

 

어 놓은 이미지의 덫이다.

 

마야인들이 전쟁과 살인을 일삼았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들이 그렇게 위대한 싸움꾼이었다면, 진정 서양사람들 처

 

럼 죽고 죽이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면 금속공예를 포함한 발달한 과학 기술을 가지고서 왜 비효율적인 석기무기만을 고집

 

했겠는가? 수천년 동안 사냥을 위한 도구 이외에 발달한 살인도구를 만들지 않은 것을 어찌 설명하겠는가? 영화에서 보는 것

 

과 같은 엄청난 건축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리고 그 기술을 이용하여 상하수도시설이 잘 정비되고 증기목욕탕을 가진 선

 

진적인 도시를 만들 수 있었으면서도 방어를 위한 수단인 석벽이나 해자 등은 왜 불과 몇 몇 유적지에서 그나마도 의심되는

 

형태로 발견되었겠는가? 그렇게 전쟁이 중요한 일상이었다면 군사제도의 핵심인 명령과 복종을 중시한 위계질서가 마야의 사

 

회구조 속에 발달하지 않았겠는가? 어떻게 수백 혹은 수천개의 부족이 작게는 40~50 많게는 300~400여명에 불과한 작은 독

 

자, 독립적인 마을 형태를 유지하였겠는가?

 

물론 여러 가지 다른 해석과 의견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한참을 양보하여 그들이 그렇게 피에 굶주린 사람들이라고 한

 

들 유럽의 문화와 역사에 비하면 그것은 하찮은 것이었다. 십자군, 마녀사냥, 식민지개척, 노예무역 등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

 

에게 보여주고 있는 서양은 잔인함에 있어서 만큼은 지구상의 어떤 다른 인종보다도 커다란 업적(?)을 남겼으며 지금도 계속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더군다나 서양인이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한 이후 이곳에서 벌어진 살육을 생각해보면 유럽 침략 이

 

전의 원주민들의 전쟁은 그야말로 세발의 피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류의 영화를 보는 대부분 사람들의 머릿속에

 

는 서양의 잔인함은 개척정신 정도로 치환되고 원주민의 그것만이 반대의 극단으로 강조되어 야만적이고 잔인한 마야인이라

 

는 이미지로 대조를 이루며 나타난다. 우리는 아포칼립토를 통해서 그러한 메시지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되는 것이다.

 

인신공양을 하는 장면만 해도 그렇다. 무슨 게임을 하듯이 인간의 심장을 잘라 손으로 들어 올리고 이상하게 생긴 제사장은

 

계속적으로 기이한 동작을 한다. 그리고 그 뚱뚱하고 못 생긴 아이 녀석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왔다갔다 하고 있다. 백성들은

 

어떤가! 피의 광기에 환호를 질러대는 모습은 우리의 머릿속에 강한 인상을 차곡차곡 쌓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 마야인들

 

은 야만적이고 잔인한데다 멍청하기까지 하다. - 이성이라고는 없는 * 인간들,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그런 야만성을 가진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의 모습들이 스크린을 통해 우리의 뇌에 각인되는 것이다.

 

그 어떤 다른 인류의 문명에 비하여 발달한 천문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마야 사람들은 태양을 비롯한 행성들의 주기를 정

 

교하게 계산해 냈고 일식과 월식에 대한 예상을 정확히 해냈었다. 그러나 영화에 나오는 마야인들은 그러한 사실과는 전혀관

 

계가 없다. 역시 마야인들의 무지함을 강조하고 싶은 의도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사실을 따져보면 인신공양을 하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 사료는 상당히 많다. 즉 사료적으로 사실 무근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아주 장면 장면을 사료에 맞추어 놀라울 정도로 철저하게 잘 재현하고 있다. 과테말라 띠깔 유적지의 모

 

습이 멀리 뒤로 있고 인신공양을 하는 장소는 대략 멕시코의 욱스말 유적의 마법사의 피라미드와 유사하다. 다양한 소도구나

 

복장, 배경 등도 훌륭하게 당대를 잘 표현하고 있다. 최소한 소위 하드웨어적인 부분은 그렇다. 물론 시대와 장소적인 면에서

 

의 혼용은 일단 논외로 하고 말이다. 좌우간 장소, 복장 등은 일단 그렇다 치고, 문제는 내용과 해석부분인데, 장면의 묘사 역

 

시 사료에 쓰여진 것을 그대로 아주 잘 옮기고 있다. 근데 그렇게 잘 재현했다면 뭐가 문제인가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렇지

 

만 여기에 교묘한 왜곡이 자리잡고 있다.

 

마야에 대하여 적고 있는 중요한 사료는 대부분 16세기 가톨릭사제들에 의하여 기록된 것들이다. 란다(diego de landa)

 

의 ‘마야 이야기(relación de las cosas de yucatan)’가 대표적이고 거의 유일한 종합 마야 사료이다. 리얼리티에 입각한다

 

면 당연히 란다의 사료를 중심으로 인신공양이야기가 만들어 져야한다. 이는 마치 한국고대사를 공부하기위해 삼국유사와 삼

 

국사기를 빼놓을 수 없는 것처럼 명확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멜깁슨은 혹은 이 영화의 작가는 왠지 메시까(아즈텍)의

 

사료를 차용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 설명의 상세함과 잔인함에 있다. 란다는 16세기 최초의 유럽인이 마야를 침략하였을 당

 

시의 마야의 생활상을 상세하게 적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사료에서는 인신공양에 대한 내용이 아주적다. 그것도 간접적으로 그

 

림에 대한 설명을 하는 부분에서 희생제물을 받쳤던 모습을 적고 있다. 그리고 그나마도 사람이 제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

 

고 동물이 등장하는 내용이다. 리얼리티를 강조한다면 당연히 란다의 사료를 중심으로 축제 장면에 자주 등장하는 꽃을 가져

 

다 바치거나 기껏해야 노루 등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을 사용해야 할 텐데 이러한 장면은 영화에서 이야기하려는 것에 별로 적

 

합하지 않았나 보다. 그래서 굳이 수천킬로 떨어져있고 언어마저 다른 메시까의 사료를 가지고 현장을 생생하게 그들의 의도

 

대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이도 메시까지역의 사아군(bernardino de sahagún)과 같은 사제는 인신공양의 모습을 아

 

주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영화에 나오는 장면은 그러한 16세기의 기록들을 아주 잘 재현한다. 좌우간 그 인신공양의 장면

 

은 원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가톨릭사제들이 책에 적혀있다. 그러나 메시까의 사료는 16세기에 쓰여질 당시부터 사실

 

에 바탕을 둔 척 하면서 상당한 왜곡을 하고 있다. 잔인한 원주민들을 개종시켜야되는 필연적인 이유를 만들어 내는 것이 그

 

들의 집필목적이고 종교적인 사명이었다. 그러다보니 침략을 정당화하고 정복자들의 원주민 착취를 불가피한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원주민들을 야만적이라고 하는 부분에서는 엄청난 과장과 제멋대로의 왜곡이 있었다. 한손에 십자가 한손엔 칼을 든

 

정복이란 말은 그 당시의 분위기를 잘 설명하고 있다. 사아군 이외에 듀란(fray diego durán)이나 또르께마다(fray juan de

 

torquemada) 등의 사료에서도 공통적으로 인신공양과 같은 내용은 크게 부풀려져있다. 극적인 효과를 주기에 충분한 인신공

 

양을 친절하게 다루고 있는 메시까의 사료는 영화 제작자에게는 아주 좋은 재료가 되었을 것이다.

 

영화의 중요한 지침이 되었던 16세기 메시까 사료들을 쓴 사람들의 시각이 어떠했는가는 그 사료들 속에 극명하게 나타난다.

 

당시 대부분의 사제들은 원주민을 “말하는 동물”(animal que habla)로 취급하였다. 너무도 야만적이고 잔인하여 인간으로 취

 

급해 주어야 할 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였다. 결국 이들을 인간으로 인정하기까지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런 생각을 하

 

는 사람들이 쓴 원주민들에 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이 영화의 인신공양 장면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 사정이 어떠하

 

겠는가는 뻔 한 일이다. 왜곡되었다는 점을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아니 그들

 

의 시각에서는 이런 종류의 사료들의 내용을 그대로 믿기만 하면 되는데, 굳이 그런 내용에 비판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우리가 보고 있는 마야의 가히 엽기적인 인신공양 장면이다. 영화의 전반을 흐르고 있는 소스라치도록 잔인

 

한 살육장면을 통해서 우리는 서양 패권주의가 권해주는 마야인들의 부정적인 모습을 단숨에 들이키고 있는 것이다.

 

굳이 한 가지 더 딴지를 건다면, 기술적으로 봐도 심장은 그렇게 간단히 잘라져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료에서는 마치 생선의

 

내장을 바르듯이 심장을 꺼내내는 일이 간단한 것처럼 표현되어 있고 영화에서도 그런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들이 사료가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점을 더욱 뒷받침해주고 있을 뿐이다. 당시에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흑요석

 

칼은 날카롭기는 하지만 무척 부서지기 쉬웠다. 유리와 같은 재질인데 더욱 약한 유리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것을 마치 요즘

 

우리들이 쓰는 쇠로된 칼처럼 마구 휘둘러대는 것도 말이 안되는 것이지만 공연히 이런 사소한 부분에 시비를 걸고 싶은 마음

 

은 전혀 없다. 그 정도쯤이야 다른 것에 비한다면 영화에 재미를 주기위한 어쩔 수없는 기술적인 부분이라고 인정하는 데에

 

아량을 베풀 수 있다. 좌우간 그 칼로는 그렇게 쉽게 심장을 잘라 꺼낼 수 없다. 그 점에 있어서는 구체적으로 말을 하면 비위

 

가 좀 상할 것 같아 줄이겠지만 어찌되었거나 다른 여러 가지 도구들을 보조적으로 사용하여 심장의 절단이 가능은 하지만 오

 

랜 시간과 숙련된 사람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사료에서는 마치 몇 십초 만에 해결되는 것처럼 적고 있고 영화에서도 오

 

류를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확인할 필요 없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추어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신공양이 없었냐? 그렇지는 않은것 같다. 그러나 그 수나 정도 등은 훨씬 축소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야의 경

 

우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로 노루를 그 희생재물로 사용했었다. 작은 제사의 경우에는 다른 더욱 작은

 

동물들로 대신하였다. 이는 한국 사람들이 제사상에 돼지머리를 올리는 것과 개념이나 방식이 유사하다. 마야의 경우 인간이

 

재물로 바쳐진 것은 기원후에 발전해 7~8세기에 쇠퇴한 고전기에 있었었고 서양사람들이 침략해온 후고전기에는 그나마도

 

거의 사라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메시까(아즈텍)지역에서는 인간을 재물로 사용한 것이 남아 내려왔을 가능성이 있

 

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상당부분 그 정도나 숫자 등이 부풀려져있다.

 

또 좀 더 변명 아닌 변명을 하자면 인간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풍습은 인류에 아주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중의 하나였

 

다. 서양의 경우 아브라함이 자기의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이 성경에 묘사되어있고 그것이 양으로 대치되는 것도 나타난

 

다. 우리나라의 경우 심청가에 나오는 임당수에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내용도 역사적으로 보면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다양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당시의 정황으로 이해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신체는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제물이 될 수 있었고 이러한 생각과 풍습은 동서양을 막론

 

하고 상당히 폭넓게 행해졌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역사적으로 유사한 현상을 마야의 것은 잔인하고 야만스럽게 표현되고 다

 

른 것들은 성스럽게 표현되는 것이 문제이다. 그것이 의도를 가진 왜곡이라면 더욱 그렇다.

 

영화를 보고 나오며 만일 마야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면 무슨 느낌이 들까? 라는 생각을 하며 씁쓸했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 유

 

학시절의 별로 유쾌하지 않은 한 기억을 소개하며 이야기를 맺겠다. 멕시코 공중파를 통해 헐리우드에서 만든 한국전쟁을 배

 

경으로 한 영화를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거기에 나오는 한국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람보 영화에 나오는 베트남 사람들과 같

 

았다. 바보 같고 힘없고 *같은 것들, 잔인하기만 한 족속들이었다. 나는 그 영화를 나의 멕시코 친구들이 보지 않았으면 좋

 

겠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참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이었다. ‘한국사람들은 저렇게 멍청한 사람들이 아니예요’ 라고 그

 

영화를 보고 있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한국사람들을 저렇게 바보같이 표현하고 있는 영화에 울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였다. 허탈한 무기력감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유독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미국영화가 왜 상영되지 않는지 이해가 되었

 

다. 아포칼립토란 영화를 보고나서 딱히 똑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

 

한국사람들이 잔인하고 *같은 버러지가 아닌 것처럼 마야사람들도 아포칼립토에 나오는 것과 같은 잔인한 전쟁광이나 인

 

간 살육을 일삼는 미치광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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