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사냥에 대한 진실

소마토마 작성일 08.03.20 16: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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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판타지 소설을 읽으면 자주 나오는 소재가 바로 마녀사냥이다.  때로는

귀족이나 왕족의 "꽤심죄"를 이유로 사용되기도 하고, 교회의 주인공이나 주

변인물 탄압으로 툭하면 던져지는 마녀사냥.  그러한 현대사회에서의 마녀사

냥의 이미지는 중세시대, 즉 1450~1700년 사이의 유럽에서 일어난 마녀사냥

열풍을 중심으로 한다.  일단 교회의 신부나, 무지한 마을사람들이 무고한 처

녀를 시기하거나 탄압하기 위해 마녀로 몰아붙이고, 그 이후 잔인한 고문이나

비이성적인 실험방법으로 마녀라는 고백을 받아내거나 또는 아니라는 증명으

로 목숨을 바쳐야 한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이미지가 과연 역사적 사실인가?

 

 

먼저 마녀사냥의 주체를 보자.  많은 사람들의 믿음과는 달리, 실제 마녀사냥

을 주도한 단체는 카톨릭 교회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오히려 마녀라는

존재 자체조차 부인하는 편이었다.  즉, 자신들이 마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해도, 실제로 저주나 마법으로 사람을 해치고 교회를 위협하는 존재들이

아니라는 관점이었던 것이다.  비신앙자나 신교도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저

유명한 스페인의 "종교재판"조차도 마녀사냥의 재판에는 소극적이었다.  실제

이탈리아에서는 643년부터 "외국여성이나 여자노예를 마녀라는 죄로 처형하

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존재했고, 973년 교황 레오7세는 추기경들에게 지역

관리들이 마녀처형을 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편지까지 보냈다.  15세기 플로렌

스 추기경 안토니오는 "마녀의 힘이란 것들은 불가능하며, 그것들을 믿는것조

차 어리석은 일이다"라고 선언했고, 팜플로나의 추기경 안토니오(동명이인)

역시 자신의 구역내의 신부들에게 마녀라는 존재는 거짓이니, 마녀로 고발당

한 사람들을 치료할것을 명령했다.

 


그럼 마녀사냥은 권력강화의 도구였던 것일까?  쟌다르크의 경우는 유명한 예

라 할수있으며, 영국의 찰스2세는 자신의 왕권을 강권하게 하기위해 많은 사

람들을 마녀로 몰았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사실 이것 역시 진실이라 할수 없

는 것이, 대부분의 마녀사냥은 중앙집권체제가 없는 독일지방이나 왕권의 힘

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국경지방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쟌다르

크의 경우는 마녀로 불리기는 했지만, 처형된 죄목은 "이단"이었다.  즉, 그녀

가 마녀라서 처형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하

는 점을 이단이라 지적되어 처형된 것이다.  단지 마녀사냥으로 유명한 화형이

역시 이단심판에도 주 처형방식이었다는 것이 이러한 오해를 불러냈다고 하겠

다.  대체로 유럽왕가는 마녀사냥에 비판적이거나 소극적이었고, 마녀사냥은

당시 영주들과 지방관리들에게도 달갑지않은 사건이었다.  11세기 헝가리왕

콜로만은 "마녀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에 따른 조사는 전면금지"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탈리아의 지방관리 알키아투스(Alciatus)는 마녀심판의 의

뢰를 받자 "피고들의 의료상태가 심각하니 처형은 중지하고 오히려 치료를 베

풀어야한다"라고 건의했다.  1520년 독일지방도시 메츠에서는 코넬리우스 아

그리파가 마녀로 몰린 평민여성을 성공적으로 변호한 적도 있다(아이러니하

게도, 코넬리우스 자신은 당시 마술사이자 점술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럼 이런 마녀사냥을 일으킨 장본인들은 대체 누구일까?  바로 마녀로 몰린

사람들의 이웃이었다.  현재도 마녀사녕의 열풍에 정확한 원인은 지목되지 않

고 있다.  하지만 가장 많은 마녀심판이 벌어진 곳이 당시 지방공국들로 갈려

져 싸움을 끊임없이 벌이던 독일지방이라는 것을 볼때, 집단히스테리가 가장

큰 이유로 뽑히는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루하루가 불안한 정치상황, 전쟁의

위험으로 위축된 경제상황, 암울한 앞날에 절망한 일반인들에게 마녀란 존재

는 어찌보면 가장 위험하지만, 어찌보면 자신들이 처벌할수 있는 유일한 존재

였을 것이다.  자신들의 문제의 해결점이 보이지 않는만큼, 다른 누군가에게

그 책임을 지워 죽임으로서 불안감과 절망감을 잠시나마 해소할수 있다는 것

이 그들에게는 짧지만 달콤한 안식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열풍에 불을 지피는 집단도 존재했다.  그중 큰 예가 바로 바젤공의

회로, 당시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며 교회의 최고권력을 민중에게 돌려줘야 한

다는 공의회수위설(Conciliarism)을 주장하던 개혁단체였다.  그들은 마녀들

의 존재가 교회의 안전에 위협을 끼친다고 주장하며 그때까지 마녀심판에 소

극적인 교황과 카톨릭 교회를 비판했다.  또한 하인리히 크레이머와 쟈콥 스프

렝거같은 수도사들은 마녀소추지침(Malleus Maleficarum)을 출판하여 마녀

의 존재를 부정하는 학설에 반발하고, 마녀들의 구분방법을 열람했다.  이 책

은 교황청이 금서로 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녀사냥의 주시기에 많은 마녀

심판시 고발자들에게 주요자료로 사용되었다.  영국의 매튜 홉킨스의 경우, 단

순한 점원에 불과했다가 주변의 열풍에 가담, 많은 사람들을 마녀로 몰아 고문

, 고백을 얻어내 사형시키는 것을 직업으로 삼았다.

 


하나 주목해야할 점은, 마녀심판이 상상되는 것만큼 일방적인 판결은 아니었

다는 것이다.  일단 먼저 마녀로 고발되기 위해서는 대부분의 경우 실제적으로

누군가의 죽음이나 물질적 손실이 피고의 마녀적 행위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

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즉, "쟤가 그랬데요"라는 수준으로는 시작도 안된다

는 것이다).  영국의 경우, 1567년에서 1640년에 이르는 대마녀사냥의 시기

동안 교회재판소에서 마녀로 판결되는 경우는 전체의 21%의 수준이었다.  이

중 절반정도의 고발은 증거불충분으로 재판에 가기도 전에 취하되었고, 고문

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4~8명이 "이사람은 마녀가 아니다"라고 맹세만 해

준다면 무죄로 풀려날수도 있었다.  또한 마녀로 판결된 자들도 체형이나 처형

은 커녕 대부분 벌금형이나 개종으로 용서를 받았다.  1609년 시작된 바스크

지방의 마녀사냥의 열풍은 고문을 두려워한 약 2000명의 자백서를 받았지만,

나중에 거의 대부분이 자백을 취소하는 것을 허락받았으며, 그중 6명만이 자

백을 부인하지 않았다.  오년뒤 스페인 이단심판소는 대부분의 진행중인 마녀

심판 관련 고소를 취하했다.  유럽 전체를 보아도 1450~1700년 사이 동안 마

녀사냥으로 사망한 비율은 25,000명의 사망중 한명의 비율로, 현재 중국에서

처형으로 사망하는 비율의 5분의 1수준이다.

 


하지만 마녀사냥이 극단적으로 행해지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250년동안 마

녀사냥으로 처형된 예상치 6만명중 2만6천여명이 독일에서 처형되었다.  위

에 거론한 찰스2세의 통치시, 2년남짓동안 600명이 마녀사냥의 심판대에 올

랐는데(몇명이나 처형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중 대부분은 이전 영국

의 통치자였던 올리버 크롬월의 임기시에 이미 마녀로 고발되었다가 무죄로

풀려난 사람들이었다.  14~15세기동안 스코틀랜드에서는 많은 수의 여성이

고문에 못이겨 마녀라고 자백했다.  또한 신교와 구교의 대립시기에 많은 수의

사람들이 마녀사냥이라는 간판아래 신앙의 박해를 받고 처형되었다.  매튜 홉

킨스같은 마녀심판관(이들은 교회나 정부와는 관련없이 고발자들이나 마을사

람들에게 고용되었다)들은 직업적으로 고발당한 자들을 고문, 자백을 받아내

었다.  흥미롭게도, 매튜 홉킨스는 마녀심판관으로 종사한지 3년만에 사망했

는데, 공식기록으로는 결핵이 원인이었지만 분노한 마을사람들에게 붙잡혀 마

녀심판 형식으로 살해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즉 당시에도 마녀심판관이 존경

받거나 올바른 직업으로는 인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녀사냥이 한풀 꺾이기 시작한 것은 18세기에 들어서서였다.  이후에

도 수명의 사람들이 마녀심판에 회부되나, 대다수 무죄를 선고받거나 가벼운

벌만 받고 풀려났고, 처형되는 경우에도 마녀로 처형되기보다 마녀라는 것이

다른 죄형의 판결에 영향을 주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 시기가 종교개혁이나

30년 전쟁이 끝나고, 전체적인 유럽의 정치세력권이 안정되어 지방의 치안이

대폭 향상되었던 시대였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역시 마녀사냥

은 잘못된 신앙심이 원인이라기보다, 사회적 불안이 폭력적인 요소로 표출된

것이라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자신의 문제를, 타인의 고통으로 풀려는

자세가, 얼마나 많은 생명을 앗아간 것일까.

 

요즘 국보의 화재나 잔인한 범죄가 뉴스에 나오는 것을 볼때, 현재 우리사회가

당시 유럽의 마녀사냥과 같은 시기를 겪지 않는다는 것을 과연 장담할수 있을

까?  인간을 해치는 것은 사실 인간 본인이다.  이웃간의 정을 잃어가는 지금,

서로의 안전을 무시하고 자신만 생각하는 태도가, 사실 마녀사냥같은 비극의

씨앗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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