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시굴의 저주..

비애리 작성일 08.06.30 12:4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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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가평군·설악면 장락산의 산 중턱에는 바위 굴이 하나 있는데
그 굴을 각시굴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굴이 각시 굴이라 불린 이유는 한 이야기 때문인데
조선 중엽에 이 마을엔 홀어머니를 모시고 예쁜 처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처녀는 너무도 얌전하고 착하며 살림도 잘해 칭찬이 자자했죠..

그런데 임진왜란 일어나 마을 청년들은 전쟁터로 끌려가고 아이들과
여자들만 남아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처녀 역시 홀어머니를 봉양 하며 농사일을 했는데
그런데 어머니가  전염성 병에 걸리자 마을의 산에 있는
바위굴에 어머니를 모시고 봉양 했습니다..

그런데 이웃 마을에 왜군이 쳐들어 왔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대피를 했는데 처녀는 동굴에서 어머니를 모신다고
이런 소문을 듣지 못했습니다..
마을 사람들도 워낙 정신이 없는 터라 모녀를 챙길 여유가 없었죠..

마을에 왜군이 쳐들어 오자 처녀는 동굴에서 나오지 않았으나 결국
발각 되고 말았습니다..


동굴이 좁아 왜군들은 그녀를 보고 나오라고 했지만 처녀는 응하지 않았고
왜군은 동굴 앞에 불을 피워 연기를 동굴앞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처녀는 연기 때문에 숨이 막혔지만 어머니를 꼭 붙잡은체 눈을 감았고
모녀는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처녀의 죽음이 알려져 마을 사람들이 동굴에서
시신을 꺼내 봉양 했는데
두 모녀는 꽉 끌어 안은체 썩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 얘기가 다시 상기된건 일제 치하 였을 때였습니다..


당시 이마을을 다스리기 위해 부임한 일본인 관리는 일주일을 못버티고
죽기 일수 였다고 합니다..

당시 총독부  행정 관리인 사쿠조우의 기록을 봐도
가평군에 부임 했다가 죽은 일본인이 10명이 넘으며
임기를 제대로 마치지도 못하고 온 사람도 3명이 되는데
그들은 하나 같이 밤마다 한 여인의 혼령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결국 이곳은 한국인이 지방 관리로 내려 와서 어느정도
탄압과 수탈을 피해 갈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현상에 대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왜군에게 억울하게 죽은 처녀의 원한 때문 일거라고
생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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