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철 사건일지] 아직도 잘살고있는 유영철

vsmint 작성일 08.08.04 15: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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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메인화면 뉴스에 유영철 담당 검사의 이야기가 떴더군요.

그래서 궁금해 돌아다니다 찾은 글들입니다.

가장 어이없는 인권변호사라는 작자들 얘기부터 시작해보죠 ㅎㅎ






교도관 카페서 사형제도 존치를 놓고 달린 교도관의 리플...


(출처: 담장밖의 교도관)





낮에 어린아이와 엄마가 머물고 있는 집에 들어가 엄마를 *할 때 옆에서 아기가 울자 즐기는데 짜증



나게 한다며 아이의 입을 칼로 찢고 혀바닥을 도려낸뒤 *을 하고나서는 배고프니 라면까지 끓여오라



고 하여 먹는 등의 행위를 한 인면수심의 범법자도 무기징역도 아닌 징역 15년밖에 안받았다. 이런 인면



수심의 범죄도 징역 15년 밖에 안 받는다. 그러니 사형까지 선고할 정도 되면 그 범죄 내용이 어느 정도



일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연쇄살인범 유영철이는 부녀자를 수십명 *하고 산 사람의 손발을 묶어놓고



음부를 도려내어 이것이 방금 나하고 즐긴 물건이라면서 * 피해자에게 보여주고는 *를 많이 한



사람과 적게 한 사람의 *의 차이점에 대해 비교한다고 굴비역듯 피해자의 음부를 엮어 보관했다가



경찰에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피해자의 음부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신체 각부위를 산채로 도려내어



보여주면서 피해자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즐기고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전용 망치를 피해자에게 보



여주면서 이것으로 잠시후 너의 머리를 쳐 죽이겠다고 예고한 뒤에는 공포심이 극에 달해 있을 때 죽이



곤 하였다. 사형선고 받으려면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한다. 그리고 유영철이라는 놈은 남의 몸은 장난



감처럼 산체로 신체부위를 도려내어 가지고 놀고 피해자에게 보여주고 그러는 놈이 자기 몸은 얼마나



끔찍하게 아끼는지 매일 우루사니 비타민제니 하는 영양제에, 피부 맛사지 크림에 정말 가관입니다.



게다가 규칙적으로 행하는 적당량의 스트레칭 및 운동까지... 그런 범법자를 서로 변호해주겠다고 하는



자칭 인권변호사라는 작자들이 줄을 섰었지요...





모르긴 몰라도 저런놈의 변호를 맡겠다는 인권변호사들.. 아마 지들 경력에.. 지들

이력서에 한줄이라도 더 채워넣고 싶은거겠죠.. 변호사라면 이런 글보다 더 자세하게

사건에 대해 알텐데 그걸 알고도 저렇게 앞다투어 변호를 하겠다는 새퀴들.. 제가볼때는

정상으로 보이지가 않네요.




유영철, "살인하고 장기먹었다"

10개월 동안 21명 살해한 연쇄살인범 유영철엽기행각 추적기

“토막낸 사체 믹서에 갈고, 간과 뇌수 먹었다”





지난해 9월24일 신사동 노부부 살해사건부터 올해 7월13일 출장 마사지사 임모씨(27) 살해사건까지 지난 10개월 동안 무려 26명을 살해했다는 유영철(34 전라도 강진)의 진술을 들은 경찰들은 맥이 풀렸다. 강력범죄 수사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베테랑들이 모인 서울경찰청 기동수사대 형사들이었지만 그의 말은 도무지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7월16일 오후, 경찰은 서강대 뒤편 야산에 올라 그가 가리키는 지점을 파헤쳤다. 잠시 후 심하게 부패한 살점들이 드러났다. 수백 개의 조각으로 잘린 한 구의 사체였다. 그제야 경찰은 그의 자백이 사실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충격을 받은 경찰들과 달리 그는 “그냥 죽였다. 아무 느낌도 없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유영철은 치밀하고도 잔혹한 ‘살인기계’였다. 그가 윤락여성들을 부르는 데 사용한 휴대전화는 지난 6월 살해된 우모씨(28)의 어머니가 사용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우씨로부터 어머니가 석 달 전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경찰에 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이 휴대전화로 윤락여성들을 ‘살인의 방’으로 불러들였다.

그는 집으로 불러들인 윤락여성을 곧장 살해하지 않았다. 한 시간 가량 “고향이 어디냐” “남자친구는 있냐” 등 사적인 대화를 나눴다. 심지어 고향 부모에게 안부 전화를 걸게 하기도 했다. 또 여성들을 협박해 “오빠, 나 이제 고향 내려갈 거야. 같이 일하지 못해서 미안해”라든가 “언니, 나 지금 이상한 남자한테 납치됐어” 같은 말들을 녹음해뒀다. 그리고 여성의 사체를 처리한 뒤 주변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음성을 들려줬다. 살해 시점을 속이고, 납치로 가장한 것이다.

그가 dna 검사에 걸리지 않기 위해 윤락여성들과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는 경찰 발표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검찰조사에서 그는 “처음에는 아무나 불러다 때려죽였지만, 나중에는 예쁜 여자만 골라 성관계를 갖고 죽였다”고 진술했다. 심지어는 4시간씩이나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성관계까지 갖고 나서 살해한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범행도구로 팔각형의 5kg짜리 쇠망치를 사용했다. 이 망치는 공사현장에서 벽이나 바닥을 깨부수는 데 사용되는 도구. 유영철은 편리하게 휴대하기 위해 1m 길이의 나무 손잡이를 떼어내고 짧은 고무막대를 달았다. 망치의 파괴력을 높이기 위해 이음새 부분을 석회로 단단히 바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뚱뚱한 여자는 옮기기 무겁고 키 큰 여자는 욕실에 누일 수 없어 기피”

이 망치로 그는 피해자들을 단번에 살해했다. 단독주택에 침입해서는 마주치는 사람의 얼굴과 목을 마구 내리쳤고, 윤락여성들의 경우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 가라”고 속삭이고는 뒤통수를 때렸다. 경찰이 서울 서남부지역 미제 살인사건들의 피해자 사진을 유영철에게 보여주며 “얘도 니가 죽였냐?”고 묻자 그는 “아니오. 수법이 틀리잖아요. 나는 한 방에 죽여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서남부 사건의 피해자들은 가슴과 등, 배, 다리 등을 여러 차례 찔려 숨진 것.

유영철은 범행대상을 자신이 원하는 조건에 맞춰 골라냈다. 그는 ‘아담한 키에 마른 체구의 미인’을 선호했는데, 일부 언론이 보도한 것처럼 이혼한 아내를 닮은 여성을 골랐기 때문이 아니었다. “뚱뚱한 여자는 무거우니까 살해한 후 사체를 옮기기 어려워서, 키가 큰 여자는 목을 잘라내도 좁은 욕실에 똑바로 눕힐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7월18일, 범행동기를 집중적으로 캐묻는 기자들 앞에서 유영철은 “여성들은 몸을 함부로 굴리는 일이 없고 부유층은 각성했으면 좋겠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마치 부유층과 윤락여성에 대한 ‘훈계’의 의미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인상을 풍긴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처럼 ‘정당성을 지닌’ 살인범은 아니었다.

검찰에서 그는 “지난해 9월 출소 후 이혼한 아내와 아들을 죽이기로 마음먹고 아내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다”고 털어 놓았다. 하지만 아들의 똘망똘망한 눈빛을 보고는 아내만 죽이기로 마음을 돌렸다. 그러나 안방에서 마른 김 한 장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는 아내에게 연민을 느껴 포기했다. 그날 유영철은 아내를 대신할 ‘대타’를 구해 살해했다. 다른 피해자들과는 달리 이날 희생된 여성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칼집을 내 짓뭉갰다.

그는 지난 1~2월경 동거한 애인 김모씨(27)도 죽이려 했다. 유영철이 전과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김씨가 “헤어지자”고 하자 집에 감금해놓고 온몸을 묶은 후 목을 졸랐다. 김씨가 잘못했다고 매달리자 “다시 만나겠다”는 다짐을 받고 풀어준 그는 김씨가 변심할 때를 대비해 김씨의 부모 연락처까지 받아뒀다. “변심하면 부모를 대신 죽이겠다”는 협박이었다. 거의 실신상태로 풀려난 김씨는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살해 목적의 범행과 금품갈취 목적의 범행을 철저하게 분리한 그는 가짜 경찰신분증을 만들어 경찰행세를 하며 불법 복제물을 파는 상인이나 윤락여성에게 돈을 뜯어내 생계를 꾸렸다. 그는 경찰에서 “영화 ‘공공의 적’에서 클로즈업되는 경찰신분증을 베껴 만들었다”고 털어놨다.

이 ‘가짜 경찰신분증’은 4월14일 황학동 노점상 안모씨를 살해하는 계기가 됐다. 영화에서는 유영철처럼 신분증을 위조하는 범행을 우려해 진짜 신분증과는 다른 디자인을 사용했는데, 경찰서에 종종 들락거렸던 안씨가 유영철의 경찰신분증이 가짜라고 의심한 것. 이것이 유영철을 자극해 결국 안씨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7월18일 봉원사 인근 야산에서 벌어진 사체 발굴 작업에 모인 경찰 관계자들은 사체 훼손 정도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체들은 15~18조각으로 절단돼 있었다. 유영철은 빨리 썩게 하기 위해 비닐봉지를 벗기고 사체 조각들을 땅에 묻기도 했다.

유영철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잔인한 연쇄살인범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그의 가족이 20년 이상 거주했던 동네 주민들은 “종종 교도소를 들락거리긴 했어도 가족에게 잘하는 착한 젊은이였다”고 기억한다. 초등학교 담임교사였던 하모씨는 “집안 형편이 어렵고 조용한 아이였지만, 학급 일도 솔선수범하고 운동도 곧잘 해 아이들이 좋아했다”며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중학교 때 친구들은 이번 사건이 보도되기 전까지 유영철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소년원에 들어갔으며 이후 계속 교도소를 들락날락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가끔씩 연락이 되지 않아 소식을 물으면 그가 항상 “제주도에서 돈 벌고 있다”고 둘러댔기 때문이다.

3남1녀 중 막내아들인 유영철은 아버지가 서울에 올라와 막노동을 하게 되면서 여덟 살이던 77년 식구들과 상경했다. 알코올중독자이던 아버지는 식구들을 잘 챙기는 편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동네 아기들을 맡아 돌보면서 가계를 꾸렸다. 아버지는 유영철이 6학년 때 술에 취해 무단횡단을 하다가 차에 치여 숨졌다. 유영철은 검찰에서 아버지에 대해 “연이은 사업실패 때문에 알코올중독자가 됐다”고 회상했고, 어머니에 대해선 “그런 아버지 때문에 심적으로 많이 고통받은 분”이라고 말했다.

그림을 무척 잘 그렸던 유영철은 미술가가 되고 싶어 안양예술고교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유영철은 “색맹이라서 떨어졌다”며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고졸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k고등기술학교에 입학했고 고교 2학년 때 친구 몇몇과 서울 성동구에 있는 주택가를 침입해 절도한 혐의로 소년원에 들어갔다.

소년원에서 나온 뒤 학교를 그만둔 유영철은 계속 절도를 일삼으며 교도소를 들락거렸다. 그러다 20세 무렵 첫사랑인 아내 황모씨(32)를 만났다. 친구 노씨는 “90년경 영철이를 만났는데, 아내가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걸 온몸으로 구해주면서 서로 사랑하게 됐다고 했다. 영철이는 ‘부부 금실이 아주 좋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결혼 후에도 절도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93년에는 승용차를 훔치다 잡혀 구속됐다. 94년에는 둘째형이 실명(失明)을 비관해 한강에 투신자살하는 ‘지옥’과 아들이 태어나는 ‘천국’을 동시에 맛보는 와중에도 절도 행각을 계속했다. 2000년에는 미성년자를 차에 태워 *·폭행한 혐의로 3년 6개월 형을 언도받았다. 더 이상 참지 못한 아내는 유영철이 구속되자마자 이혼소송을 제기했고, 양육권도 가져가버렸다.

경찰에 따르면 유영철은 전주교도소에서 이혼을 통고받은 후 살인을 결심했다고 한다. ‘이렇게 살아서 무엇 하나’라는 심정으로 ‘살아 있을 때까지 죽이자’고 마음먹었다는 것. 유영철은 출소한 후 서울 일대를 돌아다니며 ‘사냥감’을 물색했고 미리 ‘찍어둔’ 집에 침입해 속전속결로 작업을 마치고 빠져나왔다.


“붙잡히지 않았다면 올해 안에 백 명은 죽였을 것”

범행에 완벽을 기했기에 잡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처음에는 2주 간격으로 단독주택을 침입해 살해했지만, 윤락여성을 집으로 유인해 살인하기 시작한 뒤로는 살인을 저지르는 간격이 점차 짧아졌다. 윤락여성 살인을 꾀하다 경찰에 붙잡힌 7월15일은 살인을 저지른 지 고작 이틀 후였다. 경찰에서 유영철은 농담 조로 “붙잡히지만 않았다면 올해 안에 1백 명쯤은 거뜬히 죽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영철은 지난해 9월27일 출소한 지 2주 만에 휴대전화를 개통했다. 그가 고른 전화번호는 ‘1818’. 신촌에서 6년째 이동통신회사 대리점을 운영하는 정모씨는 “1818은 대표적인 기피번호다. 그동안 1818을 번호로 쓰는 사람을 딱 2명 봤는데 둘 다 조직폭력배로 남을 위협하는 수단으로 고른 숫자”라고 했다. 유영철에게 1818은 전화번호만이 아니었다. 경찰 관계자는 “유영철이 사용하는 인터넷 아이디나 비밀번호 대다수에도 1818이라는 숫자가 꼭 들어갔다”며 출소 후 분노와 비관에 빠진 그의 심리상태를 설명했다.

유영철을 대면한 수사 관계자들의 말을 빌리면 “유영철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듯하다”고 한다. 지난해 10월9일 구기동에서 일가족 세 명을 살해한 사건에 대해 유영철은 “본래 그 집의 앞집을 목표로 정했는데, 정원에서 공사를 벌이는데다 큰 개가 있어 포기했다. 그래서 나오는 길에 뒷집으로 들어간 것”이라고 진술했다. 수사 과정에서 ‘앞집’이 존속살해범 박한상의 변론을 맡았던 황산성 변호사의 집임을 알게 되자 유영철은 검찰에 “황 변호사에게 변론을 맡기고 싶으니 의사를 타진해달라”고 상식 밖의 요구를 하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유영철의 말 한마디에 검찰과 경찰에서 ‘믹서 소동’이 벌어졌다. 검찰조사에서 유영철이 “5명의 사체를 찾지 못한 것은 사체를 모두 믹서에 갈아버렸기 때문”이라고 진술한 것. 검찰은 경찰에 유영철의 오피스텔 등지에서 믹서를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믹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수사 관계자는 “완전 범죄를 위해 사체를 믹서에 갈다가 힘이 드니까 그만둔 게 아니겠냐”고 추측했다.


“네 구의 사체에서 간이 발견되지 않아”

8월13일 검찰이 “유영철로부터 4차례에 걸쳐 피해자 인육을 먹었다는 진술을 확보했지만 입증되진 않았다”는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또 한 번 세상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그가 먹었다는 ‘인육’은 ‘간’이다.

수사 관계자는 “유영철은 아버지와 둘째형 모두 간질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한다. 자신만은 간질로 죽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살해한 4명의 사체에서 간을 도려내 바로 먹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둘째형은 실명을 비관해 자살했음에도 그는 간질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사 관계자는 “유영철은 간질과 한센병에는 사람의 간이 효험 있다는 터무니없는 민간 속설을 그대로 믿었다”며 “실제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 결과 네 구의 사체에서 간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유영철은 간뿐만 아니라 뇌수(腦髓)도 먹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 관계자는 “유영철이 ‘뇌수를 떠먹어봤는데, 맛이 비릿하더라’고 했다”고 말했다.

한림대 조은경 심리학과 교수는 “유영철이 처음부터 장기(臟器)를 목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한 건 아닐 것이다. 이는 살인행각의 진화단계로 봐야 한다”고 분석했다. 처음에는 살인도구를 현장에 두고 나오는 등 범행이 미숙했지만, 나중엔 방화를 하는 등 살인을 거듭할수록 범행기술이 발전한 것처럼 장기를 먹는 행위도 ‘살인의 진화단계’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는 행동이라는 것. 조 교수는 “장기를 먹는 쾌감을 느낀 이후로는 그 쾌감을 위해 살인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검찰은 유영철을 윤락여성 연쇄살인 혐의로 기소한 이후에도 수사를 멈추지 않고 있다. 최근 검찰이 주력하고 있는 부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5구의 사체를 찾는 일과, “출소 후 예고 여학생들과 동거했다”는 유영철의 진술에 따라 이 여학생들을 추적중인 것.

유영철은 검찰에서 아직 사체를 찾지 못한 피해자 5명의 인상착의, 살해시기, 살해장소, 사체 유기장소 등을 진술했다. 유영철은 봉원사 인근 야산에 사체를 파묻고는 캔 조각 등으로 작은 표지(標識)를 해놓았다고 했는데, 이 표지가 비에 휩쓸려 떠내려간 탓인지 아직 사체를 발굴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가족들과 친구들을 잘 챙기는 ‘의리 있는’ 유영철과 연쇄살인범인 ‘살인마’ 유영철.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유영철’ 사이에는 무엇이 놓여 있는 것일까. 깊게 눌러쓴 모자와 마스크 속에 숨겨진 그의 ‘여러 얼굴’을 밝히는 데는 앞으로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유영철 사건일지





-> 2003년 9월 24일 수요일, 이영애(30)씨는 아침 일찍부터 생신을 맞은 서울 시아버님에게

축하인사차 전화를 드렸으나 아무도 받지 않음. 의사인 남편과 지방에서 지내느라 직접 찾아뵙지

못하는 것도 죄송스러운데 전화 통화마저 안되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일흔이 넘었지만 젊은이 못지 않게 건강하셨고 평생 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몸관리를 잘해오신 터라

그저 전화선에 문제가 생겼거니 하고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 어디 가신다는 말씀도 없었는데

생신날 연락이 안된다는 것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영애씨는 남편에게 빨리 퇴근해서 올라가보자고 채근하고 서둘러 서울 갈 준비를 했다.

밤 10시가 되어서야 강남구 신사동 주택가 부모님댁에 도착한 영애씨 부부는 초인종을 눌러도

응답이 없자 가지고 있던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인기척이 없는 집 안 공기는 싸늘했고 불까지 꺼져서 어두컴컴했다.

시부모님을 부르며 안방문을 여는데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불을 켜보니 차마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영애씨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그대로 주저앉았고 뒤따라온 남편 역시 넋을 잃었다.

노부부는 머리가 깨어진 채 잠옷 바람으로 엎어져 있었고 이불과 방바닥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112신고를 받고 출동한 강남 경찰서 형사들은 출입문이 잠겨 있고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없으며

뒤진 흔적은 있으나 거액의 현금과 귀금속들이 그대로 있는 걸 보고는 면식범에 의한 원한 관계나

가족 갈등에 의한 살인으로 보고 피해자 주변을 중심으로 수사에 착수했다.

서울 경찰청 과학수사요원들의 현장 감식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결과

시아버지 이진수(73세)씨는 머리에 둔기로 5차례 공격을 받고 두대골 골절 및 뇌손상을 심하게 입은 것이

사인이었고, 목과 팔에도 칼에 찔린 상처와 골절상이 발견되어 방어와 저항을 한 흔적이 역력했다.

시어머니 이숙진(67세)씨는 같은 둔기로 머리에만 3번의 공격을 받았는데 정수리 부근에 집중되었고

다른 부위에는 공격받은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전혀 저항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방적인 공격을 받고

사망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사망 시간은 오전 10시에서 정오사이로 추정되었고, 희미한 구두 뒷굽자국과 지문, 모발 몇 점 등 증거도

일부 수거되었다.




-> 2003년 10월 9일 목요일. 은퇴후 소일거리 삼아 주차관리원으로일하는 고상수(61)씨는 오늘도

새벽 5시에 출근해서 하루종일 근무하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북한산 자락에 있는 집으로 왔다.

저녁 6시 반이었다. 집에 도착해 초인종을 눌렀지만  아무대답이 없었다. 집에 전화해도 신호만 갈뿐이었다.

여든이 넘은 *와 장애인 아들을 돌보느라 집을 비우는 일이 없는 아내가 웬일인가 싶었다.

급한 대로 담을 넘어 들어가 거실의 스탠드 불을 켜니 아내가 벽난로 옆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보았지만 이미 싸늘해진 시신이었다.

놀라도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데다 윙윙거리는 머릿속은 정리가 안돼 잠시 멍하니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전화기를112 를 눌러 신고를했다. 전화를 끊고는 어머니와 아들이 생각나 목이 터져라

외쳐부르며 온 집안을 헤매다녔다. 아들 (34세, 지체장애)은 2층 방문 앞에, *(82)는 현관앞

화장실 입구에 숨져있었다. 머리가 깨져서 온바닥이 핏물로 흥건했다.

현장에 출동한 서대문 경찰서 형사들은 출입문이 잠겨있었고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없으며

뒤진 흔적은 있으나 거액의 현금, 수표와 귀금속 등이 그대로 있는 점 등으로 보아 면식범에 의한

원한관계나 가족 갈등에 의한 살인으로 보고 피해자 주변을 중심으로 수사에 착수했다.

서울 경찰청 과학수사 요원들의 현장감식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결과 피해자들은 둔기로

얼굴과 머리에 여러차례 가격을 당했으며 두개골 골절과 뇌손상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현장에서는 뚜렷한 발자국이 채취되어 곧바로 신발 종류와 제조 회사를 확인하기 위한 데이터베이스 검색

작업에 들어갔다. 언론에서는 신사동 사건과 한데 묶어 '부유층 노인 연쇄살인'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경찰에서는 서로 다른 개별 사건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불필요한 공포가 확산되지 않도록 경계했다.

강남경찰서와 서대문 경찰서에 각기 차려진 수사 본부에서도 서로 다른 사건으로 보고 피해자 주변과

인근 지역 불량배, 강절도 전과자와 정신질환자를 대상으로 탐문 수사를 전개해나갔다.

그러나 두 사건을 비교 분석한 서울 경찰청 범죄분석반은 범행시간과 수법, 흉기, 피해자의 나이,

피해 주택의 위치와 구조 등 동일한 부분이 많은 것을 지적하며 조심스럽게 동일범에 의한 연쇄범죄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 2003년 10월 16일 목요일. 지병치료를 위해 장인을 모시고 병원에 갔던 최용준 (36세)씨는 오후 1시경

삼성동 처갓집에 돌아와 초인종을 눌렀다. 그런데 아무리 눌러도 응답이 없었고 소리쳐 불러봐도

대답이 없었으며 전화도 받지 않았다.

마침 장인도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처남에게 전화하고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처남이 와서 문을 열고 들어가니 비릿한 냄새가 훅 끼쳤다. 장모 유지혜(69세)여사가 화장실 바닥에

엎어져 피를 잔뜩 흘리며 의식을 잃은 채 신음하고 있었다.

119구급차를 불러 인근 종합 병원응급실로 옮겼으나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린 터라 뇌손상이 심해

희망이 없는 상태였다. 역시 둔기에 의한 두부및 안면부 다발성손상이 원인이었다.

밤 1시 45분경 유여사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채 숨을 거두었다.

한편 112 신고를 접하고 현장에 출동한 강남경찰서 형사들은 앞선 두 사건을 의식해 더욱 신중히

현장관찰을 시도했다. 역시나 출입문이 잠겨있었고 외부 침입 흔적이 뚜렷하지 않았으며

뒤진 흔적은 있으나 현금과 귀금속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지만 집 뒤쪽 담장 안과 밖에서 다량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면식범이나 가족이 아닌 외부인의 침입이있었던 흔적이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다.

뒤에 도착한 과학수사반의 현장 감식결과 같은 발자국이 안방과 거식, 화장실에서도 발견되었고,

구기동 사건 족적과 비교해보니 일치했다. 동일범이 분명했다.

서울 경찰청은 물론 경찰청 전체가 극도의 긴장 상태에 돌입했고, 사건과 수사내용에 대한 철저한 보안유지가

하달되었다. 언론 보도는 연쇄살인임을 기정사실화하기 시작했고 경찰이 범인의 윤곽조차 잡지 못한 채

엉뚱하게 피해자 가족과 주변인물들을 수사 대상으로 삼아 괴롭힌다고 맹렬히 비난히가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한 일선 경찰관이 " 한건만 더 발생하면 잡을수 있다." 며 또 다른 희생자가 발생하길 바라는 듯한

발언을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작은 소동이 일기도 했다.



->  여론의 압박과 경찰의 검문 검색 및 수사망이 강화되면서 한동안 아무일도 일어나지 았았다.

물론 수사에 큰 진전도 없었다. 그러나 삼성동 사건 이후 한달이 2003년 11월 18일 화요일.

역시 주택가에 담과 마당이 있는 혜화동 양옥집이었다.

약사인 오혜란(62세)씨는 아침 9시 50분경 약국에 출근해서 한창 일을 보던 12시 50분 경에 보일러 기사의

전화를 받았다. 애프터서비스의뢰를 받고 왔는데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이 없다는 항의성 전화였다.

간병인 겸 파출부 아주머니가 거동이 불편한 팔순의 시아버지 혼자 놔두고 낮잠을 자거나 손자를 업고

동네에 산책 나간 모양이었다. 착하고 성실해서 늘 식구처럼 지냈던 아주머니가 그러리 없어

이상해 하면서도 일이 바빠서 그러려니 했다.

한창 바쁜 시간을 넘긴 오후 3시경 집에 들른 오여사는 여전히 초인종에 응답하지 않는 아주머니에게

화가 나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나 집안에는 온통 연기가 자욱해 앞이 보이지 않았다.

연기를 헤치고 시아버지의 방분을 여니 바닥에 피만 흥건하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갓난아기인 손주가 있는 작은 방문은 잠겨서 열리지도 않았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침대 위에는 시아버지가, 방바닥에는 간병인 아주머니(53세)가

불에 탄채 누워있었다. 갓난아기는 이불과 포대기에 겹겹이 싸인 채 아무 상처도 없이 옆방 소파 위에

누워있었다.   현장을 관찰한 동대문 경찰서 형사들 중 일부는 사체에 불을 지르고 지하실에 있던

곡괭이와 골프채 등을 가져다 금고를 부수려 한 흔적 등이 신사동, 구기동, 삼성동 사건과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발견하고 이번사건은 연쇄살인에 해당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현장을 감식한 현장요원들과 사체를 부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관들은

둔기에 의한 두부 및 안면부 다발성 손상과 두개골 함몰 및 뇌손상 등 공격 방법과 흉기가 동일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거실과 복도에서 발견된 발자국 역시 신사동을 제외한 이전 두 사건과 일치했다.

사망추정시간도 오전 10~12시 이전 세 사건과 같았다.

피해자 집 주변을 수삭해던 경찰은 인근 건물 입구에 cctv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녹화된 테이프를 제출 받아 분석에 들어갔다. 다행히 테이프를 틀자마자 범행을 마치고 피해자의 집

옷장에 걸려있던 점퍼를 걸쳐입은 채 유유히 걸어내려가는 범인의 뒷모습이 찍힌 화면을 찾아낼수 있었다.

이 영상으로 범인의 키가 168센티미터라는것과 2,30대 후반의 남자. 그리고 족적 검색에서 찾은

k 제화 b 캐주얼화를 신고다니는 사람을 찾는다는 수배 전단을 전국에 배포했다.


-> 공교롭게도 주택가 부유층 노인 연쇄살인 사건 발생지역의 이름 두자가 모두 같은 자음으로 시작하다

보니 항간에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abc살인>을 모방한 '가나다 살인' 이라는 풍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즉, 신사동 = ㅅ ㅅ . 구기동 = ㄱ ㄱ . 삼성동 = ㅅ ㅅ . 혜화동 = ㅎ ㅎ .  이기 때문에 다음 사건 역시

같은 자음으로 구성된 명칭을 가진 동네에서 발생할 거라는 예측도 제기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혜화동 사건 이후 약 3개월이 지난 2004년 2월 11일 정오 무렵 ,

분당 '정자동'의 고급 아파트에서 팔순의 부유층 노인이 둔기로 머리를 여러차례 강타 당해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번사건은 예전사건들과 틀린점이 많았다. 첫째로 주택가가 아닌 고층 아파트였고,

둘째로 사용된 둔기가 훨씬 작았다. 셋째로 발견된 발자국의 크기과 모양이 달랐다.

넷째로 신용카드 등 금품이 없어졌다. 결국 이 사건은 한달이 채 안된 3월 4일 범인이 검거 되었다.

증권사 직원이 고객을 찾아와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하다 거절당하자 피해자를 살해하고 신용카드 등을

훔쳐 달아난 '면식범에 의한 금푼을 노린 살인' 이었다.



->  서울 주택가 부유층 노인 연쇄살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식어가던 2004년 봄, 서울 서남부 지역에서

심야에 귀가하던 여성들이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서 괴한에게 칼로 마구 찔리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마침 경기 남부 연쇄살인(화성사건) 사건을 영화화한 <살인의추억>이 화제가 되던 때라

언론에서는 '서울판 살인의 추억' 이라며 연일 자극적인 보도를 했고, 일부 언론은 3건중 2건이

목요일에 발생했고 그 중 비오는 날이 있었다는 점을 과장하여 '비오는 목요일 밤의 괴담'이라고 기사를 실었다.


<서울 서남부 여성 연쇄 피살 사건>

1. 2004년 2월 26일 새벽 5시 신림동: 방학을 이용해 서울 할머니댁에 올라와 있던 여고생(18세)이

새벽에 일나가는 할머니를 배웅하고 돌아오던 길에 골목길에서 갑자기 나타난 괴한에게 칼로 10여차례

찔렸으나 다행히 목숨은 건짐. 장기간 치료가 필요하고 평생 후유증이 남는 중상.

2. 2004년 4월 22일 새벽 3시 고척동 : 친구집에 갔다가 귀가하던 여대생(20)이 자신의 집 현관에서

문에 열쇠를 꽂아둔 채 사망한 채로 발견됨. 칼로 가슴과 다리 등 6군데를 찔림.

3. 2004년 5월 9일 새벽 2시. 대방동 보라매 공원 :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 전철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던

여대생(22세)이 갑자기 나타난 괴한에게 칼로 10여 차례를 찔려 병원으로 후송했으나 과다 출혈로 사망.


-> 일부에서는 노인연쇄피살사건과의 연관성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범행시간, 장소, 대상, 방법, 흉기등이

전혀 달라 동일범의 소행으로 볼 여지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두 종류의 연쇄살인이 한꺼번에 발생했고 범인은 오리무중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인해 민심은 심리적 공황 일보직전까지 와있었다.



-> 혜화동 사건이 발생한지 두달 후인 2004년 1월 20일 아침 7시 반, 신촌에 있는 찜질방에서

큰 소동이 일어났다. 수면실에서 잠자던 손님의 옷장 열쇠가 없어져 확인해보니 누군가 열쇠를 훔쳐

지갑에 있던 현금과 상품권 등 10만 원 상당의 금품을 훔쳐간 것이었다.

몇시간 전인 새벽 4시에도 비슷한 도난 사건이 발생했던 터라 종업원이 탈의실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옷장을 열고 돈을 꺼내간 손님의 얼굴을 기억했다.

경찰이 출동했고, 용의자를 붙잡혔다. 이름은 유영철, 절도 등 전과 범이었다.

이 용의자는 범행을 극구 부인하는 한편, 피해자에게는 "20만원을 줄테니 없었던 일로 하자" 고

합의를 종용했고 연행하던 경찰관에게는 화장실에 가자고 하고는 피해자와 합의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애원했다. 결국 피해자가 합의를 해주지 않아 경찰은 용의자 유영철에게 수갑을 채워

경찰 지구대로 연행했고, 유영철은 목격자 진술을 듣느라 잠시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수갑을 풀고 도주했다.

경찰에 쫓기던 유영철은 3층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려 도주하다 다시 붙잡혔다. 범행을 극구 부인하는데다

찜질방 종업원의 진술 말고는 증거가 없고, 도난 당한 금액이 10만원밖에 안된다는 이유로

경찰이 신청한 구속영장이 기각되고 유영철은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다.

: 10만원이라는 소액 절도 혐의를 받고 범행을 부인한 상태에서 수갑을 풀고 도주극을 벌이는 범인의
이상행동에 주목하지 않은 경찰과 구속영장을 기각한 법조인들의 성의없는 판단이 초래할 엄청난 비극을
과연 짐작할수 있었을까. 한국 범죄수사 역사에서 '천추의 한'으로 남을 만한 순간이었다.


-> 2004년 2월 6일 저녁 7시가 조금 넘은 시간 서울 외국어대 인근 이문동의 한 골목길, 야간 근무를

위해 출근을 서두르던 의류상가 직원 전효실(25세)씨는 누군가와 마주쳤고, 가슴과 팔 등 5군데를 칼에

찔려 몸부림치다 가까이 있던 중국집 문을 밀고 쓰러졌다.

한창 배달 준비를 하던 중국집 주인은 갑자기 피를 흘리며 들어와 쓰러진 여성에게 다가가 괜찮냐며

말을 시켜봤지만 신음소리만 흘릴뿐이었다. 112신고후 5분만에 경찰이 도착해 병원으로 후송했으나

피해자는 사망하고 말았다.

경찰은 범행 수법이 잔인하고 금품을 가져가지 않은 점 등을 이유로 치정이나 원한 관계에 의한

면식범의 소행으로 보고 수사에 착수했다.



-> 2004년 4월 14일 새벽 1시 50분경, 인천 월미도 바닷가 가까이 있는 석유가게 주차장에 있던

승합차에서 갑자기 불길이 솟아올랐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소방관들은 인근 석유 저장고로 불길이

번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겨우 불길을 잡고 진화에 성공했는데, 불이 꺼진 차안에는 시체 1구가 발견되었다.

놀랍게도 시체는 양손목이 절단되어 없는 상태였고 온몸에 20여 군대 칼레 찔린 상처가 발견되었다.

국과수의 부검 결과 머리에서 커다란 둔기로 얻어맞은 상처도 발견되었다.

나중에 밝혀진 피해자의 신원은 서울 황학동 도깨비 시장 노점에서 불법 cd 나 비아그라 등을 판매하는

남자(44)로 채권 채무나 원한관계등 살해될 만한 주변 문제를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살해되던 날 저녁 7시경 피해자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와 뒷골목에서 심각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이 인근 가게 종업원에게 목격되었다.



-> 연초부터 부천에서 초등학생 2명이 실종된 후 사체로 발견되고 포천에서도 실종된 여중생이 피살된 채

발견되는 사건이 터지면서 실종 신고 접수 이후 경찰의 초동 조치와 철저한 수사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이에 경찰청에서는 2월 17일부터 실종자 수사에 전념하는 '100일 작전'을 개시하겠다고 발표.

100일 작전이 한창이던 3월 24일, 서울의 한 경찰서에 출장 마사지사로 일하던 20대 여성의 실종신고가

접수되었다. 밤에 손님의 전화를 받고 나간 이후 소식이 없어 걱정하던 동료가 신고한 것이었다.

실종자 수사에 전념하는 100일 작전 중이었지만 유흥 관련없에 종사하는 20대 여성들은 종종 연락없이

영업 장소를 옮기기도 하고 일을 그만두고 새 삶을 찾기 위해 종적을 감추기도 한다고 판단한 경찰은

'일단 기다려보자' 며 신고자를 돌려보냈다.

6월 4일과 28일에도 비슷한 실종신고가 접수되었지만, 유사한 방법으로 별다른 조치없이 그냥 넘어갔다.

몇 달 후, 이 3건의 실종신고 중 단 한건만이라도 제대로 수사가 이루어졌더라면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피해자를 단 몇 명만이라도 줄일수 이었으리라는 아쉬움에 피살자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거액의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 2004년 7월 12일 밤 11시경, 서울 관악구에 사무실을 둔 출장 마사지 업체에 30대 남자 목소리로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표시 장치에 남겨진 번호는 휴대전화, 신촌 로터리에서 만나자는 호출이었다.

이 전화를 받고 나간 임희선(27)씨는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에 업소로 전화를 걸어 다급하게 비명 같은

한마디를 남겼다. "나 지금 납치되고 있어요." 전화를 받았던 동료가 다시 통화를 시도해봤지만

이미 휴대폰은 꺼져있었다. 이후 희선씨는 연락도 두절되고 업소로 돌아오지도 않았다.

비록 출장 마사지업에 종사했지만 누구보다 성실하고 고향 가족에게 꼬박꼬박 돈을 보내는 보람으로

살아가던 희선 씨였기에 장난이나 허위 전화는 아니라는 것이 업소 사람들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이틀이 지난 7월 14일, 업주 노씨는 과거 사건 관계로 만난 적이 있던 서울경찰청 기동수사대 양형사에게

전화했다. 양형사는 전화로 들은 내용을 첩보로 작성해서 보고하고는 수사에 착수했다.



-> 이튿날인 7월 15일 새벽 2시, 희선 씨를 호출했던 번호가 전화기 화면에 뜨면서 벨이 울렸다.

신촌 g편의점 앞으로 마사지사를 보내달라는 목소리는 사흘 전 그때와 같았다. 신촌 현장에서 잠복 근무중이던

양형사에게 연락한 뒤 마사지사가 출발했고, 마사지 업소 주인과 친구들은 눈에 띄지 않게 마사지사를 따라갔다.

마사지사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자 감시당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남자는 모습을 감춘 채 마사지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 교체해달라고 전화했다. 다시 교체된 마사지사가 약속 장소에 가니 남자는 전화를 걸어

만날 장소를 인근 h 대학교 앞, g 마트 뒤편, g 마트 앞쪽 등으로 계속 바꾸어대는 것이었다.

간첩 접선하듯이. 할수 없이 양형사 팀은 합정동 h 대학교 근처, 마사지 업주 노씨 일행은 신촌 g마트 근처로

나뉘어 잠복하기로 했다.

새벽 4시 45분경, 인적없는 g 마트 뒤 골목에서 웬 남자가 휴대전화로 통화하는걸 봤는데, 곧이어 업소에서

노씨에게 연락이 왔다. 방금 전에 남자가 다시 g 마트 뒤편으로 마사지사를 보내달라고 전화했다는 것이다.

'저 놈이다'싶었다. 노씨는 양형사가 단단히 일러준 대로 섣불리 덮치는 대신 양형사에게 전화했고,

양형사는 바로 출발할 테니 인근 순찰지구대에 연락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고 일렀다.

새벽 5시, 연락을 받은 순찰지구대 김경장이 출동했으나 그 사이 남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낚시꾼이 입질이 약해 조금만 더 하다가 그만 미끼를 뜯긴 상황이었다.

그러나 20분 뒤 남자는 g 마트 앞 길가에 다시 나타났고 김경장과 노씨 일행은 사방을 포위하며 덮쳤다.

남자는 격렬히 저항하며 손에 들었던 무언가를 입에 쑤셔넣었고, 김경장 일행은 손가락을 입에 넣어

삼키지 못하게 한 다음 마침 주머니에 들어 있던 숟가락을 물려서 입안의 물건을 빼냈다.

출장 마사지 업소 전화번호가 적힌 전단지 뭉치였다. 마침 양형사 일행이 도착해 수갑을 채우고 차에 태웠다.

차에 태우는 과정에서도 격렬히 저항하는 통에 양형사와 일행은 남자의 이에 물어뜯기고 머리에 받쳤으며

남자역시 타박상과 찰과상을 입었으나 큰 부상은 아니었다.



-> 체포된 남자의 이름은 유영철, 절도등 전과 11범이었고 지난 1월 신촌의 한 한 찜질방에서 발생한

소액절도 사건의 피의자로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중인 피의자였다.

'이거 완전 도둑놈이군.' 기동수사대 형사들이 한마디씩 내뱉었다. 전화로 불러낸 마사지사를 어떻게 했느냐는

질문에 유영철이 이상한 대답을 했다.

"마사지사가 맘에 안들어 바꿔달라고 하고 기다리는데 다짜고짜 덤벼들어 붙잡았기 때문에 마사지사는

잘 모르고요. 요새 발생한 서남부 살인 사건 그거 다 제가 했어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구체적으로 질문하자 서남부 사건의 구체적인 사실에 대해 유영철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뭐 이런놈이 다 있어. 야, 그럼 휴대전화는 어디서 났어?"

유영철은 7월 13일 새벽 4~5시에 길을 걷는데 지나던 차가 창문을 열고 봉투를 버렸고 그 안에

휴대전화와 동전, 시계, 휴지, 생리대, 명함 등이 들어있었다고 대답했다.

7월 12일에도 이 휴대전화로 불러낸 마사지사가 실종되었는데? 당시 유영철이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출장 마사지 업소 전화번호는 여러 개라서 각기 다른 전단지에 적혀있지만, 사실은 모두 한 업소의

같은 전화로 연결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12일에 전화한 업소와 14일에 전화한 업소가 다른 줄 알고

지어낸 거짓말이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형사들은 일단 유영철이 내뱉는 이야기를 다 들어주기로 했다.

7월 16일밤 12시 10분경, 횡설수설하던 유영철은 갑자기 입에 거품을 물고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다.

취조하던 두 형사는 가혹행위로 인해 징계를 당할까봐 얼른 유영철의 수갑을 풀고 어깨에 담요를  덮어주고는

괜찮은지, 물이나 뭐 필요한 것이 없는지 물었다.

곧 진정된 유영철은 고분고분해졌고 11명을 살해해서 암매장했는데 다 자백할 테니 현장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두 형사는 잠시 서로를 쳐다보며 망설인 끝에 "그래. 가보자"며 지원을 받기 위해 사무실을 나서는 순간이었다.

유영철은 사이에 두고 한 경찰관은 앞장서고 다른 경찰관은 뒤에 섰다가 잠시 서류를 챙겨들기 위해

뒤돌아선 순간, 그 허점을 노린 유영철이 앞선 경찰관을 온 힘을 다해 밀어붙이고 계단을 향해 전력질주하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대부분의 형사들이 야간 출동 중이라 정문까지 달리는 동안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지난 1월 찜질방에서 도주했을때와 달리 건물로 들어가지 않고 사람이 붐비는 길로 빠져나가

도주하는데 성공하였다.



-> 유영철이 도주하자 서울경찰청 기동수사대에 비상이 걸렸다. 모든 직원들이 소집되어 간단한 교양 후에

유영철의 사진을 담아 급히 만든 수배 전단을 받아들고 거리로, 유영철 연고지로, 역으로, 터미널로 달려갔다.

일단 수배한 죄목은 '절도'였다.

"유영철을 잡아올 때까지는 먹지도, 싸지도, 앉지도 마!"

경장의 고함소리가 대원들의 뒤통수에 꽂혔다.

도주 11시간 만인 11시 40분 영등포역 앞, 눈에 불을 켜고 머리에는 오직 유영철의 얼굴만 담고 있던

기동수사대 김형사의 눈에 낯익은 모습이 들어왔다. 이리저리 살피며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남자,

유영철이었다.  절대로 놓치면 안된다는 생각에 동행한 의경들에게 지시가 있을때까지는 표정하나 바꾸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다.. 유영철이 1미터 안쪽으로 다가오자 김형사의 외마디 소리와 함께 덮쳐 체포되었다.

거짓말과 도주의 명수 유영철은 다시 경찰의 체포망에 걸려들었다.

본부에 무전으로 검거 소식을 전하고 호송에 들어가다, 유영철은 호송되면서도 간질 발작 흉내를 내거나

다리가 아프다며 비명을 지르는 등 갖은 술수를 다 부렸지만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 일선 경찰고나들이 도주한 유영철을 검거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는 동안 서울경찰청에서는 기동수사대에서

보고한 내용들을 토대로 분석 작업에 들어갔다. 검거 당시와 이후에 보인 유영철의 반응과 행동 특성들로

미루어볼 때 출장 마사지사 갈취 여부는 그저 '빙산의 일각' 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미 서남부 연쇄살인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당시 분석을 주도하던 서울 경찰청 수사부장

김용화 경무관은 유영철의 사진에서 왠지 낯이 익다는 느낌을 받았다.

"혜화동 cctv 사진 가져와봐!"

비록 뒷모습이었지만, 어머니들은 신생아 뒤통수만 봐도 안나고 뒷모습에도 분명히 개인마다 다른

특징들이 있었다.

"그래. 이거야."

다시 검거된 유영철이 묵비권을 행사하는 등 제대로 진술하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은 수사부장은 직접

유영철을 신문하기로 결정했다. 서울경찰청 수사부장. 경찰의 별에 해당하는 경무관으로 거대 서울경찰청

형사들의 최고 우두머리가 직접 피의자 신문을 하겠다니, 위험부담이 매우 큰 모험이었다.

만약 수사부장이 신문해도 별 소득이 없다면 위신이 구겨지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방법은 더 이상 찾을 수

없다는 부담을 안은 결정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유영철에게도 전달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유영철은 매우 과시욕이 강하고 우쭐대기 좋아하는 심리적 특성이 있는 터라

서울 경찰 최고위 형사 간부가 직접 자신을 신문하러 온다는 사실에 흥분했다고 한다.

한국의 살인 사건 분석과 프로파일링을 주제로 범죄학 박사 학위까지 받은 김용화 수사부장이 차분히

추궁하자 유영철은 이내 자백하기 시작했다.

우선 4건의 부유층 노인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임을 자백했다. 자백 내용이 구체적이고 상세하며

범인이 아니면 모를 이야기들을 하거나 현장 상황을 정확히 재현해 그리는 점 등으로 보아 범인이 분명했다.

진술에 뒤이은 현장 답사에서도 정확히 피해 주택들을 찾아내고 사건 현장의 처음 모습을 재현해냈다.

11시간 도주하는 동안 증거가 될 만한 물건들을 버렸다는 진술에 따라 수색한 결과 유영철의 하숙집에서

멀지 않은 골목길 구석에서 범행에 사용한 해머가방도 발견해 수고했다.

나중에 이 해머의 손잡이 플라스틱 안쪽에서 피해자의 혈흔을 발견했다.

이상한 것은 이미 4건의 연쇄살이을 자백한 유영철이 정작 체포된 이유인 출장 마사지사 실종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모르쇠로 일관한다는것이었다. 수사부장은 계속해서 유영철이 소지하고 있던

여성용 발찌와 손목시계, 여분의 휴대전화에 대해 그 출처를 집중 추궁했다.

꿋꿋하게 거짓말에 거짓말을 거듭하던 유영철은 마침내 스스로의 거짓말에 지쳐 모두 피해 여성들의

물건들이고 여성들을 모두 살해해서 토막 낸 후 유기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 2004년 7월 16일 저녁 7시 반. 김용화 수사부장이 직접 앞장 선 수사진은 유영철을 앞세워

사체 1구를 매장했다는 신촌 대학 부근에 있는 야산으로 올라갔다.

지역 주민들이 산책하거나 운동하는 등산로를 따라 8부 능선쯤에 이르자 유영철은 한켠에 있는 고목나무

뿌리 밑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저기 파보세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표시나 흔적도 없는 뿌리만 남은 고목 나무 밑둥을 들춰내고 흙을 조금 파내자

이내 물컹한 것이 손에 잡혔다. 비닐 봉지에 담은 사체 조각이었다. 모두 18조각. 사체는 이미 심하게

부패해서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였다.

서울 경찰청 과학수사요원들이 장비를 갖추고 세심하게 비닐을 벗겨낸 다음 사진을 찍고 오랜시간에 걸쳐

조각들을 인체 형태로 맞추어 나갔다. 사체들은 손가락들이 모두 잘려나간 상태였다.

지문을 통한 신원 확인을 하지 못하도록 한 짓이었다.

그러나 감식 요원들의 일만 어렵게 할뿐 잘려나간 손가락 마디에서도 지문을 채취할 수 있었다.

지문을 현출하여 피해자의 신원을 파악한 다음 가족들과의 dna 비교 분석으로 확인했던 것이다.

24살의 나이에 어려운 집안을 돕기 위해 시골에서 올라와 일자리를 찾던 끝에 전화방 도우미 일을 하던

여성이었다.  유영철이 지목한 다음 장소 역시 신촌 지역의 다른 대학교 인근 산자락으로 계곡물이 흐르고

한켠에서는 대형 빌딩 신축 공사가 진행중이라 사람들의 통행이 잦은 곳이었다.

계곡 이쪽과 저쪽. 공사 현장 뒤켠 등에서 모두 11구의 사체들을 찾아냈다.

이번에도 사체들은 모두 조각나 있었고 손가락 지문 부분이 잘려나갔으며 일부 사체에서는 장기가 발견되지

않았다. 유영철은 이후 조사에서 사체의 장기 일부를 믹서기에 갈아 마셨다고 진술했다.

18개의 토막으로 절단된 11구의 사체들 중 일부는 서로 뒤섞여 있기도 하고 부패가 많이 진행되어

있었기 때문에 과수사요원들과 국과수법의학자들이 총동원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별로 조각들을

맞추어 몸형태를 재구성해내는 작업에 몇일 밤낮이 걸렸다.

지문감식. 전국의 실종자 및 가출인 명단과의 대조. 사체와 예비 유족들의 dna 비교분석등­ 신원을

파악하는 작업도 엄청난 일이었다.

피해자들은 모두 2.30대 여성들이었고 끝까지 가족이 나서지 않아 dna 비교를 하지 못한 2명을 제외한

9명의 신원이 모두 밝혀졌다. 대부분은 출장 마사지 업소나 전화방 등에 종사하는 여성들이었지만

결혼을 하루 앞둔 채 실종되었던 예비 신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영철은 발굴된 사체 외에도 5명의 여성을 더 살해해서 같은 장소에 매장했다고 주장했다.

그 말에 따라 수차례에 걸쳐 유적 발굴에 버금가는 수색과 발굴 작업을 벌였으나 발견되지 않았다.



-> 유영철은 인천 월미도에서 손목이 잘린채 불에 탄 차량안에서 발견된 서울 황학동 노점상 사체 역시

자신이 살해한 것이라고 자백했고, 공개되지 않은 현장 상황을 정확히 진술해서 범인임이 확인되었다.

인천 살인사건 현장 검증 때는 몰려든 취재진과 인근 주민들 속에 피해자 유가족들이 있었는데

너무도 태연한 유영철의 태도에 분노한 고인의 아내는 울다가 실신했고, 동생은 웃옷을 벗어던진 채

"유영철, 이 비겁한 놈아. 우리 형님 대신 나랑 한판 하자." 라고 소리치며 달려들어, 경찰과 주민,

휘재진을 물론 이 장면을 텔레비전 뉴스로 본 국민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런데 더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 피해자의 동생이 그 후 사건 후유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다가 결국

자살했다는 사실이다. 그 동안 누누이 지적해왔던 범죄 피해자 대책이 여전히 제대로 구축되지 않아

발생한 비극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매우 크다.

경찰 구속 기간이 끝나갈 무렵 유영철은 마치 보너스를 준다는 듯이 이문동 출근길 여성 살해 사건도

자신이 저지른 범행이라고 자백했다.

역시 범인이 아니면 모를 구체적인 현장 상황을 진술했기 때문에 경찰은 현장 검증을 마친후 유영철

사건 목록에 포함시켰고, 검찰 역시 다른 사건들과 함께 기소했지만 법정에서 유영철이 진술을 번복하고

범행을 부인하는 바람에 결국 이문동 사건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이 나왔다.

이문동 사건 역시 범죄 피해자 보호와 지원 측면에서 큰 문제를 드러낸 경우인데, 유영철을 검찰에 송치하기

직전에 취재진들이 운집해 있는 상황에서 이문동 사건 피해자의 어머니가 우산을 들고 유영철 앞으로

달려나오자 유영철을 호송하던 경찰관이 반사적으로 다리를 올려 피해자 어머니가 그 발에 맞고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진 사상 초유의 사건이 벌어진 것이었다.

언론과 여론에서는 경찰이 살인마 유영철을 보호하기 위해 비탄에 잠겨 이성을 잃은 연약한 피해자 유가족을

발로 차는 과잉행동을 했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피해자를 보호하고 지원하는 경찰관이나

사회복지사가 전혀 없는 우리 제도가 문제의 원인이지, 해당 경찰관 역시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경찰청장이 공개석상에서 고개 숙여 사죄헀고, 해당 경찰관은 징계를 당했다.



-> 총 20명을 살해한 유영철은 그 해 11월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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