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정사 하후돈전

건모2 작성일 09.11.04 02:2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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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꾸눈의 칼잡이가 아닌 사람냄새 물씬나는 옆집아저씨 같은 하후돈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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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후돈(夏侯惇) 자는 원양(元讓)

 

  이분은 삼국지연의에 의해 빛을 보고 또한 삼국지연의에 의해 평생을 어둠속에 살아야 했던 사람이라 생각한다.

 "유비에게 관우가 있다면 조조에겐 하후돈이있다!"..라는 말로 비유하기엔, 어딘가 묘하게 모자라 보이고, 무신(武神)관우와 비교되는 위치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독자에게 바보취급당하는 하후돈.

 

  조조와 친척관계이면서도 그 혈연은 유비와 관우의 '俠과 義'의 사이만 못하고 무용역시 관우를 따라갈 수 없기에 우리는 그를 "2인자 집단의 대표"라고 기억하게 된 것이다.

 

-> 이게 좀 웃기다. 관우는 유비와 별개, 혹은 유비를 뛰어넘는 포스와 존재감을 보여주는데 비해서, 하후돈은 단독 2인자도 아닌 '2인자 집단'의 구성원중 선두, 혹은 한명으로 인식되어지고 있다.

 

나름 생각해 보던데, 유비가 공명과 법정을 얻기전까지 관우는 능력이나 서열면에서 유비군의 넘버1이었던 반면, 조조는 세력을 키우는 와중에 흡수한 천하의 기재들이 너무 많아 그곳에 파묻힌 느낌이다. 물론 촉한공정론도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하지만 사실은 어떠한가.

 

  관우는 군공은 많으나 형주를 다스리면서 위정자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였으며, 그 빛나는 자부심을 차치하더라도 (부)사인과 미방이 저항없이 항복한바로 보아 약간의 인격적인 결함 또한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테클 사절, 전 관공 존경합니다) 하후돈은 살점튀는 전장에서의 군공과 무예는 관우보다못하더라도 뛰어난 인덕과 성품으로 군 전체를 이끌었던 장수였으며, 실명이후 병사의 통솔과 후방에서 병참을 지원함은 물론, 내정면에서도 우수한 성과를 올렸다. 그야말로 솔선수범의 자세로 군과 민의 모범이자 사랑을 받은 올라운드 플레이어라 말할 수 있다.

 

삼국지의 저평가주(그래도 블루칩이지!) 하후돈. 이제 그를 다시보자!!

 

P.S 더불어 그의 부장 한호(삼국지 연의에서는 장사태수 한현의 동생으로 나오지만 사실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도 재조명 받아야할 인물이다. 이런면에선 KOEI가 노력한다는게 물씬 느껴지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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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극의 하후돈 분장

중국에선 파란색이 좋은 의미가 아니기때문에..

이로 유추해보건데 역시 악당을 보임.

 

  하후돈은 자가 원양(元讓)이고 패국 초현 사람이며, 하후영(夏侯?)의 후예다. 열네 살 때, 어떤 사람이 그의 스승을 모독하자 하후돈은 그를 살해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강직한 기개가 알려졌다.(기개도 좋지만 그래도 살인인데..) 조조가 처음 군사를 일으킬 때부터 하후돈은 비장(裨將)이 되어 정벌에 따라나섰다. 조조가 분무장군이 되었을 때(190), 하후돈을 사마로 임명하여 단독으로 군사를 이끌고 백마(白馬) 일대에 주둔하도록 하였고, 곧 절충교위(折衝校尉)로 승진시켰으며 동군태수에 제수하였다. 조조가 도겸을 정벌하면서 하후돈을 복양(?陽)에 머무르게 하여 수비를 맡겼다.
->차후에도 나오지만 하후돈은 역시 연의나 진 삼국무쌍에서 처럼 저돌적인 맹장형의 스타일은 아닌것으로 보인다. 인재보는 눈은 유비와 더불어 삼국시대 1,2위를 다투던 조맹덕은 그를 최전선보다는 후방에서 군,민을 안정시키는 역할에 충실하도록 한것으로 보인다. 누구보다 믿을만한 듬직한 이미지의 인재라는 이미지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것으로 보인다. 역시 코에이 삼국지에서 하후돈 무력이 날이 갈수록 낮아지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장막이 모반하여 여포를 맞아들일 때, 조조의 가족들은 아직 견성에 있었다. 하후돈은 여포가 조씨 가족을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간단하게 무장한 군사를 이끌고 성으로 달려가는 도중에 여포와 마주쳐 전투를 벌였다. 여포는 군사를 이끌고 물러나 북으로 들어가서 하후돈 군사들이 남겨둔 군수품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그 후 여포는 여러 장수들을 위장 투항시켜 힘을 합쳐 하후돈을 사로잡아 인질로 삼고 보물과 교환할 것을 요구하니 하후돈 군중에서는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하후돈의 부장 한호(韓浩)가 병사들을 지휘하여 하후돈 군영의 문을 지키게 하고, 군감과 여러 장수들을 소집하여 각 부의 사병들이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단속하게 하고서야 모든 진영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그런 연후에 한호 등은 하후돈이 있는 곳으로 가서 인질을 잡고 있는 자들을 꾸짖어 말했다.
“너희들은 흉악한 반역자들이면서 감히 대장군을 인질로 하여 협박하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또한 우리들은 왕명을 받들어 반역한 도적을 토벌하고 있는데 어찌 장군 한 사람 때문에 함부로 너희들 말에 따를 수 있겠는가?”

이렇게 말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하후돈에게 말했다.

“이것은 국법이니 저희들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병사들을 불러 인질을 잡고 있는 자들을 공격했다. 인질을 잡고 있던 자들이 당황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우리들은 다만 재물을 빌려가고자 할 뿐입니다.”

한호는 이 자들을 여러 번 책망하고 모두 베어버렸다. 하후돈이 위험에서 벗어난 후 조조는 사건의 전말을 듣고 한호에게 말했다.

“그대의 이러한 점은 만세의 모범으로 삼을 만하오.”

이에 법령을 공포하여, 지금 이후로 인질을 잡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힘을 합쳐 공격하고 인질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이로부터 인질을 잡아 협박하는 사람이 없어지게 되었다.
-> 리더따라 팀원도 닮는다. 사적인 감정앞에 대의와 법규를 준수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동생이 장사태수 한현의 동생으로 나오니.. 진위여부는 가릴 수 없지만..

  조조가 서주에서 돌아오자 하후돈은 대군을 좇아 여포를 정벌하는 도중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왼쪽 눈에 부상을 입었다.(1) 그후 하후돈은 또 진류(陳留)ㆍ제음(濟陰)태수를 겸임하였고, 건무장군의 직위가 더하여지고 고안향후에 봉해졌다. 그 당시 큰 가뭄과 병충이 일어나자, 하후돈은 곧 태수의 물을 끊어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몸소 흙을 지고 장사들을 인솔하여 모내기를 권장하였으므로 그곳의 백성들은 그에 의해 이로움을 보았다. 하후돈은 후에 하남윤으로 전임되었다. 조조가 하북을 평정할 때, 대장군이 되어 후방을 방어했다. 하북 원소의 업성이 함락되자 복파장군으로 승진했으나 여전히 하남윤을 맡았고, 그의 판단에 따라서 적절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법령에 구애받지 않도록 허락을 받았다.
-> 하후돈을 무척이나 좋아한 조조는 그에게 지속적이고 빠른 승진을 시켜준다. 하후돈이라는 인간자체를 좋아한것에 더해 안정되지 않은 기반을 다진 성과가 영역 확장보다 더 나은 성과이기 때문일 것이다.


  건안 12년(207)에 조정에서는 하후돈의 앞뒤 공적을 기록하고 식읍 1천8백 호를 추가하여 이전의 것과 합쳐 2천5백 호가 되게 했다. 건안 21년(216)에 조조를 따라 손권을 정벌하고 돌아온 조조는 하후돈을 26군의 도독으로 삼아 거소(居巢)에 머물게 했다. 그에게 각종 악기와 가기(歌妓)를 주고, 포고령을 내렸다.

― 춘추시대 진나라의 대장 위강(魏絳)은 융족과 강화한 공적으로 금석(金石)으로 만든 악기를 상으로 받았는데, 하물며 장군에게 있어서랴! ―

  건안24년(219)에 조조는 군대를 마피(摩陂)에 주둔시키고, 하후돈을 불러 항상 수레에 함께 타고 행동했으며, 특별히 친근하고 존중하는 것을 보였으며 침상까지 출입하도록 하였으니, 다른 여러 장수 중에서 그와 비길 자가 없었다. 하후돈은 전장군(前將軍)에 임명되었고,(2) 제군(諸軍)을 지휘하여 수춘(壽春)으로 귀환했고, 군영을 옮겨 소릉(召陵)에 주둔시켰다. 문제가 왕위에 오르자 하후돈을 대장군에 임명했으나, 몇 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다.
-> 조조가 이렇게 하후돈을 중시했던 이유를 생각해보자. 앞서말한 내정에 있어서의 치적이 첫번째 일 것이고, 친족이자 친구에 대한 예우가 두번째 일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덧 붙이자면 그의 인간됨이 타의 모범이 되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감탄, 그리고 모두가 이러한 장수가 되라는 '매사마골'의 전략적인 의도 또한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너무 순수하지 못한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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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하남성에 있다는 하후돈, 하후연묘에 서있는 석상. 눈이 있는걸로 봐선 하후돈?


  하후돈은 비록 군중(軍中)에 있었으나, 스승을 직접 영접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성격은 청렴하고 검소했으며, 남는 재물이 있으면 곧 사람들에게 나누어 베풀었고, 부족하면 관청에서 도움을 받았으며, 재산 관리를 일로 삼지는 않았다. 하후돈의 시호는 충후(忠侯)이며, 아들 하후충(夏侯忠)이 후사를 이었다.(3) 문제는 하후돈의 공훈을 헤아려서 그의 아들 전부를 제후로 봉해주려고 하후돈의 식읍에서 1천 호를 내어 일곱 아들과 두 손자에게 나누어 주었고, 작위는 모두 관내후(關內侯)를 내렸다.
-> 국가 1급 공무원이 되어서도 배움앞에 겸손함을 잃지 않고,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몸소 실천하는 자세를 보인다. 재산 관리를 일로 삼지 않았다는 것은 지금에 있어선 큰 문제가 되겠지만-_-;


  하후돈의 동생 하후렴(夏侯廉)과 둘째 아들 하후무(夏侯楙)(4)는 스스로의 공로로 열후(列侯)에 봉해졌다. 이전에 조조는 자기 딸을 하후무에게 시집보냈으니, 곧 청하공주(靑河公主)이다. 하후무는 시중상서(侍中尙書)와 안서진동장군(安西鎭東將軍)을 역임했으며, 가절(假節)이 되어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었다. 하후충이 죽은 후 그의 아들 하후이(夏侯?)가 후사를 이었고, 하후이가 죽자 하후이의 아들 하후소(夏侯?)가 뒤를 이었다.
->하후돈은 삼국지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자식복이 없다. 명예까진 좋은데 능력이 안습이다. 원소는 원상이라는 싸움꾼 자식이라도 있었고, 유표도 투항했지만 유종이라는 총기있는 자식을 두었다. 하후무.. 부마(황제의 사위)라는 큰 직위에 올랐건만 촉군에게 캐관광. '출정했다'.. 이후 기술이 없다. 덧붙여 하후무는 삼국지11 F4(무능력 4인방)에서도 유선을 압도하는 에이스 기질을 보여준다. 내년쯤 나올 삼국무쌍6엔 숨겨진 케릭터로 하후무좀 만들어줬으면 좋겠어. 아.. 잠깐.. 눈물좀 닦고..


  한호(韓浩)는 하내 사람이다. 패국의 사환(史渙)과 한호는 모두 충의와 무용으로 이름을 날렸다. 한호의 관직은 중호군(中護軍)까지 이르렀고, 사환은 중령군(中領軍)까지 올랐으며, 모두 황제의 근위병을 관장하고 열후에 봉해졌다.
-> 사실 한호에 대한 기술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한다. 정확하진 않지만 한호가 조조군의 핵심기반이었던 '둔전제'를 제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장으로 전장에 나가고, 내치에 힘썼던 장수. 조운과 등지 콤비에 쌍을 이룰 올라운드 콤비가 바로 하후돈, 한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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