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이벤트]삼국지 정사 감녕전

건모2 작성일 09.11.04 23: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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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이벤트가 있다는걸 이제야 알았네요. 저도 참가합니다.^^

 

이번엔 좋게 보면 오나라의 돌격대장   나쁘게 보면 일종의 사이코패스같은 오나라의 명장 감흥패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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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쌰! 내가 바로 동오의 돌격대장 감흥패다!

진삼국무쌍4의 감녕


삼국지 감녕전(甘寧傳)
  감녕의 자는 흥패(興覇)이며 파군(巴郡) 임강(臨江)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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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녕의 고향인 임강시의 지도
[주 : 『오서(吳書)』에 이르길 「감녕의 본래 남양(南陽)사람인데, 그의 선조가 파군에 빈객으로 있었다. 감녕이 관리가 되어 계연(計?)으로 천거되고 촉군의 군승(郡丞)에 보임되었으나, 얼마 후 관직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기력(氣力)이 있었고, 유협(遊俠)을 좋아하여, 경박(輕薄)한 젊은이들을 불러 모아, 이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무리들이 모여 서로 따르면서, 궁노를 차고, 깃털을 꽂으며 방울을 달고 다니니, 백성들이 방울소리를 들으면 이가 곧 감녕인지 알았다.   -> 사서를 보신 분들이라면 유심히 이 대목을 보며 알아차리실 수도. '건달'을 우회적으로 멋지게 표현하는 방식이죠.^^; 오죽하면 방울소리만 들어도 감녕인줄 알겠습니다. 그래도 삼국지11에서 크리티컬 나올때 방울소리 딸랑~ 하는건 멋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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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신야문화사에서 출판한 극화 삼국지의 감녕  망나니(?)라 하기엔 너무 얌전한 당신   [주 : 『오서』에 이르길「감녕이 경박하게 협기로 사람을 살해하고 망명자를 집에 숨겨주었는데,  이것이 군중에 소문이 났다. 그가 출입할 때, 뭍에서는 수레와 말을 펼쳐놓고, 물에서는 빠른 배를 연이어 놓았으며, 시종하는 자들은 무늬 있는 비단옷을 입어 마치 길에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멈추어 설 때면 항상 비단으로 배를 메었다가 떠날 때면 혹 이를 잘라 버려서 사치함을 보였다」 고 한다]     사람들과 서로 만나고 그래서 성의 장리(長吏)들을 만날 때, 융성하고 후하게 접대하는 자는 더불어 즐겁게 교제하였지만,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그들의 재물을 빼앗아 버리니, 장리들이 군현의 경계에서 이런 해로움을 당해도 재물을 내어놓아 부담해야 되어, 20여 년간이나 계속되었다.   -> 대충 보면 아무리 어려도 30대 중반까지 이짓을 계속했다는건데.. 과거의 행적이 이러니 황조나 유표나 곱게 보아줬을리 난무하겠습니다. 역시 젊은날의 손권은 대인밴가.      이렇게 위협하고 협박하는 짓을 그만두고, 점차 제자백가의 책을 읽고는 이에 유표에게로 가 의탁하고, 이로 인해 남양에 살았으나, 나아가 등용되지 못하였고, 후에 돌아서 황조에게 의탁하였으나, 황조 또한 보통사람들처럼 그를 길렀다.   [주 : 『오서』에 이르길 「감녕의 그의 가동(家?)과 빈객들 8백명을 거느리고 유표에게 갔다. 유표는 유생(儒生)이라 군대의 일을 익히지 못하였다. 이때 여러 영웅 호걸들이 각각 병사를 일으키고 있었는데, 감녕이 유표의 사세(事勢)를 살펴보니, 아무리해도 이루는 바가 없어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아울러 그 화를 받게 될까 두려워, 오(吳)로 들어가고자 하였다. 황조가 하구(夏口)에 있었는데, 군대는 지나가지 못하니, 이에 머물러 황조에게 의탁하였으나, 3년이 되도록 황조는 그를 예우하지 않았다.    손권이 황조를 토벌하자, 황조의 군대는 패배하여 흩어져 달아났는데, 그 병사를 추격하니 위급하였다. 감녕이 활을 잘 쏘았는데, 병사를 거느리면서 후방에 있으면, 활을 쏘아 교위 능조(凌操)를 죽였다. 황조가 위급함에서 벗어나고, 군대는 파하여 진영으로 돌아왔으나, 감녕을 처음처럼 대하였다. 황조의 도독 소비(蘇飛)가 수차례 감녕을 천거했으나, 황조가 쓰지 않고, 사람을 시켜 그의 빈객을 유혹하니, 빈객들이 점차 도망하였다.   감녕은 떠나가고 싶었으나, 붙잡힘을 면하지 못할까 두려워 하여, 홀로 걱정하며 나갈 바를 몰랐다. 소비가 그의 뜻을 알아, 이에 감녕을 맞이해 술자리를 베풀고 말하길 “내가 그대를 천거한지 여러 차례였으나, 주인이 능히 쓰지 않는다. 해와 달은 멀리 넘어 가니 인생이 얼마되겠는가. 마땅히 먼곳에서 가 도모하면, 무릇 지기(知己)를 만날 것이다”라 했다. 감녕이 한참 후에 말하길“비록 뜻이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라 했다. 소비가 말하길 “내가 그대를 주(?)현의 현장으로 삼고자 아뢰고, 이에 떠나간다면, 누가 더불어 판적(版籍)에 임하여 바꾸겠는가?:” 라 하였다. 감녕이 “심히 다행입니다” 라 했다.
  소비가 황조에게 아뢰니, (황조가) 감녕이 주현으로 가는 것을 들어주었다. (감녕이) 망명객들과 불러 모으고 의를 따르는 자들을 합쳐서, 8백 명을 얻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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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경극에서의 감녕분장

돌격대장의 이미지대로 뒤에 장식보다는 무기 두개로 깔끔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에 오나라로 귀부했다. 주유와 여몽이 모두 천거해 올리니, 손권이 더욱 기이하게 여겨 그를 옛 신하와 같이 대우했다. 감녕이 계책을 진언하길 “지금 한의 사직은 날로 쇠미해지고, 조조는 오래토록 교만하여, 끝내는 찬탈하는 도적이 것입니다. 남쪽 형주의 땅은 산릉의 형세가 편리하고 강과 하천이 유통하니, 실로 이 나라의 서쪽 형세입니다. 제가 이미 유표를 살펴보았는데, 그의 사려는 원대하지 않고, 어린 자식들 또한 못나서, 능히 기업을 잇고 전수할 수 없습니다. 지존께서는 응당 재빨리 이를 살펴보셔야지, 조조의 뒤가 되면 안됩니다.   -> 감녕의 용맹함과 천하를 바라보는 안목은 일반인, 아니 흔히 말하는 식자들 이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천하삼분지계를 대세로 볼때 감녕은 천하이분지계를 손권에게 제안합니다. 참고로 제갈량은 천하삼분지계는 그시대 이미 통용되는 대세와 같았다고 합니다.     이를 도모하는 계책은 마땅히 먼저 황조를 취하는 것입니다. 황조는 지금 연로(年老)하고 혼몽(昏?)함이 이미 심하며, 재화와 곡식은 아울러 부족한데 주변에서는 그를 속이고 놀리면, 자기 이익을 늘리는데 힘쓰며, 관리와 백성들을 침범하여 토색질하니, 관리와 군사들의 마음은 원한으로 가득차 있으며, 전함이 갖추어져 있긴 하나, 오랫동안 부서어져 수리도 하지 않고, 농사에 태만하고, 군대에는 법령이 없습니다. 지존께서 지금 가신하면 반드시 격파할 수 있습니다.   한번 황조의 군대를 격하고, 북을 치면서 행군하여 서쪽으로 가서, 서쪽에서 초의 관문을 점거하면서 대세(大勢)를 점차 넒히면, 가치 점차 파촉도 도모할 수 있습니다.” 라 했다.     손권이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장소(張昭)가 이때 자리에 함께 하고 있었는데, 탄식하며 말하길 “오가 지금 위태로운데, 만약 군대가 과연 행군해 간다면, 필히 난을 불러올까 두렵습니다”라 했다.     감녕이 장소에게 말하길 “국가에서 소하(蕭何)의 임무를 그대에게 맡기었는데, 그대는 머물러 지켜야지 난을 걱정하고 있으니, 어찌 고인(古人)을 사모하길 바라시오?”라 했다.   손권이 술을 들어 감녕을 재촉하면서 말하길“흥패, 올해의 토벌은 이 술과 같아서, 경에게 맡기어 결단내려 하오. 경은 다만 마땅히 방략을 세우는데 부지런하면, 필히 황조를 이기게 될 것이며, 이는 곧 경의 공인데, 어찌 장(張) 장사(長史)를 의심하오?”라 했다. 손권이 마침내 서쪽으로 가서, 과연 황조를 사로잡고, 그의 군사들을 모두 차지하였다. 마침내 감녕에게 병사를 주고 당구(當口)에 주둔하도록 했다.   [주 : 『오서』에 이르길 「처음, 손권이 황조를 격파할 때 미리 두 개의 함을 마련하여 황조 및 소비의 머리를 담고자 하였다. 소비가 사람을 시켜 감녕에게 위급함을 고하게 하니, 감녕은 “소비께서 그런 말씀 하지 않으셔도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라 했다.    손권이 여러 장수들을 위해 주연을 베푸는데, 감녕이 아랫 자리에서 고개를 숙이고 피눈물을 흘리며 손권에게 말하길 “보시는 옛날에 은혜를 베풀어준 사람으로, 제가 소비를 만나지 못했다면, 실로 이미 구덩이에 빠져 죽었을 것이니, (장군) 휘하에서 명을 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소비의 죄는 마땅히 도륙해야 하지만, 특별히 장군께 청하옵건대 그 머리를 제게 주십시오” 라 했다. 손권이 그 말에 감동하여 말하길 “지금 그대를 위해 살려주었는데, 만약 도망가면 어찌하오” 라 했다. 감녕이“소비가 몸이 찢겨지는 화를 면하여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받게 된다면, 내쫓아도 반드시 달아나지 않을 것인데, 어찌 도망갈 것을 도모하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마땅히 제 머리가 대신 그 함에 들어가야 합니다”라 했다. 손권이 이에 그를 사면했다.」고 한다.]     후에 주유를 따라 오림(烏林)에서 조공을 막아 격파했다.   -> 적벽대전이 단 한줄로 마무리되는 것을 보면 위나라의 패배를 줄이고자 하는 의도도 분명히 있었겠지만, 역시 대전이라기 보다는 보통의 수전이었을 거라는 냄새를 지울수가 없습니다.    남군(南郡)에서 조인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니, 감녕이 먼저 사잇길로 진군하여 이릉(夷陵)을 취하자고 계획을 올리니, 가서 곧 그 성을 얻고 이로 인해 들어가 수비하였다.     이때 수하에는 수백명이 있었는데, 새로 얻은 자들은 합쳐 겨우 만 천명을 채웠다.   -> 이것이 오나라만의 특징입니다. 위나라의 경우 국가의 기틀이 이미 법률로 정해져있어 신하라면 호위군몇백을 빼고 사병을 소유할 수 없지만, 오나라는 지방호족의 색채가 아주 강해 개인의 권세에 따라 사병을 지닐 수 있었습니다. 즉, 전쟁을 치루려면 장수들의 사병을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손권이 천하재패를 향해 나아가기 힘들었던 하나의 큰 이유가 됩니다. 물론 훗날 사병을 국가복속 체재로 전환되긴 합니다만.   조인이 5~6천명에게 감녕을 포위하라고 했다. 감녕이 여러 날동안 공격을 받았는데, 적이 높은 누각을 설치하고 성안으로 비처럼 활을 쏘아대니, 많은 병사들이 두려워했으나, 오직 감녕만은 담소하며 태연자약했다.   사신을 보내 주유에게 보고하니, 주유가 여몽의 계책을 써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포위를 풀었다.
  후에 노숙을 따라 익양(益陽)을 진무(鎭撫)하며 관우를 막았다. 관우는 3만명이 있다고 불렸는데, 스스로 정예병 5천명으로 골라 현의 상류 10여 리의 얕은 여울에 보내놓고, 이르길 밤에 강을 건너고자 한다고 하였다.     노숙과 여러 장수들이 의논하였다. 감녕은 이 때 3벽명의 병사가 있었는데, 이에 말하길“다시 5백명을 제게 더해 주시면, 제가 가서 대적하면, 관우는 제가 가래침을 뱉는 것을 보고는 감히 물을 건너지 못하고 건넌다면 곧 제 포로가 된다고 보장합니다”라 했다. 노숙이 바로 병사 천명을 골라 감녕에게 더해주니, 감녕이 바로 밤중에 갔다.     관우가 이를 듣고는 머물러 있으면서 건너지 못하고, 땔나무를 엮어 진영을 지으니, 지금은 이 곳을 이름하여 관우뢰(關羽瀨)라고 한다. 손권이 감녕의 공로를 훌륭하게 여기며, 서릉(西陵)태수로 배수하고, 양신(陽新), 하치(下雉) 두 현을 관할하게 했다.     후에 환(?)현을 공격하게 따라가니 승성독(乘城督)으로 삼았다. 감녕이 손에는 명주를 쥐고 자신이 성을 올라 군사들의 선봉이 되어, 마침내 주광(朱光)을 격파하여 사로잡았다. 공을 논하는데, 여몽이 최고가 되었고, 감녕이 그 다음이 되어, 절충(折衝)장군에 배수했다.
  후에 조공이 유수(濡須)로 나오니, 감녕이 전부독(前部督)이 되어, 명령을 받아 나가 적의 앞쪽 진영을 부수엇다. 손권이 특별히 쌀과 술, 많은 고기를 하사하니, 감녕이 이에 수하의 백 명을 헤아려 내려주고 먹게 하였다. 먹는 것이 끝나자, 감녕이 먼저 은잔에 술을 따라 스스로 두 잔을 마시고, 이에 그의 도독에게 따라 주었다.    도독은 엎드려 있어서, 이때 잔을 쥐지 못하고 있었다. 감녕이 흰 삭(削)을 꺼내어 무릎 위에 두고, 그를 꾸짖어 말하길    “경이 지존에게 인정을 받았다고는 하나, 어찌 나와 같이 하겠는가? 내가 일찍이 죽음을 아까워 하지 않고, 경은 어찌 홀로 죽음을 아까워하는가?" 라 했다.     도독은 감녕의 안색이 맹렬한 것을 보고, 곧 일어나 절하면 술잔을 쥐고는 병사들에게 각자 은잔 1잔 씩을 돌렸다. 이경(二更)이 되었을 때, 나뭇가지를 물고 나가 적을 쳐부수었다. 적들이 놀라 마침내 퇴각하였다. 감녕은 더욱 귀중한 대접을 받았고, 병사를 2천명을 늘려 주었다.   [주 : 『강표전(江表傳)』에 이르길 「조공이 유수로 출전했을 때, 보기 40만이라 불렀고, 강물에 임하여 말을 물먹였다. 손권이 병사 7만을 거느리고 응전하면서, 감녕을 시켜 3천명을 거느리고 전부독이 되게 하였다. 손권이 비밀리에 감녕에게 명령을 내려 밤에 위군으로 난입하게 하였다.   손권이 수하의 건장한 병사 1백명을 골라, 빠른 길로 조공의 진영 아래로 가서, 녹각(鹿角)을 뽑아 불며, 보루를 넘어 진영에 들어가, 수십 급을 참수했다. 북군(北軍)은 놀라 시끄럽게 북을 울리며 불을 별빝처럼 환하게 드니, 감녕이 이에 진영으로 돌아와 북과 나팔을 불며 만세를 불렀다.   인하여 밤에 손권을 알현하니, 손권이 기뻐 말하길 “늙은이를 너무 놀래킨 것 아니오? 오로지 경의 담력만 지켜봤소.” 라 했다. 곧 비단 1천필과 칼 1백 자루를 하사했다.   손권이 말하길 “맹덕에겐 장료가 있지만, 나에겐 흥패가 있으니, 족히 서로 상대해볼만 하다” 라했다. 한달여간 멈추고 머무르다, 북군은 바로 퇴각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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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청룡폭포를 굽어보는 감녕의 동상 장강여행중에 귀찮아서 배에 머물고 있었는데 투어중에 감녕의 유적지를 돌아보는 코스가 있었더랬지... 땅을치고 후회했던 아픈기억이..     감녕이 비록 성품이 거칠고 매섭고 죽이기를 좋아했지만, 그러나 시원스럽고 계략이 있었으며, 재물이 가벼이하고 군사들을 공경하여, 후덕히 건장한 군사들을 기르니, 병사들 또한 즐거이 용명(用命)하였다.
  건안 20년(215) 합비(合肥)를 공격하는데 따라갔는데, 역질을 만나, 군대는 모두 이미 나왔고, 오직 수레 아래에 호사(虎士) 1천여 명과 아울러 여몽, 장흠(蔣欽), 능통 및 감녕이 있어, 손권을 따라 나룻터 북쪽을 둘러보았다. 장료가 멀리서 이를 알아보고, 바로 보기를 거느리고 갑자기 닥쳤다. 감녕이 시위를 끌어당겨 적을 쏘고, 능통 등과 더불어 죽기로 싸웠다.     감녕이 거센 소리로 고취(鼓吹)대에게 어찌 북치고 피리불지 않느냐고 물으니, 그 장한 기세가 굳건하였으며, 손권이 이를 심히 기뻐하였다. (감허세.....)   [주 : 『오서』에 이르길 「능통은 감녕이 자기 아버지 능조를 죽인 것을 원망하니, 감녕은 항상 능통을 대비하며 서로 마주치지 않았다. 손권 또한 능통에게 명을 내려 복수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일찍이 여몽의 집에서 연회가 베풀어져 술이 취하자, 능통이 이에 칼을 들고 춤을 추었다. 감녕이 일어나“나도 쌍극무(雙戟舞)를 출 수 있소”라 했다.    여몽이 말하길 “감녕이 출 수 있다고 하지만, 이 여몽의 공교함만은 못할 것이다”라 하면서 이로 인하여 칼을 쥐고 방패를 들어 자신으로써 그들 사이를 양분하였다. 후에 손권이 능통의 뜻을 알고, 이로 인하여 감녕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마침내 반주(半州)로 옮겨 주둔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감녕 집의 주방에서 일하는 아이가 일찍이 잘못을 저질러, 여몽에게로 달아나 몸을 맡겼다. 여몽은 감녕이 그를 죽일까 걱정하여, 그래서 바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후에 여몽이 예물을 가지고 여몽의 모친을 예로써 뵈었는데, 이에 임하여서는 모친과 함께 당에 오르니, 이에 주방에서 일하는 아이를 감녕에게 돌려보냈다. 감녕은 여몽에게 죽이지 않겠다고 허락하였다.     잠시후 배로 돌아가, 뽕나무에 아이를 결박해 두고 자신이 직접 궁을 들고 쏘아 죽였다. 끝나고 나자, 뱃사람들에게 명하여 다시 배의 닻줄을 내리도록 하고, 옷을 벗어 배안에 누웠다. 여몽이 크게 노하여, 북을 울리며 병사를 모아, 배로 가서 여몽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감녕이 이를 듣었지만, 일부러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다.     여몽의 모친이 맨발로 가서 여몽에게 간하길 “지존께서 너는 골육처럼 대하고 너에게 대사를 맡기셨느데, 어찌 사사로운 노여움으로 감녕을 공격해 죽일려고 하는냐? 감녕이 죽는 날, 만약 지존께서 묻지 않으시더라도 너의 이 행동은 신하된 법도가 아니다”라 했다.     여몽은 본디 지극한 효자였으므로, 모친의 말을 듣고는 바로 활연히 품었던 마음을 풀고, 직접 웃으며 감녕의 배로 가서, 웃으며 소리치길 “흥패, *께서 경에게 식사를 대접하신다고 하니, 급히 올라오게!”라 했다. 감녕이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며 말하길 “그대와 약속을 지키지 않았소”라 했다. 여몽과 함께 돌아와 모친을 뵙고, 종일토록 즐겁게 즐겼다.
감녕이 죽으니, 손권이 애통해 하며 슬퍼하였다. 아들 감괴(甘?)는 죄를 지어 회계로 옮겨져, 얼마 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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