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정사 관우전

건모2 작성일 09.11.04 02: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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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게 미스테리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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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ei社 진삼국무쌍4의 '무신武神'관우.

 

일개 범인으로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전란의 세상에 나와

 

평생동안 한 사람과, 그 뜻을 신념으로 삼아 생전에 천하에 우뚝선 무인이 되었고

 

죽음앞에서조차 자신의 신념을 꺽지 않음으로써 신이 된 남자.

 

끝모를 자부심, 원만하지 못했던 인간관계로 인해 그 인생과 대업을 망쳤지만,

 

 그의 일생에 있어 보여준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춘추의 향내는

 

후세 사람들의 마음에 커다란 감동을 심어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역사에서도, 소설에서도 가장 위협적이자 압도적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무장중의 무장. 관우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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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극에서의 관우가면.

 

붉은색: 충성

검은색: 정의

흰색: 지모

완벽하구만. 참고로 제 사진 아닙니다.

 

 

촉서(蜀書) 관우전(關羽傳)

  관우의 자(字)는 운장(雲長)으로 원래의 자는 장생(長生)이었으며, 하동(河東) 해현(解縣) 사람이었지만 탁군( 郡)으로 도망하여 망명했다. 선주(先主:유비)가 향리(鄕里)에서 무리를 모았을때 관우는 장비와 함께 이를 도왔다.

  선주(先主)가 평원상(平原相)이 되자, 관우와 장비를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임명하여 부곡(部曲)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

  선주(先主)는 잠을 잘 때에도 두 사람과 침상(寢牀)을 함께 했으며, 그 은혜는 형제와 같았다. 그러나 관우와 장비는 여려 사람이 모여 앉아있는 자리에서도 하루종일 선주(先主)를 모시고 서 있었고, 또 그를 따라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도 어렵고 험한 것을 피하지 않았다.
-> 이 이야기가 바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혼란기였던 삼국시대의 원흉(유비가 없었다고 가정해보면 조조가 일찍 통일했을 것이라는 가정하에-_-;)이자 삼국지의 시작을 알리는 '도원결의桃園結義'의 모태가 됩니다. 저는 사서를 보다 중시하는 사람이라서 '도원결의'를 부인하는 편입니다만...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있었든지, 없었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도원결의 자체가 바로 사나이의 로망! 이기 때문에~ 실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하나의 뜻을 가지고 평생동안 같이 살아간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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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술 좀 조금만 마실걸..

아침에 일어나 어제의 도원결의에 대해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시는 관공.

굳게 앙다문 입술에서 순간의 실수(?)에 대한 회한을 느낄 수 있다.

(영화 적벽)

 

선주는 서주자사 차주(車胄)를 기습하여 죽이고 관우로 하여금 하비성(下 城)을 지키도록 하고, 태수(太守)의 일을 대신하도록 했다.

그리고 선주(先主)는 소패(小沛)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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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기(蜀記)」에 전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조공(曹公:조조)이 유비와 함께 여포(呂布)를 하비성에서 포위했을 때 관우가 조공에게 아뢰어 여포 수하의 진의록(秦宜祿)을 구원해줄 것과, 여포의 처(妻)를 아내로 맞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애걸했다. 조공(曹公)은 이를 허락했다.
  여포를 격파하고나자 관우는 또다시 그 일을 조공(曹公)에게 여쭸다. 그러자 조공은 불쾌하게 생각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더니, 먼저 했던 약속을 어기고 여포의 처(妻)를 자기 곁에 두었다. 그러자 관우는 마음이 편치가 아니했다.
-> 이장면.. 좀 깨는 장면입니다. 관공께서 여색을... 그것도 패장의 부인을..덜덜덜..하지만 상대는 여인네 앞에선 먹이를 노리는 매의눈. 조승상이 이긴거죠.


이것은 '위씨춘추(魏氏春秋)'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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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씨춘추와는 상관없지만

관우를 문,무 겸전의 완벽무비의 장수이미지로 만드는데 일조한

춘추 좌씨전.

관공의 화상엔 언제나 武를 상징하는 청룡언월도와

智를 상징하는 춘추좌씨전이 빠지지 않는다.

덤으로 한수정후 인장까지.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관우를 임명하여 서주목(徐州牧)의 일을 대신하게 했다고 한다.

건안(建安) 5년, 조공(曹公)이 동쪽 정벌길에 나서자 선주(先主)는 패(敗)하여 원소(袁紹)에게로 달아났다. 조공은 관우를 사로잡아 돌아갔는데, 그에게 편장군(偏將軍)의 벼슬을 내리고 예(禮)로써 심히 후하게 대우했다.
-> 인재우선의 원칙을 심히 지키시는 조승상은 관공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자 노력하기 '시작'합니다. 패장 신분에 가장 하급이지만 도위도 아닌 장군의 작위를 준것만으로도 상당한 대우를 한것이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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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도대전 당시 중원최대의 군세를 자랑하던 원소군의 상장 안량.

천하의 인재가 속속 모였던 원소군에서 상장을 맡았던 인물이라면

군사적 재능 뿐만아니라무예도 뛰어났을텐데..

하지만 자비없는 언월도 아래 속절없이 하직.


  원소(袁紹)가 대장 안량(顔良)을 파견하여 동군태수(東郡太守)유연(劉延)을 백마(白馬)에서 공격하자, 조공(曹公)은 장요(張遼)를 관우과 함께 선봉으로 삼아 맞서게 했다.

-> 삼국지 역사상 한중쟁탈전에서의 마초, 장비 투톱에 전혀 꿀리지 않을 어쩌면 더 강할지도 모르는 최강의 투톱이 결성! 드록바와 앙리가 같이 뛰는 느낌이랄까..

  관우는 안량의 대장기와 마차의 덮개를 멀리서 바라보더니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 나가서는 수만의 병사들 사이에 있는 안량을 찔러죽이고 그의 목을베어 돌아왔다. 그러나 원소의 여러 장수들 중에 능히 관우를 당할 자가 없었기 때문에 원소는 하는 수 없이 백마의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이에 조공(曹公)은 즉시 표(表)를 올려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로 봉했다.
-> 화웅에서 부터 시작되는 관공의 일기토 전설은 원래 여기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군사학적, 역사학적 그리고 상식적으로도 대장이 일기토를 나간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일이고, 일기토의 패배는 곧 전장에서의 패배로 100% 직결되기 때문에 실제 전장에선 거의 이뤄진 적이 없긴 합니다만.. 관공은 하셨죠..-_-; 이 부분에 있어서 많은 논란이 오가고 있습니다.

 

  "유비가 원소에게 의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량은 관공이 투항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방어하지 않은 것이다."

 

  "아니다, 저것이 바로 관공의 무용이다."

 

  대장은 중군에서 군을 지휘해야 하고, 기록에도 '병사들 사이에 있는 안량'이라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관공의 무예가 절륜함에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만...

  물론 누구의 의견이 정답인지 아무도 알수 없습니다. 하지만, 과감성과 절륜한 무용은 진정 장료나 조인보다 앞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수만명의 군사를 향해 홀로 적진으로 돌격해 대장을 찔러(즉 언월도가 아니라는 말) 목을 베어오는게 말이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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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간다. 잡지 마라.


  처음에 조공은 관우의 사람됨이 용감하고 기상이 굳세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오래 머무를 뜻이 없는 것을 살피고 장요에게 말하기를, "경(卿)이 그의 뜻을 시험해보게."라고 했다.
  장요가 관우에게 그의 의중을 물어보니 관우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는 조공께서 나를 후히 대우해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유장군(劉將軍:유비)의 후한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을것을 맹세하였으니 이를 어길 수는 없소. 그러니 여기 끝까지 머무를 수는 없고,

대신 다른 공을 세워 조공께 보답하고 떠날 것이오."라고 하였다.
 장요가 이를 조공에게 보고하자 조공은 관우가 진정 의기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1) 얼마 안있어 관우가 안량을 죽이자 조공은 그가 반드시 떠날 것임을 알고 상을 무겁게 베풀었다. 그러나 관우는 그 상을 모두 봉(封)해 놓고 떠나감을 알리는 글을 올려 놓은 후 선주(先主)가 있던 원소군으로 달아났다.
-> '달아났다'고 표현되는 이 장면, 관우를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단기천리單騎千里' 고사의 시작입니다. 연의에서는 천리길을 갔다고 만들기 위해 허창에서 낙양으로, 다시 관도로 돌아가는 말도 안되는 중원유람을 시켜놨습니다. 실제로는 300리 정도였다고 하지요. 관우전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러면 또 어떻습니까?"라는 말을 자주 쓰게 되는데.. 이것 또한 다시한번 말해야 겠군요. 그러면 또 어떻습니까? 적지에서 주인을 찾아가고자 빛나는 충성과 의리는 거리에 상관없이 빛나고 있는데.. 

  조공(曹公)의 좌우에 있던 사람들은 관우를 추격하려 하였지만,조공은 "누구나 각기 그 주인이 있는 것이니 추격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 아무것도 가진것 없고 비전도 없는 유비를 향한 관공의 충성 크리티컬 작렬! & 조승상, 역시 대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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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傅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장요가 이를 태조(太祖:조조)에게 고하려 하다가 태조가 관우를 죽일까 두려워하여 말하지 못했는데, 이는 군주를 섬기는 도리가 아니었으므로 곧 탄식하며 말하기를, "조공은 나의 군부(君父)요,관우는 형제와 같다." 그러면서 관우가 한 말을 고했다.
  태조는 "군주를 섬기는 근본을 잊지 않았으니 천하에 다시없을 의사(義士)로다. 그러면 언제쯤 떠날 것 같은가?"라고 묻자, 장요는 "관우는 공(公)의 은혜를 입었으니 공을 세워 이를 보답한 연후에 반드시 떠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신(臣) 배송지(裵松之)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조공이 관우가 머무르지 않을 것을 알고도 내심 관우의 뜻을 아름답다고 여겼다. 떠나가는 관우를 추격하여 잡지않고 그가 갈 수 있도록 내버려 뒀는데, 이는 왕의 으뜸가는 도량이라 아니할 수 없음이니, 어느 누가 능히 이를 따를 수 있겠는가? 이것은 조공(曹公)의 용서하는 미덕의 결실이다.』

 

  관우는 선주(先主)를 따라 유표(劉表)를 따르게 되었다. 유표가 죽자 조공(曹公)은 형주(荊州)를 정벌했는데, 선주는 번성(樊城)에서 남쪽으로 강을 건너려고 하며 별도로 관우를 보내 수백 척의 배를 이끌게 하여 강릉(江陵)에서 만나기로 했다.
-> 지혜로 보나 무용으로보나, 군 통솔력으로보나 역시 관공은 유비군의 형식상 2인자, 실질적 1인자.


  조공은 추격을 계속하여 당양(當陽)의 장판(長阪)까지 이르게 되자, 선주는 한진(漢津)을 끼고 달려 관우의 배와 서로 만나게 되었고 함께 하구(夏口)에 이르게 되었다.

  손권(孫權)이 병력을 보내 선주를 도와 조공을 막도록 하자, 조공은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여 돌아갔다.

  선주는 강남(江南)의 여러 군(郡:무릉·장사·영릉·계양 등)들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고, 공이 있는 자들에게 상을 내렸으며 관우를 양양태수(襄陽太守)·탕구장군( 寇將軍)으로 봉하여 강북에 주둔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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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형의 전*가 시작된다.

다들 염통에 각잡고 대기하시도록!

드라마 신삼국의 관우

 

  선주가 서쪽으로 익주(益州) 원정길에 올랐을 때, 관우에게 형주(荊州)를 맡아 지키도록 하였다. 마초(馬超)가 선주에게로 투항하 여 왔다는 소식을 듣자, 일찌기 그와 교류하며 지냈던 사람이 없었던 까닭에 관우는 제갈량(諸葛亮)에게 글을 써 보내 마초의 인물됨과 재주가 누구와 비교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제갈량은 관우의 오만함(-_-;)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곧 답장을 보내"마맹기(馬孟起)는 문무(文武)를 겸비했고 그 능력은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일세의 호걸로써, 경포( 布)·팽월(彭越)과 같은 무리일 것이니 마땅히 익덕(益德)과 나란히 앞섬을 다툴 수 있을 것이고, 미염공(美髥公)의 절륜(絶倫)함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오."라고 했다.

  관우는 수염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제갈량은 옛날부터 그를 '염(髥)'이라 했다. 관우는 서신(書信)을 살펴보더니 크게 기뻐하며 이를 빈객(賓客)들에게 보여 주었다.

-> 아무래도 관공의 끝모를 자부심의 시작은 마초와의 비교에서 시작되는 듯. 제갈량이 기름부어놓은 관공의 자부심이 결국 관우의 말년을 꼬이게 만들어 놓는데 한몫한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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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기(蜀記)」에 이르기를,

  처음에 유비가 허도(許都)에 있을 때 조공(曹公)과 함께 사냥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사냥 중에 무리가 흩어지자 관우는 유비에게 조공을 죽일 것을 권했지만 유비는 이에 따르지 않았다.

  하구(夏口)에 이르러 장강(長江)가를 떠도는 처지가 되자 관우는 화를 내며 말하기를,  "지난날 사냥을 할 때 만약 이 관우의 말을 들었다면 오늘과 같이 곤란한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유비는 "그때는 다만 국가를 위해 조조의 재주를 아깝게 생각했을 뿐, 만약 천도(天道)가 옳은것을 돕는 것이라면 이것이 복(福)에 어긋나는 것이었음을 알았겠는가?"라고 했다.

※ 신(臣) 배송지(裵松之)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유비는 후에 동승(董承) 등과 함께 모의하여 조공(曹公)을 죽일 것을 결의하였지만, 일이 사전에 탄로나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만약 유비가 국가를 위해 조공을 아깝게 생각했다면 그의 이러한 언행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는가! 관우가 이와 같이 권했을 때 이것을 옳게 여겨 듣지 않았던 것은 조공을 따르는 심복이나 친척의 무리가 많아, 미리 심사숙고하여 일을 하지 않고서는 이를 행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공이 비록 살해된다고 해도 자신의 몸이 반드시 징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는 계산을 했기 때문에 유비는 이를 하지 않은 것이었을 뿐, 어찌 조공을 아끼는 마음이 있었겠는가? 이미 지나간 일이었기에 단지 아름다운 말로 꾸며댄 것일 뿐이다.』
-> 맞습니다. 일신의 안전을 우선으로 삼았던 유비를 배송지는 정확히 꿰뚫어 본 것입니다. 더욱이 유비는 조조가 있어야만 反조조의 바람이 유비에게 불것임을 이미 계산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창천항로의 말대로 유비는 조조가 불러오는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것이지요.

  일찌기 관우는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그의 왼쪽 팔을 관통당한 일이 있었다. 뒷날 비록 낫기는 했지만 흐린 날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욱신거리고 아팠는데, 의원이 말하기를, "화살 촉에 독(毒)이 있어 그것이 뼈속으로 들어가서 그런 것이니, 마땅히 팔을 가르고 뼈를 깎아내면 이 고통은 자연히 없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관우는 순순히 팔을 뻗어 의원에게 자신의 팔을 가를 것을 명했다. 이때 마침 관우는 여러 장수들을 초청하여 음식을 먹으며 서로 마주 대하고 있었는데, 피가 흘러내려 받쳐놓은 대야에 가득넘쳤다.

그러나 관우는 구운 고기를 자르고 술을 마시며 담소(談笑)를 나눌 뿐 태연했다.
-> 중독되어 이미 팔에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만.. 어리석은 생각이겠지요. 욱신거리는 팔, 즉 신경이 살아있다는 말. 고통이 느껴지는 가운데 자기 팔을 가르는데 맨정신으로 가능할까요.. 거기에 일반적인 치료가 아니라 일부러 장수들을 불러 태연하게 식사를 하는건. 보통의 정신력과 자부심으로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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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양양성의 모습

 

  건안 24년, 선주(先主)는 한중왕(漢中王)이 되자 관우에게 전장군(前將軍)의 벼슬을 내리고 절월(節鉞)을 내렸다. 그 해에 관우는 군사들을 이끌고 번성(樊城)의 조인(曹仁)을 공격했다. 그러자 조공(曹公)은 우금(于禁)을 보내 조인을 돕도록 했다. 가을이 되어 큰 장마비가 내리자 한수(漢水)가 범람하여 우금이 이끄는 칠군(七軍)이 모두 물 속에 잠기게 되었다.
우금은 관우에게 항복하였는데, 관우는 또 장군 방덕(龐悳)의 목을 베었다. 양(梁)·협(陜)·육혼(陸渾)의 여러 도적들은 관우의 관인(官印)이나 봉호(封號)를 받아 그의 한 무리가 되었고, 관우의 위엄은 화하(華夏:중국을 일컫는 말)에 떨쳤다.
-> 관공의 무용이 천하에 진동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 우금을 사로잡고 방덕을 목베었으며 전국에 도적떼가 일어나 관우에 호응한다. 어떠한 계략이나 예측으로도 계산할 수 없었던, 오로지 관우라는 무장이 보여준 한실부흥의 가능성과 압도적인 위엄이 이뤄낸 성과. 하지만 3만 정도의 병력으로 번성을 공략하여 조조군을 불러들여 유비의 본대가 장안으로 진격하기 쉽게 만들고자 했던 이 작전은 조조의 본대, 장료와 하후돈의 원군까지 불러들이며 일순 성공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만.. 희대의 뒷치기가 작렬하게 되며 꼬이게 됩니다.


  조공(曹公)은 그의 예봉(銳鋒)을 피해 허도(許都)를 떠날 것을 신하들과 논의하기까지 했으나,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장제(蔣濟) 등은 '관우가 뜻하는 바를 이루게 되는 것은 손권(孫權)이 반드시 원하는 일이 아닐 것이므로, 사람을 보내 손권에게 관우의 배후를 치도록 권하고 강남을 나누어 손권이 갖는 것을 허락 해준다면 번성의 포위는 스스로 풀릴 것'이라고 주장하자 조공(曹公)은 이에 따랐다.
-> 매시앞의 골키퍼들처럼 손발이 어지러운 조조에게 크리티컬 계책을 올리는 연의의 패배자, 하지만 역사의 승리자 사마의. 그 조조가 도읍을 옮길 생각을 가지게 할 정도로 관공의 무위는 천하를 진동시킨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손권이 사람을 보내 그의 아들과 관우의 딸을 혼인시킬 것을 제의한 적이 있었는데, 관우는 손권의 사자에게 모욕적인 말로 꾸짖으며 혼인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손권은 대노(大怒)했다.

  또한 남군태수(南郡太守) 미방( 芳)이 강릉(江陵)에 있었고 장군 부사인(傅士仁)은 공안(公安)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평소 관우가 자기들을 경시했던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관우가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면서 미방과 부사인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일을 맡겼지만, 이들은 서로 최선을 다해 관우를 원조하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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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방, 사인 이 잡놈들을..

아무래도 84부작 삼국지의 관공이 싱크로 짱인듯.


  그러자 관우는 "돌아가면 마땅히 이들을 문책할 것이다."라는 말을 하였고, 미방과 부사인은

불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 손권이 몰래 미방과 부사인을 유혹하자 이들은 사람을

보내 손권을 따르겠다고 했다. 한편 조공(曹公)은 서황(徐晃)을 보내 조인(曹仁)을 구원했다.

관우는 이것을 당해낼 수 없게 되자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그러나 손권이 이미 강릉을 점령하고 관리들과 처자식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관우의

군대는 흩어져버렸다. 손권은 장수를 보내 관우를 공격하여 관우와 그의 아들 평(平)을

임저(臨沮)에서 참수했다.

 -> 손오의 배반(확실히 배반 이지만, 빌려준 땅을 입 싹닦고 안주지, 그래도 손오의 수장인데 대놓고 욕먹었지 손오의 심정도 인정하는바가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부심과 더불어 관우의 실책인 홀대, 특히나 자신보다 못하다 생각되는 사람을 존중할줄 몰랐던 관우의 대인관계가 발목을 붙잡게 되고 결국 무신은 생을 마감하게까지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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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典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관우가 번성을 포위했을 때 손권은 원군(援軍)을 보내 그를 돕도록 했지만, 고의로 신속한 진군(進軍)을 늦추며 주부(主簿)만 먼저 보내 그의 명(命)을 알리게 했다. 관우는 원군의 도착이 늦어지는 것에 대해 화를 냈고, 또한 자기 스스로 우금(于禁) 등을 사로잡은 자신감에  "오소리 자식같은 것이 감히 이럴 수가 있는가? 번성을 쳐서 빼앗게 되었는데, 내가 너 따위를 멸하지 못하겠는가!"라고 욕했다.

손권이 이 말을 전해듣자 관우가 자신을 가볍게 보고 있음을 알고, 편지를 써서 관우에게 사과하고 자신이 직접 가겠다고 하였다.

※ 신(臣) 배송지(裵松之)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형주(荊州:관우)와 오(吳:손권)은 비록 겉으로는 화목한 것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의심하여 서로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은밀히 군사를 일으켜 관우를 기습한 것이다.』

(2)「촉기(蜀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관우와 서황은 서로 아끼는 사이였으므로 먼거리에서도 서로 말을 주고 받았는데, 단지 평범한 이야기만을 주고 받을 뿐 군사(軍事)의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잠깐 대기하던 서황이 말에서 내리더니 명령을 내렸다. "관운장의 머리를 얻어오는 자는 상금으로 천근을 주겠다."

  관우는 놀라고 두려워하며 서황에게 "대형(大兄)! 이것이 무슨말씀이오?"하고 묻자, 서황은 "이는 국가의 일입니다."라고 답했다.
-> 일찍부터 법령이 정비되었던 위나라에선 당연한 사고방식임.


「촉기(蜀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손권이 장수를 보내 관우를 공격하고 관우와 그의 아들 평(平)을 사로잡았다.

-> 연의에서는 의아들로 나오는 관평이지만, 정사의 기록에는 '아들'이라 표현되어 있기에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아들'이라는 기록에 비추어 봤을 때 관공의 적자가 맞는 것으로 보입니다.
  손권은 관우를 살려주어 조공을 유비의 적이 되게 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좌우에서 그를 보좌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리의 새끼는 기를 수가 없습니다. 뒤에 반드시 해를 입히게 됩니다. 조공(曹公)도 관우를 즉시 제거하지 않을 것이므로 큰 우환거리가 될 것이어서, 도읍을 옮기는 일을 의논하는 일이 생기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찌 지금 그를 살려둘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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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낙양의 2대 관광지인 관림의 모습.

공자와 더불어 무덤에 '林'자를 붙이는 성현이 되어 지금도 충성과 의리 그리고 재물의(?) 화신으로 민중들 사이에서 살아 숨쉰다.

직접찍은 사진을 올렸으면 하지만 일이 번거로와져서... 


손권은 곧 참수해버렸다.
-> 손권이 독자들에게 미움을 받게된 결정적 장면. 만약 여기서 관우가 살아돌아갔더라면 삼국의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명의 장수를 처단하는 것이 그 후에 돌아올 뒷감당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관우와 그가 쌓아올린 무명武名은 상대방에게 실로 위협적인 것이었습니다.

※ 신(臣) 배송지(裵松之)가「오서(吳書)」의 기록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손권은 장수 반장(潘璋)을 보내 관우의 달아나는 길을 가로막아 끊어 버렸다. 관우는 곧 죽게 되었다. 임저(臨沮)는 강릉에서 2∼3백리 떨어져 있는데, 불시에 관우를 죽였으니 어찌 생사(生死)를 짐작할 수 있었겠는가?』

「오력(吳歷)」에는,

『손권이 관우의 머리를 조공(曹公)에게 보내자, 조공은 그의 주검을 제후의 예를 갖춰 장례를 치러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 목 : 촉서 관우전

관우에게는 장무후(張繆侯)의 시호가 내려졌다.(1) 그의 아들 흥(興)이 그의 뒤를 이었는데, 관흥(關興)은 자(字)를 안국(安國)이라 했고 어려서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다. 승상 제갈량은 그의 그릇됨이 매우 남다르다고 보았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시중(侍中)과 중감군(中監軍)을 지냈지만 몇해 뒤에 죽었다. 그의 아들 통(統)이 그의 뒤를 이었는데 관통은 공주를 아내로 맞았다. 관직은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에까지 이르렀으나 그가 죽은 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관흥의 서자 이(彛)가 뒤를 이어 작위에 봉함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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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기(蜀記)」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관우가 출전하여 번성을 포위했을 때 돼지가 그의 발을무는 꿈을 꾸었다. 관우는 이것을 그의 아들 평(平)에게 말하며,

"나도 이제 늙었나 보다. 돌아올 수 없을 것 같구나!"라고 했다.

※「강표전(江表傳)」에 이르기를,

『관우는 좌씨전(左氏傳)을 좋아하여 내용을 모두 외울 수 있었다.』고 한다.

(2)「촉기(蜀記)」에 이르기를,

『방덕(龐德)에게는 회(會)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종회(鍾會)·등애(鄧艾)를 따라 촉(蜀)을 정벌했다. 촉이 망하자 관씨(關氏)의 가문은 모두 멸하여 그 대(代)가 끊어졌다.』고 했다.
 

-> 오.. 마이 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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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의 이름앞에 神과 같은 류의 별칭을 붙이는 걸 참으로 싫어하지만

관공의 앞에는 '武神'이라는 칭호조차 작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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