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해방이다. 세영은 날아갈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지금이라도 큰 배낭만 짊어지면 이 지긋지긋한 삶의 사슬속에서 벗어날 것만 같았다. 5년간의 동거, 우여곡절 끝에 아기가 생겨 결혼식도 올리는둥 마는둥 힘겹게 지낸 세월만 해도 연애기간 까지 합치면 어언 12년이란 세월이 다 되어간다.
김동수... 이름 석자만 되뇌어도 세영의 머리끝은 쭈뼛쭈뼛한다.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살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같은 직장의 거래처 손님으로 만난 그를 무작정 짝사랑 했다. 딱히 잘생긴 얼굴도 아닌데, 아니 오히려 남들보다 떨어지는 외모였다. 세영보다 무려 14살이나 많은 노총각 동수는 이제 막 피어오르는 꽃봉오리같은 청순한 세영을 그냥 둘 리가 없었다. 집안의 반대에 무릅쓰고 시작한 결혼생활인지라 생각했던것 처럼 신혼의 단꿈이라는 것은 상상도 할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세영이 못견뎌 했던 것은 연애 때 전혀 알수 없었던 동수의 술버릇 이었다. 술만 먹었다 하면 트집을 잡아 세영을 구타했다. 세영의 꽃봉오리 같았던 얼굴은 나날이 시들어 갔고 몸은 상처 투성이었다. 아들 수민을 낳으면서 그 버릇은 더 심해졌다. 심지어는 술먹고 수민을 패기 까지 했다. 채 돌도 되지않은 수민은 울음마저 울지 않았다. 일시적인 쇼크 상태였다. 나아지려니 하고 헛되게 지내온 세월이 어느덧 12년 이었다.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 동수를 결국 어렵게 1년이라는 재판을 거쳐 힙겹게 벗어날 수 있었다. 마지막 재판정에서 울며불며 매달리는 동수를 그녀는 매몰차게 돌아섰다. 술과 노름으로 가진 재산을 모두 탕진해 버리고 빚마저 짊어진 그에게 받아낼수 있는 재산은 오로지 아들 수민 뿐 이었다.
법원에서 나선 세영은 아들 수민의 손을 잡으며 따가운 햇살 마저 정겹게 느껴졌다. 세영은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나왔다. 2년전 한 노파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어린 수민의 손을 잡고 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육교밑에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노파가 갑자기 세영을 불렀다. "새댁 이리 좀 와서 내말 좀 들어봐요" 세영은 거지 노파려니 생각하고 가진돈 1000원을 던져주고 바삐 지나치려 했다. "새댁 남편이 많이 힘들게 하지?" 세영은 멈칫 했지만 그냥 지나쳤다. 하지만 마지막 귓가를 때리는 노파의 말은 지울수가 없었다. "벗어나고 싶어도 못 벗어나, 걍 그렇게 살어! 새댁의 업보야 괜한 헛고생이야, 발버둥 쳐도 소용없어" 순간 세영의 몸에는 소름이 쫙 돋았다. 걍 미친 노파의 주저리라 생각하면 되겠지만 마지막 던진 그말은 계속해서 가슴을 아려왔다. 하지만 지금은 웃음밖에 않나왔다. '못벗어 난다고?지금 이렇게 해방이 되었는데... 역시 노파의 정신나간 소리였어' 가진 것 없고 갈 곳 마저 마땅치 않는 그녀였지만 동수로 부터 해방되었다는 것만 해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놀이방에 수민을 맞기고 일자리를 찾던 세영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동수였다. "수민엄마,나 아직도 당신 사랑해,나에게 다시한번 기회를 주면 안 돼? 수민엄마, 사랑해! 사랑한다구..." 세영은 황급히 전화를 끊어 버렸다. 소름이 쫙 돋아나고 있었다. 동수의 전화는 시도 때도 없이 걸려왔다. 그녀는 아예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로부터 일주일후 어렵게 얻은 회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 오니 대문앞에 동수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세영은 기절할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그의 얼굴을 술에 절어 벌겋게 퉁퉁부어 있었고 몸에선 심한 악취가 풍겼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돌아서려는 세영의 손을 잡고 무릎마저 꿇었다. "으흐흑, 수민엄마! 한번만 용서해 줘, 진짜 잘할게." "가지마, 이대로 가 버리면 나 죽을지도 몰라." 그는 진짜 무슨 약인지 약병 하나를 꺼내들고 있었다. 착한 세영은 그대로 떠날수가 없었다. 새사람이 되면 재결합 해주마 하고 겨우 설득을 하고서야 돌려 보낼수 있었다. 세영은 서둘러 이사를 했다. 아무리 이사를 해도 동수는 끊임없이 찾아왔다. 찾아올때 마다 술에 절고 쇠약해 져 있는 그를 볼수 있었다. 세영은 신경 노이로제 마저 걸렸다.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그때 뿐 이었다. 그렇다고 행패를 부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방으로 들어가 버리면 뜬눈으로 대문 앞에서 지새웠다. 세영의 몸과 마음이 약해지고 있었다. 결국 세영은 수민을 데리고 전입신고도 않은 채 아주 산골짜기 마을로 떠나 버렸다. 전화번호 마저도 바꿔 버렸다.
그러고 한달이 지났을까, 그녀에게 한통의 전화가 왔다. 세영의 언니 세미였다. "얘 세영아, 아무래도 큰일난 것 같다." "언니 무슨 일인데?" "김서방이 간암 말기래, 곧 죽을 것 같어." 순간 세영의 마음이 흔들렸다. 간암이라니? 아무리 미운 동수였지만 정작 죽기까진 바라진 않았다. "침대에 누워서 끊임없이 니이름만 불러." "..." "얘 세영아,한번 찾아가 봐야하지 않겠니?" "..." "세영아, 내말 듣고 있어? 이왕 죽을 사람이야, 너 정말 죄받어. xx병원 305호야, 생각있으면 찾아가 봐." 전화를 끊은 세영은 몸시 고심했다. 망설이다가 결국 세영은 수민을 맡기고 동수의 병실로 찾아갔다. 동수는 정말 침대꼬리에 이름표만 없으면 알아볼수 없을 정도로 많이 변해 있었다. 시커멓게 타들어간 얼굴, 뼈만 앙상한 손과발... 괜하게 눈물이 났다. '나쁜인간, 헤어졌으면 잘 살아줄 일이지, 끝까지 속을 썩여.' 세영의 손이 동수의 이마에 살며시 닿자 거짓말 처럼 동수의 눈이 뜨졌다. 세영과 눈이 마주친 동수는 희미하게 미소를 보였다."세영아... 와줘서 고마워." "빨리 회복하세요, 전 가 봐야 해요." "세영아,가지마! 나 얼마 않남았어, 그건 너도 잘 알잖아." "제발 부탁이야, 죽을 때까지만 내 부인으로 남아줘." 푹 꺼져가는 동수의 눈에선 마른 눈물이 흘렀다. 앙상한 손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길어야 보름입니다, 임종 준비를 하십시오.' 닥터박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세영은 다시 그와 재결합을 하고 그의 나날이 약해져 가는 몸뚱이를 정성껏 간호했다.
그녀의 간호 탓인가? 보름 하고도 열흘을 더 버티던 그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희미하게 숨은 쉬고 있었다. 그러고 일주일이 지나도 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갑갑했다. 차라리 살아서 말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그의 생명의 꼬리는 악착같이 이어져 가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 어떻게 된 일이지요, 그이가 살았으면 왜 이런가요." 동수를 진료하던 닥터박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정말이지,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그이가, 살아있는 거지요? 손발이 이렇게 따스한데..." "저도 의사생활 30년에 이런 해괴한 경우는 처음입니다, 말기암에서 식물인간이라... 사실 간 기능은 기적적으로 회복 상태를 보입니다만..." "아무쪼록 빠른 쾌유를 바라겠습니다, 다른 기능은 거의 회복이 되었습니다." 순간 세영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후로 10년이 지났다. 하지만 남들보다 폭삭 늙어버린 세영은 아직도 여전히 동수를 간호하고 있다. ----------출처 : 붉은 벽돌 무당집 작가 : 해골귀신 님 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