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론에 대해서..1

버닝중 작성일 12.04.28 17: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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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요즘 창조론과 진화론이 굉장히 이슈가 돼서 저도 늦었지만 살짝 끼어들어볼까 합니다.

 

진화론이야 제가 아는 건 생물2에서 배웠던 내용이 전부이고... 또 그래서 그걸로 깝치다 전공자까지

 

나오셨으니..

 

진화론 자세한 설명이 이미 되어있고 하니 저는 조금 다르게 창조론에 대해서 접근해 보겠습니다.

 

 

 

 

저는 이이야기를 두 가지로 풀어나가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과연 창조론, 창세기란 무엇인가? 가 이고,

 

두 번째는 이 창세기를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인가? 입니다.

 

일단 첫 번째부터 이야기 해 보도록 하죠.

 

기독교에서 창조론.. 이라고 한다면 성경의 창세기를 근거로 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주장하는 창조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기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은 창세기를 굉장히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창세기의 저작연대는 약 BC 500~550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때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이스라엘이 바빌론과의 전쟁에서 대패하고 바빌론은 전쟁에는 승리하였지만

 

이스라엘의 반란을 두려워해서 이스라엘인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옵니다. 이것을 바빌론 유배라고 하죠.

 

당시의 그리스나 중동지방의 사람들은 국가와 국가의 전쟁을 나라와 나라의 싸움이 아닌 각 나라 수호신들의

 

쌈박질의 대리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전쟁에서 졌다는 것은 (당신의 관념상으론)자신들의 수호신인 야훼가 바빌론의 신에게

 

패배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신인 야훼란 대체 누구인가 라고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나온 책이(원래 책은 아니었습니다. 창세기는 기록되기 전까진 구전으로 전승되어 왔죠.) 창세기입니다.

 

 

 

 

자 이제 살짝 다른 이야기로 우주의 나이가 137억년 이라는 사실을 요 근래에 와서 밝혀냈다고 합니다.

 

그럼 과연 기원전 500년 전의 사람들이 우주의 탄생에 대해서 알았을 까요? 사실 굉장히 회의적이죠..

 

그럼 과연 창세기는 구라인가? 네 구라입니다. 사실이냐 아니냐를 놓고 따진다면 말이죠.

 

이 때 당시 이스라엘 인들에게 구약 성경이란 어떤 의미였는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인들은 성경을 자신들의 역사서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역사에 구라를 기재하느냐?

 

라는 반문이 있을 수 있겠지만, 당시 유태인들과 현대의 저희들의 역사에 대한 개념이 달랐습니다.

 

저희에게 역사란 사관에 영향을 받는다 하더라도 가능한 한 사실대로 과거를 기재하는 것을 이야기 하지만

 

당시 유태인들에겐 자신들의 민족의 정통성을 유지시켜 줄 수 있는 일종의 규범집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쉽게 역사책이라고 쓰고 도덕책이라고 읽으시면 된다는 이야기죠. 뭐 일종의 탈무드와 비슷한 셈이죠.

 

 

그래서 구약성경에는 역사적인 왜곡도 많이 들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여호수아기에 보면 이스라엘 인들이 근처 이교를 전부 죽여 버리지만.. 조금 뒤로 넘어가면

 

다 살아있습니다. 이 민족들이 d, f 스킬창에 부활을 껴넣거나 전원이 수호천사 (lol의 부활아이템)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냥 여기서는 아 이교를 믿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구나.. 하고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그러면 창세기에서 받아들일 것은 무엇인가? 라고 했을 때

 

아 우리의 근원은 하느님께 있구나.’ 요 내용 입니다. 그리고 7일간의 천지창조라던가.. 그 이외의 여러 가지

 

아담과 이브,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 이야기.. 이런 부분은 당시 유태인들이 후손들에게 하고 싶은 종교적인

 

가르침을 담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대 부분이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주제에 약간 벗어나기 때문에 넘어가기로 하죠.

 

여긴 미스터리 게시판이지 종교 게시판이 아니니까요.

 

그러니 창조론을 가지고 진화론을 반박할 만한 이야기로 아니며 진화론을 가지고 창조론을 반박할 거리도 못됩니다.

 

서로 이야기 하려는 내용도 목적도 다르기 때문이죠.

 

전 창조론과 진화론으로 싸우는 것은 허수 10i10중에 어느 수가 더 큰 수인지를 가지고 싸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요. 애초에 비교대상 자체가 달라요. 속해 있는 차원이 다릅니다.

 

여기까지가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이야기가 길어질 듯하니..

 

두 번째 이야기인 창세기를 어떤 과점에서 보아야 하는가.. 즉 창세기에서 하려는 궁극적인 중심내용은

 

우리의 근원은 하느님께 있다. 인데 대체 그 근원이란 무엇이고 무엇으로 부터의 창조인가? 라는 이야기를 다음 글에서 써볼게요.

 

 

 

 

 

ps.

그리고 여담으로 글을 좀 써보려고 합니다...

 

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하느님을 믿으면,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아랫글을 보니 천국에 가고 말고는 하느님이 결정하신다는 이야기도 있네요...

 

제가 아는 교리는 조금 달라서 가톨릭의 교리는 이런 거다.. 라는 상식선에서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일단. 천국의 개념에서부터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천국이란 성서 원어인 히브리어로 말쿠트 샤마임 이라고 합니다. 말쿠트는 왕권, 통치, 다스림을 뜻하는 단어이고

 

샤마임은 하느님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천국이란 말은 정확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 혹은 하느님의 다스림, 왕권 등이

 

오히려 더 정확한 해석이죠. 그런데 천국이란 개념은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 하나인 마태오 복음에서 처음

 

전개되는데 마태오는 유태인으로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신인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는 것을 굉장히 꺼려합니다.

 

불경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하느님나라 대신 하늘나라란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게 우리나라에 오면서 천국이란 개념으로 굳어졌습니다.

 

그러면 대체 하느님 나라와 천국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굉장히 아주 많이 다릅니다.

 

대부분들은 천국에 대해 내세적인 개념과 장소적인 개념으로 파악합니다.

 

묘사하자면, 천국은 착한 사람, 기독교식 표현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죽어서 가는 ’.

 

젖과 꿀이 흐르고 행복이 가득한 상으로서의 장소. 이런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보통 이곳의 중심에 큰 의자에 앉아 있는 백인 할아버지로 묘사됩니다.

 

아마 다들 기독교의 천국에 대해 비슷한 인상을 가지고 계실 겁니다.

 

 

 

그러면 하느님나라는 무엇인가. 단어 그대로 직역하면 하느님이 다스리는 왕국입니다. 당시 고대 근동에서

 

가장 훌륭한 군주의 판단근거는 가장 버림받은 백성들에게 얼마나 따뜻한 정치를 폈는가.’ 였습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란 소외받은 자들을 소외시키지 않는 사랑과 자비의 나라이며, 또한 관념적인, 나라로서의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내가 살아 내어야할 행위적인 개념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인가를

 

가르친 것이 예수님이 한 일이죠. 전 생애에 걸쳐 비유를 통해 설파한 개념이며, 기독교의 핵심 사상입니다.

 

결국 가톨릭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개념은 하느님이 날 인형뽑기처럼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다는 확실을 가지고 그 사랑을 가르침대로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웃들과 자발적으로 나누면서,

하느님의 통치방식을 삶으로 살아내게 되면 바로 하느님나라 안에 들어와 있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서 이웃이란 표현을 사용했는데 가톨릭에서 이웃이란 이런 비유를 사용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이란 비유인데,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죽어가고 있는데 당시 유태인의 신과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사회 상류 계급층과 사제들은 죽어가는 사람이 죽었을 때 시체를 만지게 되면 불경을 저지르는 것이니 곤경에 처한 사람을 피해 갑니다. 하지만 이민족의 침략으로 피가 섞이고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사마리아인-우리로 말하자면 조선족-이 지나가다 이 곤경에 처한 이를 도와주고 여관에다 맡기고 주인에게 돈까지 주면서 내가 바빠서 어딜 다녀와야 하는데 다시 돌아올 동안 보살펴 주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때 이 곤경에 처한 자의 이웃이 누구냐? 라고 물어보고 사마리아인이라고 이야기하자, 예수님이 너희도 가서 그렇게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결국 국가와 민족, 종교 모든 구분을 버리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지 다가가서 이웃이 되어주라는 이야기죠. 결국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가 이웃이고 형제입니다. 가톨릭적 이웃의 개념입니다.)

 

이 깨달음을 가지고 내 행동과 사고패턴을 변화시켰을 때 삶과 죽음을 떠나

 

삶과 죽음에 구애받지 않는 완전한 구원을 받는단 개념입니다.

 

때문에 하느님 나라는 행위적인 개념이면서 동시에 삶과 죽음을 떠난 초월적 개념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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