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두 번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대체 창조론에서 말하는 근원. 이것이 왜 필요하고 알아야 하면 대체 어떤 개념으로서의 근원인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많이 난해할 지도 모르는 개념입니다. 존재론적 이야기가 되니까요.
이제 창조론은 철학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결국 과학과 대립할 필요가 점점 더 없어지죠.
이해의 편의를 위해 불교과 비교해가면서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불교와 가톨릭이 상당히 흡사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한 종교를 통해 둘 중 나머지 종교를 설명을 한다면 훨씬 쉬운 이해가 가능하리라 봅니다.
일단 불교의 시작은 삶의 허무에서 시작됩니다. 싯타르타 왕자가 궁에서 나와 생로병사를 시청합니다.
그리고 싯다르타왕자는 삶의 한계성과 허무성에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병들고 태어나서 죽게 되며
강대한 나라 역시 사라지고 큰 바위도 먼지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이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수행을 하고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어 해탈을 하게 됩니다. 부처님이 되신 거죠.
부처님은 이 허무를 연기법을 통해 설명하십니다. 연기법이란 사물의 궁극적인 실체란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이 서로와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다. 결국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해서 이것이 있다.
란 개념입니다. 책이란 개념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책이란 그 구성성분은 온통 책이 아닌 것으로 구성됩니다.
나무부터 벌목꾼 출판사 잉크 등등 수많은 요소가 결합되어 책이 되지만, 책은 읽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만 책이란
개념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책을 사람을 패는데 휘두르거나 뒷간에서 똥 닦을 때 사용한다면 책보단 무기나, 휴지란
개념으로 불리는 게 적절하겠죠. 아버지란 개념 역시 아들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개념이고 아들 역시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심지어 부처와 보살 역시 중생이 없다면 성립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이것을 무자성(無自性)이라고 합니다. 자성을 문자 그대로 자체의 존재라고 한다면
무자성은 ‘자체의 존재가 없다.’란 말이죠. 이 자체 존재의 성질이 비어있는 것을 공(空)이라고 칭합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구절의 공이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는 성질(색)을 가지고 있고 이 색은 공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물이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에 그 자체의 존재를 갖고 있지 않다는 말은,
다르게 표현했을 때 사물 사이의 차이와 거리가 궁극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죠.
결국은 공으로 귀결되니까요. 그렇다고 공이 무無는 아닙니다. 무와 유의 중의적인 ‘비어있는’ 개념이죠.
살아 있는 생명은 결국은 무이나 이것을 없다고 할 수는 없으니 유이기도 합니다. 난해한 개념이죠.
이렇게 불교는 존재를 서로서로 연관되어있는 수평적관계로서 이해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세기에서 말하는 우리의 근원은 우주를 만든 시초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론적 기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거죠. 결국.
가톨릭에서도 이 불교의 허무를 수긍합니다. 세상이 결국은 공하고 무라는 것도 인정을 하죠.
그런데 여기서 세상이 무임에도 불구하고 유가 있도록 하는 것. 그 근원을 기독교에서는 하느님께
찾습니다. 창세기를 볼 때 ‘우리의 근원은 하느님께 있다’란 가르침은 존재론적인 부분에서 받아들이시면
될 것 같네요. 진화론하곤 거리가 굉장히 멀죠.
ps2.
진짜 창조론이 이런 거라면,
그럼 대체 왜 기독교인 중엔 진화론을 창조론으로 논박하려는 사람이 생길까.. 궁금하시죠?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 기독교는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개신교, 프로테스탄트, 는 사실 미국적인
기독교에 한국적인 기복신앙적 색체를 입힌 것이 지금의 한국 기독교의 주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미국 개신교 중에서도 복음주의 혹은 근본주의라고 부르는 주의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됩니다.
이게 뭐냐면 복음. 즉, 성경을 인위적인 일체의 해석 없이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주의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글자 그대로 세상은 일주일 만에 탄생되었고 공룡들은 노아의 홍수 때 멸종된 동물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더욱이 문제는 이 근본주의는 일체의 해석이 없기 때문에 목사들이 자신이 필요한 구절만 떼다
‘봐라! 성경에 이렇게 적혀있지 않느냐?’라는 식으로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성경을 팔아 할 수 있는 거죠.
특히 대형 교회들 중에 이런 교회들이 많기도 합니다.
또 사이비 교회 역시 이런 노선을 많이 탑니다. 쉽게 예를 들어 보자면 이런 식입니다.
제가 기독교의 핵심사상은 하느님나라 사상이라는 것을 앞 전 글에서 미리 언급을 했었습니다.
몇몇 사이비 교회들은 종말을 언급하는 요한 묵시록에만 집중에서 설교를 합니다.
묵시록 중에는 사람들 중 144,000명이 구원 받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유대의 12지파와
예수님의 12사도를 곱해서 나온 수인 144와 당시 사람들의 무한함을 상징하는 1000을 곱해서 144000명이
구원된다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근본주의(복음주의)에서는 144000명만이 구원을 받는 다고 합니다.
이런 복음주의 안에서의 종교라면 저부터 당장에 때려 쳤습니다. 현재 인구도 70억에다 그동안 모든 인류
이 있는데 내가 144000명에 들어갈 가능성은 0에 수렴하니까요. 그래서 이런 사이비교회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내가 하느님께 계시를 받았고 이 교회안의 144000명은 반드시 구원받는다. 뭐 대부분 이런 식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부분만 떼서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결론을 돈을 내고 전도해라입니다.
대동소이하지만 많은 교회가 이런 식이죠. 이게 지나치게 노골적인가 아닌가로 사이비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수준입니다.
결론은 원래 개신교가 그런 게 아니라 특히 미국와
우리나라의 개신교의 특징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두서없이 써내려가다 보니 다시 봐도 엉성하네요.. 글재주가 없어서..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