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스토커 2

닉네임변경함 작성일 13.08.20 08: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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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스토커의 눈빛을 애써 외면했다.

그의 등 뒤에서 들어오는 거실의 불빛이 환했다.
환한 거실에는 자신이 어질어 놓은 유리조각이야 쓰레기 더미들이 쌓여 있어야 했었지만
좀 전부터 치우는 소리가 들렸기에 애써 모르는 척 무시를 했다.

이상한 스토커.

다가오세요. 이 이상은 다가오지 마세요.
내가 전하는 뜻이 무엇이 되었든 그 말에 순종적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편의점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갔을 때였다.

하고 싶은 일도 할 일도 없었다. 배가 고팠지만 밥을 먹고 싶지 않았고,
고단했지만 눕고 싶지 않았다. 울고 싶지만 눈물이 말랐고, 소리치고 싶지만 목이 매였다.

불도 켜지 않은 방에 앉아 뜬눈으로 출근 시간까지를 보낸 일도 많았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죽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다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무거운 마음이
자신의 갈 길을 막고 있다는 막연하면서도 치졸한 마음이 들었다.

이틀이나 씻지를 않은 몸에서 쉰내가 났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옷가지들을 대충 세탁기에 쑤셔 넣었다.
차가운 샤워기의 물이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었다.
기름기가 덕지해서 뭉텅이가 지는 머리카락에 흠뻑 물을 적셨다.

샤워를 마쳤을 때 욕실에 수건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젖은 몸은 한 채로 방에 불을 켜고 서랍장에서 수건을 하나 꺼내 들어 몸의 물기들을 떨궈냈다.

머리의 물기를 수건에 짜내는데 방의 풍경에 이질감이 들었다.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방을 골똘히 둘러보자, 책장 위에 놓인 작은 선인장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눈에 초점이 풀리고 다리의 힘이 빠져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다시 방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으나 다른 곳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여러 명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내게 오만 원 두 장을 내밀며 "이런 곳에서 일하지 말고, 나랑 놀자." 라고 했던 아저씨.
전화번호를 물어보고선 내가 고개를 흔들자 "신발년." 하고 욕을 하던 이름 모를 학생.
이따금 실수인 척 내 엉덩이를 만져오는 편의점의 사장.
얼마 전 술 마시고 편의점 물건을 집어던지던 대머리의 중년.
물건을 건네던 손을 변태처럼 더듬었던 아저씨.

그리고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담배 한 갑만 사가는 아저씨.

말 없는 선인장 화분을 들어 가만히 바라보았다.
솜털 같은 가시들이 일어선 모습이 귀엽고 앙증맞은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방에 들어왔을까, 누가 들어왔던 것일까.
앞으로도 또 찾아올 생각일까.

내가 집에 없을 때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은 당연히 내가 집에 있을 때도 들어올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한밤중 몰래 집에 찾아들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오싹한 기분이 들며 허리가 꼿꼿이 펴지는 느낌을 받았다.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할까, 망설였지만 집안에는 화분이 하나 더 생겼을 뿐, 다만 그뿐이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점점 추락하던 마음의 한켠이 경직되는 기분을 느꼈다.

아이러니하게도 범죄자의 침입에 그동안 잊고 있던 자극이란 것을 경험했다.
누군가 자신의 방에 머물렀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설렜다.
초라하고 꾸미지 않은 방안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미쳤다는 생각을 하며 방안에 메시지를 남겼다.

'신고하지 않을게요. 또 오세요.'

포스트잇 메모지를 현관에 붙이며 가슴이 방망이질을 쳤다.
일부러 방의 문에 열쇠를 채우지 않았다.
혹시나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이 오히려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토커는 주말이 아니고서는 집에 찾아드는 일은 없었다.
내가 적어 놓은 메시지들을 읽었다는 표시처럼 그가 방문한 날이면 메모지는 사라져있었다.

나는 방을 화사하게 꾸며갔다. 커튼의 색을 바꾸고 이불을 세탁했다.
허전한 방구석을 이리저리 보며 궁리를 했다.
시간이 지나며 이름 모를 방문객을 기다리는 방에는 활기가 생겨났다.

어렴풋 그려지던 스토커의 얼굴을 상상해 보았다.
그저 조용히 나의 방에 다녀가는 이상한 사람.

가끔씩 멀찌감치 서서는 편의점을 들여다보는 아저씨의 얼굴이 머리를 맴돌았다.
한참을 서 있다가는 조용히 담배 한 갑만을 사가는 아저씨.

그가 누구인지 확인하지 않고는 못 견딜 만큼 애절한 마음이 생겨나는 자신이
이상스러우면서도 마음이 들떴다.
비로소 5년만에 자신이 다시 태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의점 사장에게 삼십 분만 일찍 교대를 부탁했다.
사장은 별일이라는 듯 꼬치꼬치 캐묻다가 순순히 자신이 삼십 분을 채워주겠다고 했다.

스토커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아니, 이제는 내 스스로가 그 사람을 스토커라고 여기는 것조차 웃기는 일이었다.
나는 그를 위해 방의 문을 열어주고, 음식을 준비했으며, 다시 찾아오라는 메모를 남겼다.

그 사람은 내 인생의 몇 안 되는 손님이었다.


편의점을 마치고 집까지 온 힘을 다해서 달렸다.
단지 삼십 분만 일찍 끝냈다고 그를 확인 할 수 있는 확실한 보장이 없었으며,
나는 그 남자가 집에서 나오는 것을 직접 마주하기보다는 한켠에 숨어 몰래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그를 위해서 더 좋은 방법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집으로 향해 계단을 오르던 순간 잠깐 익숙한 얼굴이 스쳐지나 갔다.
나는 방문을 향해 달리던 것을 멈추고 계단을 다시 내려가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해야 했다.

그 남자를 불러 세웠을 때,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아저씨, 여기사세요?"

"아니요."

"네, 저도 아저씨 본적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요?"

"여기 왜 오셨어요?"

그 남자는 당연히도 자신이 스토커라는 것을 부정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아는 얼굴. 편의점에 매일 같이 들려서 담배를 사가는 사람.
편의점 밖에서 기웃기웃 나를 엿보던 사람.

그를 돌려보내고 방으로 들어갔을 때, 모든 메모지가 사라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 사람이 확실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가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너무 드세게 그를 몰아 치진 않았나 자신을 탓하고 있는 나를 눈치챘을 때는
내가 그에게 얼마나 빠져들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다시 그가 편의점에 찾아들었을 때는 표현 할 수 없는 기쁜 마음이 일었다.
여전히 나의 방에 들려주는 것이 안심되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일이 줄어들고, 방을 꾸미거나 그 사람이 다시 찾아올 것을 기다리며
메모를 남겼다. 내가 남긴 메모의 의도를 알고 그대로 움직여주는 그 사람.

처음 그의 뒤를 쫓았을 때, 혹여 남자가 뒤를 돌아볼까 노심초사였지만,
그는 길을 걸을 때 곧잘 땅만 쳐다보며 걷고는 했다.

열쇠를 손에 넣는 것은 의외로 순조로웠다.


"아가씨 못 보던 분인데?"

그의 방 문 앞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나에게 어떤 아주머니께서 말씀을 걸어오셨다.
아주머니는 의심의 눈초리인지 호기심의 눈초리인지 애매한 태도로 나를 경계하며 다가왔다.

"아, 저희 남자친구네 집인데요. 지금 열쇠가 없어서..."

"여기 총각 여자친구야? 어마! 이쁘네~."

"아, 하하..."

"열쇠가 왜 없어. 남자친구 부르면 안 돼?"

"지금 일가서 좀 그러네요. 제 서류가방이 안에 있는데."

"아침에 두고나왔구만?"

아주머니는 무엇이 그리도 신이 나는지 싱글벙글하며
나의 거짓말에 일단일조 장단을 맞춰왔다.


"관리 아줌마 불러줄까? 열쇠 금방 가지고 올 텐데."

"정말요? 그러면 감사하죠."

관리자를 기다리는 동안 아주머니에게 계속해서 거짓말을 했다.
결혼을 하기로 했다. 사귄 지 2년이 넘었다. 일만 해서 서운하다.
내가 가끔 찾아오지 않으면 방이 개판이다. 술을 너무 좋아해서 탈이다.

아주머니는 내가 꺼내는 거짓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재미있는 듯
우리의 거짓 연애담에 푹 빠져들었다.
나도 내가 어째서 그렇게까지 술술 거짓말을 뱉을 수 있는지 의아스러웠다.
거짓말을 하면서 이 거짓말의 현실성이 느껴지는 것이 즐거웠다.

"여기 열쇠."

관리자 아주머니께서 시큰둥한 얼굴을 하며 열쇠를 건넸다.

"똥 씹다 왔어? 얼굴이 왜 그래?"

아주머니가 관리자분을 나무라자 관리자 아주머니는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여기 총각 혼자 사는데?"

"왜 혼자 살면 여자친구도 못사귀어?"

"아니, 아는 사람 맞는 건지."

"아! 됐어 무슨 내가 여기 살면서 이 처녀 얼굴을 한두 번 봤는지 알어? 괜찮아."

아주머니가 대뜸 얼토당토 안는 거짓말을 했다.
만난지 삼십 분 남짓 아주머니는 나에게 이상하리만치 깊은 신뢰를 갖은 듯 했다.

"아, 나 지금 부동산에 손님 와계시니까. 그쪽으로 좀 가져다줄 수 있어요? 저기 바로 앞인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관리자 아주머니는 급하게 발을 돌렸다.
나와 장단을 맞춰주던 아주머니는 내 등을 두드리더니


"남자는 혼전에 확실히 잡아 놔야되! 알았지? " 하며 계단을 올라가셨다.

내가 웃으며 고개 숙여 인사를 하자 함박웃음을 머금으시며 계단에 오르는 아주머니.
손 위에 열쇠를 바라보며 내가 근 한 시간여 동안 거짓말을 하며 이루어낸 것들이 믿겨지질 않았다.

열쇠를 따고 방에 들어섰을 때.

그의 방은 뭐랄까. 향이 없었다. 남자들의 냄새.
그리고 또 특별히 뭐라 콕 찍어 설명이 힘들었지만,
이곳은 남자의 방이라는 뉘앙스가 없었다.

꼭 남자들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 방에는 그 흔한 여자 연예인이나, 게임 포스터조차 한장 보이지 않았다.

커튼이 걸리지 않은 창문에는 어설픈 페인트칠이 볼품이 없었고,
침대는 순 시커먼 진 남색의 민무늬 커버로 재미없는 물건들뿐이었다.


냉장고 안에는 요리할 수 있는 식재료 따윈 들어있지 않았다.
물, 맥주 몇 캔, 언제부터 얼어붙어 있는지 가늠이 안 되는 고기 한 덩어리.

15인치 즘으로 보이는 작은 TV와 그 옆에 오히려 TV보다 커 보이는 모니터가 하나
컴퓨터와 함께 책상도 아닌 조막만 한 작은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옷장 속은 남자의 옷장이란 느낌을 풍기며 별 옷이 들어있지 않았다.
확실히 내가 그를 보아왔던 옷들이 대부분으로 그는 옷을 몇 벌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방을 둘러보다 졸업앨범을 찾아 앨범을 뒤적이며 그를 찾았다.
졸업 사진의 고등학생 시절의 얼굴이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아 금방 그를 찾아낼 수 있었다.

2006년 졸업생. 이름 김성민.

어릴 적부터 어두운 상이었 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지금 모습을 보면 예상이 어려워 소스라칠 만한 일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금의 모습보다는 밝아 보이는 느낌이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컴퓨터를 켜자. 바로 윈도우 화면으로 전환되었다.


하드디스크 내용물을 살살 뒤져보자, 순 게임과 영화 그리고 몇몇 야동이 나왔다.
남자란 별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약간 실망감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웃음이 나왔다.
메모지에 휘둘려주는 상냥한 스토커가 그래도 남자는 남자였다.

한참 방을 뒤져보고는 텅텅 비어있는 방의 살풍경이 마치 남자의 삶을 대변하듯 느껴졌다.
나를 스토킹하는 남자에게 이런 생각은 모순되었지만, 나는 김성민이란 남자를 동정하게 되었다.

이 사람에게 이 이상 빠져들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발이 방을 떠나지질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지영씨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사람이 이렇게 오랜 시간을 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녀는 "나 원래 잘 안 울어요." 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끝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자 그녀는 무엇을 잘못한 것이 있느냐며 반문했다.

그녀의 말에 대꾸할 수가 없었다.
우리의 사이에는 차가운 열쇠 쪼가리와 사람 냄새 어수룩하게 느껴지는 작은 방구석,
몇 장의 포스트잇 메모지가 전부였다.

"우리는 무슨 사이인 거에요?" 하고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의 무거운 침묵은 어떤 명확한 대답보다도 가슴에 와 닿았다.
우리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

"거실에 아직 유리조각들 있으니까 맨발로 나오지 마세요."

쓰레기통의 비닐봉지가 유리조각의 무게를 못 이긴다며 주욱 하고 늘어졌다.
하는 수 없이 쓰레기통을 통째로 들고 집 앞 분리수거장에 나가야 했다.

유리조각들을 버리고 방에 다시 올라오니 지영씨가 거실에서 청소기를 돌리고 있었다.
청소기의 시끄러운 소음이 이 어색한 분위기를 중화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청소기 주둥아리로 자잘한 유리파편들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빨려들었다.
지영씨가 꼼꼼하게 이곳저곳에 흡입구를 들이밀고 있는 모습이 내 시선을 피해 이리저리 절묘하게
도망치는 것처럼 보였다.

웃기지만, 청소기를 끄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청소기의 소리가 멈추고 들릴 "싱~"하는 침묵이 두려웠다.

이렇게 가까이서 그녀를 여유롭게 바라본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랫동안 뒤에서, 옆에서 몰래몰래 지켜보다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접겠지' 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훔쳐보던 그 여인은 지금 내 거실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녀가 내 방에서 나를 기다렸다는 것이 무엇보다 더욱 놀라운 일이지만,
아무 사이도 아닌 우리는 한 지붕 밑에서 이렇게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 데도
그것을 참아내는 것에 무색하지 않다는 것에도 작은 놀라움이 일었다.

애써 시선을 돌리는 그녀의 뒷모습.
오랜만에 그녀의 푸석한 머릿결을 보니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청소기를 아무리 돌려도 더이상 달그락거리며 유리조각이 딸려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그녀도 청소기를 멈췄을 때가 두려웠을까, 없는 조각을 찾는 척 한참을 더 밍기적 거렸다.

청소기를 끄지 않을 구실은 찾는 듯한 지영씨가 애처롭게 보였다.


"이제 그만 돌려도 되지 않을까요?"

내가 묻자, 지영씨는 말없이 청소기의 전원을 내렸다.
청소기의 소음이 사라지자 예상한 것보다도 더 무거운 침묵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식사, 는..."

지영씨가 말끝을 흐렸다.


"아직 이요."

지영씨가 말없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어차피 아무것도 없을 냉장고를 들여다보려는 그녀의 행동에 급작스레 웃음이 터졌다.

"거기 있는 거 지영씨가 다 집어던졌잖아요?"

"제 이름, 아시네요?"

당연했다. 하지만 느닷없는 질문에 가슴 한켠이 뜨끔했다.
스토커가 변명거리를 찾을 이유도 여유도 없음에도 나는 그렇게 당황을 느꼈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그녀 한쪽 손에 쥐어있는 냉장고 문에서 은은한 한기가 수증기가 되어 공중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지영씨 졸업앨범 봤어요."

"저도 성민씨 졸업앨범 봤어요."

그녀는 냉장고의 문을 슬며시 닫으며 내 정면을 향해 돌아섰다.
굳은 표정의 그녀는 나의 눈을 쳐다보는 것도 아니고 얼굴을 쳐다보는 것도 아닌
목 언저리의 애매한 곳에 시선을 둔체 입을 열었다.

"제 이름 말고 또 뭐 알고 있으세요?"

내가 그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이름, 나이, 집, 얼마 전까지 일하던
편의점 정도 밖에는 없었다.
대답할 것도 얼마 없으면서도 대답을 하고 나면 벌을 받아야 할 것처럼 겁이 나고 두려웠다.

"또, 뭐 알고 있으시냐니까요?"

"이름, 나이, 집. 그게 다에요."

"스토커가 알고 있는게 그게 다에요?"

그녀를 똑바로 마주 볼 염치가 없어져 고개를 떨군체 끄덕였다.
자백, 자백이었다. 뻔히 알고 있는 그녀에게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을 자백했다.

"왜 그것밖에 몰라요?"

"그 이상 알아서 뭐하게요?"

내가 되묻자 지영씨가 쏜살같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제 방에 오셔서 뭐 하셨어요?"

"지영씨가 읽어보라던 책 읽고, 드라마 보고, 그게 다에요."

"선인장 화분은 왜 가져다 놨어요?"

"방이 쓸쓸해서요."

어째서인가 그녀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져 갔다.
그녀는 눈에 힘을 주며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날이 서 있는 것 같은 눈빛에 주눅이 들었지만 나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저 어떻게 할 생각인거에요?"

"모르겠어요."

"당신 바보야?"

지영씨가 화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좋았다.
자신의 방을 찾아오라는 그녀가 의외였지만 기뻤던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그 이상 다가서서 그녀에게 무언가 바래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뿐이었다.


"뭘 더 어떻게 해요? 이 이상 다가서지 않는 다면서요."

"그건 제 이야기죠. 당신은 스토커잖아요."

"스토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그녀가 말이 없었다. 입술을 앙다문 그녀에게서 도망치는 나는 방으로 발을 옮겼다.
잠시 잠깐의 침묵이 괴롭게 느껴진 나는 그녀에게 돌아서서 물었다.


"밥, 먹을래요?"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돌아가실래요? 저 이제 쉬고 싶은데."

그녀가 더 크게 고개를 흔들었다.


"저 HIV 보균자에요."

"예?"

"예비 에이즈 환자라구요."

HIV 보균자.
영화에서 봤던 단편적인 지식이 떠올랐다.

HIV 균을 가진 사람이 에이즈에 걸리지만,
아직 진행되기 전에 약물의 치료로 발병을 억제할 수 있다.
언제 병이 급작스레 진전될지는 모르지만, 현대의 의학으로는 어느 정도 다스릴 수 있는 병.
성적행위로 전염될 확률이 있지만, 이는 현저히 낮은 편이고 혹여 전염된다면 아직 완벽한 치료약은 없다.
억제만이 가능할 뿐, 세계적으로 자연 치료된 케이스가 두건 정도 발표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그저 기적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성민씨 전염됐을지도 몰라요. 저희 집에 자주 찾아왔었잖아요."

"..."

"병원에 안 가봐도 되요? 저한테 전염됐으면 어떻게 할 거에요?"

"지영씨한테 전염될만한 짓 한 적 없잖아요."

지영씨의 눈가에 그렁그렁하게 눈물이 맺혔다.


"저희 부모님도 제가 무서워서 따로 살자시는데 성민씨는 안 무서워요?"

"뭐가 무서운데요?"

"그럼 저랑 키스하자면 할 수 있어요?"

"..."

"같이 자자면 잘 수 있어요?"

"..."

"같이 살자면 살 수 있어요?"

그녀가 흐느껴 울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는 좁은 어깨를 들썩이며 또 꾸역꾸역 구겨 삼키듯 한 소리와 함께 울기 시작했다.
'다가서지 않을게요. 하지만 저를 찾아오세요.'
나 같은 스토커 따위에게 친절하게 구는 것이 이상스러웠었다.
아무것도 없는 빈방처럼 쓸쓸하게 느껴지던 그녀의 집이 눈에 밟히는 것처럼 선명히 떠올랐다.
작고, 좁고, 어두웠던 작은 방.
누구도 찾아오지 않고, 누구도 찾아오지 않게 하려 했던 방.

숨을 참는 것처럼 소리 없이 우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자 지영씨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기색을 보였다.
커다만한 눈이 놀라 휘둥그레진 모습이 애처로웠다.
잘 울지도 않는 다는 여자치고는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이 퍽 굵직했다.

"이 이상 다가서지 않는다는 뜻이 이거 때문이에요?"

내 질문에 지영씨는 대답을 하는 것인지 마는 것인지 애매한 고갯짓을 하고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몸이 얼마자 자그마한지 와락 껴안기라도 하면 부서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럼 지영씨는 저랑 키스하자면 할 수 있어요?"

지영씨가 눈을 번쩍 뜨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한번을 꿈뻑이지도 안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던 지영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같이 자자면 잘 수 있어요?"

지영씨의 얼굴에 어렴풋 웃음기가 서린 것같이 보였다.
지영씨는 더 크게 고개를 흔들었다.


"같이 살자면 살 수 있어요?"

지영씨가 더더욱 크게 고개를 흔들었다.
지영씨의 눈가에 웃음기가 역력했다.
나도 웃음이 나와 주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름 심각한 고백을 했는데 나는 왜 웃음이 나오는 것일까.
그녀는 왜 웃어주는 것일까.


나도 지영씨의 앞에 풀썩 주저앉아 지영씨와 눈을 맞췄다.
지영씨의 큰 눈망울이 아직 다 못 흐른 눈물들과 함께 나를 응시했다.


"그럼 우리 같이 밥 먹어요."

"..."


오늘 처음으로 지영씨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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