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제가 중학교 1학년 시절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찾아와 제법 쌀쌀해지고 나뭇잎도 하나 둘씩 떨어지기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그 시절, 좋은 학원은 공부를 많이 시키는, 힘들다고 소문난 학원들이었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다른 부모님들 사이에서 좋다고 이야기가 영어 학원으로 저를 보냈죠. 여느 학원들이 그러하듯 제가 다니던 영어학원도 수업 후 남겨서 시험을 많이 치게 하던 학원이었습니다.
매번 학원에 한번 갈 때마다 단어를 천개 가까이 시험을 쳤었습니다. 말이 단어 천개지, 외워보면 양이 엄청 많습니다. 많은 양에 자연스레 수업이 마치고도 세 시간, 네 시간씩 단어 시험 때문에 남아 있어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날도 저는 단어 시험으로 학원에 남아있었습니다. 한 자리에 앉아서 자리를 안 뜨고 두 시간 정도 단어를 외우다 보니 슬슬 답답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제 등을 콕콕 누군가가 찔렀습니다. 같은 반 학원 친구가 제 의자 뒤로 와 조용히 턱을 옆으로 까딱였습니다.
"나가자"
조금 쉴 겸, 저와 마찬가지로 공부를 하던 학원 친구들과 커피를 타서 단어집을 들고 학원 비상계단으로 갔습니다. 비상계단은 중형 빌딩에 으레 있는 단단하고 무거운 철문으로 각층이 막혀있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벽면은 새로 만든 건물이다 보니 그냥 벽이 아닌 벽 중간에 손 두 뼘 너비의 아크릴판으로 계단을 따라 쭉 장식되어있었습니다.
비상계단은 어둡고,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는 곳이다 보니 약간 무서운 기분이 들 수도 있었겠지만 반강제로 학원에 잡혀 학원에서 나가는 것만 바라는 아이들에게는 학원 사람들 눈에 안 띄고, 학원 안이지만 밖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곳이었기에 자연스레 찾게 되는 곳이었습니다.
또 밤에 계단에 가있으면 9층 높이에서 보이는 야경에 공부로 갑갑하던 마음도 잠시나마 가벼워지는 곳이었죠.
그날도 저희는 비상계단에 서서 야경을 보면서 커피를 마시며 별 시답잖은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눴습니다. 이야기를 한참 하다 등을 돌려 계단 쪽을 보게 되었습니다. 계단의 창문 난간 쪽에 등을 기대고 있다보니 자연스레 아랫층 계단 벽면이 보였습니다. 그곳을 보며 다른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데 아랫층 벽면의 아크릴에 뭔가 비쳤습니다.
아크릴에 비쳐서 보인 건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붉은 빛이었습니다.
그걸 본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온몸에 닭살이 돋고 배가 차가워졌습니다.
이야기를 하던 친구들에게 저는 빨리 들어가자고 이야기했습니다.
애들은 갑자기 왜 그러냐고 했고 저는 이유는 하지 않고 일단 학원으로 들어가자 들어가면 설명한다고 했죠. 그래도 웃으며 저의 이상한 반응에 왜왜 ? 왜 갑자기 그래? 그러며 들어가지 않으려 했습니다.
저는 조용히 손가락을 들어, 맞은 편 아크릴 벽을 가리켰습니다. 이윽고 저희들은 누구 먼저라고도 할 것 없이 비명을 지르고 계단을 뛰쳐나왔습니다. 저희가 본 순간 아크릴 벽에 여러 개의 붉은 불빛이 굉장한 속도로 도는 것이 비쳤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학원으로 돌아와 "뭐였지! 뭐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불길한 기분에 학원 선생님한테 몸이 안 좋아서 가야겠다고 말을 하고 그냥 시험을 미루고 학원을 나왔습니다. 학원 선생님도 정신이 없으신지라 저의 하얘진 얼굴과 비 오듯이 흘리는 식은땀에 별 다른 이야기 없이 저를 보내줬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함께 학원을 나온 친구는 자동차 불빛 같은 게 비춘 게 아닐까 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있던 곳은 꽤나 고층이어서 지나가는 자동차 불빛은 비칠 일도 없었고 자동차 불꽃이 비쳤으면 그냥 스윽 지나가는 빛이지 그렇게 뱅글 뱅글 도는 불빛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친구는 저와 반대편 난간에 서있어서 못 봤겠지만 저는 계단 사이로 봤습니다.
아크릴에 비친 것이 아닌 공중에 떠서 빠른 속도로 돌고 있는 불꽃들을…….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외갓집에 데려다 준다고 하셔서 저는 따라 어머니 차에 올랐습니다.
그래서 한참 외갓집에 가는데 틀어져있던 라디오에서 뉴스가 들려왔습니다. 뉴스는 저희 학원 건물에서 화재가 일어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전기 누전으로 추정된다고 뉴스에서는 나왔지만 저는 그것들을 봤기에 식은땀이 다시 흘렀습니다.
몇 명이 병원으로 실려 갔다고 했지만 학원 원장님의 빠른 대처로 사망자는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불꽃은 화재가 나기 전에 나타난다는 화마였을까요?
그것들을 보고 빠르게 학원에서 나온 덕분에 사고를 안 겪고 집으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