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수학익힘책 작성일 14.08.31 14: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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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는 미치광이로 자살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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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의 미스테리 주제는, 유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입니다.

 

고흐가 살아생전 미쳐서 자살했다는 이야기는 꽤나 유명한데요.

자신의 왼쪽귀를 스스로 잘랐다는 것에서

 

소름이 끼치더라구요:) 어떻게 스스로 자신의 귀를..

과연, 알려진대로 고흐는 미쳤었던걸까요?

 

그래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것일까요?

 

 

 

 

*자살로 마감한 예술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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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고흐의 작품 '해바라기'>

 

 

1978년 3월 23일, 런던의 미술품 경매장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상열기로 가득했다.

홀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박물관 관계자들과 미술품 애호가 및 수집가들이었다.

 

이들은 고흐의 작품인 《해바라기》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1천 5백만 달러에서 시작된 가격은 경매가 시작되기가 무섭게 치솟았다.

 

95센티미터X73센티미터의 이 그림은 낙찰가 3천9백85만 달러라는 최고가를 기록하였고 낙찰되기 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4분이었다.

 

한 통계조사에 의하면 근세기 들어 세계 각국에서 열린 명화 경매장에서 1천만 달러 이상의 고가에

경매된 그림은 총 11개 작품이었는데 그 중에서 고흐의 작품이 4점이나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해바라기》와 《붓꽃》이 각각 3천9백85만 달러와 5천3백90만 달러에 팔렸다.

화가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남부의 브라반트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청년기의 고흐는 공방에서 미술품 파는 일을 시작으로 이후 파리, 런던 등지로 건너가게 된다.

하지만 괴팍한 성품 탓에 여러 차례 고객과 실랑이를 벌이게 되고 결국 공방일을 그만둔다.

 

후에 종교에 심취하게 된 그는 신학교에서 성직자가 되기 위한 단기 연수를 받던 중 브뤼셀의 한 탄광 지역에 파견된다.

 

광부들과 동고동락하며 보내던 2년이란 시간 동안 고흐는 하층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지켜보게 되었고

종교적 연민에 휩싸인다.

 

이 시기의 고흐는 목탄화를 통해 억압과 착취의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아픔을 표현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서른살을 앞두고 있었다.

 

가슴 속에 잠재되어 있던 그림에 대한 열정이 서서히 불타오르던 시기였다.

"오로지 그림을 통하지 않고는 나를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는 평생 빈곤과 질병에 시달리는 조락한 삶을 살아야 했다.

부와 권력에 대한 혐오, 멸시로 자신을 후원하고자 하는 사람들조차 외면했으며 친구들 역시 그의 히스테릭한 기질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 등을 돌렸다.

고흐는 생전에 7백여 점의 소묘와 8백여 점의 유화작품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 중에서 돈을 받고 판 것은 단 한점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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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고흐의 작품 '붉은색 포도밭'>

 

 

고흐가 자살한 후 몇개월이 지나서야 포르투갈의 여류화가 안나가 그의 《붉은색 포도밭》이라는 작품을 구입했다.

 

당시만 해도 무명의 화가에 불과했던 고흐의 그림은 터무니 없이 싼값에 팔렸다.

생전에 고흐는 늘 허기에 시달렸으며 때때로 환각 상태에서 그림의 염료를 짜서 입에 넣고 삼키기도 했다.

 

서른다섯이 되던 해 화가 고갱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고 그에게 우발적인 상해를 입힌 직후

스스로 자신의 왼쪽 귀를 잘랐다.

 

당시 고흐의 병원 기록을 보면 발작증, 조울증, 심지어는 극심한 정신분열에 시달렸음을 알 수 있다.

1890년 7월 27일 고흐는 파리 부근의 작은 마을에서 요양중이었다.

 

한 자루의 총과 화구를 챙긴 그는 인근 보리밭으로 걸어 들어갔다.

자신의 숙소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장소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었고 이내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지 약 4시간후 고흐는 기적적으로 회생했다.

온 몸에 피를 흘리며 그는 숙소로 돌아갔고 이틀 후 숨을 거두었다.

 

서른일곱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자신의 비극적인 생을 마감한 셈이다.

이후 고흐의 자살 동기에 관하여 많은 추측이 난무했다.

 

최근까지도 고흐의 생애와 작품세계에 대한 평론집, 전기, 영화와 시나리오, 서간문 등이 세인의 비상한

관심 속에서 끊임없이 발표되고 있지만 자살에 관한 논란은 그 진위를 구분하기 어렵다.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에는 고흐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적고 있다.

 

'그는 결국 정신적인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를 절망에 이르게 한 것은 무엇일까?

 

 

 

 

 

 

*고흐는 과연 미치광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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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고흐의 작품 '자화상'>

 

첫째, 대다수의 사람들이 고흐의 사인을 정신분열증으로 몰고 갔다.

1914년 고흐가 자신의 동생이자 후원자였던 테오와 주고받은 서간집이 출간되자 사람들은 이를 통해 당시 고흐가 어떤 심리 상태에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열악한 환경에 장기간 노출된 고흐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하되었다.

그는 늘 환각 증세와 악몽에 시달리곤 했다.

 

자신의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우울과 절망으로 인해 점차 염세주의자로 변해 갔으며 정신마저 피폐해졌다.

사람들은 고흐의 죽음을 심각한 의지결핍과 정신적 붕괴에 그 근본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독일의 한 주간지는 두 가지 관점에서 의문을 제기했다.

우선 자살하기 수개월 전 고흐는 자신의 마지막 유작이 되어버린《자화상》을 남겼다.

 

작품 속의 인물이 뿜어내는 광기 어린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소름이 돋아 오르게 만드는 강렬한 마력이 느껴진다.

 

또 파란색 물감을 여러겹 덧칠하면서 연출되는 생생한 질감과 역동적인 선뿐 아니라 마치 조소상처럼 견고한 상체의 구도를 살펴볼 수 있다.

 

이는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그렸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절제와 고도의 계산에

의한 작품이라는 설명에 수긍이 가는 부분이다.

 

다음으로 말년의 고흐를 진찰했던 의사 가셰의 아들이 증어한 바로는 고흐의 자해 상처는

진심으로 자살할 의지가 있는 사람의 것으로 보기가 어렵다고 했다.

 

고흐가 자살할 당시 같은 숙소에 묶고 있던 네덜란드의 한 화가는 피로 범벅이 된 고흐가 절박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전했다.

 

만약 사람들의 말대로 그가 심각한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다면 이처럼 침착하게 대처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둘째, 일부 학자들은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극심한 고독 때문이라고 말한다.

고흐는 열한 살 된 아들을 외지의 기숙학교로 떠나 보낼 때도 엽기적인 행동으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괴상한 표정과 괴팍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또한 화를 잘 내며 쉽게 흥분하는 바람에 대힌 관계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고흐는 사람들이 늘 자신을 오해하고 적대시한다고 생각했다.

1890년 5월 17일 고흐는 동생 테오를 만나러 파리로 갔다.

 

테오는 1년전 조안나와 결혼한 바 있었다.

고흐는 동생과 해후한 지 겨우 이틀만에 파리를 떠나 작업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6월 초 테오는 고흐를 재차 파리로 초청했다. 그러나 6월6일 파리에 도착한 고흐는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곧바로 오베르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해 7월 27일 권총으로 자살해 생을 마감했다.

테오가 형에게 보냈던 7월 22일자 편지를 보면 6월 6일 고흐가 갑자기 떠나버린 이유가

 

'가족 간의 말다툼' 으로 인한 것임을 알수 있다.

극도로 예민해져 있던 고흐에게 그 날의 충격은 혼자서 견뎌내기에는 너무나 큰 절망감을 안겨 주었다.

 

안타깝게도 고흐의 삶은 예술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것들로부터 철저하게 격리되어 있었다.

결국 그는 세속의 모든 인연을 과감히 청산하고자 스스로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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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또 다른 일부에서는 경제적 어려움을 강조했다.

고흐는 일평생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말년까지도 그는 동생인 테오에게 생활비를 얻어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물감과 화구를 구입하고 나면 사흘 내내 커피로 연명해야 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이 이어졌다.

 

고흐의 작품 속에서 유독 자화상이 많은 이유 역시 돈을 주고 모델을 부를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궁여지책으로 고흐는 거울을 하나 샀고 스스로 모델이 되어야 했다.

 

생전에 고흐는 많은 작품을 그렸으나 그의 그림에 관심을 갖고 값을 물어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자살하기 전 며칠 동안은 고흐의 정신이 매우 맑았다고 한다.

 

한결 차분해진 그는 자신을 찾아온 동생과 포옹을 나누며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난 단지 우리 가족이 잘 되길 바랄 뿐이란다."

 

그것은 결국 그의 마지막 유언이 되고 말았다.

 

 

넷째, 여인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고흐는 평생 여인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실연을 겪고 난 후 그는 죽기 전까지 평생 유곽을 배회하며

 

거리의 여자들과 어울렸다.

고흐는 16세가 되던 해 헤이그의 호우필 미술 상회의 점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고흐는 세심하며 유능한 직원이었다.

그는 곧 런던의 분점으로 파견되었고 그곳에서 하숙집 부인의 딸인 우슐라를 만났다.

 

하지만 첫눈에 반한 고흐는 그녀의 냉랭한 태도에 혼자서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결국 고흐의 첫사랑은 혼자만의 짝사랑으로 끝나버렸다.

 

그 후 고흐는 자신보다 세살이나 연상인데다 아이까지 딸린 과부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여인의 가족들 반대에 부딪쳐 상처만 받고 말았다.

 

당시 테오가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만약 형이 그 여인과 결혼한다면 다시는 형이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

 

그 후 호우필로 다시 돌아온 고흐는 가셰의 딸 마그리트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후에 가셰의 가족들은 이렇게 증언했다.

 

"아마도 고흐는 실연에 대한 충격과 배신감으로 자살했을지도 모른다.

마그리트는 솔직히 한쪽 귀가 없는 이 가난한 화가를 탐탐히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고흐는 마그리트의 초상화를 그린다는 명목으로 집에 드나들며

적극적인 구혼을 했다. 이일로 인해 아버지는 고흐와 언성을 높이며 싸웠고

 

결국 서로 등을 돌리고 말았다."

 

계속되는 실연과 일련의 고통으로 인해 고흐는 점점 더 의기소침해졌고

깊은 절망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고흐의 사인을 놓고 때론 터무니 없는 억측이 나돌기도 했다. 사람들은 어쩌면 나무에만 치우쳐

숲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술에 대한 고흐의 뜨거운 열정과 그로 인한 정신적 방황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현실과 동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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