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는~?

수학익힘책 작성일 14.08.31 14: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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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는 다빈치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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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미스테리 주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입니당:)

 

유명한 화가죠.많은 작품이 있는데,

가장 유명한게 '모나리자' 와 '최후의 만찬' 이지요.

 

그런데, 모나리자가 사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자화상이란 말이있더라구요:D

모나리자는 여인이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남자인데.

 

말도안돼는 소리아닌가요?! 하지만 아예 근거없는 얘기 같진않네요.

그럼 다빈치에 대해서 한번 알아볼까요?

 

 

 

*세기를 초월한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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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세례>

 

 

다빈치는 1452년 4월 15일생으로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다빈치는 조부와 계모의 손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1468년 8월, 그는 아버지를 따라 피렌체로 건너간 후 화가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도제 수업을 받게 되었다.

16세 되던 해 다빈치는 고향을 떠나 이곳에 정착한 후 장장 10년동안 베로키오로부터 회화와 조각 등을 배우며

다방면의 예술적 재능을 키워나갔다.

 

베로키오의 공방은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화실이었으며 베로키오 역시 명성과 재능을 겸비한 화가였다.

1475년 베로키오는 성 살비오 교회로부터 부활절 전까지 <그리스도의 세례>라는 작품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다.

 

부활절까지는 겨우 일주일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베로키오는 배경이 되는 부분을 다빈치에게 맡겨보기로 했다.

 

두사람은 그날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스케치 하기 위해 호수를 찾았다.

스승의 의도를 간파한 다빈치는 아름다운 한 폭의 자연을 고스란히 화폭에 담았다.

 

이를 본 베로키오의 표정은 매우 흡족한 모습이었다.

그는 정해진 기간 안에 반드시 배경부분을 완성할 것을 당부하고 다빈치만 남겨둔 채 급한 일로 그곳을 떠났다.

 

다빈치는 스승인 베로키오의 화풍을 모방하여 밤낮없이 배경의 완성에 몰두했다.

이윽고 완성된 그림을 앞에 둔 다빈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성의를 들고 있는 천사의 모습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에 긁혀 훼손된 것을 뒤늦게 발견했기 때문이다.

약속한 날짜까지는 겨우 사흘밖에 남아 있지 않았는데 스승 베로키오마저 부재중이었으므로

 

다빈치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다빈치는 스승의 화풍을 흉내내어 원래 상태로 복원해내었다.

 

부활절 아침 마침내 공방으로 돌아온 베로키오는 화폭 속의 천사가 본래 자신이 그린 것과는

달라져 있음을 단숨에 알아차렸다.

 

겁이 난 다빈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였고 가만히 듣고 있던 베로키오는 호된 질책 대신에

조용히 그의 어깨를 감싸안고 이렇게 말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뛰어난 부분을 찾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네가 그린 이 천사란다.'

 

그 날 이후 피렌체를 기점으로 다빈치의 명성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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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

 

 

1495년 43세의 다빈치는 밀라노 대공의 부탁을 받고 밀라노 성마리아 수도원의 식당에 걸어둘 대형 벽화

 

《최후의 만찬》작업에 착수했다.

훗날 다빈치의 이름을 세계사에 영원히 남길 위대한 작품이 이렇게 탄생된 것이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이 작품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여러 군데 파손을 당했다.

그리고 이후 일곱 차례에 걸친 대복원 작업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원형을 되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이 작품이 주는 감동을 기억하고 있다.

1503년 3월 3일 피렌체의 은행가였던 지오콘도는 아내 리사를 위해 다빈치에게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1505년 9월 다빈치는 완성된 초상화를 들고 리사를 방문했다.

화폭에 담겨진 여인의 모습은 보는 이를 강하게 흡입하는 묘한 마력이 있었으며 자신감과 인생에 대한

 

즐거움으로 충만한, 우아하면서도 고전적인 여성상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풍부한 표정을 담고 있는 여인의 얼굴은 불가사의하기 까지 했다.

 

부드러운 눈빛은 세상의 모든 희로애락을 꿰뚫은 여인의 인생 굴곡을 담고 있었으며 입가에 흐르는

실처럼 가느다란 미소 역시 신비로움으로 가득했다.

 

기쁜 표정을 짓는 것 같지만 정숙함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열정적이나 침착하며 선한 느낌을 주면서도 결코 영민함을 잃지 않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1506년 5월 다빈치는 피렌체를 떠나기 직전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리사의 저택을 찾았다.

그는 리사에게 자신이 이 초상화를 가져 갈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간청했다.

 

리사는 다빈치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때 지오콘도는 이렇게 말했다.

 

"아내의 미소를 세상에 남기게 해준 것에 대하여 무한한 감사를 드리오."

 

 

 

 

 

*가짜 《모나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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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8월 21일 월요일 그 날은 마침 루브르 박물관의 휴관일이었다.

작업복을 입은 세 명의 남자가 루브르 박물관 내부에 침입했다.

 

그들은 곧바로 《모나리자》앞에 멈추었고 익숙한 솜씨로 각종 감시 경보 장치를 제거하더니

《모나리자》를 들고 유유히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각종 일간지는 '모나리자가 사라지다' 라는 제목의 기사가 1면을 장식했다.

당국의 철저한 보안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은 외부에 공개되고 말았다.

 

그 후 여섯명의 미국인들이 30만 달러를 주고 《모나리자》를 구입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자신이 구입한 그림이 틀림없는 진품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2년후 우여곡절 끝에 《모나리자》의 초상화는 루브르 박물관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나

진품의 여부에 세간의 시선이 모아졌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모나리자》는 전세계에 무려 200여 점이나 퍼져있다.

영국의 전 수상인 처칠의 부인은 그 중 네 점을 소장하고 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모나리자》의 열렬한 팬입니다. 하지만 진품을 소장할 수는 없으니 이렇게 위조품으로라도 만족할 수밖에요."

 

과학자이자 미술품 감정가로 활동하는 영국의 보리츠 박사 역시 자신의 집 거실에 《모나리자》를 소장하고 있다.

그는 루브르의 《모나리자》는 진품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다빈치의 초상화는 일반적으로 한 점이 아니라 여러점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모나리자》는 지오콘도의 두 번째 부인으로, 초상화가 완성된 후 다빈치는 그중의 하나를 지오콘도에게 주었다.

 

지오콘도는 죽은 아내를 기리기위해 초상화를 부탁한 것이라고 한다.

후에 이 초상화는 지오콘도 가문에 대대손손 전해 내려왔으며 나중에 영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20세기초 《모나리자》는 잉글랜드 바스 지방의 미술관 관장에게 팔렸다.

당시 보리츠는 진품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특별 촬영까지 했다고 한다.

 

검사 결과 화폭에 남겨진 지문이 다빈치의 다른 작품 속에서 발견된 지문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의 주장이 확실하다면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진품이 아니라는 말인가?

 

보리츠 박사의 설명에 의하면 다빈치가 피렌체를 찾았을 때 한 귀족으로부터 정부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한다.

 

후에 귀족의 정부를 만난 다빈치는 지오콘도의 부인과 너무나 닮은 그녀의 외모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름 또한 '라 지오콘도'로 비슷하였으며 '미소 짓는 여인'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다빈치는 그녀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중간에 귀족이 변심하는 바람에 그림을 전해줄 수가 없었다.

 

다빈치는 하는 수 없이 이 초상화를 가지고 프랑스로 돌아왔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집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 작품의 예술적 가치가 높아짐에 따라 곳곳에서 복제품이 끊이지 않고 출연하게 되었다.

이들 모조품들의 수준은 거의 진품에 가까웠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보면 다빈치의 작품은 적어도 여러 편의 모작이 존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중의 대부분은 다빈치의 수하생들이 그린 것이며 훗날 이들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초상화가 진품임을 주장하고 나섰다.

 

1955년 프랑스 파리에서는 세계적인 진품과 위조품에 관한 전시회가 열렸는데 상당히 많은 작품이 선보였다.

그 중에서 가장 진위를 가리기 어려웠던 작품이 바로 《모나리자》인것으로 밝혀졌다.

 

프랑스 미술계는 귀신도 속일 만큼의 정교함을 지닌 이 모조품들의 수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모나리자》에 대한 의혹만 더욱 깊어지게 했다.

 

 

 

 

*《모나리자》는 과연 누구를 모델로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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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시각에서 볼 때 앞서 언급한 피렌체의 은행가 지오콘도의 아내라는 학설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빈치의 친구 바사리는 이렇게 말했다.

 

"다빈치는 모나리자의 초상화 작업에 착수한 지 3년만에 이를 완성했으며

현재는 프랑스 왕실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이러한 바사리의 증언에는 여러 면에서 모순을 드러내고 있으므로 신빙성이 약하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다빈치가 이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을 때 그림속 여인의 나이는

 

겨우 24세에 불과했다.

하지만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모나리자》는 40여 세의 완숙한 여인의 모습이다.

 

게다가 화폭 상에서 3년간의 시간적 격차를 전혀 발견할 수 없다.

미술계 일부에서는 유채화에 있어서의 단층 기법으로 추정하지만 이 초상화는 단기간에 완성된 그림임에 틀림없다.

 

유럽에서는 《모나리자》의 모델이 된 여인이 이탈리아 피렌체 관직자의 세 번째 부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 귀부인의 얼굴에는 내면의 깊은 고독과 슬픔이 담겨져 있으며 화가가 내면의 미소를 외부로 이끌어 내었다고 한다.

 

다빈치가 모델인 귀부인을 위해 악대를 불러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이로써 유명해졌다.

 

1986년 미국잡지 《예술과 앤티크》는 매우 대담한 내용의 주장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다빈치가 바로 《모나리자》의 모델이라는 전혀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 것이다.

 

《모나리자》는 다빈치의 자화상이며 이를 증명하기 위해 다빈치의 자화상과

모나리자의 초상화를 동일한 비례로 겹쳐 보았다.

 

놀랍게도 화폭 속의 눈동자가 완벽하게 일치하였으며 두 초상화 속의 눈과 머리의 윤곽,

두 뺨과 코의 비율이 거의 흡사했다.

 

모나리자의 신비한 미소는 1518년 다빈치가 거울을 보고 그린 자화상의 모습과 닮은 구석이 많았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몇 가지 의문이 뒤따른다.

 

첫째, 1504년 《모나리자》가 완성될 당시 다빈치의 나이는 52세로 노인에 가까웠다.

다빈치의 일관된 화풍에 근거하자면 그는 매우 과학적이며 실사에 치중한 그림을 그려왔다.

 

다빈치가 자신의 자화상을 미소짓는 여인과 혼동하도록 그렸을 것이라는

이들의 주장은 터무니 없다.

 

 

둘째, 화폭에 담겨진 여인은 단지 얼굴뿐만 아니라 상반신과 손까지 포함된 모습이다.

또한 이 비율과 구도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다.

 

평화로움, 아름다움, 온화한 기품, 신비함 등등 여성특유의 기질과 자태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이는 분명 실제 모델을 두지 않고 상상만으로는 도저히 그려낼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모나리자》는 누구를 모델로 한 것일까?

이에 대한 논란은 그 신비한 미소만큼이나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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