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근무했던 부대는 강원도 춘천시내에 위치한 정보계통의 부대였습니다. 밖에서 보면 무슨 관공서처럼 보이기에 정문에서 경계를 서는 위병이나 ****부대라는 현판을 보기 전에는 군부대라는 걸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군대를 다녀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부대에서는 자신들이 맡은 일(보직) 이외에도 주간과 야간에 경계근무를 섭니다. 일반적으로 선임과 후임이 함께 초소에 투입되어 경계근무를 하거나 일정지역을 순시하는 동초를 서는데 제가 근무했던 부대는 위병은(부대정문 경계병입니다.) 단기사병(방위라고 합니다.)이 맡고 야간동초 근무는 현역병이 근무를 섰습니다.
부대 규모가 외곽담장을 끼고 빨리 돌면 10분이 안 걸릴 만큼 작았고 주택가에 위치해서 동초근무자들은 총 대신 방망이와 호루라기 하나만 달랑 들고 근무를 나갔습니다. 경계근무라고 해봐야 사각형 모양으로 부대를 감싸고 있는 담장구석구석에 위치한 초소와 유류고에 위치한 초소를 한 시간 가량 돌면서 일지에 서명을 하는 것이라 경계근무라 하기에는 작은 일이었습니다.
행정업무를 하는 부대라 현역병의 수가 적었고 파견인원에 외박 및 휴가인원 그리고 상황인원을 제외하면 근무를 설 수 있는 인원이 많지 않았기에 제대를 앞둔 말년병장들은 주말엔 일직사관 양해아래 말뚝근무를(1번 근무부터 끝번까지) 서곤 했습니다. 잠이 늘 부족한 후임들을 위한 배려였습니다.
제대를 한 달 가량 앞두고 있었으니, 아마 1월 중순 토요일이었을 겁니다. 저는 여느 때처럼 말뚝근무를 가기 전에 내무반에 라면과 만두를 사주고는 1번 초소부터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날따라 함박눈이 내리고 있어서 한겨울이었지만 오히려 포근한 느낌이 들었고 쌓이는 눈 위에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내면서 발자국을 남기는 재미도 괜찮아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순찰을 돌았습니다.
새벽 두 시였을 겁니다. 식당 앞을 지나가는데 불이 켜졌습니다. 누군가하고 식당 창문 너머로 보았더니 제 아들놈이(군번이 선임보다 1년 늦은 후임을 아들이라 합니다.) 자다가 목이 말랐는지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내서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습니다. 그냥 갈까하다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해서 모자를 벗고 창문위로 고개를 쏘옥 내밀고는 얼굴에 손전등을 비추고는 창문을 천천히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톡. 톡. 톡. 톡…….
아들놈이 잠이 덜 깼는지 반응이 없었습니다. 잠시 후 소리가 난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저랑 눈이 마주쳤습니다. 몇 초 간 쳐다보는 것 같더니 이 녀석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습니다.
'아니 이 녀석이 으악! 하고 놀라기만 할 줄 알았는데…….'
장난한번 치다가 애 잡겠다 싶어서 식당으로 바로 들어가려는데, 일직병이 식당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습니다. 우당탕하는 소리가 일직실까지 들려 알아보러왔다고 합니다. 일직병에게 식당 뒷문을 열라고 하고는 들어가 보니 아들 녀석이 완전히 큰대자로 뻗어 있었습니다.
녀석을 들쳐 업고는 내무반으로 와서 흔들어 깨웠더니 조금 있다가 정신을 차렸습니다. 다친데 없냐는 물음에 괜찮다고 답하고는 저보면서 사시나무 떨 듯 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미안하다. 장난친 건데 네가 이렇게 놀랄 줄은 몰랐다. 내일 너 좋아하는 자장면 사줄 테니까 잊어버리고 푹 자라."
다시 근무서려고 초소로 돌아가는 저에게 당직병이 물었습니다.
"이병장님 떨어뜨린 빨래 가지러 안가십니까?"
"인마, 오밤중에 근무서다 말고 웬 빨래야?"
"예? 어 이상하다…"
"쓸데없는 이야기 말고 사관님께 내가 식당에 찬물 마시러 갔다가 넘어진 거라고 잘 말씀드려."
다음날 종교행사를 마친 후 부대로 복귀하는 길에 아들 녀석을 데리고 중국집에 갔습니다.
"짜식, 정말 놀랐나보네. 내가 탕수육도 쏠 테니까 그만 풀어라 응?"
자장면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녀석이 먹을 생각도 안하고 자꾸 저만 쳐다보기에 소주 한 병 시켜서 따라주었더니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단숨에 4잔을 들이켰습니다.
"너 술 먹고 싶어서 수 쓴 거지? 좋아. 내가 사관님께 잘 말씀드릴 테니 오랜만에 아버지하고 대작 한번하자."
그리고는 한 병을 더 주문하면서 저도 한잔 털어 넣었습니다.
그리곤 짬뽕국물을 들이키는데 녀석이 말했습니다.
"이병장님 저 어제 이병장님 장난 때문에 기절한 거 아닙니다."
"뭐? 그럼?"
"이병장님 보곤 별로 안 무섭다고 그러면서 웃으려고 했는데 그때 보았습니다."
"보긴 돌봐? 귀신이라도 본거야? 짜식 싱겁긴……."
"이병장님이 창문너머로 저 보시고 계실 때 이병장님 왼쪽 뺨 바로 옆에서 이병장님을 쳐다보면서 씨익 웃고 있던 여자를……."
순간 들이키던 뜨거운 짬뽕국물이 차가운 얼음덩어리마냥 온몸 구석구석 한기를 전해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냐……. 네가 놀래서 잘못본거야."
"아닙니다. 저도 첨엔 그런 줄 알았는데 분명히 보았습니다. 이병장님 왼쪽 뺨에 자기 볼을 댈 듯이 가까이 붙어서 싸늘한 미소로 이병장님을 쳐다보던 그 창백한 얼굴의 여자를…….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정신을 잃은 겁니다……."
어이가 없었습니다. 남이 보았다는 여자를 바로 옆에 있던 저는 느끼지도 보지도 못했으니까 말입니다. 자꾸 보았다고 우기는 녀석에게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냐고, 귀신이 있어도 우리 부대처럼 분위기 안 나는 곳에 나타날 리가 면박을 주고는 잘못본거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하면서 남아있던 술을 마저 마신 후 부대로 복귀했습니다.
복귀 후 뭔가 생각나는 게 있어서 전날 일직을 섰던 후임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상병 너 어제 나한테 말했던 빨래가 어쩌고? 그게 무슨 이야기야?"
"아 그거 말입니까? 어제 이병장님이 뒷문 열라고 하시면서 뒷문으로 가실 때 왼쪽어깨에 하얀색 옷 같은 걸 걸치고 계셨습니다. 창문을 통해서 본거라 잘 안보여서 전 그냥 눈 오니까 밖에 널어 논 빨래 걷어 오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바람에 날렸는지 휙 날아가기에 땅에 떨어뜨리고 그냥 들어오신 줄 알고 그거 주우시라고 말씀드린 건데……. 못 찾으셨습니까?"
이런…….
전 빨래를 걷어온적도, 하얀 비스 무리한 천 같은걸 어깨에 걸친 적도 없는데, 한 녀석은 귀신을 봤다고 하고, 다른 녀석은 어깨에 뭘 걸치고 있었다고 하니…….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습니다. 녀석들이 헛것을 본 건지, 제 옆에 누군가 정말 있던 건지.
그날 저녁도 말뚝근무를 나가는데 저도 사람인지라 소름이 돋고 두려운 마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말년병장 체면에 무섭다고 자원한 근무 빼달라고 할 수도 없고…….
근무가 거의 끝날 때쯤 식당 창문가에 다시 가 보았습니다. 시간도 새벽 5시가 다 되었고 취사병들도 아침준비를 하려고 들어오기 시작해서 두려움이 많이 가셨기 때문입니다.
혹시 내가 무심코 지나친 느낌은 없었는지 생각을 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습니다. 아들 녀석이 저랑 눈이 마주쳤을 때 제 왼쪽 볼에서 느껴졌던 순간적인 싸늘한 느낌……. 갑자기 불어온 바람 때문에 그러려니 했지만 어제처럼 함박눈이 포근하게 내리는 날엔 그런 바람이 불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순간 온몸의 털들이 전부 서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대 한지도 벌써 10년이 훨씬 지났지만 아직도 그 아침에 온몸에 퍼졌던 소름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게 아니기에 사실 그때 뭔가가 정말 제 옆에 있었는지도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제 옆에 서늘할 때면 옆을 보기가 두려워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