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악령 4

씨바둥 작성일 17.07.10 00: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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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내가 어리석었던 거요. 나는 그때
그 걸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소. 당시 칼
자루는 내가 쥐고 있었기에 그 놈의 복수가 40
년이 지나 이렇게 시작될 거라곤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못했소.”
엄 장군은 눈을 지그시 감았죠. 두 눈을 감
은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비로소 많이 늙었
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닫힌 눈꺼풀이 미
세하게 흔들렸죠. 그는 한참 뒤에 차분한 목소
리로 사건의 전말을 털어놓기 시작했지요.
한국 전쟁이 일어났을 때 나는 당시 이 지역
에서 치열한 전투를 지휘했던 연대장이었소.
당시는 전시 상황이라 내 나이에 연대장이면
그리 높은 계급은 아니었다오.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다가 휴
전이 되었소. 우리는 휴전 협정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전투를 하곤 했다오. 그러
다 마침내 38선이 확정되었지요. 정전 협정이
이루어진 게 아니고 휴전 협정이었기에 자연스
레 38선 부근으로 군부대가 들어서게 되었소.
비무장지대를 중심으로 해서 언제 다시 일
어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해서 서로 총부리
를 겨눈 채 대치 상태에 들어서게 된 거요. 우
리 부대는 휴전이 될 때까지 이곳에 있었는데
우리 부대로 이 지역에 부대 막사를 세우고 철통
같은 경계 태세를 갖추라는 명령이 떨어졌소.
나는 적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
는 전술적인 위치를 찾아 부대 막사를 세웠소.
그런데 작은 문제가 발생했지요. 내가 부대터
로 선정한 곳에 살던 주민들이 반발을 한 거요.
그들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살아온 고향을
버리고 이주할 수는 없다는 거였소.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족들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데 어
떻게 고향을 버리고 갈 수 있겠느냐는 거요.
회유도 해 보고 겁도 줘 봤지요. 그래서 많
은 사람들이 떠나기는 했지만 몇 사람들은 끄
떡도 안 했어요. 나는 군대식으로 몰아붙이기
로 마음을 먹었소. 얼마 뒤에 대통령을 비롯해
서 국가 고위 관리들이 방문할 거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더욱 더 서둘 수밖
에 없었소.
우리는 일주일의 최후 통첩 기간을 두고서
무작정 철거를 시작했소. 한쪽에서는 공사가
시작되고 한쪽에서는 철거가 이루어졌지요.
곳곳에‘민간인 통제 구역’이라는 푯말을 세
우고 밀어붙이자 공사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
소. 젊은 군인들이 상급자의 명령에 따라서 일
을 해 나가서인지 속도도 무척 빨랐지요.
공사가 반이 넘게 진척되었지만 여전히 집
을 떠나지 않는 토박이들이 있었소. 남아 있는
몇몇 사람들과는 개별 면담을 해서 무조건 떠
나라고 협박을 했소. 말을 듣지 않으면 탱크로
빈 집을 깔아뭉개버리기도 하면서.
모두들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떠나갔지요.
그런데 딱 한 집이 남아 있었어요. 약초를 캐
서 먹고 사는 약초장수가 사는 집이었소. 그는
두 딸과 함께 오두막에 살고 있었는데 선산을
지켜야 하기에 결코 떠날 수 없다는 거요. 그
의 오두막이 서 있던 자리가 현재 탄약고가 서
있는 자리라오.
나는 군인들을 동원해서 강제로 쫓아내기도
여러 번 했소. 그랬지만 소용 없었지요. 다음
날이면 어느 새 산을 타고 넘어와 집에 들어가
있는 거였소. 대통령과 국가 고위 관리들이 방
문하기로 한 날짜는 점점 다가오는데 저렇게
버티고 있으니 보통 문제가 아니었지요.
사실 그때는 전쟁 직후라 보상 문제니 그런
것은 생각지도 않았을 때요. 단지 쫓아내기만
하면 그걸로 끝이었소. 그런데 일자 무식쟁이
인 약초장수가 생계 수단을 보장해 달라고 주
장하고 나선 거요. 그렇지 않으면 결코 선산을
떠날 수 없다고.
물론 그 당시는 폐품이 된 덩치 큰 군수품이
많아 몇 개만 처분하면 약초장수가 원하는 돈
쯤은 만들어 줄 수 있었소.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소. 만약 그런 선례를 남기면 쫓겨난 다른 주
민들이 몰려와 돈을 요구할까 봐 겁이 난 거요.
나는 그의 가족을 강제로 쫓아내라고 명령
을 내렸소. 명령은 곧바로 실행됐소. 그는 약
초를 캐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두 딸
들은 군인들의 손에 끌려갔다오. 나는 부관을
시켜 밑에서 연병장 땅 고르기를 하고 있는 탱
크를 동원해 원두막을 깔아뭉개 버리라고 명
령했소. 그때는 점심 무렵이었다오.
점심을 먹고 나서 임시 막사에서 몇 가지 지
시 사항을 내린 뒤에, 해가 질 무렵에 오두막
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소. 그런데 아직도 오두
막이 그대로 자리하고 있는 거요. 난 화가 날
대로 나서 빨리 탱크를 끌고 오라고 호통을 쳤
소.
내가 명령을 내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탱
크 한 대가 올라왔지요. 나는 마지막으로 혹시
나 해서 오두막 안을 살펴 보았소. 맹세컨데
분명 아무도 없었다오. 밖으로 나간 나는 탱크
로 깔아뭉개 버리라고 손짓을 했소.
마침내 탱크가 오두막을 밀고 들어갔지요.
나는 앓던 이가 빠진 듯한 통괘함을 느꼈소.
탱크 굉음 소리와 함께 오두막은 순식간에 무
너져 내렸다오. 탱크는 서너 차례 움직였는데
나는 누군가의 비명소리를 들은 것만 같아 일
단 정지 신호를 내렸소. 그리곤 잔해를 살펴
보았더니 흙벽 사이로 사람의 팔이 보이는 거
였어요.
허겁지겁 들어냈더니 시체가 나왔소. 점심
무렵에 쫓아냈던 두 딸이 서로 꼭 껴안은 채
짓뭉개져 있었지요. 캐터필더에 깔려 내장이
튀어나온 채로.정말 고의는 아니었다오.
나는 너무도 놀라 망연자실 서 있었소. 전시
때 참혹한 시체도 많이 보았지만 그런 시체는
처음이었다오. 시체를 치울 생각도 못 하고 충
격 속에 서 있다가 누군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거였소.
약초장수가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거요.
두 딸의 시체를 보았는지 그의 눈동자가 시뻘
겋게 타오르고 있었소. 고의가 아니었다고 말
하려고 하는데 그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
소. 한 손에 호미를 들고. 심장을 쥐어짜는 듯
한 신음과 함께.
나는 위기감을 느꼈소.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권총을 꺼내 약초장수를 쐈소. 아니, 솔
직히 말한다면 그를 죽여야지만 사건을 조용
히 묻어 버릴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을 한 거요.
일이 틀어진 데 대한 화풀이라도 하듯이 나
는 약초장수를 향해 세 발을 쏘았다오. 그는
죽어 가면서 나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소. 네
놈에게 꼭 복수를 하겠노라고.내 딸들처럼 네
놈의 자식들도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될 거라며.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았던 부관과 탱크병
들에게 이 일을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소. 그리곤 시체는 그 당시 공사중
이었던 창고 건물 바닥에다 묻어 버렸지요.
무사히 부대 공사는 끝났소. 나는 그 뒤로
승승장구했고 명예롭게 군에서 물러났소. 부
대 대치를 직접한 덕분에 난 부대 마을의 상권
을 쉽게 장악할 수 있었지요. 나는 전역 후 고
향으로 돌아가려다가 생각을 바꿔 먹고 이 곳
에 눌러앉았소.
이 곳은 정말이지 나의 고향이나 마찬가지
로 정이 들었던 곳이니까. 내가 여기에 터를
잡자 고위 군인들이 찾아왔소. 아직도 높은 자
리에 있는 동기생과 선후배들에게 인사 청탁
을 해 달라고.
퇴역 군인의 집으로 현역 장성들이 드나드
니 나의 행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소. 어리석
게도 내가 눈을 감을 때까지 이런 행복은 계속
이어질 줄로 알았다오.
그런데 삼 년 전부터 놈이 꿈 속에 나타나기
시작한 거요. 아주 가끔씩.나는 몸이 허해져서
그런 줄 알고 몸 관리를 하는 한편 보약을 먹
었소. 그런데도 잠을 자다가 나는 자주 그놈
꿈을 꾸어야 했지요.
처음에는 한 달에 한 번꼴로 나타나던 놈이
점점 자주 나타났소. 난 내가 죄의식 때문에
놈의 꿈을 꾸는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
게 아니었소. 재작년 봄에 큰아들이 밤낚시를
하다가 저수지에 몸을 던져 투신자살을 한 거요.
난 그 시간에 잠을 자고 있었는데 아들이 죽
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소. 놈이 내 아들을 강
제로 물에 처넣는 장면을.내 아들은 물 속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아무 소
용이 없었소. 놈이 내 아들의 팔을 잡고 놓아
주질 않는 거요. 놈은 나를 보고 기분 나쁜 웃
음을 흘렸소. 그리곤 물 속으로 서서히 들어갔
지요.
놈의 두 눈이 물 속으로 사라지고 나서 나는
벌떡 일어났지요.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
었소. 나는 다급히 자고 있는 운전수를 깨웠지
요. 그리곤 꿈 속에서 보았던 저수지로 달려갔소.
부랴부랴 달려가 가 보니 내가 꿈 속에서 보
았던 것과 똑같은 광경이 펼쳐져 있었지요. 낚
시대 하나는 떨어져 있고, 아들은 보이지 않았
소. 나는 아들을 삼키 저수지 한가운데를 망연
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오.
다음날 유디티를 동원시켜서 아들을 저수지
에서 건져냈소. 내 아들은 수초더미에 칭칭 감
겨 있었다고 합디다. 나는 아들의 시신을 집으
로 들여 놓고 몰래 용하다는 무당을 불러 굿을
했소.
무당은 죽은 아들을 불러내기 위해서 한참
춤을 주더니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떠는 떨어대
는 거요. 그러더니 갑자기 음산한 목소리로,
자식을 잃은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 거였소. 바
로 그 놈, 그 약초장수의 목소리였지요.
나는 무당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어
요. 용서해 달라고.이만 화를 풀라고.그러자
무당은 길길이 날뛰면서 준비한 음식상을 발
로 차 뒤집는 거였소. 나는 살려 달라고 안 할
테니까 내 딸을 살려내라고. 그러면 다시는 나
타나지 않겠다고.
노여움을 풀라고 내가 손이 발이 되게 빌었
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지요. 다른 무당이 말렸
지만 약초장수 신이 실린 무당은 펄펄 뛰면서
집안을 온통 들쑤셔 놓고 집을 나가 버렸소.
굿이 엉망이 된 거지요.
며칠 뒤에 나는 다시 그 무당을 찾아갔지요.
무슨 방법이 없냐고 물어 보려고.그 무당은 몸
이 아프다고 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내 얼굴을
보자마자 손을 휘휘 젓는 거였소. 다시는 굿을
하지 않겠다면서.
나는 그래서 다른 무당을 찾아갔지요. 몇 번
해 보았지만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소. 장군신이니 뭐니 하는 신들이 나와서
조상의 묘자리가 나빠서 그렇다는 둥 괜한 헛
소리만 지껄여 대는 거요.
나는 그래도 행여 자손들이 화를 입을까 그
들이 시키는 대로 모두 했소. 부모님 묘도 합
장을 했고, 부적을 사다가 집 곳곳에 붙이기도
했다오.
그러자 동네에서 소문이 이상하게 나는 거
였소. 소위 퇴역 장군이라는 사람네 집에서 연
일 굿이나 하고, 점장이나 찾아다니니 실망스
럽다는 거지요. 나는 이웃들의 안목도 있고 해
서 모든 행위를 중단했지요. 그리곤 사찰로 등
산을 핑계삼아 약초장수와 두 딸의 명복을 몰
래 빌러 다녔소.
하지만 약초장수의 노여움은 풀어지지 않았
지요. 놈이 힘이 강해진 건지 내가 몸이 약해
진 건지는 모른겠지만 꿈 속에 수시로 나타나
는 거였소. 그러던 어느 날 밤에는 놈이 이번
에는 손녀를 데려가겠다는 거요.
잠에서 깬 나는 깜짝 놀라서 딸을 불렀소.
서울로 보내 놓으면 놈의 힘이 미치지 않을 것
같아 딸네 집에 가 있으라고 보냈지요. 그런데
그 아이는 떠나기 전에 동생 얼굴이나 보고 간
다고 면회를 간 거요. 난 그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소.
손녀가 서울로 간 날부터 나는 계속해서 악
몽을 꾸었다오. 그런데 이번에는 손자가 어이
없게 죽은 거요. 이어서 손녀의 시체가 발견되
고.
군부대에서 온 연락을 받고, 나는 놈이 내
귀여운 아이들을 죽였다는 것을 알았소. 그래
서 수사를 종결시키고 공비의 소행이었다고
발표하라고 한 거요. 그때의 비리가 밝혀져서
는 안 되겠기에.
나는 살만큼 살았소. 이 생에 대해서 더 이
상 미련도 없소. 놈이 나타나 나를 데려가기만
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중이오.
하지만 나 내 개인의 명예는 상관없지만 군
의 명예는 더럽힐 수 없소. 내가 자랑스러워
부대에서 일어난 일들이 세상에 밝혀져,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을 원치 않소. 이
상이오.
엄 장군은 긴 이야기를 마치고 찻잔을 들었
으나 잔은 이미 비워져 있는 상태였어요. 나는
옆에 있는 주전자를 들어 장군의 잔에 차를 가
득 따랐어요. 엄 장군은 찻잔을 들어 하얗게
말라붙은 입술을 적셨죠. 침통한 표정으로.
임성수 씨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다가 이
렇게 말하더군요.
“장군님의 마음은 어느 정도 알겠습니다만
다음 차례는 장군님 차례가 아닙니다. 그토록
강한 힘을 가진 원귀라면 장군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차례로 죽여서 장군님의 피를 말려
죽이려 들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군부대에서 대
대적인 굿이라도 하면 그 원한이 풀어지겠는
가?”
엄 장군이 애원하는 눈빛으로 임성수 씨를
바라보았죠. 임성수 씨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
어요.
“늦었습니다. 인생은 업을 씻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장군님께서는 도리어 업을 쌓았으니
인생 잘못 산 겁니다. 좀더 올바르게 처신하셨
어야지요.”
“다른 방법은 없겠는가?”
“꽃이 피면 지게 반드시 지게 되어 있지요.
죄를 지었으니 당연히 벌을 받으셔야지요.”
“인과응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장군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을 막
기 위해서 제가 수단을 강구해 보겠습니다.”
“그럼, 재앙을 막을 수 있나?”
“막아야지요. 장군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해서야 되겠습니까? 이제
부터라도 제대로 업을 씻으십시오.”
“어떻게 하면 내 업을 씻을 수 있나? 방법을
가르쳐 주게나.”
“죽음이 얼마 안 남은 노인네에게 이런 호화
스러운 집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모아 놓
은 재산은 죽을 때 지고 가시렵니까? 그런 욕
심을 지닌 채 죽게 되면 영계로도 들어가지 못
한 채 이 세상을 떠도는 잡령이 됩니다. 잘 알
아서 처신하십시오. 그럼.”
임성수 씨는 차갑게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
어났지요. 엄 장군이 일어나서 식사라도 하고
가라고 붙잡았지만 임성수 씨는 매정하게 뿌
리치며 집을 나섰어요. 나는 부대로 돌아가는
짚차 안에서 몇 가지 궁금한 점을 물어 보았지요.
“어떻게 엄 장군님에게 그런 과거가 있다는
것을 알았죠?”
“귀신이 선량한 사람을 해꼬지하는 경우는
드물어요. 그를 제거하려 하지 않는 한. 난 그
래서 그 귀신이 가족 중의 누구에게 원한을 품
고 있다고 판단했죠. 그런데 엄 장군을 보고
나서 사연이 있다는 것을 알았죠. 보통 사람들
은 잘 모르겠지만 전 엄 장군의 눈동자를 보고
귀신을 본다는 것을 느꼈어요.”
“엄 장군님은 꿈 속에서 귀신을 만났다고 했
잖아요. 꿈 속에서 귀신을 봐도 눈동자에 드러
나나요?”
“보통 사람들은 악몽은 잠잘 때 꾼다고 생각
하는데 그건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엄 장군
은 저수지에서 아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고 했는데 그건 꿈이 아니에요. 약초장수가 엄
장군의 영혼을 불러내 저수지로 데려간 다음
아들을 서서히 죽인 거죠. 영혼은 깜짝 놀라
다시 몸 안에 들어갔고, 그제사 정신을 차린
엄 장군은 자신이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제가 알기로는 귀신은 물리력을 지닐 수 없
다고 들었는데 이 귀신은 어떻게 해서 물리력
을 지닐 수 있는 거죠? 목을 완전히 등 뒤로 돌
려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아마도 그는 보통 약초장수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귀신은 원래 물리력을 지닐 수는 없지
만 맛과 향은 느낄 수가 있어요. 약초 장수는
기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는 이
산 저산을 떠돌며 약초의 향을 맡으며 기를 모
았던 게 아닌가 싶어요.”
“장장 사십년 가까운 세월 동안 말이죠?”
“그래요. 그는 처음에는 아들이 저수지에 가
까스로 끌어들일 정도의 힘밖에 없었어요. 그
런데 불과 이 년 만에 그토록 강한 기를 모은
걸로 봐서는 살아 생전에도 보통 약초장수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임 선생님은 그 귀신을 무슨 수로
막으시려는 거죠?”
“지금부터 설명할 테니까 잘 들어요.”
임성수 씨는 주머니에서 부적을 꺼냈어요.
그리곤 저에게 주었죠.
“이 부적은 제가 어제 저녁에 쓴 거예요. 우
주에 떠도는 힘을 모아 쓴 거니까 효험이 있을
거예요.”
저는 뭐라고 썼나 궁금해서 부적을 펴 보았
죠. 두 장이었어요. 그런데 예사 부적과는 달
랐어요. 저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서 어머니
가 부적을 자주 옷에 달아 주셨기 때문에 부적
에 대해서는 잘 알거든요.
그런데 그 부적은 제가 지금까지 본 것과는
아주 달랐어요. 붉은 잉크도 아닌 검은 먹으로
‘술(術)’이라고 써 있었지요. 다른 한 장도 똑
같았어요. 제가 부적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
는데 임성수 씨가 말을 이었어요.
“약초장수의 원귀는 자신의 집을 잃은 한이
가장 커요. 원귀에게 있어서 집은 바로 육체
죠. 귀신이 죽어서도 육체 곁을 맴도는 것은
일종의 미련 때문이죠. 그래서 일단은 시체를
찾아내 불에 태워 줘야 해요. 그러면 원귀의
힘이 많이 약해지게 되죠.
그러니 부대로 들어가게 되면 그 창고로 가
세요. 아무 때나 가지 말고 자시(11시 1시)에
가세요. 자시는 원래 귀신들이 활동하는 시간
인데 원한이 깊은 악령들은 반대로 자는 시간
이죠. 그들은 해시나 축시, 묘시에 주로 나다
니는데 이번 악령 같은 경우는 시간에 구애받
지 않는 것 같더군요.
창고에 가기 전에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 나
뭇가지와 생닭을 한 마리 가지고 가세요. 창고
에 들어서면 일단 문 안쪽에다 내가 준 부적을
한 장 붙이세요. 그리고 나서 곧바로 복숭아
나뭇가지를 태우세요. 나뭇가지에 불이 붙으
면 닭의 목을 따서 창고 주변에 닭피를 뿌려
놔요.
악령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거죠. 그 다음
에 시체를 빠른 시간내에 파내세요. 시체를 파
냈으면 재빨리 약초장수의 이마에 남은 부적
한 장을 붙이세요.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절대로 부적을 손상시켜서는 안 돼요. 아셨
죠?
만일 부적이 찢어지거나 하면 엄청난 일이
벌어질 거예요. 그리고 혹시나 해서 주는 건데
이걸 가지고 가세요. 창고에 들어서게 되면 제
일 먼저 이 먼지 덩어리와 그곳의 먼지가 같은
가 확인해 보세요. 만약 먼지가 틀리다면 파
봤자 헛수고예요.”
나는 그가 주는 대로 비닐 봉지에 들은 먼지
덩어리를 받았죠. 그런데 이해가 가지 않는 부
분이 있어서 다시 물어 보았어요.
“그건 왜죠?”
“악령은 주변에 흩어져 있는 기를 모을 때
주로 원심력을 이용하죠. 그래야 빠른 시간내
에 힘을 비축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이 먼지는
바로 원심력에 의해서 뭉쳐진 거예요. 무슨 말
인지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창고에 잠들어 있는 약초장수가
기를 창고에다 모아놓았다 이거죠. 그래서 밖
으로 나가기 전에 흩어진 기를 원심력으로 모
았고, 그 과정에서 먼지 덩어리가 형성됐다는
거죠. 형성된 먼지 덩어리는 악령의 뒤를 따라
다녔고 그러다 악령이 그 여자를 죽일 때 바닥
에 떨어졌다 이렇게 되는 건가요?”
“아주 훌룽해요! 철규 군에게도 초감각적 지
각능력이 어느 정도 있군요. 우린 훗날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난 이만 가 봐야 해요.”
“아니 가시다뇨?”
“운전병, 차 좀 세워 줘요!”
임성수 씨가 외치자 짚차가 멈춰 섰어요. 그
는 차 뒤에 놓인 자신의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렸죠.
“섭섭해하지 마요. 어제 제가 말했잖아요.
저는 이 정도에서 손을 떼겠다고.”
임성수 씨가 불쑥 손을 내밀었어요. 나는 그
의 손을 잡지 않고 그를 따라내렸죠. 그를 그
대로 보냈다가는 큰 후회를 할 것 같은 예감 때
문이었어요. 결국 그 예감은 맞아떨어졌지만.
“사건을 마저 해결해 주지 못하고 떠나서 미
안해요. 내가 이대로 떠나는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에요.”
“그 두가지 이유란 게 뭐죠?”
나는 그가 달아날까 봐 옷자락을 꼭 잡고 물
었죠.
“첫번째 이유는 내가 다른 세계에 발을 디뎌
놓았기 때문에 그 일을 직접하게 되면 지금까
지 내가 노력한 것이 허사가 돼요. 더 이상은
묻지 말아 주세요.”
“좋아요. 그렇다면 두번째 이유는 뭐죠?”
“두번째 이유는 만약의 경우에 사고가 나게
되면 저에게 닥칠 불행 때문이에요. 군대에서
일어난 일을 군인이 해결해야 해요. 그래야 책
임 소재가 확실하죠. 그런데 만약에 민간인인
내가 그 일을 하려다가 자칫해서 불상사라도
일어나게 되면 저 혼자 뒤집어써야만 하죠. 억
울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아무도 민간인인 저
의 편에 서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요.”
첫번째 이유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두번째
이유는 충분히 납득이 갔다. 나는 그를 순순히
보내 주는 쪽으로 입장을 굳혔다.
“고마워요. 많은 도움을 줘서.”
“시체를 불에 모조리 태울 때까지 방심하면
안 돼요. 부적이 떨어지지 않게 특별히 조심해
야 해요. 아셨죠?”
임성수 씨는 마지막 당부를 하고는 몸을 돌
렸어요. 그가 점점 멀어져 가자 두려움이 몰려
들기 시작했어요. 제가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의혹이 들었죠. 사실 임성수 씨에게 전적
으로 의지하고 있었는데 제 앞으로 일이 떨어
지자 불안하기 짝이 없었어요.
저는 일단 부대로 복귀했어요. 연대장과 고
급 장교들은 연대장실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죠. 저는 상갓집에서 들은 엄 장군의 과거
는 모두 생략하고 임성수 씨가 사라졌다는 것
만 보고했어요.
그러자 모두들 술렁거렸어요. 연대장은 실
망하는 빛이 역력했죠. 저는 이어서 임성수 씨
가 알려 준 방법을 상세히 말했죠. 그러자 연
대장은 준비물을 빠짐없이 챙겨 두라고 지시
를 내렸어요.
결국 이 일을 어느 소대에서 맡아서 처리하
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이야기를 주고받더군
요. 어느 소대에서 맡게 될까 궁금하기도 해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죠. 그런데 대뜸 연대장이
나에게 저녁을 먹었느냐고 물어봐서 안 먹었
다고 했더니, 이중대 중대장에게 장교 식당으
로 가서 밥을 먹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장교 식당으로 가서 허기진 배를 채웠
죠. 다시 연대장실로 갔더니 일단 내무반으로
복귀해 있으라는 거예요. 다시 부를 테니 이
일을 절대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라는 거였죠.
아홉시쯤 되어서 이제쯤 호출하겠구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 소대장이 들어왔죠. 임
소위님이 내게 와서 우리 소대에서 극비리에
이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고 하더군요.
임 소위님은 R.O.T.C 장교인데, 저랑 같은
학교 출신이라 단둘이 있을 때면 저에게 아주
잘해 줬죠. 임 소위님은 나와 세 명의 병사를
피엑스로 데려가서 긴장을 풀라고 커피를 사
줬죠.
다른 병사들에게 무슨 일을 하는 건데 일이
끝나면 2주 동안 휴가를 보내 준다는 거냐고
묻더군요. 그러자 소대장이 나서서 그저 시체
만 파내면 되는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키더군요. 나는 모든 사실을 이야기해
줄까 하다가 함구하라는 연대장의 당부도 있
고 해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죠.
그들은 더 이상 물어 보지 않고 2주짜리 포
상 휴가를 받으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떠들기 시작했죠. 내가 피엑스에 앉아서 빵과
과자를 먹고 있는 사이에 소대장이 선임하사
와 상병 한 명을 데리고 연대장실에 들렀다가
나왔어요. 손에는 복숭아 나뭇가지와 닭 한 마
리, 곡괭이, 삽, 손전등, 작은 기름통 같은 것
이 들려 있더군요.
일을 막상 시작한다고 하니 저는 솔직히 조
금 걱정이 됐어요. 하지만 소대장이나 다른 병
사들은 휴가 기분에 들떠 있었죠. 저흰 짐을
나눠 들고 임성수 씨가 시킨 대로 문제의 창고
로 올라갔어요.
물자를 비축해 두는 창고였는데 부대 구석
에 처박혀 있더군요. 너무 구석에 위치해 있어
서 일이 있지 않는 한 지나갈 일도 거의 없는
곳이었어요. 그러니 신병인 저로서는 당연히
처음 가는 장소였죠.
같이 올라간 고참들에 의하면 검열 나올 때
만 청소 정도 해 놓고 그 이외에는 거의 들릴
일이 없는 곳이래요. 판초 우의나 군용 담뇨
등을 비롯해서 전시 상황에 쓸 물자를 저장해
두는 곳이라 하더군요.
창고에 도착하니 열한시 십분이 조금 지나
있었어요. 소대장이 열쇠꾸러미를 꺼내 문을
땄어요. 자물쇠가 녹슬어 잘 열리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한참 뒤에 끼익 하는, 귀에 거슬
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어요.
문을 열자 쾌쾌한 창고 냄새가 났어요. 40년
전에 지어진 창고인데다 또 애초부터 창고로
지어진 곳이기 때문에 전등 같은 것은 아예 없
었어요. 밖에는 별빛이라도 있어 그래도 좀 뭐
가 보였지만, 창고 안은 글자 그대로 한치 앞
도 안 보일 정도로 깜깜했어요.
소대장이 손전등으로 휘이 들러보았지만,
차곡차곡 쌓인 박스밖에 보이는 것이 없었어
요. 저는 솔직히 창고 안으로 발을 들이기가
무서웠어요. 그 창고 안에 무시무시한 힘을 지
닌 악령이 누워 있다고 생각하니 영 내키지가
않았어요.
누군가 등을 떠밀더군요. 뭘 꾸물거리고 있
느냐면서. 저는 그래서 길게 심호흡을 하고 안
으로 들어갔죠. 안으로 들어선 순간, 전신을
조여 오는 듯한 음험한 한기에 깜짝 놀랐어요.
싸늘한 기운이 창고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죠.
다른 사람들도 춥다고 몸서리를 치는 거였
어요. 누군가 담배 한 대씩 피우고 하자고 제
의했어요. 소대장이 허락을 하자 모두들 흩어
져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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