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면 눈이 먼다는 말이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느 여자에게 반한 뒤,
매일 그 사람을 생각하며 문자를 보냈다.
돌이켜보면 스스로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마치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 같았달까..
몇 달 정도 지나 사귀기 시작한 다음에는 더욱 심해졌다.
그 여자가 부탁하면 뭐든지 했다.
큰 돈도 아깝다는 생각 없이 건네줬고, 보고 싶다고 하면 휴가까지 쓰고 달려갔다.
평범한 커플이라면 그 정도까지 될 일은 없겠지, 보통.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모르는 남자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쪽지를 건네주면서
[R이라는 사람 죽이고 와.] 라고 말했다.
나는 아무 의문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가방에 식칼을 넣고 밖으로 나섰다.
묘하게 신이 나서 달려가는데, 너무 신을 냈는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무릎이 왕창 까지고 머리도 살짝 부딪혔다.
그 순간, 지금까지 돈을 갖다 바치고
이번에는 살인마저 서슴지 않으려는 스스로가 너무나도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 그녀는 없었다.
그 후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녀의 사진도, 입었던 옷과 신었던 구두도 다 남아있지만
어쩐지 처음부터 그녀라는 존재가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대로 그 남자네 집까지 갔다면 나는 아마 그 남자를 죽였겠지.
출처: VK's Epitap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