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 저는 집안 사정으로 시골에 살고 계시는 할머니 댁에서
시내의 고등학교까지 통학을 하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댁은 일자형으로 된 한옥집이었습니다.
가방이라는 집 맨 끝 쪽의 방이 제 방이었는데,
제일 넓고 깨끗한 데다 여름에도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방이었습니다.
그때는 한여름이라 후덥지근한 열대야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할머니는 서울에 사시는 작은아버지 댁에 가 계셨고,
큰 방에서는 아버지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저는 제 방에서 열대야에 시달리며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새벽 2시쯤 저는 보고 있던 TV를 끄고
선풍기 바람을 쐬며 잠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쓰던 선풍기는 약간 고장이 난 상태였는데,
회전 버튼을 누르면 회전 도중 머리가 잘 움직이지 않아 딱딱 소리가 났었습니다.
시골이다 보니 밤에는 조용해서 다른 소리도 없고,
후덥지근한 날씨 때문에 뒤척이고 있다 보니
그 소리가 무척 거슬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 3분 정도 지났을까요?
갑자기 어디선가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흑흑 울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리가 싶었지만 곧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귀를 세우고 집중했습니다.
그때, 숟가락으로 쇠 그릇을 긁는 소리와 함께
서럽게 울고 있는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배고파요. 밥 좀 주세요, 네? 흑흑.. 배고파요. 밥 좀 주세요, 네? 흑흑..]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의 털이 쫙 곤두섰습니다.
당시 저는 잠에 취해있거나 반쯤 잠든 것도 아니었고,
멀쩡한 정신으로 일어나 있었습니다.
집에서는 개를 15마리 정도 기르고 있었는데,
제 방에서 3미터 근처에 개집이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우리 집 개들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조용히 있고,
제 귀에는 그 소리가 계속 들려왔습니다.
소리는 벽 쪽에서 들렸는데,
형체도 없이 계속 소리만 들려오니 정말 미칠 것 같았습니다.
정말 온몸이 굳어 있는 와중에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데,
무조건 여기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베개를 품에 안고 나갈 기회만 엿보다,
선풍기를 끈 뒤 마루로 뛰쳐나가 아버지가 주무시던 큰 방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무척이나 더운 날이었지만
그날 저는 아버지 옆에 딱 붙어서 잤습니다.
아버지 곁에 있어서인지 아까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저는 마음을 가다듬고 잠을 청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저는 아버지가 깨우셔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누군가가 우는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알고 보니 울고 있는 것은 저였습니다.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굉장히 슬픈 꿈을 꾸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마음이 무척이나 평안해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도대체 그때 밥그릇을 긁으며 애처롭게 울던 소녀는 누구였을까요?
아직도 그 슬픈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합니다.
출처: VK's Epitap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