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집은 부모님이 그냥 풀어 키우시는 스타일이라,
서울로 이사 오고 난 5살 때부터 혼자 놀이터에 나가 놀았습니다.
지금이야 놀이터가 휑하지만,
당시에는 아이들을 데려 나와 놀게 하시는 부모님들이 많았던 데다
아파트 바로 앞에 있는 곳이니 괜찮다고 생각하셨던 거겠죠.
그 때서울에서 처음 사귄 친구라고 기억되는 아이가 있습니다.
당시 유치원 선생님 말씀으로는,
저는 특정한 친구와 엄청 친해지기보다는 두루두루 친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마 제일 친했던 건 그 친구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소꿉친구라고 생각되는 아이들도
7살 때 유치원을 그만두고 논술과외를 함께 하면서 친해진 거니까요.
하여튼 그 남자아이는
저희 유치원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놀이터에서만 만났거든요.
하지만 이상할 것은 없었습니다.
근처에 유치원만 두 개인데다가,
멀리 버스 타고 다니는 유치원에 보내는 아줌마들이 그때도 있었거든요.
유치원이 끝나면 집에도 안 들르고
바로 놀이터로 가서 그 남자아이와 놀았습니다.
솔직히 지금 생각하면 이상합니다.
제가 놀이터에 오기 전부터 그 남자애는 모래밭에서 절 기다리고 있었고,
없어도 먼저 놀고 있으면 금방 등장했거든요.
정말 사정이 안될 때를 제외하고는 매일 함께 놀았습니다.
엄마도 나중엔 유치원 끝나도 놀이터에 있겠거니 하시면서
아파트 복도에서 제 이름 한 번 불러 확인하기만 하실 정도였죠.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남자아이가 문득 [우리 집에 가서 놀자!]라고 제안해왔습니다.
저야 환영이었죠.
친구 집에 가서 노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거니와,
서로 집에 초대하는 것은 처음이었거든요.
하지만 조금 쑥스러웠기 때문에 쭈뼛쭈뼛하고 있으니,
엄마도 널 데려오랬다면서 제 손을 잡아끌더라고요.
결국 걔를 따라 저희 아파트 단지를 벗어났습니다.
저도 기대가 되었습니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간 건 이번에 처음이었거든요.
그 애의 손을 잡고 모르는 길을 지나
모험을 하는 기분으로 그 애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 애의 집은 저희 집과 달리 주택이었습니다.
대문을 여니 진짜 하얗다고 탄성이 나올 듯한 커다란 개가 있었습니다.
개가 절 보고 짖으니 안에서 뭔가를 소리치며
아줌마 한 분이 나와 개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남자애 뒤에 숨은 절 보더니 웃으시더군요.
부러웠습니다.
저희 집은 개는커녕 물고기 하나 키우지 않고
우리 엄마는 저렇게 상냥하게 예쁘지 않았거든요.
어머님은 저를 반기시면서 집 안으로 이끄셨습니다.
아마 이때부터 친구의 표정이 조금 뭔가 불편해 보였던 것 같습니다.
눈치 없는 저는 어머님이 가져다주신 간식을 먹으며
그 애의 방에서 마음껏 뛰놀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창밖을 보니 날이 어둑어둑해진 겁니다.
아주 밤은 아니고 슬슬 해가 지는 초저녁 정도의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방문이 열리더니 어머님이 자고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친구랑 밤늦게까지 놀 수 있을 테니 저는 마냥 좋았습니다.
제가 알았다고 하자, 어머님이 이불을 꺼내오시겠다며 문을 닫고 나가셨습니다.
그때, 남자애가
제 손목을 잡았습니다.
[안되겠어.]
느닷없는 소리에 그 애를 보자
엄청 화난 표정이었습니다.
저희 오빠처럼 무표정한 얼굴이라 순간적으로 겁이 났습니다.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는 착한 친구였는걸요..
얘가 왜 그러나 이해를 못 하고 있으니,
절 끌고 방에서 나가 눈치를 보면서 현관 밖으로,
그러니까 마당으로 나가더군요.
그리고 개를 피해 집 옆으로 돌아가더니
절 보고 [넌 안되겠어. 안돼.] 이런 말을 하더니
덤불이었나 돌이었나를 치우더라고요.
그 뒤에는 구멍이 하나 있었습니다.
여전히 무슨 일인지 모르는 제가 뒤에 서있자,
남자아이는 절 구멍으로 잡아끌더니 나가라고 하는 거예요.
왜냐고 물으니까
[너희 엄마가 걱정하실거야.]라고 말하더라고요.
그제서야 엄마 생각이 났습니다.
심지어 말도 안 하고 왔으니 엄청 혼날 것 같았습니다.
급한 마음에 대문은 생각도 못 하고
구멍으로 나가려고 움직이는데
걔가 뭘 손목에 끼워주더군요.
파란색 팔찌였습니다.
비즈인지 돌인지 그런 게 꿰어진 팔찌였죠.
그리곤 웃기에 저도 인사를 건네고
구멍으로 나와서 왔던 길 쪽으로 가던 와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생각이 나는 게,
걔네 엄마한테 인사를 안 하고 온 거죠.
엄마가 인사는 잘 하고 다녀야 한댔어요.
어차피 대문을 지나쳐 가야 하니까
초인종으로 인사드리고 가자는 생각으로 가는데
걔네 집이 무척 소란스럽더라고요.
그렇게 상냥하던 아줌마가
[어디 갔어! 어디다 놨어!] 하고 소리 지르는 게 들리고,
개는 대형견 특유의 큰 울음소리로 컹컹 짖어댔습니다.
저는 어린 마음에 너무 놀라 울면서 막 집으로 달려갔죠.
그리고 다음에 눈 떴을 땐 병원이었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작은 오빠가 학교 갔다 돌아오는데,
놀이터 근처에 사람들이 모여있더래요.
가보니까 중간에 제가 쓰러져 있었다나요.
오빠들이 놀라서 엄마 불러오고
그대로 병원으로 직행했답니다.
문제는 오빠가 절 발견한 날이
제가 그 애랑 그 애 집에 갔던 날의 낮이었다는 겁니다.
저는 하루 종일 걔네 집에서 놀다가
해가 지고 나서야 나왔는데 말이에요.
그리고 제가 눈을 뜬 건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후였다고 합니다.
저는 수요일에 분명히 그 친구네 집에 갔다고 주장을 했지만,
오히려 엄마는 그 친구가 누구냐고 하시더라고요.
나중에 엄마께 여쭤보니 목격자분들도
제가 혼자 있다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쓰러졌다고 했다고 합니다.
오빠도 상상의 친구다, 꿈꾼 거다 뭐 이런 얘기를 하고요.
하지만 저는 그 아이가 상상의 친구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건 이제 성인인 지금에 와서도 여전합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정신을 차렸을 때,
그 애가 줬던 팔찌가 제 손목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사준 것도 아니라
엄마도 그건 어디서 난 거냐고 물으셨을 정도죠.
그 이후로 전 병원 침대 신세를 져본 적이 없습니다.
도대체 그 아이는 누구였고,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어째서인지 그 아이에게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생각해보니 그 아이가 보내주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지 못했을 것 같거든요.
한참 지난 어릴 때의 일을
갑자기 꺼낸 이유는 딱히 별 건 아닙니다.
늘 지니고 다녔던
그 팔찌의 끈이 얼마 전 끊어져 버렸거든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언젠가 이 글을 쓸 수 없기 전에
누군가에게 말해놓고 싶었어요.
출처: VK's Epitap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