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가 유럽을 석권하는 과정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점 중의 하나는, 바로 프랑스가 독일의 단 한 번의 작전에 의해 너무나도 허무하게 무너졌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독일의 ‘낫질(Sichelschnitt) 작전’으로 프랑스의 방어선은 허무하게 무너졌고, 그 이후 불과 한 달 만에 프랑스는 항복하게 된다. 사실 독일과 프랑스의 전력을 비교할 때, 프랑스 육군의 규모나 무장은 새롭게 재무장한 독일 육군에 비해 분명히 우위에 있었다. 프랑스는 병력과 편제의 규모나 전차 및 야포의 수 등 대부분의 면에서 독일보다 우위에 있었다(전차 3000:2400, 야포 11,200:7,700). 더욱이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유럽에서 강력한 육군을 보유한 국가로서 역사에서 큰 족적을 남겨왔기에 장기간 무장해제를 당했다가 재건된 지 얼마 안 되는 독일 육군에게 맥없이 무너졌다는 사실이 의아하기까지 하다. 이 책은 그 원인과 결과를 설명해줌으로써 이런 의문점을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게 풀어주고 있다.
당시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매우 분열된 상태였다. 그리고 국민과 정치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피해를 경험하면서 전쟁을 두려워하고 끝까지 전쟁을 피하려고 했었다. 본질적으로 유럽을 제패하려는 히틀러의 의도와 목표를 무시하고 전쟁을 피하기 위해 지속적인 협상을 통해 양보를 거듭했던 영국과 프랑스의 외교는, 히틀러의 야망을 달래거나 잠재우지 못하고 오히려 독일에게는 더 큰 야심을 품게 하고 재무장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자원을 허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너무나도 큰 전략적 실수였다. 이것은 “전쟁은 전쟁을 준비하는 자를 피해가고, 전쟁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달려든다”는 격언이 정확히 적용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독일은 매우 짧은 시간에 독일군을 재건하여 무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에게 자신감과 함께 새로운 나라에 대한 비전을 심어주어 매우 공격적이고 기동력을 갖춘 새로운 육군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 장군들은 기술의 발전 흐름과 새로운 전략개념을 이해하는 데 등한시했다. 그들은 과거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집요한 공격을 막아냈던 참호와 요새를 이용한 방어전에 지나치게 의존했고, 이런 생각은 마지노선으로 분명하게 구체화되었다. 엄청난 예산이 투입된 이 무용지물은 결과적으로 프랑스군의 무장이나 훈련에 들어가야 할 자원을 허비하게 함으로써 프랑스가 전쟁에서 패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예를 들면, 프랑스군은 전차를 배치하면서 결정적으로 필요한 무전기를 예산 부족으로 설치하지 못했다. 또한 프랑스 공군의 전력은 시대에 뒤떨어진 구형을 포함해도 독일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 반면 독일은 기술의 발전 흐름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 흐름에 맞춰 군을 새롭게 육성했다. 그 핵심은 바로 공군과 기계화부대였다. 독일 공군은 유일하게 프랑스에 비해 우월한 전력을 갖춘 군이었다(항공기수 3,000여 대:1,200여 대). 더욱 결정적인 것은 새로운 육군인 기계화부대를 편성하고 운용하는 데 있어서 독일이 그들의 무기에 맞는 새로운 전술교리를 개발하여 집단 운용한 것과는 달리, 프랑스는 독일보다 월등한 전차 전력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개념에 매여 분산 운용함으로써 독일의 기계화부대의 집중공격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변화의 흐름을 읽고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진리는 동식물에게든, 기업에게든, 국가에게든 변함없이 적용된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프랑스는 독일의 선전전에 의해서도 패배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괴벨스가 주도한 독일의 선전전은 매우 교묘하고 집요해서, 1939년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도 전쟁이 선포된 상황인데도 독-프 전선에서 프랑스군은 독일군에 대해 그다지 긴장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 중 한 예로, “프랑스 병사는 고작 일당 50상팀밖에 못 받는데 영국 병사들은 하루에 17프랑이나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프랑스를 전쟁에 끌어들인 자가 바로 영국인데, 그들은 고작 10개 사단밖에 보내지 않았다!(당시 프랑스는 대 독일 전선에 100개 사단 정도 배치했다)”고 선전하여 동맹군 간의 이간을 꾀했다. 전반적으로 프랑스군의 사기는 독일군에 비해 매우 낮았고 전쟁 의지가 약했던 것은 많은 부분 독일의 선전전의 결과였다.
마지막으로 이 프랑스 전투에서 독일과 맞서 싸운 국가는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4개국이었다. 그러나 이들 동맹국들은 제대로 된 공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쟁 전반에 걸쳐 4개국은 따로 놀았고, 특히 마지막 국면에서 영-프 양국군 간의 공조 미비는 충분히 반격 가능한 기회를 여러 번 놓치게 만들었다. 이런 공조의 미비는 프랑스 공군과 육군 사이에서도 나타났다. 주요한 작전계획이 공군에게는 제때에 전달되지 않아, 많은 반격 작전이 공군의 지원이 없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따라서 모든 반격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독일-프랑스 전쟁의 교훈은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과 오버랩되면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당시 프랑스와 현재 우리나라의 모습이 너무나도 비슷한 면이 많아서 몸서리쳐질 정도로 아찔해지곤 했다. 정치적 분열,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끝없는 양보, 불바다 위협과 “그럼 전쟁을 하자는 거냐”는 정치인들의 막말들, 선전전에 온 나라가 놀아나는 상황, 동맹국과의 사이를 이간질하고 역사상 가장 긴밀한 공조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시도, 북한의 비대칭 전력에 대한 무방비 상태인 군 전력 구조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
또 우리나라가 프랑스 전투에서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은, 프랑스 육군 최고사령관이었던 가믈랭 장군의 어처구니없는 결정이다. 월등한 전력을 가진 독일 공군의 보복공격을 두려워한 가믈랭 장군은 침공하는 독일군 집결지에 대한 연합군 공군의 공습을 불허하고 공군의 활동을 ‘요격과 정찰’에만 국한시켰다. 이런 비겁하고 어리석은 결정은 프랑스군의 엄청난 피를 흘리게 했고, 결국 패배를 가져왔다. 이런 모습이 우리나라에서도 재현되지 않기를 바란다. 사실 이미 비슷한 모습을 우리는 여러 번 보아왔다. 북의 도발을 목숨을 바쳐 저지한 용사들을 머쓱하게하는 정치권의 행동과 이를 제대로 지휘한 지휘관을 칭찬하기보다는 한직으로 밀어내어 예편시키는 정부, 이런 모습에 환멸을 느껴 나라를 떠났던 유가족들까지 ......
이 책을 통해 패배한 자의 교훈을 통해 같은 패배를 겪지 않을 수 있는 지혜를 우리나라의 많은 이들이 얻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전쟁은 전쟁을 준비하는 자를 피해가고, 전쟁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달려든다. 이 말은 너무 지겨우면서도 새롭게 다가오죠. 아버지, 옛날 교련 선생님 그외 기타 미디어계통에서 수십번 수백번 들어서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새롭게 인식되는 이유는 뭘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