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 위로부터] . 침몰한 전함 후드의 승조원들 1939 년 촬영 . HMS 로드니 . 비스마르크 주위로 떨어지는 16인치 함포탄들의 물보라 . 도르셋셔어 에 의해 구조되는 비스마르크의 생존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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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7시가 넘어, 아크 로열은 갑판상에 15대의 소오드피쉬 함재기들을 다시금 공격에 내보내기 위해 정렬해놓고 있었고, 이들 함재기들은 이제 뭔가를 쳤을 때만 작동하는 구형의 믿을만한 충격폭발식의 뇌관을 장착한 어뢰들을 장비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함재기들은 흔들리는 함상에서 힘겹게 출격했고, 폭풍우 치는 하늘을 뚫고 올라갔다. 그들은 셔필드를 지나갔는데, 함정에서 적함 정면 12마일 전방 이라고 신호가 올라왔다. 약 반시간 후, 비행기들은 비스마르크를 발견하지 못하고 엉뚱한 방향에서 돌아왔는데, 40노트의 강풍 속에서 80노트 속력의 비행기로는 항법에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다시금 적을 찾아 사라졌고, 이번에 셔필드는 대공포화가 터지는 것을 보게 된다. 대형함포들의 화염과, 4문의 15인치 함포 일제사격의 소리는 셔필드에게 불안스럽게 가깝게 들려왔다. 셔필드는 연막을 치고 반전했으나, 비스마르크가 어렴풋한 섬광 속에 우현으로 변침하며 북북서로 도는 것 같은 모습을 보았다. 셔필드는 이 움직임을 보고했고, 거의 같은 시간에 함재기 편대장은 “명중탄 없는 것으로 추정” 이라고 보고했고, 토비 경은 셔필드의 보고가 잘못 되었다고 판단했다. 비스마르크는 남서쪽으로 향하면 안전지대에 도달 할 것이다. 반대쪽을 향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빈 함장과 구축함들의 임무는 전함을 보호하는 것이었지만, 비스마르크가 관측되자마자 이들은 적을 향해 침로를 변경해서 좋지 않은 해상상태에서 낼 수 있는 최고속력으로 비스마르크를 향해 질주해 갔다. 저녁 10시 50분, 어둠 속에서 그들은 비스마르크와 조우하게 된다. 거의 같은 시각, 아크 로얄로 복귀하는 소오드피쉬의 승무원들은 여러 질문을 받게 되고, 함장은 편대장이 잘못 보고했다고 다시 보고하게 된다. 어뢰 한발이 명중 했던 것이다. 다른 항공기들이 이제 비스마르크가 침로를 변경하는 중이라고 보고해오고 있었다. 자정 무렵이 되어서야 의문이 풀렸다. 복귀하는 정찰기의 보고로는 두 번째 명중탄이 비스마르크의 함미 부근에 피격되어, 함정은 크게 두 번 원을 그리며 선회를 한 후 멈추었다는 것 이다. 분명 어뢰가 비스마르크의 치명적인 부분인 타 또는 스크류, 아니면 둘 다를 손상시킨 것이 틀림 없었다.
이제 이야기가 맞아 들어갔다. 토비 경은 새벽이 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으며, 빈 대령에게 그날 밤 동안 계속 비스마르크와의 접촉을 유지하도록 지시했다. 단지 걱정이 하나 남아있다면, 모든 대형 함정들이 구축함들의 대 잠수함 방어망 없이 잠수함활동 해역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분명 독일군측에서 반격을 위해서 잠수함대를 보낼 것이었고, 사실 그랬지만 이들은 잘못된 곳으로 보내지고 있었다. 한 척의 잠수함은 대서양 패트롤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항공모함 아크 로얄이 서서히 자신의 함수 앞을 지나는 것을 보게 되지만, 이미 모든 어뢰를 소진한 후였다. (이 잠수함은 U-556으로, 비스마르크와는 장난 삼아 자신들이 항상 지켜주겠다는 스폰서 쉽을 맺었던 특별한 인연이 있던 함정이었으나 결국 도와주지 못한 비화를 가진 함정입니다. - 역자 주 : 이 잠수함의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구축함들은 그 날 밤 동안 거친 파도 속에서 비스마르크 주위를 선회하며 남아있었는데, 짙은 어둠 속에서의 레이다 통제 함포사격을 받은 첫 함정들이 되는 유쾌하지 못한 경험을 하게 되지만, 피격되는 함정은 없었다. 5월 27일 여명이 박아올 때, 비스마르크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고, 여전히 북쪽으로 천천히 불규칙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킹 조지 파이브와 로드니가 포격을 위해 다가왔다. 8인치 함포의 노폭과 자체판단으로 선단 호위를 떠나서 사냥에 참여했던 도르셋셔 (Dorsetshire) 도 참여했다. 오전 8시 47분, 로드니가 포격을 개시했고, 2분이 지나자 킹 조지 파이브와 비스마르크도 포격을 주고 받기 시작했다.
어뢰가 조타기를 불능으로 만들었을 때부터, 비스마르크의 승조원들은 자신들에게 희망이 없다는 사실과, 아침이면 대부분 죽음을 맞이하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더할 나위 없는 결심으로 응전했고, 마지막 1문의 함포가 사그라질 때까지 싸웠다. 비스마르크는 너무 튼튼하게 건조되었기에, 역으로 승조원들의 죽음의 고통은 길고 끔찍했다. 두 시간에서 10분이 모자라는 시간 동안, 비스마르크는 셀 수 없는 16인치 (406 미리), 15인치 (381 미리), 8인치 (203 미리)의 포탄의 비를 맞아냈다. 영국함정들의 피격은 없었으며, 비스마르크의 사격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흩어져 갔을 뿐 이었다. 하나 둘씩, 비스마르크의 포탑이 침묵해갔고, 오전 10시가 되자 아무런 반응이 없이 떠 있는 폐선이 되었다. 마스트와 연돌은 날아가 버렸고, 함포들은 제각기 다른 방향을 향하며 죽어 있었다. 함선의 내부는 화염의 지옥이었다. 넘실거리는 화염이 피격된 구멍을 통해서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항복하지도, 침몰하지도 않았다. 10시에 로드니가 3천 야드 (2,750 미터) 거리에서 9문의 16인치 함포 일제사격을 가했다. 또한 어뢰도 발사했는데, 아마도 역사상 전함이 다른 전함에 어뢰를 발사한 유일한 경우 일 것이다. 노폭도 참여했다. 종말이 다가오면서, 갑판 위를 뛰어다니는 사람들과 바다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보이고 있었다. 비인격화된 함정을 상대로 한 전투가 다시 인격화 되고 있었다.
오전 10시 15분, 킹 조지 파이브와 로드니는 연료유 부족으로 인하여 모항을 향하여 급하게 반선하여 갔다. 토비 경과 다른 모든 이들은 그들이 비스마르크를 침몰 시킬 수 없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토비 경은 예하 함정들에게 누구든 어뢰가 남아있으면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도르셋셔 가 부근에서 어뢰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함정이었기에 이 전투함은 아주 가까이 근접하여 한쪽 현측에 한발을 발사하고 일부러 다른 쪽으로 빠르게 돌아가서는 한 발을 더 발사했다. 아직도 깃발을 휘날리며 떠 있던 비스마르크는 이제 천천히 좌현쪽으로 기울어져가다가 전복되어서 사라져갔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같은 시간 오전 10시 15분, 비스마르크의 기관장인 게르하르드 유낙 Gerhard Junack 중령은 배를 침몰시킬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준비를 마치고 갑판위로 올라가자, 자기가 살아남은 최고 선임장교 인 것을 알게 되었다. 중령은 살아남은 자들을 모아 그룹을 짜고, ‘조국만세 Sieg Heil 지크하일’ 을 세 번 외친 후 퇴선명령 ‘Abandon Ship’ 을 내렸고, 배가 뒤집어 질 때 힘겹게 탈출해서 침몰하는 배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 역자 주)
갈라진 바다위로는 헤엄치며 떠있는 사람들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도르셋셔는 이들 구조를 위해서 구축함을 불렀다. 구명정을 진수하기에는 파도가 너무 거칠었기에 이들은 밧줄과 그물을 내려줬다. 불행히도 대다수의 생존자들이 밧줄을 타고 오르기에는 너무 심하게 부상당했거나 지쳐있었으나, 두 척의 함정은 아마도 비스마르크 승조원의 10분의 1 가량인 110 명을 구조해냈다.
이 전투는 함정과 항공기의 발전상에 있어서 이전에도 앞으로도, 보기 힘든 아주 독특한 경우로서, 첫 시작부터 끝까지 무려 3,000 마일 (4,800 키로)의 전역을 이루었고, 단 한 척의 전함을 잡기 위해 다섯 척의 전함, 두 척의 항공모함, 약 열 척의 순양함, 스무 척의 구축함, 그리고 대략 50여 대의 항공기가 대서양 전역을 걸쳐 동원되었었으나 거의 실패할 뻔 했었다. 치명적인 실수도 있었는데, 후드의 함수 주포만을 이용한 공격, 프린스 오브 웨일즈 포탑의 고장 (킹 조지 파이브 도 고장이 있었다), 기함에서의 잘못된 위치산정, 본부에서 이를 바로잡지 않았던 태만, 아크 로얄 함재기들의 우군함 셔필드 공격 등이었다. 이런 모든 실수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여전히 파도 위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은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거대한 전함은 이제 사라져 가는 과거의 무기가 되고 있었고, 항공기가 다가오는 미래의 무기가 되고 있었다. 전함이 20 마일 거리의 공격을 할 수 있다면, 항공모함은 심지어 소오드피쉬의 시절에서도 100 마일을 넘게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자매함 텔피츠 한번도 대양으로 나가보질 못하였는데, 영국의 항공기들이 노르웨이의 해안에서 이 전함을 서서히 두들겨 부셔나갔기 때문이었다. 역으로, 1941년 싱가폴에서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리펄즈는 일본의 항공기 공격에 90분 만에 격침해버리고 마는데, 이 사건으로 영국은 스페인 무적함대 (Armada) 와의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로 믿어온 거함거포주의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