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해군
U-보트
독일군은 1919년 ‘베르사유조약’으로 잠수함의 건조가 금지되었으나 나치스의 재군비에 따라서 U-보트의 건조를
재개하였다. U-보트는 대량 생산이 가능하였고, 무음(無音) ·급속 잠항능력이 뛰어났던 우수한 잠수함으로 제1차 세계대전
때는 200∼300t급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1,000t급 이상의 것도 출현하였다. 2차대전 독일군의 주력이었던
U7형은 수상배수량 790t, 속력 17kn, 항속거리 1만 2000km이며, 어뢰발사관 5기를 장비하고 있었다.
2차대전 전쟁초기 연합군을 상대로 활약한 U-보트들은 대전초기 월간 수십만 톤의 연합군 상선을 격침하였는데 이는
연합국의 선박선조능력을 상회하는 격침전과였다. 대전 중 U-보트는 157척의 호위함과 2603척의 연합군 선박을
격침하였으며 총 격침 톤수는 1350만 톤에 이른다. (군함 ·상선 5,150척(총톤수 2157만 726t)격침)
그리고 독일해군의 U보트와 전투를 벌인 미 해군은 태평양과 대서양에서 그동안의 전통적인 해전과는 완전히 상이한,
전혀 새로운 형태의 전투를 경험하게 된다.
특히 대규모 항공전으로 해전의 승패가 판가름 나던 태평양과는 달리 소수의 잠수함과 수중에서 벌이는 게릴라식 전투는
완전히 새로운 전술과 무기들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U-보트에 극심한 피해를 입었던 연합군은 적극적인 대잠무기 개발과
새로운 전술을 개발하여 U-보트의 공격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 개발에 태만하고 작은 승리에 안주해 있던 독일군 수뇌부의 판단 착오로 대서양의 전세는 연합군
측으로 역전되었다. 그리고 대서양에서 연합군의 승리의 이면에는 영국해군의 활약이 있으며 U-보트의 활략에 민감해져
있던 미 해군은 이후 잠수함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전쟁기간동안 연합군을 괴롭힌 U-보트는 총 1,162척이 건조되어
그중 786척이 손실되었으며 49000면의 잠수함 부대원 중 28000 명이 전사하고 5000명이 포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