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컴퓨터 Z3, 컴퓨터의 선구자 콘트라 쥬제

행동반경1m 작성일 07.04.17 21: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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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하워드 에이킨'의 '마크 I' 은 한동안 세계 최초의 '전기 기계식 컴퓨터'로 알려 졌다.

 

그러나 독일의 '콘트라 쥬제'의 'Z3'이 먼저 만들어 졌다는 이야기가 사실로 밝혀지면서 마크 I 은 '최초'의 영광을 놓쳤다.

 

하지만 누가 먼저인가는 중요치 않다. 미국의 하워드 에이킨도, 독일의 콘트라 쥬제도 지금이 화려한 컴퓨터 역사를 이끈

 

선구자 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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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에이킨'의 마크 I

 

하워드 에이킨은 마크 I 이 세계최초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독일의 콘트라 쥬제에게 한발 뒤졌다. 콘트라 쥬제의 Z3은

 

2차 대전 때 연합군의 공습에 의해 모두 파괴되었고 그 바람에 전후 20여 년간 역사의 진실 속에 묻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우연히 발견된 연구 자료가 1963년 영문으로 번역되면서 화려하게 부활되었다. Z3은 마크 I 과 아타나소프의 ABC,

 

모클와 에케드의 애니악을 모두 앞지르는 진정한 선구자 이었다. 당시 독일 정부가 물신양면으로 밀어줬다면

 

콘트라 쥬제는 미국의 하워드 에이킨이나 영국의 앨런 튜링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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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트라 쥬제  

콘트라 쥬제는 1910년 6월 22일 베를린에서 태었다.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우체국 행정관리였던 아버지는 아들의

 

교육에 적극적이었다. 쥬제는 18때 베를린 대학 기술학교에 진학해 토목공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지루하게 시간만 잡아먹는

 

계산 작업이 문제였다. 빌딩과 같은 구조물을 배우는 그레데 기존의 계산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지붕을

 

지탱하는 구조물을 제작하려면 선형방정식을 이용해야 했지만 방정식하나만 붙들고도 몇 주를 흘려 보내야했다.

 

하워드 에이킨이 박사 학위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새로운 계산기를 꿈꿨듯이 쥬제도 자신의 전공을 위해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가 막연히 꿈꾼 해결책은 "기계를 자동화해서 최소한의 인력으로 복잡한 계산을 하는 계산 기계를 만드는 것" 이었다.

 

 

1935년 봄, 베를린 대학에서 졸업한 쥬제는 독일의 헨셸항공사에 취업해 비행기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학교와는 비교할 수 없는 복잡한 계산에 시달렸다. 결국 26살이던 1936년, 평소에 간직했던 꿈을 현실애서 펼쳐 보이기로

 

결심했다. 컴퓨터를 향한 도전은 아타나소프의 그 유명한 '선술집 구상' 보다 1년이나 앞서는 것이었다.

 

 

쥬제의 목표는 "모든 방정식을 풀 수 있는 컴퓨터" 이었다. 먼저, 연산장치가 필요했으므로 부동소수점 개념을 이용해 직접

 

고안했고 계산 속도를 높이기 위해 2진법도 들여왔다. 그 외에도 메모리의 숫자, 그리고 명령의 흐름을 제어하는 장치, 낡은

 

필름조각을 이용한 천공테이프에서 명령과 데이터를 읽는 장치, 입출력장치 등을 차례로 완성해 나갔다.

 

 

쥬제는 자신의 컴퓨터를 '실험모델(VERSUCHSMODELL)'이라는 뜻의 첫 글자를 딴 'V'로 불렀다. 그리고 업그레이드할 때마

 

다 뒤의 숫자를 하나씩 높였다. V1, V2……. 하지만 독일의 로켓탄 중에 V1, V2가 있어서 'V'를 'Z'로 바꿨다. Z1은 1936년

 

무렵에 완성되었다. 크기는 2x1.5M 이고 천공테이프를 쓰는 기계식 계산기였지만 오류가 많았다. 쥬제는 이내 Z2를 개발하면

 

서 미 특허국에 특허 신청을 했지만 "하드웨어의 특성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았다. 쥬제는 자신이

 

치밀하지 못한 자신의 실수를 탓했다. 만약 이때 특허출원이 받아 드려졌다면 '콘트라 쥬제'라는 이름은 역사에 일치감치

 

등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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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1

 

회사에서는 비행기를 설계하고 집에서는 계산기를 계발하는 쥬제의 '이중생활'은 줄곧 이어졌다. 그의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통신기술사 헬무트 슈라이어는 "Z1의 연산장치로 쓰던 기계부품을 Z2에는 전화용 릴레이"로 바꾸라고 제안했다.

 

릴레이는 자성 특성의 연산뿐만이 아니라 분당 수백회의 온-오프(ON-OFF) 처리로 연산속도를 높였다. 사실은 진공관을 쓰

 

고 싶었지만 돈이 넉넉하지 않았다. 아무런 도움도 없는 상광에서 그 비싼 진공관을 산다는 도무지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1937년, 진공관을 포기한 채 연산장치와 메모리를 성공적으로 연결해 Z2를 완성시켰다. 하지만 역시 잦은 고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하늘이 도와서일까 운이 좋게 정상적으로 작동한 날이 있다. 바로 회사선배이자 비행기 설계의 베테랑이었던 알프레

 

드 타이하만이 우연히 집을 방문했을 때였다. 이 기계에 감명을 받은 알프레드는 쥬제의 컴퓨터 연구를 회사차원에서 돕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1939년 제 2차 대전이 발발하고 전쟁의 총성은 더욱 치열해 졌다. 29살이던 쥬제는 일반병사로 징집되었다. 해군부대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던 하워드 에이킨이나 영국의 알랜 튜링과 달리 그는 전장에서 사선을 넘나들었다. 그의 능력을 아까워한

 

헨셸항공사는 독일군 수뇌부에게 "비행기 설계는 전투력에 대단히 중요하다"며 쥬제가 계산기를 계속 만들 수 있게 해 달라

 

면 요청했지만 "독일 공군은 천하무적이기 때문에 더 이상 빠른 계산이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묵살 당했다. 천신만고 끝에

 

쥬제는 6개월뒤 전선에서 빠져나와 헨셸항공사에 돌아왔다.

 

 

전장에서 돌아온 그에게 회사는 비행기날개의 정밀도를 계산하는데 도움이 되는 계산디를 만들어 줄 것을 부탁했다.

 

쥬제는 "만약 해사가 허락하면 비행기 진동에 관한 방정식되에도 다른 수학적 문제까지 풀수 있는 범용 컴퓨터를 만들어

 

볼 생각" 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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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3

 

회사는 그에게 15명의 직원을 붙여 주었고 1941년만 'Z3' 이 탄생됐다. 애니악이 개발이 시작되기 2년 전이었다.

 

Z3은 진공관을 사용하지 않는 기계식 계산기인데도 전통적인 컴퓨터의 주요 특징을 두루 갖췄다. 그 뒤에 선보인 아나타소프

 

ABC와 비교하면 그 특징이 더욱 도드라진다. ABC는 특정한 계산만 처리 하지만 Z3은 범용적이여서 여러 계산에서 두루 이

 

용할 수 있고 ABC는 관리자들이 단추를 누르거나 손잡이를 돌려 펀치카드를 넣고 빼는 구조였지만 Z3은 미리 입력한 프로그

 

램에 따라 자동으로 작동했다. '최초의 프로그램제도 컴퓨터'라는 타이틀이 붙은 영광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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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4

 

개발비가 6천 500달러에 불과한데도 사칙연산, 루트등 복잡한 계산을 훌륭하게 해냈고 하워드 에이킨의 마크 1 보다 빨라서 3

 

~5초 만에 한 번씩 곱셈을 했다. Z3이 성공하자 회사는 더욱 주제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그는 1942년 S1, 1943년 S2를 잇달

 

아 개발했다. S1은 날개 S2는 방향타의 표면을 계산하는 기계였다. 이로써 헨셸항공사는 비행기날개의 균형을 맞추는데 상당

 

한 진전을 거뒀다. 쥬제의 연구는 계속되고 마침내 Z4를 개발했다. 512개의 32비트 숫자를 기억할 뿐 아니라 사칙연산과 변반

 

근 계산을 단 3초 만에 끝내는 진일보한 계산기였다. 그리고 이 계산기는 영국을 쑥대 밭으로 만든 V1과 V2의 로켓탄의 탄도

 

쾌적을 계산하는데도 큰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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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2

 

1943년 2월 독일군이 동부전선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하자 전세는 기울어졌다. 쥬제는 "전쟁이 끝나면 컴퓨터가 지금보

 

다 더 가치를 발휘 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도 남은 기간 목숨을 부지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연합군의 독일 침공이 본격화

 

되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극에 달했다. 연합군의 폭격기은 밤낮없이 하늘을 뒤엎었고 폭격은 끝이 없는듯했다. 연합군의 폭

 

격기는 거의 매일 베를린을 공격했고 이 와중에 Z3이 그만 폭격당하고 말았다. Z1과 Z2는 이미 그 전에 박살이 난 상태여서

 

이제 남은 것은 Z4 뿐이었다. 그는 1945년 베를린을 빠져나오기 전까지 무려 3번이나 폭격을 피해 Z4를 안전한 장소로 옮겨

 

야 했다.

 

 

전쟁 중인데다 독일의 전세가 약화되면서 외부세계의 소식을 접하기 더욱 어려웠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쥬제의 팀에서 획

 

계를 맡던 직원이 독일정보부에서 일하는 딸에게"회사에서 컴퓨터를 만들고 있다"는 극비 정보를 실수로 털어놓고 말았다. 그

 

의 말을 들은 딸은 정보부 문서 창고에서 비슷한 기계의 사진을 봤다고 답했고, 이 말은 쥬제의 귀에 들어갔다.

 

 

쥬제는 사진을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만, 정보부의 모든 정보는 군사기밀이었다. 그는 정보국 간부에게 "다른 나라의 컴퓨

 

터에 관련된 자료를 열람하고 싶다"고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 다른 간부에게도 부탁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끝내 쥬제는 사진을 보지 못한 체 어느 미국인이 자신과 비슷한 기계를 만든다는 사실만 기억하게 되었다. 그 문제의 사진은

 

미국의 마크 I 을 찍은 것이었다. 미국이 마크 II를 개발하고 있을 때 독일은 패망의 문턱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혼란와중

 

에도 쥬제는 Z4를 폭격당하지 않게 하려고 동분서주했다.


 

주제는 Z4를 분해해 베를린 서쪽 160km 에 떨러진 괴팅겐으로 옮겼다. 뒤늦게 쥬제 컴퓨터의 가치를 깨달은 독일정부는 Z4

 

를 노트르하임 근처 지하공장으로 옮기하고 했지만, 강제수용소의 처참한 관경을 목격한 쥬제는 하루라고 머물고 싶지 않았

 

다. 그래서 바바리아 지방의 평화로운 산골마을인 힌터슈타인으로 Z4를 옮겼다.

 

 

피난길에 쥬제는 소련군보다 영국군, 미군에게 포로로 잡히길 원했다. 컴퓨터의 가치를 영국과 미국이 더 잘 알아 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 진 잘 모르겠지만 그가 머물던 힌터슈타인은 미군에게 점령당했다. 미군은 농장 건

 

물 지하에 숨겨져 있던 Z4를 수상하게 여겨 쥬제를 심문했지만 걱정할 것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그를 풀어 주었다.

 

 

주제는 유럽에서 첫 번째 손가락에 뽑히는 컴퓨터 개발자였지만 자신의 발명품을 상용화 하는데 실패했다. Z4는 1950년 취리

 

히 기술대학에 임대됐고 수학과 공학문제를 푸는 유럽 유일의 계산기라는 명예롭지만 외로운 타이틀을 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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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22

 

전쟁의 수령 속에 목숨처럼 지켜낸 Z4 이길래 그의 애착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쥬제 KG라는 컴퓨터 회사를 세

 

워 알차게 키워 나갔다.  그리고 Z4의 정신을 잇는 Z5, Z11,22들 을 내놓았다. 이 무렵에는 자신의 평생 취미였던 그림그리기

 

에게 흠뻑 빠져 있을 때였다. 그의 초기 작품에는 Konrad zuse 대신 Konrad see이라는 사인이 들어있었는데, 이에 대해 주

 

제는 "컴퓨터가 늦게 배달되었을 때 고객들이 그림을 그리느라 늦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라고 털어 놨다.
 

그는 훈펠트지방에 헬시안이라는 마을에서 살다 1995년 12월 18일 숨졌다. 유명한 컴퓨터 제작자 하워드 에이킨과 콘트라 쥬

 

제는 한 번도 마주 서지 않았지만, 컴퓨터 라이벌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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