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모함 역사

똥꼬X 작성일 07.05.15 19: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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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공모함의 효시인 Furious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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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적인 항모 Argus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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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함을 개조한 Eagle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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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층 갑판형의 일본 항모 Akagi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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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k Royal號와 함재기 Swordf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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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전함으로 건조후'27년 항모로 개조된 Bearn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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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에 취역한 미국의 Essex號의 함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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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에 취역한 Midway號>

 

항모의 역사는 비행기의 출현과 그 흐름을 같이하고 있다. 라이트형제가 첫비행에 성공하자, 군에서도 비행기를 활용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고, 보다 개선된 연락과 통신방법으로서 함정에 항공기를 이용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1912년에는 드디어 함정에서 발함과 착함에 성공을 거둔다.

  1910년 복엽기 제작사인 커티스社는 미해군으로 부터 함정에서의 비행시험을 도와줄 것을 요청받고, 군당국에 자사 항공기를 팔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겨 복엽기와 시험비행 조종사를 제공하게된다. 1910년 순양함 버밍햄에 길이 83 피트의 활주로를 만들어 항공기를 발함시키는데 성공했으며, 이날 약 4Km를 비행 성공하였다.

  1913년 샌프란시스코만에서 장갑순양함 펜실베이니아에 길이 120피트의 특설갑판을 만들어 커티스 복엽기를 착함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로서 함상에서의 이착함 시험은 성공적으로 끝나게 되었으며 결론은 발진보다는 착함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편 영국 해군에서는 세계1차대전부터 초계·정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수상기를 군함에 탑재 운반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하였으며, 1912년 항공기의 발함에 성공했으며 같은해 5월에는 항해중의 함선에서 발함시키는데 성공했다. 결국 영국은 세계최초로 항공기의 발함과 착함을 모두 할 수 있는 현대항공모함의 원형을 만들 수 있었다.

  영국은 워싱턴 군축회담 후 1917년에는 대형 순양함 Furious號(19,000 톤, 31 노트)를 이용하여 선체 앞부분은 발함갑판을, 뒷쪽에 착함갑판을 설치하고, 함교와 굴뚝의 바깥쪽에 통로를 만들어 전후갑판을 연결하고 그 밑에 격납고를 둔, 항공모함에 가까운 형태를 만들어 비행기탑재함(Airplane Carrier)이라고 하였다.  이 항모는 착함제동장치나 엘리베이터 등이 도입된 근대적인 항모였으나 함의 중앙부에 연돌이 있어 항공기가 함선의 앞뒤를 오갈 수는 없었다.

  그 이듬해인 1918년 영국군은 상선 콘트로스를 개장하여 상선의 선체 위에 넓은 격납고를 시설하고, 그 위에 돌출물이 없는 평탄한 비행갑판을 설치하여 본격적인 앞뒤로 완전히 트인 근대적인 평갑판구조를 가진 항모 Argus號(14,000 톤, 20 노트, 함재기 20대)를 제작하였다.

  1923년에는 전함을 개조한 Eagle號(22,000 톤, 23 노트)와 신함 Hermes號(1,0900 톤, 25노트) 건조하였다.

  1922년 워싱턴 군축회담의 결과 미국은 Lexington號와 Saratoga號(33,000 톤)를 일본은 아카기(赤城)와 가가(加賀, 27,000 톤)를 건조한다. 그보다 앞서 일본은 7,500t급의 소형 항모 호우쇼(鳳翅)를 건조하였었다.

  초기의 항모는 크기와 관계없이 구조상으로 함교형(Island)과 평갑판형(Flush Deck)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함교형은 비행갑판의 한쪽에 폭이 좁은 함교구조물, 마스트, 굴뚝 등을 설치하는 형식이며, 평갑판형은 비행갑판상에는 전혀 구조물을 두지 않는 형식으로서, 주로 소형함에 채택되었다. 영국의 이글號 허미즈號, 미국의 새러토가級은 모두 함교형이었으며, 일본의 아카기號, 가가號는 비행갑판의 앞부분이 3단, 격납고도 3층으로 되어 있는 평갑판형이었다.

  1930년경 이후 모든 항모가 미국식인 1층으로 된 넓은 비행갑판형식으로 통일되고, 소형 항모도 함교는 갑판상에 두되, 연돌은 현측 밖에 둔 semi-Island형의 것이 일반화되었다.

  이 무렵부터 캐터펄트식 발함장치가 채택되게 되었고, 착함제동장치와 활주제지장치가 개량되었으며, 엘리베이터의 성능과 속도, 가솔린 탱크의 방어시설, 가솔린의 폭발방지장치 등이 개선되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까지 Ranger號(14,500톤), Yorktown級(19,900톤) 3척, 1955년 건조된  Forrestal號(60,000톤) 까지의 항모는 구조형식을 모두 새러토가형과 같이 만들었으며, 그것이 미국 항모의 모델이 되었다.

  1938년 영국이 건조한 Ark Royal號(22,000톤)는 격납고가 2층으로 되어 있고, 활주갑판은 선체 보다 앞뒤로 훨씬 더 길 게 나온 형태로 설계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말까지 이 함의 개량형 여러 척과 1층 격납고로 된 저속의 간이함이 상당수를 건조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에서는 요크타운級을 확대 개량한 Essex級(22,000톤) 24척을 건조하였고, 이어 에식스級의 개량형인 Midway級(45,000톤 ... 아래 사진. 훗날 앵글드 데크가 있는 새로운 항모로 다시 태어난다 ) 3척을 건조하여 태평양 전쟁의 주력함으로 이용하였다. 또한 상선의 선체를 이용해서 만든 6,700∼12,000톤, 속력 18노트 정도의 저속간이함인 호위항공모함(Escort carrier:CVE) 130여 척을 건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때부터 성능과 형태에 따라 임무별 구분을 하게 되었다. 미국 해군에서는 항공모함을
 - 공격항공모함(Attack carrier:CVA)과
 - 대잠지원 항공모함(Antisubmarine Warfare Support Carrier:CVS)으로 구분하고 있다.

  공격항모는 공격기를 포함하여 80기 정도의 함재기를 탑재하고, 적의 함대 및 육상의 표적을 공격하기 위한 해양전투력의 주력으로 배수량 6∼10만톤의 거대항모 이다.

  대잠지원 항공모함은 주로 제2차 세계대전중에 건조한 에식스級을 종전후에 개량한 것으로, 적 잠수함의 발견과 공격에 사용되는 배수량 3∼4만톤급의 항공모함이다.

  2차대전 중에 1만 t급의 순양함을 개조해서 다량 건조한 경항공모함(Light Carrier:CVL), 화물선이나 상선을 개조해서 만든 호위항공모함 등은, 종전후 탑재비행기의 대형화  중량화 고속화에 따라 전투기용으로는 사용할 수 없게 되어 한 때 대잠용이나 비행기수송선, 헬리콥터모함 등으로 이용되다가 1960년경부터 대부분이 폐함처분되었다.

. 폐함의 운명에서 벗어난 일부 항모는 개수되거나 용도가 바뀌어
 - 비행기 및 화물수송선(Aircraft Ferry and Cargo ship:AKV),
 - 비행기 운반선(Auxuliary Aircraft Transport: AVT),
 - 상륙전용 헬리콥터모함(Amphibious Assault ship:LPH),
 - 인공위성을 이용한 통신중계선(Major Communication Relay ship) 등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었으나, 현재는 거의 폐기처분되었거나 퇴역하여 관광목적의 전시함으로 활용되고 있다.

영국 해군에서는 3만톤급 이상의 몇 척을 함대항공모함 또는 공격항공모함이라 하여 미국의 공격항공모함과 동일한 목적에 사용하였고, 2만톤급 이하의 몇 척을 헬리콥터용 상륙기습함으로 사용하며, 이것을 지휘항공모함(Command Carrier)이라고 불렀다.

  프랑스는 2차대전후 새로운 계획에 의해 기준 배수량 24,200톤급 항모 Clemenceau號(1961년)와 Foch號(1963년)를 건조하여 이것을 대잠 및 초계, 전투기용으로 사용하였다.

  제2차 세게대전 때는 해상전투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항공모함도 대전 후 핵무기  미사일   제트기 등의 출현과 발달에 따라 한때 공격용 무기로서의 가치가 의문시되기도 했으나, 6.25동란과 베트남전을 거치면서 그 가치는 다시 평가 받게 되었다. 특히 6.25 당시 미태평양함대에는 항모 3척과 대잠용 호위항모 2척이 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1950년 7월 3일 평양 폭격을 시작으로 수도를 공격하자 북한의 수뇌부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오늘날에는 다시 해양통로의 중요성과 원거리 분쟁지역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한 효과적인 무력투사 방법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2차 대전이 끝남과 동시에 찾아온 냉전시대는 새로운 군사강국으로 출현한 쏘련에게도 항모를 보유하도록 부채질 하였으며, 비교적 대형함정을 건조할 기회가 적었던 쏘련은 순양함을 기본으로항여 확대개조한 Kiev級 항모를 건조하면서, 항모보유국 대열에 동참하게 되었다. korea0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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