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독일의 압제에서 유럽을 구한 지상 최대의 작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60주년을 맞아 당시 이 작전의 당사국이던 프랑스, 미국, 독일등에서는 역사 속에 가린 이 작전의 진실과 이라크전을 두고 이들 나라들이 벌이는 갈등으로 미묘한 갈등이 다시금 드러나고 있다.
노르망디, 해방의 기쁨과 조국잃은 치욕 동시에 느껴
5일 로이터통신은 당시 유럽대륙에서 가장 먼저 나치로부터 해방됐던 프랑스의 사례를 소개하며 해방이라는 기쁨을 맞은 프랑스 국민들사이에서 퍼지고 있는 우울한 그림자에 대해 보도했다.
프랑스는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유럽대륙에서 히틀러의 야욕을 직접 저지할 수 있는 강대국이었다. 독일의 서부국경에서 프랑스군은 독일군과 직접 대적했고 국민총동원령으로 군대의 수는 이미 독일을 압도했지만 독일군의 전격전에 불과 3주만에 무릎을 꿇고 만 뼈아픈 기억이 있다.
노르망디상륙작전은 이들 프랑스인들을 독일의 압제에서 구한 작전이지만 동시에 자신들의 나라를 자기 힘으로 구하지 못한 사실을 상기시키는 어두운 기억이다.
더구나,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이 상륙하면서 13만 2000명이란 엄청난 대병력이 외딴 프랑스북부 해안에 모이면서 피치못할 불상사도 일어난 것이 사실이다.
노르망디지역 70% 연합군이 파괴, 여성 500명 미군에 성폭행당해
당시 10대 청소년이었던 자크 아드리안 페레는 “노르망디지역 도시들의 70%가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됐고 우리는 해방군을 맞이한다기 보다는 또다른 침략자가 다가온다고 믿었다”고 밝혔다.
페레는 “결국 미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독일군을 몰아내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군인들 못지않게 프랑스 민간인들이 희생됐다”며 “우리는 파괴된 마을과 도시에서 1944년의 추운 겨울을 맞이했다”고 덧붙였다.
프랑스 일간 파리마치가 발행하는 잡지 파리마치는 12페이지에 걸친 기획기사에서 “노르망디의 항구도시 캉에서만 하루동안 4만t의 폭탄이 떨어져 도시를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당시를 기억하는 프랑스인들은 인터뷰에서 “캉에서 숨진 프랑스민간인만 2만명이나 됐다”며 “연합군은 프랑스에서 해방과 기쁨을 맛볼 것으로 기대했겠지만 우리에게는 또 다른 지옥이 시작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시의 역사는 연구하는 역사학자 장 피에르 아제마는 “노르망디 전투 직후 촬영한 사진에는 독일군이나 미군 사상자 못지않게 프랑스민간인들의 시신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아제마는 “노르망디지역에서만 미군에게 성폭행당한 프랑스여성이 500명이나 된다”며 “미군이 분명 점령군은 아니었지만 자유를 선사한 해방자도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이라크전으로 대미감정은 악화일로
일부에서는 “노르망디상륙작적을 기념해 조지 W 부시 미국대통령 등 주요 국가원수를 초대하는 것이 적절하지 못하다”며 “차라리 유럽에서 독일이 항복한 5월 8일 베를린에서 전승대회를 갖자”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런 발언에서 이라크전을 두고 미국과의 관계가 불편한 프랑스국민들의 불만이 그대로 표출되는 것 같다.
미국측 참전용사들에게도 이 작전의 60주년 기념일은 자신들이 유럽을 해방시켰다는 자부심보다는 이라크전이라는 커다란 고통이 더 실감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제 2차 세계대전과 이라크전은 비교대상 못돼
5일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에 따르면 당시 미 육군 101 공수사단의 일원으로 이 작전에 참가했던 아트 워드로(84)는 “우리가 젊어서 싸운 제 2차 세계대전은 올바른 전쟁이었지만 요즘 젊은이들이 벌이는 이라크전은 정당한 전쟁이 아니다”라고 못박았다.
워드로씨 부부
워싱턴 DC의 노르망디 기념관에 아내와 함께 온 워드로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전역에서 징집된 청년 1600만명이 유럽 등 외국에 나가 싸웠고 이 중 40만명은 영원히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워드로는 그러나 “작전 직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이 한 ‘여러분은 이제 유럽에서의 또 다른 십자군이 될 것’이라는 내용의 연성을 잊지 못한다”며 “과거를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워드로는 “나는 오마하해변에 상륙했고 당시 5군데 해안에 상륙한 연합군 가운데 유독 미군이 맡은 유타해변과 오마하해변만 독일군의 저항이 강했던 것을 기억한다”며 “오마하에서만 상륙 첫 1시간 동안 미군 3000명이 전사했다”고 말했다.
워드로는 “기관총이 발사하는 MG기관총 소리와 파편에 살이 떨어진 전우들의 모습이 뇌리에 생생하다”고 말했다.
이런 괴로운 기억에도 불구하고 워드로는 평소 전쟁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워드로는 “무엇보다 당시 나는 젊었고 내가 영웅들과 함께 싸웠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참전용사 “부시는 전쟁의 전자도 모르는 풋내기”
이런 워드로도 요즘 벌어지는 이라크전쟁에 대해서는 좀처럼 이야기를 하려 하지 않는다. 워드로는 “노르망디와 바그다드를 동일 선상에 놓고 전의의 전쟁을 운운한 최근 부시대통령은 전쟁에 전자도 모르는 풋내기”라고 지적했다.
워드로는 “정치인들이 책상 위에서 지도 몇장 펼쳐놓고 결정하는 전쟁과 피와 땀을 흘리는 전장의 병사들은 전쟁을 대하는 마음이 다르다”며 “만일 부시가 노르망디를 기억한다면 어떤 형태의 전쟁이라도 반대해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워드로는 끝으로 “나는 노르망디에서 어른이 됐지만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뿐”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노르망디상륙작전의 패배로 유럽에서의 패권을 상실한 독일에서는 이 지상최대의 전투를 바라보는 시각이 또 다르다.
이제 독일도 행사초대받아
이번 60주년 행사는 독일로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 될 것으로 보인다. 패전국이자 연합국과 맞서 싸운 독일은 그 동안 노르망디기념행사에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이었지만 올해는 연합국축도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총리를 정식으로 초대했기 때문이다.
슈뢰더는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전후 독일통리로서 처음으로 나를 초대해준 연합군과 참전용사협회에 감사한다”며 “과거의 적이 이제 한 자리에 모여 그날의 일을 기념한다는 사실이 과거의 멍에를 벗고 새로운 화해의 시대를 맞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독일에서는 노르망디작전 당시를 회상하는 참전용사들의 회고록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특히 다른 나라와는 달리 독일에서는 작전의 전술적인 측면을 다루는 경향이 강하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독일군 사령부가 만일 캬랑텡 인근 바스에 위치한 제 21SS 기갑사단을 동원했다면 연합군이 해안에 교두보를 만들기 전 적을 바다로 밀어넣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잡지는 또, “셸부르항에 있던 독일해군소속 어뢰정부대가 출동했다면 작전이 개시된 새벽 3시 30분 연합군함정이나 상륙정이 상륙하기 전에 많은 피해를 봤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잡지는 또 “여러가지 소문이 무성하지만 이날 작전에서 독일이 연합군을 막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노르망디 인근에 기동력과 화력일 갖춘 기갑사단을 두고도 인근 10㎞지역에 제 711 보병사단, 352 보병사단 그리고 709 보병사단등 독일군의 장기인 기계화부대가 아닌 일반 보병사단만을 동원한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군이 기갑사단을 아낀 이유는 다름아닌 연합군 공군력을 두려워해서였다. 그러나, 안개가 자욱하고 야음을 틈탄 기습을 격퇴하는데 악천후 때문에 항공기가 작전을 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독일군 사령부는 모르고 있었다.
당시 전쟁범죄 저지른 독일군, 시신손상 범죄 고백해
이 외에도 독일에서는 연합군과 함께 싸운 참전용사들이 저지른 악행도 폭로되고 있다. 셸부르항을 기습한 뉴질랜드와 캐나다군과 교전을 벌인 SS부대원들은 “우리는 숨진 적군의 시신을 거리에 놓은 뒤 탱크로 뭉개버리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이 부대원들은 “패전이 현실로 다가오던 시기여서 절망감에 사로잡힌 우리는 당시 이성을 잃었다”고 말했다.
이들 독일군 참전용사들은 “당시 전선이 완전히 붕괴될 수도 있었지만 독일군의 장점은 전진이 아닌 질서정연한 후퇴작전에 있었다”며 “우리는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독일로 발길을 돌리며 교두보를 만들었고 가족과 조국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은 한결같이 “히틀러가 아닌 조국과 가족을 위해 싸웠다”며 “우리는 1945년 패전을 조장한 것이 연합국이 아닌 우리 내부의 적 히틀러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말해 전쟁의 비참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줬다.
-노컷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