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을 점령한 일본 군인은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잔학한 만행을 벌이기 시작했다 .수천, 수만 명의 젊은 남성들은 마치 가축처럼 묶여져 도시 외곽으로 끌려가 기관총 세례를 받았고, 총검 훈련의 연습물이 되었으며, 가솔린 세례를 받은 후 산 채로 태워지기도 했다. 그로부터 몇 달 동안 이 도시의 거리는 시체로 산을 이루었고 썩어가는 살 냄새로 악취를 풍겼다. 이때 희생된 사람이 약 35만명 정도라고 한다
학살
11월 말 일본군 3개 부대는 일제히 난징을 향했다. 난징으로 가는 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 일본 퇴역 군인은 난징 진격 도중 작은 농촌 마을 공격에 관해 기억한다. 눈에 띈 사람은 모두 *없이 구타당하고 총검에 살해되었다. 희생은 이 작은 마을에 국한되지 않았다.
11월 19일 비가 쏟아지는 아침, 중국인들이 얼굴을 알아* 못하도록 얼굴에 두건을 쓴 일본군은 쑤저우의 성문을 밀어젖히고 난입했다. 이 일본인들은 며칠 간 살인과 약탈을 저질렀고 오래된 유적을 불태웠으며 수천 명의 중국 여성을 능욕했다.
일본 군인들이 12월 13일 새벽 성벽을 통해 난징을 침략했을 때 난징 시민들의 수는 일본군 병사의 수보다 훨씬 더 많았다. 난징을 공격하러 간 일본인 군대는 9만 명이었는데 그 당시 난징 시내에는 50만 명의 일반 시민들과 9만 명의 중국군이 있었던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추정한다.
난징 대학살에 있어 단일 규모로 가장 큰 학살은 무푸 산 근처에서 일어났다. 난징의 북쪽, 곧 난징과 양쯔 강의 남쪽 둑 사이에 있는 이 산에서는 5만 7,000명의 민간인과 전직 군인들이 살해되었다. 수많은 중국군의 시체를 처리하는 것은 일본군에게 또 다른 문젯거리였다. 난징과 그 주변에서 학살당한 전체 중국군 가운데 일부만이 무푸 산에서 처형되었는데, 이 시체 처리에만 며칠이 걸렸다. 매장을 하기도 했지만 7,000∼8,000구의 시체를 묻을 수 있는 커다란 구덩이를 팔 수 있는 곳을 찾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소각도 또 다른 대안이었지만 일본군에겐 충분한 연료가 없었다. 예를 들자면 무푸 산 학살 후, 일본군은 시체에 휘발유를 드럼통으로 부어 태우려 했지만 불길이 시체를 재로 만들기 전 연료가 바닥나곤 했다. 대부분의 시체는 양쯔 강에 내던져졌다.
시아크완으로 끌려 온 중국인 포로들이 강을 따라 한 줄로 정렬해 있는 것을 목격한 종군 특파원 유키오 오마타는 이렇게 기록했다. "첫번째 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렸다. 두번째 줄의 포로들은 자신의 목이 잘리기 전에 앞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린 몸통을 강물에 던져 넣어야 했다. 살육은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되었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2,000명밖에 처리할 수 없었다. 그 다음날 이런 방식의 처형에 싫증이 난 일본군은 포로들을 한 줄로 세운 후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타 타 타! 방아쇠가 당겨졌다. 포로들은 강 속으로 뛰어들었지만 강 건너편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난징 대학살 동안 일어난 *은 1971년 벵갈 지역에서 파키스탄 병사들이 저지른 조직적인 *(벵골 지역에서의 반란 실패 후 방글라데시에 살던 20만∼40만 명 가량의 여성이 9개월 동안 *당했다)을 제외하곤 역사상 유례없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최악의 *이라고 밝힌 바 있다. *에 대한 보스니아 통계 자료의 불명확성으로 정확히 말하긴 어렵겠지만 유고슬라비아에서 행해진 집단 *보다 난징 대학살에서 저질러진 *은 그 정도가 훨씬 더 심각하다고 추정한다.
임신 중인 여성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임신 중이거나 방금 출산한 여성도 *의 희생자가 되었다. 임신 9개월의 한 여성은 *을 당한 후 건강은 물론 정신마저도 이상해졌으며, 임신을 한 여성을 발로 걷어차 죽이는 일도 일어났다.35) 임신한 여성을 *한 후 재미로 그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꺼내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한다.
당시 중국은?
난징은 장개석 정부의 수도였다. 하지만 난징 대학살이 일어나던 그때 장개석은 공산당을 쫓고 있으며 일본의 만행을 묵인했다.
살인게임
살아있는 사람에게 가솔린을 붓고 총을 쏘아 불을 붙임
꽁꽁 얼어붙은 겨울의 연못에 밀어 넣어 얼어죽게 만들고 일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총을 쏨
이유없이 어린아이를 전깃줄에 목을 매담
장작더미위의 나무 기둥에 묵고 바삭바삭 익을 정도로 불을 붙임
소년에게 염산을 부터 태워버림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끄집어내어 가지고 놀았음
100여명의 사람을 묶고 코와 귀를 잘라내었음
왜곡과 거짓
많은 일본 정치가들과 학자들, 산업 각 분야 지도자들은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난징에서 대학살이 벌어졌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한다. 교사들이 역사 시간에 유대한 학살에 대해 가르치지 않으면 불법으로 간주되는 독일과 달리 일본은 수십 년 간 조직적으로 난징대학살에 대한 언급을 교과서에서 지워왔다. 박물관에서 난징대학살에 관한 사진을 떼어내고 원래의 기록들에 나타난 끔찍한 사실들을 교묘히 위장했으며 대중 문화와 관련해 이 학살과 관련한 모든 언급을 삭제했다.
최근 일본의 우익단체들이 오사카에서 대대적인 집회를 열고 "난징 대학살은 20세기 최대의 거짓말" 이라며 사실 자체를 아예 부인하고 나서 내외로 큰 파문이 일고 있다. 그들은 "증거가 없지 않느냐" 고 큰소리로 되묻고 있다.
요즘 일본 우익 정치인들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롯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주변국(우리나라, 중국)의 신경을 긁고 있다. 과거를 반성할 줄 모르며 오히려 없었던 일로 만들려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이러한 분노는 정당하다. 하지만 때때로 엉뚱한 곳으로 분노를 쏟아내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저렇게 양심없는 인간들은 일부이다. 일본인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일본 내에서도 의식이 있고 양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솔직히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해 어떤 것을 했는가? (물론 나도 포함해서이다) 단지 언론에서 이야기가 나올때만 분노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지만 일본에서 이러한 정신대 할머니들을 위해 같이 싸우고 있는 일본인들도 많다. 그들까지 모두 포함해서 욕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가끔 일본 문화를 누리는 것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며 일본을 욕하며 그들의 만화와 게임을 즐기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행동이 아닌가 고민해*만 역시 별개로 놓기로 했다. 항의의 일환으로 거부할 수는 있으나 단순히 '일본'이라는 말이 붙는다고 모조리 배척하는 것은 어설픈 민족주의인듯 하다.
자료출처 : http://www.chinainkorea.co.kr
자료제공 : (주) 천년천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