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상처..3(미국과일본편)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03.06 11:3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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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원폭 투하 장면. 1945년 8월 6일에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이다.

세계 최초로 실전에 투하된 "리틀 보이"라는 이름의 이 원폭은 12kg으로 낙하산을 타고 천천히 내려왔다. 파괴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지상 600m 높이에서 폭파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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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를 궤멸시킨 "Little Boy" 세계 최초의 실전 핵폭탄.


이때의 폭발로 8만 3000명이 그 자리에서 죽었고, 5만 3000명이 부상, 그리고 반경 30km에 달하는 시 전체가 증발해 버렸다.


핵폭발 뒤의 히로시마.


히로시마 핵투하 후 3일 뒤에 나가사키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이때의 참상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고 전해져 왔다. 히로시마 시의 외곽에서 피폭된 채 살아남은 사람들은 눈 코 입 머리카락이 모두 녹아버려 비명도 지르지 못한채 귀신처럼 비틀비틀 걸어다녀야 했고, 끔찍한 상처를 입지 않은 사람들도 대대손손 무서운 방사능의 피해에 시달려야 했다.


미국은 일본에 핵무기를 사용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미국은 일본을 항복시키기 위해 상륙작전을 감행해야 했고, 그럴 경우 수만명의 '고귀하신' 미국인의 목숨이 희생됐을 것이라는 주장. 전쟁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핵무기를 사용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핵무기를 사용하기 이전에 이미, 일본의 천황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연합군과 협상하려고 했고, 미국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1945년 7월 중순, 일본의 암호화된 외교 문서를 미군이 가로챘고, 이는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내용인 즉, 일본이 항복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러가지 증거로 볼때, 당시 미국은 이미 한달 전에 굳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일본을 굴복시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왜 핵무기를 사용했을까?


미국의 핵무기 개발팀, 맨하탄 프로젝트의 구성원들.
당시 미국 내 가장 뛰어난 과학자들은 모두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미국이 핵무기 개발을 시작한 것은 일본이 아니라 나치 때문이었다. 2차대전 중 미국은 나치가 원자폭탄을 개발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했고, 미국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핵무기 개발에 전력을 다했다. 

맨하탄 프로젝트라는 코드명으로 진행된 이 핵무기 개발엔 총 13만명의 인력과 (요즘 돈으로 환산해) 200억 달러(우리돈으로 18조원)라는 천문학적인 리소스가 투입됐다.

그런데, 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맨하탄 프로젝트가 완성될 즈음, 독일은 지리멸렬 패퇴하기 시작했고 끝내 항복을 하고 말았다. 국운을 걸고 진행됐던 프로젝트가 유명무실화 될 처지에 놓였고, 미국은 초조해졌다.

이때 미국이 눈을 돌린 쪽은 아직 항복을 하지 않은 일본이었다. 미국은 이미 일본이 항복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기껏 개발한 초대형 무기를 이대로 사장시킬 수는 없었다.

특히 미국은 2차 대전에 참전한 소련이 동북아를 비롯한 전세계에 영향력을 가질 것을 두려워 했다. 미국은 자신들의 어마어마한 힘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나치든 일제든 공산당이든 자신들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전세계에 공표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그 결과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였다.

그리고 이런 의도는 미국 정부에 의해 오랜 세월 은폐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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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995년 미국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은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했던 폭격기, 에놀라 게이(Enola Gay)와 폭격 뒤의 히로시마 사진을 전시했다. 최초의 원폭 사용 역시 미국 역사의 일부라는 차원에서, 그리고 2차대전의 참상을 전달하기 위한 교육적인 목적이었다.

그러나 전시 계획 소식이 언론에 알려지자마자 미국은 '광란'에 휩싸였다.

왜 그딴 물건을 전시해서 "아름다운" 미국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느냐는 것이었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번 전시가 미국을 "진주만 공격에 대한 복수심에 미쳐 날뛰던 인종차별 국가"로 묘사했다고 길길이 뛰었고, 미 공군 전우회 및 각종 압력단체들은 스미소니언 박물관이 반미 정치공작을 일삼고 있다며 정치적인 행동까지 불사했다. 

결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장이었던 마틴 하윗 박사가 미 의회의 압력을 받아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미국의 일부 지식인들은 이런 일련의 사태에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미국은 자국의 역사적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기본적인 사실을 공개하는 것마저 꺼린다는 자괴감이었다. 이런 자세는 2차대전 당시 동북아를 침탈하며 갖은 만행을 저지른 일본과 크게 다를 것 없다는 의견도 있었다.



스미소니언 박물관. 미국에서 가장 크고 유서깊고 권위있는 역사 박물관이다.


에놀라 게이 폭격기.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한 비행기로, 1990년대 중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전시됐었다.
그 앞은 에놀라 게이의 조종사 폴 티베츠 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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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roshima's Shadow (Writings on the Denial of History & the Smithsonian Controversy)
미국의 원폭 투하에 대해 매우 사실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접근한 역사서.
평론가들과 독자들의 극찬을 받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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