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의 전쟁 역사를 읽다보면 가장 재미있는 것은 약한 군대가
강한 군대를 기발한 전략의 묘수와 강한 정신력으로 이겨 내는
전사이다.
같은 차원이지만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빈약한 전쟁 무기가 발군의 실력을 발휘해서 운용 군대에게 승리를 선물하는 경우다.
우리나라 임진왜란에서 이순신 제독이 믿기 힘든 대 승리를 달성함에 큰 공헌을 해준 12척의 전선이 그 좋은 보기가 아닌가 한다.
한국 전쟁 전 불과 몇 년 전에 일본군이 버리고 간 몇 척의 군용 선박으로 그 출발을 한 해군은 한국 전쟁 중에는 미군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아 그럭저럭 군사력으로서의 면목을 갖추었지만 60년대까지 구축함 한 척도 없는 후진국의 해군 신세를 면치 못했다.
좀 심한 말이지만 한국 해군은 빈민 군대의 틀을 못 벗고
한국 전쟁을 싸워 냈던 것이다.
한국 해군은 그 빈약한 장비 중에서 그래도 제일 나은 백두산 함은
개전과 함께 게리라 병력을 싣고 침투해오던 북한 선박을 격침시켜 한국 해군의 기본 저력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한국 해군은 그 빈약한 함정들로 여러 해상 작전에서의
임무를 충실히 다해서 미래를 위한 기반을 만들었다.
한국 전쟁 중에 해군이 이룬 작전 성과는 지금까지도
메스컴에서 다소 낮은 비중으로 다루어져 왔다.
그 중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어뢰정의 구월산 유격대
지원 포격 작전을 블로그에서 다루어 보고자 한다.
이야기의 요점을 이약기한다면 1952년 빈약한 무장력의 한국
해군이 역시 육상 포격 같은 것을 하도록 만들어 지지 않은 빈약한
장비인 어뢰정을 동원하여 빈약한 비정규군을 지원하는 포격 작전을 했고 큰 전과를 얻는다.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서 먼저 한국 해군의 어뢰정에 대해서 먼저 알아본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한국 해군이 미국으로부터 원조 받은 해군 함정들 중에서 무게 50톤 정도의 어뢰정들이 있었다.
속도가 매우 빠른 어뢰정은 두발 또는 네발 정도의 어뢰를 배 위에서 발사 할 수 있는 발사관이 있어 이론상 전함 같은 거함도 잡을 수가 있었다.
해군어뢰정
건조비도 싸고 작은 크기에 비해서 무장도 커서 이들 어뢰정은
러일 전쟁 때부터 줄곧 이용되어 왔다.
일차 세계를 거치고 이차 세계에 돌입하자 미국은 이들 어뢰정을 대폭 건조한다.
당시 대량 건조중인 대형 군용 함에 필요한 강철도 아낄 겸 합판을
사용하는 독특한 방법을 택한다.
엔진은 마땅한 디젤 엔진이 없어 기존의 대형 휘발유 엔진을
사용했다.
일본과의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의 어뢰정은 개전 초 필리핀에서
맥아더 원수를 호주로 탈출시키는 활약으로 이름을 알렸다.
더해서 미래의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지휘했던 PT 109정이 나중에 메스컴을 타서 다시 이름을 알렸다.
어뢰정은 과달카날 전투 중에 야간에 일본군의 보급선을 기습해서 전과를 올렸지만 직접 해전에서의 역할은 별로 없었다.
어뢰라는 것이 명중률도 낮았고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서 대형 함에
접근하기도 힘들었다.
야간 공격을 주특기로 삼던 어뢰정의 시대는 항공기가 발달하고 레이다가 나오고 나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서방측에서 어뢰정은 미사일 함에 바턴을 넘기고 역사의 뒷장으로 사라졌지만 공산 세계의 후진국에서는 계속 애용하였다.
1964년 통킹만에서 월맹의 어뢰정들이 미 해군 구축함 매독스호를 공격했다가 오히려 격침당하고 미국이 월남전에 개입할 구실만
주었었다.
북한은 어뢰정을 중시했다.
이들은 어뢰정을 동원하여 동해안에서 미국의 순양함과 구축함을 격침 시켰다는 허위 전과까지 발표했었고 1960년 4월에는 북한
어뢰정 세 척이 동해안에서 한국 경비함PF6함에게 어뢰를 6발이나
발사하는 도발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2년 서해 교전에서 도발했던 북한 어뢰정 한 척이 한국
해군에 의해서 격침되었다.
그 만큼 어뢰정은 한반도와 그렇게 낯선 관계가 아니다.
어뢰정은 무장이 여러 가지로 변화해서 미군이 한국 해군에게 넘겨준 그 것은 연장 캘리버 50 기관총을 설치되고 5인치 짜리 로케트포가 붙어 있었다.
어뢰정 편대
각각 8발을 발사 할 수있는 로케트 발사기가 양현에 일기 씩
설치되어 있었다. 어뢰정이 발사하는 5인치 로케트포는 그 위력이
구축함의 5인치 포와 비슷했다.
물론 로케트포의 명중률은 함포보다는 못 미쳤다
전쟁 기념관에 전시된 해군 5인치 로케트 포
어뢰정에 이어서 황해도 서해안 일대와 구월산등에서 대활약한
반공 유격대에 대한 설명도 있어야 할듯하다.
북한 깊숙이 진격했던 한국군과 미군은 중공군에게 타격을
받고 1951년 1월4일에는 서울까지도 내놓고 철수를 감행해야
했다.
이 무렵부터 반공 성향이 강했던 황해도 주민들은
무장 투쟁에 나섰다.
반공 투사들은 백령도를 후방 기지로 놔두고 황해도 일대를
출입하며 유격전을 벌렸다.
미군은 이들의 존재에 주목하고 이들을 레오파드 부대니 울팩 부대니 하는 명칭으로 관리하며 지원했다.
유격대의 병력은 한때 3 만 명이 되기도 했지만 평균 일 만 명을
유지했다.
비록 미국 고문관에 의해서 이들이 훈련과 지원을 받았다 해도
무장은 턱 없이 부족하였다.
절반의 대원들이 노획한 공산군의 무기를 써야 했었고 박격포나
대포 같은 중화기는 전무했다.
그리고 백령도나 월내도에 주둔한 유격대가 건너 육지 해안에
침투 하려면 그 곳 어민들이 쓰는 어선인 돛단 풍선(風船)에
의지하여야 했다.
야간에 은밀 침투가 절대로 필요한 야간 침투에 풍선이 동원되었다면 오늘날 간첩 침투에 돛단배가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나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유격대가 북한 침투와 탈출때 사용했던 풍선 (범선)
- 뒤에 황해도 장산곶이 보인다.
(요즈음 신세대 장병들이 이 사실을 믿을까?)
북한군은 해안에 직사포 포대를 설치 해놓고 이런 빈약한 무장의 백호 부대가 주둔한 월내도를 주기적으로 포격을 했었다.
(월내도는 북한땅에서 3키로 떨어진 곳에 있다.)
북한군은 포격뿐만 아니라 심지어 야간에 십여기의 단발 엔진의
공격기들을 보내서 백령도를 폭격까지 했었다.
이렇게 빈약한 무장에 허덕이던 유격대에 뜻밖의 지원부대가
나타난다.
한국 해군의 어뢰정 두 척이 화력 지원을 하러 백령도 항구에
입항 한 것이다.
한국 해군 어뢰정의 활약은 한국인의 기록이 아니라 미국인의 기록에서 자세히 나타난다.
(하여튼 동키 부대에 대한 전사의 기록은 아직도 생존해 계신 분들이 많지만 그들의 대 활약을 충분히 소개 할 만큼 저서가 많거나
각 전투의 묘사가 그렇게 자세하지는 않다.)
백호 부대원 - 이들의 희생적인 조국 봉사는 아직도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동키 부대중의 동키-4라고 불리던 백호 부대 고문관을 하던 벤 멜콤 중위의 전쟁 회고록은 전투의 세세한 상보까지 정밀하고 풍부하게 백호 부대의 활약을 기록했을 뿐더러 우리가 몰랐던 사실도
많이 담고 있어 다른 어느 기록보다도 이책을 통하여 한국 전쟁 중
황해도 유격대의 활약을 적나라하게 알 수가 있다.
그는 한국에서 2사단 보병 여단장까지 하고 대령으로 은퇴한 뒤
‘화이트 타이거스(백호)- 북한에서의 나의 비밀 전쟁’
이라는 전쟁 회고록을 썼다.
멜콤 중위와 백호 유격대장 박철씨
미국에서 출간된 후 이를 알게 된 백호 부대 전우회 회원들이
이 책을 국방부 군사 편찬 연구소에 번역 출판을 의뢰해서
한국에서도 출판이 되었다.
여기서 한국 해군 어뢰정이 활약을 발췌해서 소개한다.
1952년 6월 11일 백령도 해변 부근에서 유격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2척의 한국 해군 고속 어뢰정(PT)이 부두에
들어왔다.
통역관을 데리고 조사하러 가보니 그 중 한 어뢰정 지휘관은 어뢰정 두척이 일주일 동안 우리 기지에 임시 배치되었고 우리가 활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함정들은 본래 기지 남동쪽에서 작전 수행중인 울팩 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함정들이었는데 우리에게 임시 파견되어
온 것이었다.
우리는 함정들이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속도도 느리고 사고가 잦은 범선은 북한군 해안 순찰대와 경비
초소에 의해 쉽게 발견되었으며 해안의 수심이 얕은 곳에서는
들어 갈 수도 없었다.
범선은 해안에서 너무 먼곳에서 좌초해 버려서 배뿐만 아니라
배에 타고 있는 습격 부대까지 북한군의 사격 목표가 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 배치된 고속 어뢰정은 쾌속정이면서도 아랫 부분이 얕아서 수심 2 미터밖에 안 되는 곳까지 진입할 수 있었으며 두정의 로켓포탄 16개가 장전되어 있으면서 한 발씩 또는 일제히 사격 할 수 있게 되어있다.
나는 각 유격대 지휘관들에게 해안가에 고속 어뢰정이 공격할 만한 목표물이 있다면 알려 달라고 통보했다.
24시간 내에 목표물 리스트가 작정되었다.
이 리스트에는 한 북한군 중대 본부에서 포진지에 이르는 25개소의 목표물이 수록되어 있었다.
첫날 밤, 고속 어뢰정들은 어떤 한 목표물을 사격했는데
유격대 지휘관들은 이것을 보고 그 효과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함정들은 엔진에 방음 장치를 하고 해안 가까이 접근해서 한 막사를 공격했는데 최소한 10명의 북한군을 사살했다.
그 다음날 밤, 함정들은 월내도에서 남동쪽으로 15마일 떨어져
있는 또 다른 목표물을 공격하게 되었다.
함정 하나가 주 공격함이 되고 다른 하나는 예비함이 되었다.
나는 공격함의 지휘관에게 요청해서 함께 승선 할 수 있도록
협조를 받았다.
목표물은 해안에서 약 일 천미터 되는 곳에 있는 한 작은 마을이었는데 병력 30명 정도의 인민군 소대가 그 곳에서 초가집에 주민들을 내쫓고 들어가 살고 있었다.
거기에서 쫓겨 나온 피난민 중 일부가 백호부대장의 보호 하에
있었다.
박씨의 첩보원들이 그 마을을 정찰하고 온 뒤, 소대 본부 건물, 병영, 탄약 창고 및 통신소의 위치를 그린 지도를 만들어 가져왔다.
첩보원들은 공격이 시작하기 전에 마을에 재 침투하여 북쪽과 남쪽에 조명탄을 설치했다.
밤 12시 30분 조명탄을 이용하여 어뢰정이 목표물을 정확하게
명중시킬 수 있도록 해준 다음 도랑을 따라 동쪽 산으로 빠져 나갈 계획이었다.
우리 고속정은 12시에 해안에서 100야드 되는 곳까지 접근하게
명중시킬 수 있도록 해준 다음 도랑을 따라 동쪽 산으로 빠져 나갈 계획이었다.
고속정은 12시에 해안에서 100미터 되는 곳까지 접근하여
대기하다가 조명탄이 터지는 즉시 5인치 로켓포로 마을을
일제히 사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날 밤은 습격 작전을 위해 아주 좋은 날이었다.
짙은 구름이 달을 거의 완전히 가리고 있었으며 우리 쪽에서도
해안선이 겨우 보일 정도였다.
반면에 배는 너울거리는 물결위에서 흔들리고 있는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파도가 해변의 바위에 부서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12시 15분에 첩보원이 불빛을 이용한 신호를 보내기로
되어 있었다.
그 신호는 우리 어뢰정이 마을을 공격하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는지를 알려 주기 위한 것이었다.
첩보원은 일반 회중전등을 사용했는데 렌즈의 4분지 1인치 정도만
남기고 나머지는 가려 놓았기 때문에 육지를 등지고 바다를 향해
비추면 육지 쪽에서는 아무도 볼 수가 없었다.
신호는 시간에 맞추어 왔는데 우리 배가 100미터 정도 남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내용의 신호였다.
선장과 나는 기회를 보아 닻을 올리고 시동을 걸고 북쪽으로 이동해서 사격할 것인지, 아니면 그 위치에서 사격할 것인지 협의했다.
어뢰정장이 귓속말로 말했다.
“ 파도가 바닷가의 바위에 부딪히며 나는 소리도 있고 소음기에
보조 장치도 달아 놓았기 때문에 엔진소리를 들키지 않고 움직여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정장은 내가 아니고 그 사람이었기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엔진에 시동을 걸고 닻을 올렸다.
함정은 해안선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100미터를 움직이는데 10분 정도가 걸렸다.
조명탄이 오르기까지 5분이 남은 셈이었다.
이제 닻을 내리고 막 자리를 잡는 그 순간 마을 남쪽에서
조명탄이 터졌다.
그러나 밝기가 너무 약해서 목표물을 정확하게 맞힐 수 있을지가 망설여졌다.
한 30초 동안 , 우리 모두는 움직이지 않고 그저 쳐다 보고만
있었다.
해야 할 지 아니면 조금 더 기다려 봐야 할지 몰라서였다.
마침내 두 번째 조명탄이 터지면서 마을 전체가 밝아졌다.
정장은 거리를 측정하기 위해서 표시 탄 한 발을 쏜 다음
로켓포를 조정하고 목표물에 대한 사격을 시작했다.
로켓탄이 탄약 창고에 떨어져 큰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정장은 계속 로켓포를 쏘아 북한군들은 건물에서 황급히 뛰어나와 어디서 사격이 오는지 몰라 사방으로 마구 총을 쏘아 댔다.
32발의 로켓탄을 다 쏘고 나자 어뢰정의 승무원들은 50구경 기관총으로 사격을 시작했다.
살아남은 북한군은 정신을 차리고는 그때서야 비로소 공격이 바다 쪽에서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소총과 따발총으로 우리에게 응사를 시작했다.
정장은 그 시점에서 사격을 중지하고 엔진 시동을 걸어 함수를
바다 쪽으로 돌렸다.
몇 분 뒤 우리는 해변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물러나 있었다.
우리는 안전한 지점에서 약 30분 동안 마을이 불타는 광경을
지켜 보다가 기지로 향했다.
그 후 백령도 산꼭대기에 있는 공군 통신 및 레이다 기지의 미군들은 백령도 산 정상에서도 바다 건너에서 큰 불덩어리기 치솟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백령도는 북한 땅에서 25킬로 떨어져 있는데 이 정도 거리에서도 폭발이 보였다면 어뢰정 포격이 대단한 전과를 올린 것이다.)
그날 밤 조명탄을 발사했던 2명의 공작원들은 산속에 숨어 있다가
다음날 밤 월내도로 돌아왔다.
그들은 북한군 초병이 배가 이동하는 소리를 듣고는 초소 부근을 돌아다니다가 잘못돼 우연히 터뜨린 자기들 설치의 조명탄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자기도 바로 조명탄을 발사해야 할지 30초 정도
망설이다가 결국 발사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번 습격에서의 자세한 전과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분명 한 것은 통신 장비와 탄약을 포함한 그 마을의 시설
대부분을 없애버렸다는 것이었다.
어뢰정들은 백령도 작전지역에서 일 주일간 머물렀다.
나머지 4일 동안은 장산곶 북쪽 초도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해변
지역 목표물들을 습격하였다.
그 습격 작전은 모두 성공적이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를 계기로 해서 우리 유격대장들은 약간의 추가 장비라도 지원받을 경우 어떠한 작전이든 수행할 수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우리가 이제껏 이용해 오던 풍선(風船)은 너무 느렸고 어뢰정처럼 무장도 할 수가 없었다.
백령도에 한국 해군이 운용하는 중무장 고속 어뢰정 편대가
배치되어 지사의 우리 유격대와 합동해서 작전을 수행 할 수 있었다면 북한군 해안 경비 진지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을 것이
분명하다.
어뢰정의 위력을 실감한 유격대장들은 백령도에 올 때마다
미군 사령관에게 어뢰정을 배속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쌀 소총 탄약 의류와 함께 이제는 어뢰정도 그들의 지원 요청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와 어뢰정과의 만남은 그 것으로 끝이 났다.
우리는 그 후 다시는 한국 해군의 어뢰정을 볼 수 없었다.
위의 글에 나오는 한국 해군 어뢰정들은 어뢰를 탑재하지 않고
대신 여분의 로켓트 탄을 싣고 출동해서 수심 얕은 서해안에서 유격대들을 화력 지원을 전문으로 하는 임무를 수행 했었던 것 같다.
북한 해군이 괴멸 상태라서 어뢰는 어차피 쓸 곳이 없으니
용도 변경은 불가피했던 것 같다.
이차 세계 대전 때 미 해군에 상륙전 지원만 전문으로 하는
로켓트 포함들이 있었다.
어뢰정의 로켓트 포격 기능과 임무부여는 이런 전쟁의 경험에서
그 개념을 얻어서 개발했을 것이다.
로켓트 탄이라는 것이 명중률이 매우 낮은 것으로서 알려져
이차 세계 대전 때 로켓트 포함은 지역 사격을 했고 한꺼번에
수백 발의 포탄이 발사되기도 했다.
엄청난 물량적 화력이었다.
한국 해군의 어뢰정이 거기에 비하면 빈약한 수준인 32발의 로켓트 포탄을 정확히 명중시켜 전과를 올리는 점에 유의하자.
맬콤 씨의 로켓트 발사 장면을 보면 정장이 매우 신중하고 경험도
많은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니까 한국 해군의 어뢰정들은 어뢰 대신 로켓트 포탄을 가지고 주어진 임무를 완전하게 달성했던 것이다.
황해도 일대에서 활약하던 유격대들은 어뢰정의 로켓트 포격 지원에 목을 매달 정도의 열악한 전황에서도 위의 어뢰정 정장처럼
임무를 다했다.
이 책을 보면 벤 맬콤 중위는 십년 뒤 소령으로 진급하여 월남전에 참전했는데 군기 빠지고 엉성한 월남 정규군에 실망하면서 용맹했던 한국 유격대를 회상하는 대목이 나온다.
유격대 작전지역 - 북한은 감히 바다에 나올 생각을 못했었다.
백령도 윗쪽에 월내도가 보인다.
동키 부대라 불리던 서해안 일대 한국 유격대는 삼년간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 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냈다.
이 숫자는 8년간의 월남전에서 전사한 국군 장병의 숫자를
두 배를 상회하는 숫자이다.
그리고 얻어 낸 것이 NNL이었다 .
이렇게 커다란 희생으로 얻어낸 NNL이 요새 ‘땅 따먹기’란 말로
이상하게 평가되고 있으니 이미 돌아가셨거나 아직도 살아 남으신 유격대의 노전사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자료제공 : 야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