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모얼랜드 사령관은 그야말로 폭탄을 폭포수처럼 퍼 붓는다하여 붙여진
"나이아가라 작전"을 실시하기 위하여 탄손 누트 기지에 나이아가라 정보 센터를 설립하였었다.
웨스트모얼랜드는 정보 센터가 취득한 각종 첩보를 바탕으로
자기 손으로 직접 표적을 선정하여 B-52에게 타격을 지시할 수 가 있었던 것이다.
나이아가라 정보 센터의 사진 분석자를 비롯한 정보 전문가들은 제7공군이나 MACV에서 임명되었고
미 본토에서도 소 수의 전문가를 탄손 누트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웨스트모얼랜드는 북베트남군 병력 이동 및 집결지 등에 대한 첩보 수집이 몹시 제한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은 케산도 마찬가지였다.
케산 기지의 해병대는 짙은 안개와 어둠 때문에 약 100m 바깥의 상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케산 기지의 정보 거점은 26해병연대 1대대 방어선 부근에 있었다.
해병대원들은 방어선 바깥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리면 포격 요청을 하곤했다.
물론 그 곳에 실제로 적이 존재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고,
설령 존재했더라도 사상자가 얼마나 발생하였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라오스 국경 호치민 루트 감시에 사용되는 전자 감지 시스템이 가장 좋은 첩보 수집 방법이 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시스템은 이른바 "이글루 화이트" 시스템으로써, 공기감지식 지진탐지센서-ADSID 111,
소리감지식 지진탐지센서-ACOUSID 111, 고감도 마이크로 폰 내장센서-COMMIKE 111,
엔진음 탐지센서- EDET 111 등이 있고,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은 공기감지식 지진탐지센서였다
이들 전자 감지기는 1966년 9월 15일 로버트 맥나마라 미 국방장관의 지시에 따라 개발된 장비이다.
맥나마라는 막대한 비용과 승무원 및 고가 항공기의 희생이 따르는 북폭대신
호치민 루트를따라 유입되는 병력과 군수물자를 차단하는 편이 비용대 효과면에서 훨씬 경제적이라고 생각 하였다..
1966년 1월, 하바드대 로 스쿨의 로저 피셔 교수가 약257km에 달하는
거대한 장애물을 라오스, 베트남 국경에 설치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피셔 교수는 도랑을 파서 가시 철조망을 설치하고 막대한 양의 지뢰와 감지기를 매설하여
물자와 병력의 침투를 차단한다면 굳이 북폭을 할 필요가 없으며, 장애물은 5개 사단이 방어하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방어 계획이 합동참모본부와 태평양 사령부, 그리고 웨스트모얼랜드의 반대에 부딪치자
맥나마라는 일명 "제이슨 위원회"에 연구와 분석을 맡겼다.
47명의 과학자들로 구성된 제이슨 위원회는 1966년 8월,
맥나마라에게 약 1년 후에 항공기를 이용한 전자 감지기 살포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했다.
그러자 맥나마라는 9월 15일에 알프레드 D 스타버드 육군 중장을
국방통신개발위원회(DCPG / Defense Communications Planning Group)책임자로 임명하여
각종 전자전 장비 개발과 연구를 맡겼다.
제이슨 위원회의 확장판인 DCPG는 과학자 및 저명 대학교수, 컴퓨터, 정보처리 전문가 및 군전략가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이 집중적으로 연구 개발해야할 과제는 전자 감지기와 디스플레이, 데이터 정보 처리였다.
이후 장애물 프로그램에는 Dyemarker라는 명칭이 붙여지고, 태국 나콘파놈에
침투감시센터(ISC / Infiltration Surveillance Center)가 설립되었다.
ISC는 알파 기동대(Task Force Alpha)라 불리우며 지휘관으로 제7공군 윌리엄 맥브라이드 소장이 임명되었다.
맥브라이드 소장은 남베트남 주둔 미장성들이 이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하들을 베트남에 파견하여 장점을 설명토록 명령하였다.
알파 기동대는 다음과 같은 장점을 강조했다.
100명이상의 병력이 이동할 때의 압력을 감지한 전자 감지기에의해 사전 경고를 받을 수 있고,
그 지역을 집중 포격하여 적을 괴롭힐 수 있다.
그리고 케산 주변의 코끼리풀이 거의 20피트 정도로 자라 북베트남군이
방어 전진기지 전방 50m 지점을 이동해도 잘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감지기의 사전 경고는 매우 중요하다.
알파 기동대는 이미 6주동안 라오스 국경 부근에서 감지기를 사용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음을 강조 하였다.
맥나마라 국방장관과 웨스트모얼랜드 사령관
디스펜서에 전자 감지 센서를 장착
공기감지식 지진탐지센서-ADSID 111을 투하하는 시콜스키 CH-3 헬리콥터 승무원(상)
감지기가 CH-3에서 투하되고 있다(하)
하지만 아무리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감지기라도 위치 선정이 최우선 과제였다.
가장 최상의 방법은 지도를 분석하여 최종 결정된 장소까지 헬리콥터로 공수된 병사들이 직접 손으로 설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포위당한 케산에서는 이 방법이 불가능하여 공중에서 투하되어야했다.
지진감지식 센서를 땅 속에 박기 위해서는 충분히 높은 고도로 비행하여야하고
경량 고감도 마이크로 폰 내장센서는 발견이 쉽지 않도록 나무가 울창한 지역에 투하하여야 했다.
항공기는 해군의 OP-2E 넵튠과 공군의 시콜스키 CH-3 헬리콥터가 사용되었다.
지진 감지기는 헬리콥터에서 전용 디스펜서에의해 투하되었는데,
충격에 의한 오작동 때문에 승무원이 손으로 투하하기로 결정 하였다.
투하 항공기들이 투하 장소로 비행할 때 전방항공통제기들이 대공포대를 감시하였다.
그러나 적 대공화기의 위협이 너무 컸기 때문에 이후 부터 감지기 투하 임무는 속도가 빠른 F-4 팬텀이 맡게된다.
감지기로부터 신호가 전달된 지역을 정확히 찾아내기란 무척 어려웠으나
다행히도 케산 화력 지원센터에는 감지기 해독에 능통한 해병대 장교가 파병되어 있었다.
미 본토에서 개최된 심포지움 등에서 지식을 습득한바 있었던 머자 헤이그 대위는 면밀히 판독된
항공정찰사진과 감지기 신호, 나콘 파놈으로부터 공중 중계된 데이터들을 철저히 분석하여 적의 이동을 탐지했다.
적의 위치가 파악되면 B-52 폭격기의 집중 폭격이 실시되었다.
B-52의 타격 지대가 500에서 1,000 제곱미터이면 미니 아크 라이트,
500 제곱미터이면 마이크로 아크 라이트로 불리우며,
통상 미니 아크 라이트의 경우 45분간, 마이크로 아크 라이트는 10분간의 집중 폭격이 가해졌다
감지기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곳은 881S 고지였다.
케산 화력 지원센터에서는1968년 2월 3일 밤부터 전달되어지는 예사롭지 않은 신호를 주시하고 있었다.
머자 헤이그 대위는 분석 결과 북베트남군 6개 대대병력이 881S 전초 기지를 향해 이동하는 것으로 확신했다.
881S 고지 가까운 지점에 살포된 감지기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머자 헤이그 대위는 이동을 마친 북베트남군이 공격 준비에 들어간 것으로 보았다.
공격 명령을 기다리며 짙은 안개 속에 몸을 숨긴 채 은신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에 포화를 집중시키기로 결정 하였다.
2월 5일 새벽 02시 30분, 일제히 포문이 열렸다.
약 500발의 포탄이 881S 고지를 뒤 흔들었고, 적의 공격은 실현되지 않았다.
이때 2개 대대는 감지기가 설치되지 않은 지역을 통과하여 861A고지를 향해 전진했다.
안개 속에서 달려나온 북베트남군이 전초기지를 급습했다.
그러나 북베트남군의 머리 위에는 전투 폭격기가 나타났고, 뒤에서는 포화가 작렬하여 궁지로 몰아 넣어버렸다.
들판에 뿌려진 감지기는 북베트남군 대공포병 타격에 공헌했다.
한밤중에 9번 도로 근처에서 들어온 감지기 신호가 갑자기 침묵했다.
케산의 포병은 적의 침투를 단념시키기 위하여 발신 지역을 포격했다.
다음날 저녁에도 9번 도로 근처에서 다시 신호가 들어오자 또 다시 집중 포화가 실시되었다.
날이 밝은 후 실시된 수색 비행에서 위장한 37mm 대공포 6문이 발견되었다.
이들 위장 대공 포대는 B-52로부터 미니 아크 라이트 타격을 받았다.
해병대는 화력지원에 이용된 모든 정보 중 40% 가량을 감지기가 제공한 것으로 평가했다.
881S 고지의 제26해병연대 3대대 I중대 해병대원이 AN/PRC-41 무전기로 북베트남군 위치에 공중 타격을 요청 중이다
15문의 M101A1 105mm 곡사포가 케산 기지에 있었고
881S 고지에는 13연대 1대대 B포대가 3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1968년 3월 1일 밤 9시 30분,
북베트남군 66연대는 케산 기지 동쪽 끝단에 배치된 남베트남군 제37 레인저 대대 경계선 공격을 시도하였다.
레인저 대대 방어선 전방에는 북베트남군의 습격 참호 들중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큰 참호들이 구축된 상태였다.
활발한 정탐을 실시하면서 참호 속에서 호시탐탐 공격의 기회만 노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은 곧바로 전자 감지기에 포착되었다.
긴급 발진한 B-52폭격기가 케산 상공에 나타났고, 전투 폭격기와 포병이 신호 발신 지점을 강타했다.
몇 시간에 걸쳐 거듭 시도된 3번의 공격이 참담하게 실패했다.
나중에 습격용 참호와 철조망 곳곳에서 78구의 시신이 발견되었을 뿐이지만 66연대의 피해는 막대했다.
몽타냐드족들이 적게는 200, 많게는 500구의 북베트남군 시신을 봤다고 보고하였던 것이다.
동쪽 방면에대한 수색을 실시하여 엄청난 규모의 습격 참호를 발견한
제37 레인저 대대는 소탕 작전에 들어가 사상자 없이 좋은 전과를 올렸다.
3월 1일, 이륙을 시도하고 있던 C-12K 수송기 주변에 포탄이 떨어져
파편에 1기의 엔진이 손상되었지만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3월 6일 오후에는 케산 활주로를 향해 하강하던 C-123K가 대공포에 보조 제트 엔진을 피격 당해
다낭으로 회항하다 추락, 해병대원 43명과 1명의 해군, 4명의 공군 등 총 48명이 사망하였다.
3월에만 3대의 헬리콥터가 격추 당했다.
122mm 로켓탄이 케산 통제 센터 타워와 TPQ-10 레이더 부근에서 폭발하고 있다.
레이더 왼쪽에 UH-1E 휴이 헬리콥터가 주기되어있다
비록 반복되는 공격들은 물리쳤지만 포위 2개월째가 되면서 해병들의 전투 스트레스는 가중되었고,
특히 고립된 고지 전초기지 병사들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거기에다 입수된 정보에 의하면 북베트남군이 다시 강력한 대규모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몽타냐드족의 정보에 의하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냈던
디엔 비엔 푸 공격 개시일(1954년 3월 13일) 14주년을 기리는 대규모 공격이 13일이나 14일에 실시된다는 것이었다.
입수된 정보 그대로 14일 북베트남군의 공격이 실시되었지만 미군 전폭기와 포병의 불세례를 받았다.
이날 62명이 전술기의 먹이가 되었고, 아크 라이트 미션을 수행한 B-52 폭격기 승무원들은 59회의 2차 폭발을 보고하였다.
케산 기지 남서쪽 2km지점에서 25명이 포격에 사망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북베트남군의 공격은 멈추지 않고 있었지만 정보에 의하면
3월 15일부터 케산 주변에서 서서히 물러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북베트남군이 다시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가 몽타냐드족으로부터 입수되었다.
몽타냐드족의 정보대로 공격은 3월 22일에 있었다.
감지기 신호가 포착되었고, 이날 케산 기지에 1,000발 이상의 포탄이 쏟아졌다.
1번 탄약고가 직격당해 약 4,000발의 포탄과 106mm 탄약이 날아가 버려 105mm 포 사격이 중지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날밤 AC-47 스푸키 건쉽이 출격하여 총탄 우박을 뿌리면서부터 북베트남군의 공격 강도가 점차 약해졌다.
그 다음날에도 1,109발의 포탄이 날아와 2월 23일의 1,307발 보다는 적었지만 3월 중 최대의 1일 포격량으로 기록되었다.
23일과 24일에도 B-52 폭격기와 전폭기들이 적을 강타하였다.
9연대 1대대는 순찰 과정에서 8명을 사살하고 21명에게 부상을 입혔고 UH-1E 건쉽 헬리콥터가 57명을 사살하였다.
A-1 스카이레이더가 케산 기지 방어선 300m 전방 북베트남군 포위망을 강타하고있다.
스카이레이더는 비 무장에 항속거리가 짧은 O-1 관측기가 들어가지 못하는
북베트남 지역에서 격추된 조종사들로부터 "샌디"라는 애칭을 얻었다.
샌디가 상공에 나타나면 어김없이 구조 헬기가 뒤 따랐기 때문 이었다.
그동안 방어에 급급했던 케산의 해병대가 첫 번째의 공격 계획을 마련하였다.
케산 기지 남쪽 측면에 포진한 제26해병연대 1대대 B중대는 3월 30일을 기해 북베트남군 거점 공격에 나섰다.
목표는 북베트남군 제66연대 8대대 벙커 구축지였으며, 전사자 시신 회수가 목적 이었다.
B중대는 2월 25일 매복 공격에 걸려 전사한 순찰대 26명의 시신을 회수하지 못한 상태였다.
기지를 출발하여 안개에 몸을 숨기고 은밀히 전진한 1대대 B중대는
아침 7시 55분경에 방어선 외곽 300m 지점에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짙은 안개 때문에 공중 엄호는 없었지만 해병대원들은 화염방사기로 방어된 벙커를 공격하여 파괴시켰다.
그러나 북베트남군은 박격포 집중 사격으로 역습에 들어가 B중대원들을 공략했다.
이 때문에 B중대원들은 실종된 26명의 해병 시신을 찾지 못한 채 후퇴해야만 했다.
이 시신들은 나중에 회수되지만, 시신 회수에 나섰던 B중대는 10명 전사, 실종 2명, 부상 100명이라는 큰 피해를 입었다.
북베트남군도 100명 이상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비록 값비싼 희생을 치르고 실패하긴 했지만 미군 최초의 계획적 공격이된 시신 회수 작전은 포위 공격의 끝을 의미하였다.
나이아가라 작전은 3월 31일에 종료되었다.
북베트남군은 305C 사단 주력을 라오스로 철수시키고 304사단도 남서쪽으로 철수를 시작 하였지만
101C연대를 비롯한 두 사단의 포병은 그대로 잔류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이들 잔류 부대들은 심각한 보급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또한 제1군단지역에서는 구정 공세 패잔병 소탕전이 진행중에 있었다.
B-52 폭격기의 아크 라이트 폭격
B-52 폭격기의 타격 피해 평가에는 주로 항공사진이 이용되었지만
다양한 요인들이 항공 촬영을 방해하여 정확히 분석할 수 있는 사진은 겨우 7% 뿐이었다.
가장 큰 장애요인은 가시도였다.
B-52의 타격 중에서 약 절반가량은 야간에 실시되었으며, 낮에도 케산 상공에는 항상 구름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타격 박스 내에 마치 달의 분화구 처럼 많은 구멍들은
과연 어떠한 무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 분석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리 첨단 과학이 발달하였다지만 가장 믿을만한 저격은 첨단 전폭기가 아닌 노련한 저격수가 맡는 것처럼
케산의 가장 정확한 타격 평가는 해병대 순찰대에 의해 이루어졌다.
예를 들자면, 3월 19일 실시된 B-52 폭격 항공 사진에는 너무나 많은 폭탄 구멍이 찍혀있어서
숙련된 사진 분석가들 조차도 정확한 판독이 어려웠다.
뒤이어 타격 지역에 투입된 해병 순찰대원들은 폭탄 구멍과 함께 대대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벙커들을 발견하여 이를 상부에 보고하였고
그 지역은 즉각 폭격 당했다.
그렇지만 웨스트모얼랜드 사령관의 정보담당자들은 모든 통계들을 조합하여 폭격 피해를 평가해야했다.
1월 15일부터 3월 31일까지 촬영된 항공 사진과 영상에는 274개소(벙커와 참호)에 피해를 입힌 것으로 나타났고,
그중 17 곳의 무기 관련 시설을 파괴하고 8곳에 손상을 입힌 것으로 나타났다.
제3비행사단의 전투 문서에는 2,548소티 출격에 59,542톤의 폭탄을 투하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B-52 폭격기 승무원들은 1,382회의 2차 폭발과 108회의 2차 화재가 발생했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B-52 폭격에 의한 사상자 평가는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해병대 순찰대가 획득한 북베트남군 전사자의 일기와 기록들이 인명 피해 평가에 반영되었다.
어느 일기에는 "B-52폭격을 피해 동굴이나 참호 속에 들어간 병사들 조차도 살아남기 힘들었다.
케산이 디엔 비엔 푸 보다도 더 지독하다"라고 적혔던 반면에
1968년 4월 포로로 붙잡힌 팜 반 홍은 흥미로운 진술을 하였다.
자신의 부대가 쾅 트리 지역에 배치되었을 때, B-52 폭격 주의 경보를 자주 받았다고 말했다.
대체로 폭격 2시간 전에 무전 또는 전화로 경보가 전달되어 폭격 예상 지역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사전 경보들은 매우 정확하고 시기 적절하게 통보되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그런 정보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인가는 전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미군은 태평양 괌 부근 해상에서 은밀히 첩보 수집 활동을하는 소련 트롤 어선에 의해서,
또는 무선 도청에 의한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랑 베이 특수부대 캠프를 지키던 북베트남군 중대도 3월 말에 B-52의 폭격을 받았지만
벙커에 몸을 숨겨 1명만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