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는 B-25 미첼 경폭격기이며 또 하나는 P-51머스탱이다.
게다가 2차대전중 가장 성공적인 훈련기로 평가받는 T-6 텍산을 개발하였다.
2차대전이 종결되기까지 노스 아메리칸은 9만1천명 이상의 종업원을 고용했으며
15.400대 이상의 T-6텍산과 15,603대 P-51 머스탱, 그리고 9.817대의 B-25폭격기를 포함,
총 42.683대의 군용기를 제작 납품했는데, 이는 미국 항공기 총생산의 14%에 해당했다.
2차대전 중 독일은 세계 최초로 제트기 발진 Me-262를 개발하여
1944년에는 연합군 항공기를 공격하는 등 독일 영공을 방어하고 있었다.
미국도 제트 전투기 개발에 나서 벨사가 P-59를 개발하였지만 속도가 형편없었다.
록히드 P-80이나 영국 글로스터 미티어도 Me-262에 못 미쳤다.
미 육군성에는 3개회사의 제트 전투기 개발 제안서가 제출되었다.
리퍼블릭의 XP-84, 그루먼 XF9F, 노스 아메리칸 XP-86이었다.
당시 노스 아메리칸은 미 해군 최초의 함상 제트 전투기
XFJ-1 퓨리(노스 아메리칸 명칭NA-134)를 개발하고 있었다.
XFJ-1 퓨리는 4000마력 비재연소식 J35 터보제트 엔진을 장착하며,
6정의 50구경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주날개와 꼬리는 P-51 머스탱과 비슷했다.
XFJ-1 퓨리는 1946년 9월 12일, 머록에서 처녀비행을 실시하였으며
고도 12,000 피트에서 545마일의 속도로 비행하였다.
XFJ-1 퓨리는 3대의 원형기 개발후, 1945년 1월 1일에 해군에 정식 채택되어
초도 제작기들은 항모 복서의 VF-5A 비행대에 배치되었다.
노스 아메리칸 최초의 해군 납품기가되는 FJ-1 퓨리는 FJ-2, 3, 4 시리즈로 이어진다.
미 해군 최초의 함상 제트 전투기 FJ-1 퓨리. 동체에 표기된 B는 항모 복서(Boxer)함재기를 뜻한다.
노스 아메리칸 사상 최초의 해군용 기체 납품 사례가된 FJ-1 퓨리는 원형기 3대와 오직 30대만 제작되었다.
이후 후퇴익을 채용한 FJ-2 퓨리부터 시리즈로 개발된다
노스 아메리칸은 1944년 11월 22일부터 공군용 기체 개발에 나서게된다.
이것이 해군용 NA-134를 공군용으로 개발한 NA-140으로서 XP-86이된다.
XP-86은 XFJ-1 퓨리와 흡사한 형체를 가지고있었다.
동체가 조금 날렵하게 개량되었으나 주익과 미익은 똑 같았고, 엔진도 동일하게 시보레 J35 -C-3 터보제트
엔진을 장착했는데, 추력이 약한 J35엔진으로는 공군이 요구한 600마일의 속도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의 제트 항공 기술이 미국에 입수되었다.
노스 아메리칸 수석 기술자 래리 그린은 독일 항공 기술에관한 번역 문서를 입수하였다.
그 문서에는 음속에 근접하는 풍동 테스터 데이터와 후퇴익의 공기저항 감소 등의 장점들이 기록되어있었다.
1945년 9월, 노스 아메리칸 기술자 해리슨 스톰은 래리 그린이 입수한 문서를 연구하였다.
그는 문서에 기록된 독일 항공 기술들을 XP-86에 적용할 수 있을지를 연구하였다.
제트 엔진에 걸맞는 동체 제작기술도 함께 발전해야만했다.
독일의 후퇴익기에서 힌트를 얻은 해리슨 스톰은 XP-86의 곧은 날개를 후퇴익으로 변경하면
약 75마일 정도 증가된 속도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문제는 빠른 속도를 얻는대신 저속에서 안정된 비행 특성을 잃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주익 전면에 슬래트를 설치함으로서 해결된다.
노스 아메리칸은 후퇴익에 슬래트를 설치한 모형을 제작하여 풍동 테스트에 들어갔다.
풍동 테스트 결과는 XP-86이 계산상 650마일 이상의 속도를 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군도 풍동 테스트 결과에 만족하여 1945년 11월 1일, 3대의 원형기 개발 계약을 체결하였다.
1947년 8월 8일, XP-86 원형 제1호기(45-59597)가 노스 아메리칸 잉글우드 공장에서 제작 완료되었다.
원형기는 아무런 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원형 1호기는 지상 테스트를 마친 다음, 1947년 10월 1일에 머록 드라이 레이크에서 처녀 비행을 하였다.
처녀비행은 나중에 F-100 수퍼 세이버 테스트 비행 중 기체 공중 분해로 사망하였다.
1947년 8월 8일 처녀 비행을 실시한 XP-86 원형 제1호기
XP-86의 처녀 비행이 성공하자 공군은 그 놀라운 성능에 매우 흥분하였다.
35도 후퇴익기는 낮은 공기 저항을가져 음속 돌파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후퇴익기가 대형의 곧은 날개를 가진 기체보다 고속에서 더 큰 양력을 얻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공군은
어쩌면 XP-86이 수직 하강 비행을 한다면 마하의 속도를 얻을 수도 있으리라 판단하였다.
XP-86은 동체 하부와 후방 측면에 에어 스피드 브레이크가 설치되었는데, 이 감속 시스템은
그어떠한 속도나 각도에서도 작동이 가능하며, 미군 전투기 사상 최초의 사례가되었다.
XP-86은 속도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시계 양호한 버블 캐노피를 비롯하여 주익 앞전면에 설치된 슬래트는 저속 비행 안정성과
회전 반경을 줄이는 효과가있어 고기동의 격렬한 공중전에 유리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만약 시제기와달리 주익 전면에 확장된 슬래트를 설치한 항공기가
이륙 도중 양력을 잃게되면 기체의 이륙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결론은 더 강력한 엔진을 장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양산형 F-86A 세이버는 5200마력의 J47-GE-I 엔진을 장착하게되지만
3대의 원형기 중 한 대에 J47-GE-3 엔진을 장착하게된다. 1948년 4월 26일,
조지 웰치가 J47-GE-3 엔진 장착형 원형기를 전속력으로 수직 급하강 비행하여 음속을 돌파하게된다.
음속을 돌파 이전에 실시되었던 제1차 테스트는 30시간의 무사고 비행이었으며,
1차 테스트가 완료되자 제2차 테스트는 공군에의해 실시되었다.
캔 칠스트롬 공군 소령은 일주일간 총 10시간 11분/총 11회의 단거리 이착륙 비행 테스트를 실시하였다.
제3차 테스트는 실제 비행 테스트이며 이때 서방 국가에서는 전투기 사상 최초로 마하1을 돌파하게된 것이었다.
원형1호기는 1952년 9월 추락으로 손실되었고 2, 3호기는 각각 202, 75시간의 비행을 마친 후
1953년에 원형기로서의 각종 테스트 임무를 마감했다.
이후 추적기(pursuit plane)가 전투기(fighter)로 공식 표기 변경되면서 XP-86은 XF-86으로 명칭이 변경된다.
XF-86 테스트 프로그램이 성공하자 공군은 양산형 F-86A 세이버를 주문하게된다.
공군은 1946년 12월 20일 계획하였던 초도분 33기를 1947년 10월 16일에 정식 주문하면서
추가로 F-86B를 주문하였지만 취소된다.
F-86A 세이버는 XF-86과 기본적으로 크게 다른 점은없다.
양산형 F-86A-1 세이버는 J35 엔진대신 5200마력 J47-GE-I 엔진을 장착하여
음속에 근접하는 수준까지의 속도를 얻을 수 있었다.
로버트 존슨 소령은 1948년 9월 15일 670.98마일의 세계기록을 수립하였다.
XF-86에 없었던 50구경 기관총이 노즈 측면에 각각 3정씩 고정 장착되고,
공기 저항을 적게하기위하여 내부에 전기 가동식 포문을 설치하여 사격시에만 열리도록 하였다.
고속 비행용 비상 탈출 사출좌석이 설치되고, XF-86에 설치되었던 동체 하부의
에어 스피드 브레이크는 제거되고 후방 측면에만 설치되었다.
후기형인 F-86A-5는 슬라이딩 개폐식 캐노피의 라운드형 전면부가 V-자형 방탄유리로 바뀌고
전기 가동식 포문이 제거되었다.
또한 주익 파일런에 여러 종류의 무기들을 운용할 수 있게 강화된 형이다.
F-86A-5는 주익 파일런에 500, 1000파운드 폭탄과 206갤런 외부 연료탱크를 장착할 수 있으며,
추가적으로 5인치 HVAR을 장착할 수 있게 개량되었다.
그리고 엔진은 5200마력 J47-GE-5와 J47-GE-7 등으로 지속적인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져
유지성과 신뢰성이 강화되었다.
초도 생산된 33대의 F-86A-1은 각종 테스트 및 발달용으로 사용되며,
F-86A-5는 1949년 2월, 로스엔젤레스 영공 방위를 책임진 제1전투비행단부터 장비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은 랭글리 공군기지의 제4전투비행단과 커트랜드 공군기지 제81전투비행단을 비롯한
총5개 비행단이 F-86 세이버를 운용하게된다.
1950년 12월 22일에는 워싱턴 주방위공군 제116전투요격비행대에도 도입이 결정되는 등
결과적으로 공군은 178,408.00 달러의 예산으로 총554대의 F-86A 세이버를 도입하게된다.
1950년 한국에서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대량의 항공기를 투입하는데,
F-86세이버는 한반도 상공의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게된다.
한국전쟁을 수행하면서 F-86A은 몇가지 개수를 받게된다.
Mk 18 자이로스코픽 사격 조준기 및 노즈 인테이크 상부에 설치된 AN/APG-30 레이더와와 연동되는
A-1CM 사격 조준기가 설치되었다.
한국전쟁 중 항공정찰을 위하여 제4전투요격 비행단의 F-86A 48대가 정찰형으로 개조 사용되었다.
이 기체들은 프로젝트 ASHTRAY에의해 일본 타치카와의 후방 유지 시설(REMCO)로 보내져
정찰형 RF-86A로 개조되었다. RF-86A 정찰형 세이버는 자기 방어를위한 좌우 각1정씩의 기관포를 제외한
나머지 기관총과 탄약창을 제거하고 2기의 K-24 카메라가 대신 설치되었다.
카메라는 수직 촬영용 유리와함께 수평으로 장착되었는데, 카메라와 유리의 진동 때문에
질 좋은 사진을 얻기는 힘들었으나 정찰활동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약7대의 RF-86A는 다시 F-86A로 전환되었다.
공군은 1947년 10월 16일에 33대의 F-86A를 정식 주문하면서 190대의 F-86B를 주문하였다.
F-86A의 동체 폭을 7인치 증가하고, 대형 휠과 타이어, 대형 브레이크로 개수하는 형이었다.
그러나 F-86B로의 개수는 기술적으로 문제가있어 취소되고,
공군은 188대의 F-86A와 2대의 F-86C로 주문을 변경하였다
위 그림은 한국전쟁에 참가한 F-86E 세이버로, 6정의 M3 50구경(12.7mm)기관총이 장착되었다.
1정당 각 300발의 탄약을 보유하며 분당 1200발을 발사한다.
기관총 베이 아래 탄약창이 보인다.
주익 전면에 설치된 슬래트(화살표)
F-86C/YF-93A
F-86C세이버는 전략폭격기 호위용 장거리 전투기 개발을 원했던 전략공군사령부의 요청으로 계획된 형이다.
후퇴익만 그대로 유지하였을 뿐 동체와 엔진은 F-86A과 너무나 달랐다.
엔진은 애프터버너가 장착된 플랫 앤 휘트니 추력 8000 파운드 J48-P-1로서,
엔진의 크기 때문에 동체는 확대되어야만했다.
F-86A보다 전장이 44피트 더 길며 폭은 6.5피트 더 증가되었다. 기체 덩치가 커 연료는 총 1,580갤런을
적재할 수 있으며 무게 지탱을 위하여 메인 랜딩기어는 2개의 바퀴로 변경되었다.
기본무장은 20mm 기관포이며 기수 레이돔에 SCR-720 탐색 레이더가 내장되었다.
기수의 에어 인테이크 덕트는 동체 측면에 각각 하나씩의 스쿠퍼가 설치되는 NACA 형식으로 변경되고,
기수에는 블랙박스가 설치될 예정이었다.
동체 후부의 스피드 브레이크는 폐지하고 동체 하부에 대형 스피드 브레이크를 설치하였다.
캐노피의 높이도 낮아지고 에리어 룰(area rule)을 적용하여 코카콜라 병 형태의 날씬한 동체가되었다.
당시로서는 신 기술이었던 에리어 룰 법칙은 나중에 센추리 시리즈의 기체들이 사용하게된다.
F-86C는 원형기인 F-86A에 비하여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변화했기 때문에 공군은 YF-93A로 명칭을 변경하게된다.
공군은 1948년 6월 9일, 118대를 주문하였고, YF-93A 원형기는 1949년말에 제작 완료되어
1950년 1월 25일에 처녀 비행을 실시하였다.
YF-93A 원형기는 일단 2대(48-317,48-318)가 제작되어 테스트되었다.
YF-93A는 전투 중량이 26,500파운드 이상이 되었으며, 최고속도는 708마일을 기록하였고,
연료적재량이 많아 외부 연료탱크를 장착하면 항속거리가 무려 2,000마일이나되었다.
미 전략공군은 YF-93A를 소련 표적 타격에 나서는 폭격기 호위용 침공 전투기로 사용할 계획이었으나
그동안 B-47과 B-52같은 장거리 제트 폭격기가 개발됨에따라 더 이상 존재 가치가 사라져버렸다.
공군은 YF-93A 개발/발주 계획을 취소하고 그 비용으로 더 많은 폭격기를 도입하게된다.
2대의 YF-93A 원형기는 1950년대 중반까지 NACA(NASA)에서 테스트 및 추적기로 사용되었다.
1949년, 공군은 전천후 요격기 개발 요구 제안을 발표하였다.
여러 회사들이 공군의 제안에 응하였으나 당시 상황으로서는 F-86 세이버라는 걸출한 전투기를 개발해낸
노스 아메리칸이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각 항공사들의 제안 거의 대부분이 조종사와 레이더 장교가
탑승하는 2인승기였으나 노스 아메리칸은 신형 비행통제 컴퓨터를 사용하는
F-86D 1인승 전천후 요격기 안을 제시하였다.
즉, 비행통제 컴퓨터가 비행과 엔진을 통제하며 비행하는 동안 조종사는 휴즈 E-3 사격 통제 시스템을 사용하여
요격 임무를 마무리한다는 것으로, 만약 성공한다면 그 당시로서는 칭찬받을 만한 매우 훌륭한 신 개념의 기체였다.
최신 전자장비 탑재형인 F-86D 세이버는 컴퓨터 통제화 시스템 뿐 만아니라
기관총 또는 기관포 대신 미공군 최초로 공대공 로켓을 무장하는 기체가된다.
1950년 7월에 정식 명명된 F-86D 세이버는 노즈 랜딩기어 뒤 동체 내부에 2.75인치 폴딩 핀
공대공 로켓/FFAR(Folding Fin Aircraft Rocket)을 탑재하여 조종사가 발사 버튼을 누르면
동체 하부에 내장된 로켓이 표적에 대하여 일제 사격, 적기를 일거에 제압하도록 고안되었다.
엔진은 5,200마력 J47-GE-1에서 더 강력한 7,500마력 재연소식 J47-GE-17로 대체되었었고,
휴즈 E-3 사격 통제 시스템과 대형 AN/APG-36 수색 레이더를 탑재하기위해서는 동체의 재설계가 불가피하게되었다.
당초 F-86A형의 개조형으로 출발하였지만 결과적으로 75%가 재설계되어 원래 F-86A의 모습은
25%만을 유지하게되는데, 공군은 이 기체에 YF-95A라는 새로운 명칭을 부여하게되지만
나중에 양산단계에서는 다시 F-86D로 환원시킨다.
F-86D/YF-95A는 기수 레이돔 아래에 에어 인테이크가 설치되고,
캐노피는 슬라이딩 개폐식에서 상하 개폐식으로 바뀌었다.
신형 슬래트와 급강하 스피드 브레이크를 설치하고 수평미익의 승강타를 삭제한
단일 가동식(올 플라잉 테일/all flying tail)으로 개수되어 고속 안정성과 기동성 향상을 꾀했다(E형).
F-86D 세이버는 중량 증가에도 불구하고 1953년 7월, 윌리엄 바네즈 공군중령이
715.697마일의 최고 속도를 기록하게된다.
F-86D는 사용 중에도 지속적으로 개량되는데, F-86D-5형은 휴즈 E-4 사격 통제 시스템을,
F-86D-15형은 공중 급유구 신설, F-86D-20형은 연료 필터 결빙 방지 시스템,
F-86D-25형은 120갤런 투하식 보조연료탱크, F-86D-35형은 옴니 전방위 레이더,
F-86D-45형은 단거리 활주로에서의 운용을위한 감속 낙하산을,
F-86D-60형은 추력 7.950파운드 J47-GE-33 엔진을 장착했다.
F-86D의 거듭된 업그레이드는 F-86L형으로 이어진다.
테스트를 위하여 F-86D 동체 하부 트레이에 2.75인치 마우스 마이티 폴딩 핀 로켓을 장착하고있다
대한민국에서 수 많은 미그 킬러를 배출한 제335전투요격비행대 F-86E 세이버
F-86L은 신형기체가아닌 D형을 개량한 기체이다.
L형은 주익을 개량하고 최신 전자 기기들을 탑재한다.
가장 큰 특징은 세이지(SAGE-Semi-Automatic Ground Environment)반자동 요격 시스템에
데이터 링크를위하여 AN/ARR-39 데이터 링크 리시버와 AN/ARC-34 무전기,
AN/APX-25 식별 레이더와 활공각 유도장치(glide slope)를 탑재하였다.
이 장비들은 모두 동체 내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F86D와 F-86L의 외부적 차이점은
동체 전방 하부에 장착된 세이지 시스템 데이터 링크용 안테나이다.
SAGE 장비는 휴즈 E-4 사격 통제 시스템과 자동 컴퓨팅으로 침공기의 적절한 공격 시기 및 진로를 결정한다.
개수 작업은 1955년 9월부터 노스 아메리칸의 공장 두 곳에서 실시되었으며,
초도기는 1956년봄에 제49전투요격비행대에 전달되었다.
공군은 총 827대의 F-86L을 도입하였다.
F-86D 세이버는 세이버 독(Sabre Dog)이라는 닉 네임으로 더 유명하다.
1950년대 중반 북미 방공을 맡았던 30개의 전투요격비행대 중 20개 비행대가 F-86D을 운용하고있었다.
F-86D와 F-86L은 대외 군사 원조 계획에의하여 우방국에 제공되었다.
F-86D는 덴마크, 한국, 일본, 대만, 필리핀에 공급되었고, 태국은 F-86L을 도입하였다.
미국 주 방위공군의 26개 비행대가 F-102 델타대거로 대체될 때까지 F-86D와 F-86L을 운용하였다.
대한민국 공군 F-86D 세이버
유고슬라비아 공군 F-86D 세이버.
유고슬라비아는 T-33 훈련기, F84와 F-86 등의 제트 항공기를 운용하였다
F-86F
F-86F 세이버는 본격 제공 전투기이다.
한국에서 MiG를 상대로 공중전을 수행하고 있었던 세이버 조종사들은 엔진 파워 부족을 호소하였다.
조종사들은 기습공격을 가하고 도주하는 MiG-15를 추격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제너럴 일렉트릭은 더 강력한 J47-GE-27 엔진을 개발하고있었다.
이 엔진은 출력이 증가되어 분당 9,000피트의 상승 능력과 해수면상 693마일의 최고 속도를 낼 것으로 기대되었다.
F-86F-10생산기부터는 A-4 레이더 사격 통제 장치가 설치되었고, 이후에는 조종실에 방탄 장갑이 추가되었다.
F-86F-25와 30에서는 주익 개량과 투하식 연료탱크와 1000파운드 폭장 능력을 더했다.
1952년 8월, 노스 아메리칸 기술자들은 6-3윙을 개발해냈다.
6-3윙은 주익 끝단이 3인치, 앞쪽 가장자리가 6인치 연장되며, 주익 전면에 설치되었던
슬래트가 폐지되고 주익 전면 상부에 윙 팬스가 추가되었다.
F형의 주요 개수는 F-86F-35와 F-86F-40이었다.
F-86F-35는 저고도 폭격 시스템(LABS)을 탑재한 핵무기 운용 전투폭격기이다.
F-86F-40은 일본 항공 자위대용으로서 6-3윙의 끝단을 1피트 연장하고, 삭제되었던 슬래트를 다시 장착한 형이다.
대외 군사 원조프로그램에의하여 세이브를 운용하게될 각국 조종사들을 위해 제작된 형이기도하다.
주익의 길이가 증가된 F-86F-40은 저속 비행 안정성이 뛰어나 미국 및 외국 조종사 훈련을 위해
넬리스 공군기지 전투 비행 학교에도 배치된다.
F-86F 세이버는 도입 완료후 미 공군 16개의 비행단에서 운용하였다.
수원 비행장 제8전투폭격비행단 F-86F 세이버
6-3 주익 안쪽 파일런에 100파운드(45kg) 폭탄이 장착되어있다
12월 14일에 처녀비행을 실시하였다.
2호기(53-1228)는 1954년 8월에 제작을 완료하고 8월 5일 처녀비행을 하였다.
2호기가 제작되기 전인1954년 3월 17일에 원형 1호기가 추락하여 손실되어 버렸다.
TF-86F 2호기는 1호기와달리 주익 하드포인트에 외부 연료탱크 또는 폭탄을 장착할 수 있었고,
사격 훈련을위해 기수에 기관총 2정을 장착했다.
2호기는 광범위한 테스트에 사용되었다가 1955년 1월 31일, 넬리스 공군기지 전투 비행 학교에 전달되었다.
그러나 TF-100 수퍼 세이버 복좌기가 개발 진행되어 TF-86 복좌기 프로그램은 취소되었다.
TF-86 2호기는 1960년대까지 에드워드 공군기지 비행 테스트 센터에서 추적기로 사용되었다
1960년 에드워드 공군기지의 TF-86F 복좌 훈련기
RF-86F 정찰기
한국전쟁에서 T-6를 비롯하여 RB-45C 등 다양한 항공기들이 정찰 임무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미그 출몰지역인 미그 앨리로 출격하는 비무장 정찰기는 MiG-15의 손쉬운 사냥감이 될 운명이었다.
압록강 부근 정찰에나선 RF-80도 같은 운명이었다.
극동공군과 김포 비행장의 제67전술 정찰 비행단은 세이버를 정찰기로 개조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이미 오래전 프로젝트 ASHTRAY에 의하여 F-86A가 일본 일본 타치카와의
후방 유지 시설(REMCO)로 보내져 정찰형 RF-86A로 개조된 일이있었다.
하지만 안정된 개조가아니어서 품질 좋은 사진을 얻을 수는 없었다.
노스 아메리칸은 프로젝트 HAYMAKER하에 소수의 F-84F에 안정된 카메라 플랫폼을 설치하여 RF-84F로 개조하였다.
그 수가 많지는 않으나 나중에 일본과 한국공군은 RF-86F 정찰비행대를 보유하게된다
일본 항공 자위대 RF-86F 정찰기
정찰기의 특징인 동체 측면 조종석 아래 기기창 도어 돌출부가 보이고
동체 후부 측면의 스피드 브레이크가 개방되어있는 모습이다
CL-13A 세이버 Mk 5 / CL-13B 세이버 Mk 6
CL-13A 세이버 Mk 5 / CL-13B 세이버 Mk 6캐나다의 F-86F 시리즈 생산은 CL-13A 세이버 Mk 5로부터 시작되었다.
캐나다에어사는 6,355마력 아브로 오렌다10 엔진을 장착하고 윙 팬스가 설치된 6-3윙의
세이버 Mk 5 제1호기 제작을 1953년 7월 21일에 완료하고 7월 30일에 처녀 비행을 실시하였다.
캐나다에어는 총 370대를 제작하여 그 중 75대를 서독으로 보냈다.
대부분의 세이버 Mk 5는 노스 아메리칸 사출좌석대신 영국 마틴 베이커사제를 사용했다.
그후 7.275마력 아브로 오렌다 14엔진을 장착한 CL-13B 세이버 Mk 6를 제작하게된다.
캐나다는 1958년 10월 9일까지 665대의 세이버 Mk 6를 제작하는 등 총 1815대의 F-86세이버 시리즈를 제작하였다.
캐나다에어가 생산한 CL-13A 세이버 Mk 5
올덴버거 서독 공군기지 JG-72 제1슈타펠 소속 CL-13B 세이버 Mk 6
F-86H
노스 아메리칸의 세이버 시리즈 중 가장 강력한 기체가될 것으로 기대된 형이다.
먼저 제너럴 일렉트릭 8900마력 J73 엔진을 장착하고, F-86H-1형까지는 50구경 기관총을 사용하나
화력 강화를위해 20mm 기관포 4문으로 대체되었다.
최기형은 윙 팬스가 설치된 6-3윙이었으나 길이가 연장된 F-40윙으로 대체된다.
저고도 폭격 시스템을 탑재하고 주익의 하드 포인트에는
1200파운드 핵 무기를 운용할 수 있는 특수 파일런이 장착되었다.
그러나 강력한 엔진을 장착했음에도 불구하고 H형은 초음속 비행이 불가능했다.
거기다 F-100 수퍼 세이버+형의 개발로인하여 473대만 주문되었다.
2대의 F-86H 원형기(52-1975,52-1976)는 노스 아메리칸 잉글우드 공장에서 제작되고
나머지는 모두 콜럼버스 공장에서 제작되었다.
초도 제작기들은 먼저 클로비스 공군기지 제312전투폭격비행단에 배치되었고,
마지막기는 1955년 10월 공군에 전달됨으로써 생산이 종료되었다.
공군은 5개의 전투폭격비행단에서 F-86H를 운용하였다.
1957년부터 1958년 사이에 단계적으로 주방위공군에 이관되었는데, 1961년 베를린 위기가 발생하자
공군은 제101, 103전술전투비행대를 유럽으로 파견, 1962년 8월까지 프랑스에 전개되어있기도 하였다.
뉴욕 주방위공군이 1970년 9월 30일에 퇴역시키는 등 H형 전원이 퇴역하자
비행 시간이 짧은 기체들은 해군이 사용하게된다.
해군은 F-86H 세이버를 표적기 또는 가상 적기로 사용하였다.
F-86H이 MiG-17과 크기가 비슷하여 해군 탑건(TOP GUN)프로그램에서 가상 적기로 사용하였는데,
많은 해군 F-4 팬텀 조종사들이 F-86H 세이버의 밥이되기도하였다.
마지막에는 암람, 피닉스 등 각종 공대공 및 지대공 미사일 테스트용으로 사용되었다
F-86K
F-86K는 D형을 개조한 유럽 북대서양 조약기구 및 기타 국가가 사용할 수 있도록한 면허 생산기이다.
NATO는 소련의 폭격기 침공에대비, 전천후 요격기를 원했다.
F-86K는 로켓을 폐지하고 대신 4문의 M24A 20mm 기관포로 무장했다.
사격 통제 시스템은 MG-4로 대체하였고 F-86D에 사용되었던 AN/APG-36 수색 레이더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F-86K에 장착될 엔진은 F-86D의 엔진 업그레이후 결정하기로 되어있었으나 공군은 생산의 단순화를 결정,
F-86D, L, K 모두 추력 7.950파운드 J47-GE-33 엔진을 공통으로 장착했다.
초기에는 슬래트 장착형 주익이었지만 나중에 연장형 주익으로 대체하였다.
많은 수의 F-84K는 고정 무장인 기관포 4문에 2발의 사이드 와인더 공대공 미사일을 운용하도록 개수되었다.
YF-86K 원형기의 1번째 비행은 1954년 7월 15일에 실시되었다.
노스 아메리칸이 F-86D-40 기체를 개조하여 제작한 2대의 YF-86K(52-3630, 52-3804)원형기는
에드워드 공군기지에서 테스트후 이탈리아로 보내졌다.
노스 아메리칸은 잉글우드 공장에서 120대의 F86K 세이버를 제작하였고,
이탈리아 피아트사가 면허 생산에 들어갔다.
이탈리아 공군 제1여단은 1955년 늦은 여름부터 F86K 세이버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공군은 F-104 스타파이터를 도입하는 1964년부터 F86K을 퇴역 시키기 시작했다.
F86K 세이버를 운용한 나토 조약 국가는 이탈리아, 프랑스, 서독, 네덜란드 그리고 터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