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 아내 된 가난했던 여배우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05.20 20:0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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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 본명은 이운학. 후일 모택동의 아내가 되는 강청과 동일인물이다. 15세에 산동실험극원에 들어가 왕박생 등으로부터 연극과 고전음악을 배우며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한편 그의 배우시절 수입은 과연 얼마였을까? 남평은 1934년 중국 좌익희극연맹에 가입, 베이핑에서 생활했는데 당시 월세가 은화 2원, 생활비가 은화 6원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매우 곤궁한 축에 속한다. 1935년 남평은 상하이로 돌아가 입센의 <인형의 집> 노라 역을 맡아 첫 공연부터 연일 매진을 기록하면서 대히트를 쳤다. 남평은 불과 21세의 어린 나이로 상하이의 유명인사가 되지만, 이후 배우로서의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당시 그의 월급은 은화 60원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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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세기를 풍미했던 은막의 스타 호접. 1930년대 중국영화계가 황금시대를 맞을 무렵, <어광곡>, <마로천사>, <십자가두> 등의 대표작으로 대중들과 대면했다. 이 시기, 상하이에는 명성, 천일, 전통, 연화, 예화 등 유명 영화제작사들이 포진해있었고, 작가 및 배우들의 노력으로 중국 영화산업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30년대 배우들의 경제 상황에 대한 체계적 연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영화 주요 출연진들의 출연계약서 및 영화사의 장기계약 배우 월급 내역을 살펴보면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편당 출연료가 가장 높았던 배우는 호접으로 2천원이다(인민폐 약 8만 위안). 그 다음은 천원(인민폐 약 4만 위안)을 받은 완령옥. 일반 배우들의 월급은 최저 30원(인민폐 약 1200위안)부터 시작하여 다양하다. (당시 은화 1원의 가치는 현재 인민폐 40위안 정도에 상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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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배우 진파아. 1936년 <스타 반월간>의 커버 모습이다. 1907년 7월 광동성 출생. 그는 1934년 명성 영화사에 정식으로 소속되어 무성영화 <청춘선>의 출연료로 은화 300원을 받았다. 또 다른 영화 <도리겁>의 여주인공 배역 출연료 역시 300원. 같은 해 잡지 <현대연극>의 인터뷰에서 그는 한달 생활비가 100원이 못 된다고 밝혔다. 그는 글을 쓰기도 했는데 당시 1000자 당 3원의 기고료를 받았다. 총 발표한 글이 23편이니 여기에서 그의 월 수입이 은화 200원을 넘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진파아는 영화사로부터 월급을 받기도 했는데 140원에서 160원 사이였다. 소속사를 옮긴 1936년엔 월급이 더욱 올라 은화 200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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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여주인공 완령옥. 1930년대 아직 중학생에 불과했던 그는 천일 영화사의 일반 배우로 연기를 시작했다. 이 때 그의 월급은 겨우 은화 30원. 명성 영화사로 옮기고 주연을 맡으면서 몸값이 상승, 최고 100원까지 올라갔다. 완령옥은 유명 작품 <신여성>의 주연을 맡으며 전성기를 누리는 듯 하다가 영화 속에서 자신이 맡은 배역과 똑같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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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선. 1932년, 당시 13세였던 주선은 명월가무단에 가입, 빼어난 노래실력으로 인정을 받았다. 신월가무단에 몸담던 시절은 경제적으로 상당히 힘들어 티켓 판매 수입으로 하루에 0.5원 정도를 벌 수 있을 뿐이었다. 예화 영화사에 소속되어 영화 <화촉지야>의 조연을 맡게 되면서 처음으로 받게 된 월급은 50원. 이는 인민폐 2000원에 해당하는 액수로 당시의 주선으로서도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1937년 <마로천사>가 유래없는 성공을 거두자 그의 월급도 200원으로 인상되었다. 영화 출연 외에도 주선은 유행가 취입을 통한 수입도 있었다고 한다

 

 

자료제공 : http://newspic.cn.yahoo.com/books/article/index.html?type=gallery_show&p=8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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