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보병사단 부사단장 헨리 하지소장(왼쪽으로부터 두 번째).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세 번째). 제7보병 사단장 데이비드 바 소장(네 번째).
제17연대장 허버트 포웰 대령(오른쪽 끝)
11월26일 아침.
제1해병사단장 스미드 소장은 헬리콥터로 흥남의 사령부로부터
유담리에 도착하여 정면의 적정을 보고받고 현지를 정찰했다.
이날 유담리의 제7연대는 3명의 중공군을 생포했는데 이들은 중공군 제60사단 소속으로
제20군 예하 제58, 제59, 제60 3개 사단이 20일, 전선에 도착했다고 진술했으며
또 중공군의 작전계획에 대해서도 정보를 제공했다.
그 내용은 미 해병 2개 연대가 유담리에 도착하면 중공군은 2개 군으로
해병사단을 공격한다. 유담리의 해병 2개 연대에 대해서는, 2개 사단으로
각기 북쪽과 서쪽에서 협공하게 하고, 3개 사단으로는 병참선을 차단하게 되는데,
유담리로부터 하갈우리, 하갈우리에서 고토리간, 고토리에서 진흥리간에
각각 1개 사단으로 공격하여 차단시키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아주 적절한 작전 구상이었는데,
말단 병사가 이와 같은 대규모 작전 계획을 소상히 알고 있을 리가 없다고
판단하여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었다.
스미드 소장은 유담리에서 흥남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헬리콥터에서 눈이 덮인
고원을 정찰했으나 중공군의 징후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지역에 수만명의 중공군이 숨을 죽이고 숨어있었던 것이다.
유담리는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며, 북, 서, 서남 및 남으로 향하는 도로가
이 지점에서 시작되고 있는 교통 요충지이다. 이 분지 가까운 곳에서 분지를
잘 감제할 수 있는 1271, 1403, 1282, 1240, 1276, 1294 등의 고지가 높이 솟아 있고
이러한 고지들은 차후의 작전에서 피아 쟁탈전의 초점이 되었던 중요한 지형이다.
해병대는 자신들에게로 조용히 다가오고 있는 재앙을 알지 못하였다.
이미 육군은 해병대가 유담리로부터 서쪽으로 공격을 시작하기도 전에,
측방 엄호도없이 예정보다 더 빠르게 쾌속 전진만 하다가 제8군이 강력히 공격 당했고,
미 보병 제2사단도 4000명의 병력과 포병장비의 대부분을 잃어 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해병대가 작전을 마칠 때까지 버텨주어야할 부대가 황급히 남쪽으로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맥아더 장군의 대공세는 중공군의 강력한 공격에 밀려
이미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런데 육군은 이러한 긴급한 상황을
바로 다음날(27일)부터 작전을 개시하게되는 해병대에게 알려주지도 않고 있었다.
페이스(Don C. Faith)중령의
미 육군 제7보병사단 제32연대 제1대대(페이스 특수임무부대)가 육군 중 제일먼저
장진호 동안에 도달하여 해병제5연대로부터 책임전술구역을 인계받았다.
사단장 데이비드 바 소장대신 지휘를 총괄하고 있었던 헨리 하지(Henry Hodes)준장이
페이스 중령의 지휘소에 들러 지원부대들이 도착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제31연대전투단(Regimental Combat Team)연대장
맥클린(Allen D. Maclean)대령도 이동해오고 있는 제3대대와 박격포 중대,
의료진, 제57야전 포병대대등으로 구성되어진 혼성부대(특수임무부대)를
지휘하기 위해 도착하였다. 페이스 중령의 제32연대 제1대대도 맥클린 대령의
지휘 하에 놓여지게 되어있었다.
페이스 부대에는 에드워드 스탬포드(Edward P. Stamford)해병대위가
3명의 부하와함께 항공함포 통제팀으로 배속되어 있었다
미 육군 제 31연대장 알렌 맥클린 대령과(왼쪽)과 돈 페이스 중령
27일 08시15분,
제7해병연대장 호머 리첸버그(Homer Laurence Litzenberg)대령 휘하 제3대대는
유담리-무평리도로 양측의 산악지대를 2개 공격제대로 나누어 서쪽방향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1426고지와 1403고지를 저항없이 점령했고
G중대는 다시 서남방 쪽으로 공격을 계속했다.
주공부대인 레이몬드 머레이(Raymond L. Murray)중령의
제5해병연대 제2대대(대대장 로이스-Harold Sigward Roise중령)는
제7연대 제3대대와 동시에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진격하였는데
제1목표인 1271고지에 포진하고 있던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공격이 여의치않자 제2대대는 이미 1403고지를 점령한 제7연대 제3대대의
야포와 박격포, 그리고 공중지원을 받아 겨우 1271고지를 점령할 수 있게된다.
또한 장진호 서쪽으로 수색정찰을 나갔던 제7연대의 수색대가
중공군을 만나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귀환했다.
이날의 전투상황으로 보아 상당히 강력한 중공군이
유담리부근에 진출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중공군 정찰대가 저녁 때까지 지근거리까지 접근하여
정찰을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해병대는 중공군의 특기인 야간공격에
대비하기위하여 신속히 진지를 구축해야만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해병대는 거의 6만에 달하는
중공군의 대병력이 서서히 목을 조여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육군의 상황은 더 암담했다.
미 보병 제7사단은 각 예하부대들 간에 제대로 연락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장진호 주변에 분산배치 되어있던 제31연대전투단(Regimental Combat Team)연대장
맥클린(Allen D. Maclean)대령이 전초기지를 마련하기 위하여 내보낸
수색소대원 전원이 행방불명되는 불길한 사건이 발생한다.
또한 제31연대는 하갈우리를 포위하기 위해 장진호 동안으로
이동해오고 있던 중공군 제80사단의 우선 제거대상이었던 것이다
제1해병사단 제7해병연대장 호머 리첸버그(Homer Laurence Litzenberg)대령.
장진호 전투 당시 47세로서, 일개 병사에서 중장까지 승진하게되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과 태평양 전선에 참가했던 그는 대담한 작전을 수행하여
전격 리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부하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으며, 근무시간 외에는 부하를 절친한 친구처럼 대해
그 광경을 본 장교들을 놀라게 했던 인물이다.
또한 부하 장교들과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즐겨했으며,
그에 대한 부하들의 신뢰도 절대적이었다 한다.
1951년 1월, 준장으로 승진한 후 중장 계급으로 예편한다.
제1해병사단 제5 해병연대장
레이몬드 머레이(Raymond L. Murray)중령.
당시 37세의 젊은 연대장이었던 머레이는 텍사스 농과대학을 졸업한 후, 1935년 소위로 임관하여 중국 북경과 아이슬란드에서 근무한 후 영국 전술학교를 졸업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29세의 대대장으로서 과달카날, 타라와, 사이판에서 전투를 하였으며 중상에도 불구하고 용전분투하여 은성훈장 2개와 해군 십자장을 수여 받았다.
그의 용감성과 치밀한 계획, 지휘능력은 일찍부터 해병대에서 주목 받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 제1진으로 제5해병연대의 파견이 결정되자 중령계급으로 연대장에 임명 되어 부산 교두보 및 인천상륙작전에서 큰 활약을 하였다.
1951년에 대령으로 승진하고 해병대 학교장, 오키나와 제3해병사단 부사단장으로
근무 했으며 1959년 소장으로 진급, 워싱턴 해병대 사령부 작전부장을 거쳐
1967년 수륙 양용군 부사령관으로 임명된다.
27일 저녁,
제5, 제7해병연대는 사단 포병의 주력과 함께 전면방어진지를 편성하고
다음날의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갈우리에는 제1해병연대 제3대대장이
지휘하는 2개 소총중대 외에 105mm 곡사포 2개 포대와
각종 보급정비부대가 위치하여 대량의 보급물자가 야적되어 있었다.
제1해병사단 사령부는 아직 흥남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28일에는 그곳에
후방 지휘소를 남겨두고 주지휘소는 아침 일찍 하갈우리로 이동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사단 본부중대와 각 참모부의 주력은 이미 하갈우리에 도착해 있었다.
또한 하갈우리에는 미 제10군단의 지휘소와 후방시설이 곧 이동해 올 예정이었고
각종 부대의 선발대는 이미 도착하고 있었다. 수송기용 활주로는 해병 공병대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업중이었지만 아직 1/4정도만 겨우 완성되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하갈우리는 지휘 및 군수지원의 중심지가 되어 가고 있었는데,
이것을 방어하기 위한 보병병력은 극히 적었다
루이스 풀러(Lewise Burwell Puller)대령
고토리에는 루이스 풀러(Lewise Burwell Puller)대령이 지휘하는
제1해병연대 2개 대대와 105mm 곡사포 1개 포대가 전면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으며
지휘소는 보병 1개 대대와함께 황초령에 위치하고 있었다.
당시 52세였던 풀러 대령은 1918년 일개 사병으로 입대하여 수 많은 전공을 세우고
나중엔 해병 중장까지 승진한 사람이다. 미 해병대에서는 전설적인 인물로 통했으며
그의 전기는 해병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베트남 전쟁에 자원하여 참전하려 했으나 너무 고령이라 좌절되기도했다.
진흥리에는 제1해병연대 제1대대와 105mm 곡사포 포대가 있었으며
덕동고개에는 하갈우리로부터 이동해 온 바아버(William E. Barber)대위의
제7연대 제3대대 F 중대가 도착하고 있었다.
이 고개는 하갈우리와 유담리를 연결하는 유일한 도로를 통제하는 요충지였기 때문에
제7연대는 증강된 1개 중대로 이곳을 확보할 생각 이었다. 바아버 대위는 적의 공격이
예상되는 지점을 예측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기에 유리한 지점을 찾아내었다.
이 결과로 나중에 포병지원을 보다 원활히 받을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은 유담리보다 하갈우리로 부터 더 가까운 곳에 진지가 위치했기 때문이다
바아버(William E. Barber)대위
바아버 대위는 1919년11월30일 캔터키 주에서 태어나 1940년3월 해병대에 입대하여 공수교육 이수 후 노스 캐롤라이나 뉴 리브에서 공수교육대에 근무한다.
1943년5월, 버지니아 콴티코의 장교 후보생으로 입교하여 8월11일 소위로 임관한다. 바아버는 1944년까지 제1공수연대에 근무하였고, 제5해병사단 제26연대 소대장으로 이오지마 전투에 참가하여 부상을입고 후송되었다.
그 직후 중위로 진급하여 일본에서 근무하고, 1950년10월에 대위로서 한국전쟁에 참가, 명예훈장을 수여받게된다.
바아버 대위는 전공을 세우고 성실한 성품 때문에 일개 사병에서 장교로 승진하여 한국전쟁에 중대장으로 참가한 것이다.
1960년3월에 중령으로 진급한다.
한편, 중공군은 용산동 부근에 있는 미 제25사단을 공격함과 동시에
구장동부근의 미 제2사단을 돌파하여 진격해오고 있었다.
이에 미 제8군은 정주부근까지 진출해 있던 미 제24사단에게 즉각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이무렵 송시륜(宋時輪) 장군 지휘하의 중공 제4야전군 예하
9집단군의 12개 사단 12만명은 장진호부근에 부대 전개를 거의 마치고
미군에 대한 공격준비를 완료하고 있었다.
제9집단군은 유담리 북방 16km 지점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유담리, 덕동고개에 3개 사단,
진흥리, 하갈우리, 고토리에 각각 1개 사단씩을 투입하여 동시에 공격하여 일거에
미 해병사단을 섬멸하려는 기도하에 공격개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세부사항을 보면 제20군 예하 89사단은 유담리 서방에 전개하고
제59사단은 하갈우리-유담리 간의 도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유담리를 우회하여
덕동고개에 있는 제7연대소속 바아버 대위의 F중대 방어진지와
유담리 남쪽의 제7연대 C중대 방어진지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58사단은 28일 밤에 하갈우리의 미군을 공격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하갈우리 서남방을 향하여 진격중이었으며, 제60사단은 고토리-하갈우리 도로를
차단하려고 고토리 부근에서 북쪽을 향하여 이동중이었다.
제27군 예하 79사단은 유담리 북방에서 공격하기 위해 집결지로부터
공격 대기지점으로 이동중이었으며 제80사단은 장진호 동쪽인 진흥리의
미군 방어진지에 대한 공격준비를 끝냈으며 예비로 2개사단을 확보하고 있었다.
또한 제26군도 계속 남하중이었다.
지금 이 상황은 모택동이 가르친 그대로이다.
"어떠한 전투에 있어서도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사방으로부터
적을 포위하여 한 명도 놓치지 않도록 완전섬멸한다.
준비없는 작전이나 확신없는 작전은 하지 않는다.
어느 싸움에서도 충분히 준비를 갖추고 적과 아군간의 조건을 비교하여
승리할 확신을 갖도록 해야만 한다"-1947년2월25일/ 당면한 정세와 우리의 임무
당시 50세이던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겸 중공군, 북한군 통합사령부 사령관이었던
팽덕회(彭德懷)는 모택동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봉천에서 이 작전을 구상하고 결정했다 한다
팽 덕회 사령관(왼쪽)
11월27일 저녁 유담리.
27일저녁, 제5, 제7해병연대는 유담리 주위에 10개의 소총중대를 배치하여
전면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제5해병연대 3개 대대는 연대 주력과함께 무평리에 대한 공격작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장진호 동쪽 기슭에서 출발하여 27일 정오경에는 유담리 서쪽지역에 집결하였고,
제5해병연대 주력의 2개 대대는 무평리 공격을 위하여 유담리에 집결했었다.
그밖의 방어진지의 남쪽 주보급로상에는 제7해병연대 C중대가 있었고,
유담리와 하갈우리 중간지점인 덕동고개에는 바아버 대위의 F중대가 있었다.
그런데 차량부족 때문에 제7연대 제2대대장 렌돌프 록우드(Randolph Lockwood)중령을
포함한 대대본부와 화기중대의 주력과 제7연대 대전차중대는 아직 하갈우리에 남아 있었다.
따라서 제7연대장 리첸버그 대령은 각중대장들에게 록우드 중령이 도착할 때까지
제1대대장인 데이비스(Ramond Gilbert Davis)중령의 지휘를 받으라고 지시했다.
유담리에는 전차 승무원이없는 채로 M4A3셔먼 전차 1대가 남겨져 있었다.
사단장이 무평리 공격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27일 하갈우리에서 유담리를 향해
4대의 M-26 퍼싱전차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노면이 얼어붙어
미끄럽기 때문에 유담리로 전진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더 가벼운 셔먼전차 1대로 시험운행을 해본 결과
3시간 만에 무사히 유담리에 도착했다.
승무원은 다음날 전차소대의 이동을 유도하기 위해 즉시 헬리콥터를타고 하갈우리로
돌아갔다. 이렇게 해서 승무원이 없는 셔먼전차 1대가 유담리에 있게 된 것이었다.
포병은 유담리 부락의 동남방향에 전개하여 밤11시 까지 진지편성을 완료 하였고,
제11해병포병연대의 제1대대(105mm 곡사포)와 제3대대 G포대와 I포대(105mm 곡사포),
그리고 제4대대(155mm 곡사포)로 포병대대군을 편성하였으며 총문수는
105mm곡사포 30문, 155mm 곡사포 18문으로 총 48문이었고,
그 외에 제5, 제7해병연대를 합쳐 4.2인치 박격포가 모두 24문이 있었다.
제1 근무대대의 분견대가 유담리에 도착하여 사단 보급소를 개설했는데
식량과 연료는 각각 3일분, 소화기 탄약은 부대 보유분 외에 2일분에 불과했고
포병탄약도 포대의 기본 휴대량 외에는 극히 적은 수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제1해병사단 제1수송대대는 보급품을 싣고 낮에 유담리에 도착 했는데
수송대대장은 다음날의 보급품 수송을 위하여 어두워져서야 하갈우리를 향해 출발했다.
이때 유담리의 부상자는 이 차량을 이용하여 전부 후송되었다.
또한 양 연대의 보유차량도 될 수 있는 한 많은 보급품을 수령하기 위해서
자대에 40~50대를 남겨 놓고 그 외의 차량들은 모두 수송대대장이 통합지휘하여
하갈우리로 향했다. 이들 차량은 모두 험한 덕동고개를 넘어 무사히 하갈우리로 돌아갔다.
이러한 조치로 유담리 내에는 부상자가 하나도 없게 되었고 차량 수도 줄어들어
차후 작전행동에 큰 도움을 주는 결과가 되었다. 덕동고개에 포진한 F중대원들은
전조등을 켜고 덜컹 거리며 지나가는 자동차 행렬을 보고 있었는데,
이 차량들은 그 뒤로 유담리로 돌아오지 못하고만다.
전쟁 초기에 미군은 차량이 너무 많아 행동에 지장을 받았고,
더욱이 부상자까지 동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해가 많았다.
유담리에서 부상자와 차량 숫자가 줄어든 것은 우연히 얻어진 행운 이었다.
밤이되자 하늘에는 항공기가 사라지고 기온은 영하 29도로 급격히 내려갔다.
바로 이때 어둠을 타고 소리없이 중공 제89사단이 서북방으로 부터,
제79사단은 북방으로부터 산을 타고 유담리 진지로 접근중이었으며,
제59사단은 우회하여 남산과 덕동고개를 향하고 있었다.
중공 제4야전군 사령관 송시륜은 제89사단으로 하여금 서북쪽에서
제79사단은 북쪽에서 미 해병대를 야간공격으로 돌파하게 하고
동시에 제59사단으로 하여금 퇴로를 차단하게 하여
유담리의 2개 해병연대 주공을 포착, 섬멸한다는 계획 이었다.
퇴로를 차단하여 완전히 독 안에 든 쥐로 만들어 일거에 격멸해 버린다는 것이었다
중공군의 공격 11월 27일 밤~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린 당시의
각 연대와 예하부대의 포진 상황과
중공군 주 공격 루트입니다.
미흡하지만... 클맄하셔서 좀 더 큰 그림으로 보시길...
(서북지역 산악전투 시작)
중공 제89사단은
박격포 사격을 가한 후 유담리 외곽 서북쪽을 따라 진지를 구축한
제5해병연대 제2대대(대대장 해롤드 로이스중령)와
제7해병연대 H중대(중대장 르로이 쿡대위) 정면에 대하여
제266, 제267연대를 돌격 시켰다.
이 돌격은 박격포사격과 수류탄 투척으로
27일 밤9시30분부터 10시 사이에 시작되어 밤12시 까지 계속 되었다.
용감하게 돌격해온 중공군은 소규모 돌파구는 열었으나 종심깊게 들어오지는 못하였다.
이 동안 해병대는 중대 예비병력으로 진내에 침투해온 중공군을 역습으로 격퇴하고
큰 피해를 주었다. 그러자 중공군은 일단 공격을 중지하고 다시 전투태세를
가다듬은 다음, 새로운 병력으로 28일 새벽3시경부터 다시 공격을 개시하여
일부는 돌파에 성공하여 1271고지 정상의 제5해병연대 제2대대의 진내에 돌입 하였다.
한편, 다른 중공군 부대는 지형상 고립되어있는 1403고지의 제7해병연대 H중대를 포위,
기습공격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중대장 르로이 쿡대위등 많은 해병들이 전사, 부상 또는
실종되고 새벽6시에 고지를 점령당하고 말았다.
용감히 싸우다 겨우 살아남은 해병들은 새벽에 고지를 탈출하여 빠져 나왔다.
제7해병연대 제3대대장
윌리엄 해리스 중령(제1해병항공단장 피일드 해리스소장의 아들)은
1403고지 상황을 전달받고는 몹시 안절부절했다.
1403고지가 탈취 당했다는 것은 1271고지 정상의 제5해병연대 제2대대의
후방통로를 차단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중공군이 차지한 것을 의미한다.
유담리의 연대와 연결되는 도로가 고지의 중공군에게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 이었다.
유엔군이 압록강에 도달하자 모택동은 대만공격을 뒤로 미루고
유엔군을 치기로 결정했지만소련은 3차대전을 우려하여 직접 참가하지는 않는다.
4부로 계속 이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