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전조가된 비극의 디에프 상륙작전을 간략히 살펴보면...
1940년 영국군은 프랑스 덩케르크에서 쫓겨난 뒤로 노르웨이 생나제르 등
독일이 점령한 영토에 대한 습격을 자주 시도하였다.
1942년, 극동에서는 일본이 인도를 위협하고 있었고,
북아프리카의 영국군은 퇴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소련을 공격하여 스탈린그라드 부근 볼가강에서 압박을 가하고 있었고,
독일 u-보트는 5월과 6월 동안에만 1백5십만톤의 화물선을 가라 앉혀
영국의 보급선을 유린했다. 영국 수상 처칠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소식은
일본의 기습으로 미국이 참전하였다는 것이다.
처칠은 미국과 소련, 국내 여론으로부터 유럽 제2전선을 형성하여 독일군의
전력을 집중시켜 고전하는 소련을 구원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극동,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영국으로서는
유럽을 침공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전쟁 준비가 아직은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은 미국과 독일의 침공을 받은 소련으로
부터 유럽제2전선 형성 압력을 받고있던 1942년 3월, 영국 연합작전사령관으로
부임한 루이스 마운트배튼경은 소규모 기습작전보다는 대대적인 침공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제출된 여러가지 침공작전안들이 반려된 가운데
영국군 전투기의 전투반경 내의 프랑스 해안 항구들을 공격하자는 안이 나왔다.
그중에서 7개 지점은 여러 가지 이유로 취소시킨 마운트배튼경과 참모들은
해안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디에프를 지목했다.
디에프는 영국 뉴헤븐으로부터 해협을 건너 113km 거리에 위치하여 해뜨기 전에
야음을 틈타 침입하여 작전을 실시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전투기의 행동반경 내에
위치하여 유리했던 것이다. 또한 상륙 지점모두가 양호한 것으로 보였던 점들이
고려되었다. 1942년 4월 4일, 마운트배튼경은 참모에게 종합적인 작전 계획 안건을
준비하도록 지시하였다.
마운트배튼경이 제출한 작전 계획은
첫 번째, 디에프의 어느 한쪽 측면에 보병과 전차를 상륙시키고,
항구주변 2개의 높은 곶에서 협공하여 도시를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동쪽과 서쪽 측면에 상륙한 병력이 해안포대 등을 장악한 다음,
공격부대가 항구 전면에 상륙하여 도시를 정면에서 공격, 장악하다는 것이었다.
즉, 주공 부대의 상륙에 앞서 특공대가 바렝지벨르와 베르느발의 해안포대를
점령하고, 디에프 양옆 두 개의 곶도 장악하여 포격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안이었다. 영국군은 단순한 기습보다 해안에 상륙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하게되면
대규모 상륙 및 지원 작전의 귀중한 경험도 동시에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전후의 디에프 앞에 보이는 건물은 호텔 카지노 건물입니다
1942년 4월 18일, 군사위원회는 마운트배튼의 두 번째 작전계획안을 승인하였다.
디에프 상륙작전은 코드명 "루터(rutter)"로 명명되었으며 1942년 7월 중 적당한
때에 실시하기로 계획되었다. 이 작전은 이전의 그 어느 작전보다도 규모가 커서
특공대뿐만 아니라 대규모 정규군이 가세해야 가능했다.
그래서 공격의 주력부대는 캐나다 제2사단이 맡게되었다.
캐나다군은 1939년 12월 영국에 도착한 이후로 1942년 여름까지 약 20만명의
병력이 영국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은 거의 3년동안 영국본토방어임무와 훈련을
실시하고 있었으며, 3개 보병사단과 중 포병 여단을 비롯한 2개 기갑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전에 참가하지 못했던 탓에 병사들의 사기는 떨어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캐나다 병사들은 싸우기를 원하여 모두 유럽에 자원한자들로만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영국군 지휘관인 맥노튼 중장이 디에프
침공작전에 캐나다군을 투입하자고 제안하여 마침내 캐나다 제2사단이
주력공격부대로 참가하게된 것이다. 약 6천명 이상의 병력이 해안에 상륙하게되고,
영국 해군 군함은 공격동안 함포지원을 하며 공군은 적 전투기의 공격을 막아낼
운명이었다.
v.w 오들럼 소장의 캐나다 제2사단은 은 1939년 12월 17일 캐나다 제1보병사단이
영국 그린록에 도착한 다음해인 1940년 영국에 도착했다. 제2사단 소속 대부분의
대대들은 북대서양 주요 요충지인 아이슬랜드 수비대로 근무하였다.
그러다 영국군 제49사단과 임무교대를 한 후 다시 영국으로 들어왔다.
캐나다군은 영국군 편제하에 들어있었으며, 제2사단의 3개 여단(4,5,6)은
각각 3개의 보병대대와 기관총대대, 그리고 3개의 야전포병연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1941년 제2사단장 오들럼소장이 제1차세계대전에서 포병장교로 명성을 얻은
존 해밀턴 로버트 소장으로 교체되었다. 단조로운 훈련과 권태로운 캠프생활에 젖은
병사들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으나 로버트 소장은 나이많은 장교들을 젊은장교들로
교체하고 사단에 활력을 불어넣는 작업을 실시하였다.
그러다 마침내 실전에 투입된다는 소식이 들어왔는데 그 곳이 바로 디에프였다.
사단장 로버트 소장은 기습공격에 투입할 2개연대(4,6연대의 6개대대)를
섬으로보내 강도높은 훈련에 돌입하였다.
캐나다 로얄연대 병사
쥬빌리 작전에 참가하는 캐나다 병사들을 격려하는 왕족 해군대령인 마운트배튼경
5월 9일, 공식적인 작전의 윤곽이 서서히 잡힌 가운데 마운트배튼경의 참모들은
상부에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정보보고서는 디에프의 방어가 몹시 취약하며
해변은 보병과 기갑차량들이 상륙하기에 적합한 것으로 작성되었다.
그러나 마운트배튼경은 해변과 도시 중앙부의 방어가 강력하다는 보고 때문에
불안하였으나 작전의 결과에 대해서는 낙관하고 있었다.
마침내 코드명 루터는 "루터작전"으로 공식적인 승인을 받았으며
7월 4일과 8일 사이에 실시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7월 7일, 훈련끝에 잠정 실시된 루터작전은
악천후와 독일공군기의 공격으로 포기하고 말았다.
모든 사람들이 작전에 대하여 신중하게 회의적인 가운데
마운트배튼경은 끈질기게 처칠을 설득하고 있었다.
결국 처칠이 작전을 승인하자 마운트배튼경의 연합작전사령부는 작전재개를
명령하였고, 8월 중순경에 실시하기로 결정된 이 작전은 쥬빌리(jubilee)작전으로
명명되었다.
캐나다 제2사단의 두 개 공격여단은 3곳의 해변에 상륙한다음 도시 남부를 장악하고
독일군 제302사단본부와 비행장을 점령해야했다. 공병과 폭파반은 항구의 도크와
전화 교환국, 철도, 조차장, 발전소, 터널을 장악하고 그 사이 독일군 문서 등
정보들을 획득해야한다.
디에프항은 아르퀘스강과 연결되어있고 도시를 사이에두고 동쪽과 서쪽에 높은
절벽이 있다. 특공대들은 각각의 해안포대 ("헤스, 괴벨스 포대"로 명명)를 공격하며,
4특공대는 오렌지1,2비치에 상륙하고 3특공대는 옐로우1,2비치에 상륙하기로
예정되었다.
도시 정면 공격은 셔우드 레트 준장 휘하 캐나다 제4보병여단의 2개연대
(에*, 로얄 해밀턴)는 레드비치과 화이트비치에 상륙한다.
공격이 시작되면 lct로 수송된 기병연대 14전차대대의 처칠보병전차와
병사들이 도시를 공격한다.
또다른 대대는 디에프 동쪽 1.6km지점의 푸이스해안에 상륙하여 "롬멜"포대와
곶을 공격한다음 에*대대와 합류하기로 계획되었다.
캐나다 제6여단은 푸르빌해안에 상륙하여, 선도대대는 스시에 강의
상륙거점을 확보한다. 이어 근거리에 위치한 "히틀러"포대를 제거한 다음
독일군사단본부와 비행장을 습격하기로 하였다.
존 휴즈 할레트 대령 휘하의 해군은 총 237척의 각종 선박을 작전에
투입하게 되는데,대부분이 상륙정과 경함선이었다.
실제로 포지원을 할 수 있는 함선은 구축함 8척과 소수의 증기포함뿐이었다.
디에프 항의 카지노 앞 해변 / 1942년
디에프 상륙작전을 위하여 전차 양륙함(lct)에 승선하는 캐나다군
1942년 8월 18일 저녁, 영국 사우스햄프턴을 비롯한 여러 항구에서는
디에프 상륙작전 병력들이 함선에 오르고 있었다.
포츠마우스에서는 캐나다 14전차대대(캘거리)의 처칠전차들이 전차양륙함 lct에
탑재된 채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출발명령이 내려지자 각종 함선들은
어둠을 헤치며 조용히 영국해협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영국 소해정에 의해 이미 제거된 해협의 독일군 기뢰부설지역을 통과하여 디에프
가까운 지점까지 이상없이 전진했던 것이다. 뉴헤븐에서 출발하여 옐로우 1,2 비치를
향해 항해하던 3특공대가 포함된 소함대는 고요한 밤바다의 어둠을 가르며
전진하고 있었다.
03시 47분,
디에프로부터 약12km떨어진 지점까지 접근하였을 때 와이버드
소함대지휘관, 던포드 슬레이트 중령과 미국 레인저 지휘관 로이 머레이 대위가
탑승한 증기포함 sgb5는 소함대의 최후미에서 항해중이었다.
23척의 lcp에 분승한 3특공대의 임무는 두파로 나뉘어 2개의 해안포대와
2개의 곶을 해뜨기 전에 장악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해뜨는 시각은 05시50분이며 그전에 표적지들을 모두 장악해서 포대를 침묵
시켜야만 했다. 만약 작전이 실패하면 뒤이어 상륙하게되는 아군의 머리 위로
포탄이 쏟아지게 될 것이었다.
두파로 나뉘어 디에프로 향하던 특공대에게 갑작스런 재앙이 들이닥쳤다.
좌현 어둠 속에서 선박들의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던 것이다.
이 선박들은 디에프를향해 항진하던 5척의 독일소형연안선과 3척의 호위함들이었다.
독일 함선들은 어두운 밤하늘에 조명탄을 발사하여 그대로 노출된 상륙주정들을
향해 포사격을 가해왔다. 증기포함 sgb5도 포사격으로 대응하였고, 가까이 있던
포 상륙주정 lcf(l)1이 ml346 모터 보트를 띄운 다음 합류하여 포격전에
들어갔으나 역부족이었다.
sgb5 포함은 보일러와 무전기가 파괴되어 기동이 멈췄으며 사격지휘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lcf(l)1은 격렬한 전투 끝에 독일 함선 한척에 화재를,
또 한척을 격침시키면서 3특공대가 달아나도록 지원하였다.
나중에 독일 함선들이 공격을 멈추고 디에프로 철수하였을 때, lcf(l)1의 모든
장교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승무원들이 전사했으며 선체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sgb5의 무전기 파괴는 북동쪽 6km지점을 항진하던 2척의 호위 구축함을 부르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구축함도 멀리서 포성과 섬광을 보았지만 해안포
사격으로 생각하여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3특공대는 독일 함선의 공격때문에 상륙주정들이 파괴되거나 뿔뿔이 흩어져 버려
기습부대로서의 기능을 이미 상실해버렸다. 독일 함선과 조우하기 전, 이미 4척은
고장으로 인해 뉴헤븐으로 되돌아 갔으며 남은 주정은 19대뿐이었다.
전투 후, 4척은 심각한 손상을 당해 뉴헤븐으로 향했고, lcf(l)1 주변에 3척,
sgb5와 가까운 곳에 5척이 남아 있었다.
나머지 7척은 행방불명 되었다.
작전 포기를 결심한 지휘관들은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주정으로 옮겨타고
급히 영국으로 되돌아 갔다
독일 해군의 공격을받고 뉴헤븐으로 되돌아간 lcp의 캐나다 3특공대원들
옐로우 비치 / 제 3 특공대
행방불명되었던 7척의 lcp는 각기 디에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lcp15의 정장 헨리 버키 중위는 피터 영 대위와 20명의 특공대원을 태운채
예정된 베르느발의 옐로우2비치를 향해 계속 항진하고 있었다.
예정보다 5분 빠른 04시 45분, 피터 영 대위와 대원들은 표적지인 "괴벨스 포대"
공격을 위하여 해안에 상륙했다. 이때 ml346 모터 보트도 부근 해안에서 항해
중이었다. 다행히 독일군의 공격은 없었지만 맨 처음 만난 장애물은 해변으로
통하는 협곡 입구에 설치된 가시 철조망이었다.
대원들은 철조망을 잡고 절벽을 기어올라갔다. 손과 군복이 헤어지는 20분간의
힘든 등반끝에 대원들은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마침내 대원들은 자기들만 외롭게 남겨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절벽아래로 접근하는 몇 척의 상륙주정들이 보였던 것이다.
피터 영 대위는 교회 탑에서 포대를 공격하기위하여 대원들을 이끌고 교회를 향해
내달렸다. 교회로 향하는 동안 몇몇 민간인이 보였고, 디에프 쪽에서는 총성이
들려왔다. 교회에 도달했을 때 독일군의 총탄이 빗발치 듯 날아들었다.
영 대위는 과수원을 돌파하여 포대로 향하기로 결정하였지만 독일군의 방어는
매우 기민하고 강력해서 도저히 전진할 수가 없었다.
05시15분,
행방불명되었던 나머지 6척 중 5척의 lcp가 옐로우1비치에 도달했고
6번째 lcp도 잠시후에 도착했다.
총 120명의 특공대와 미군 레인저 대원들은 상륙하자마자 이미 전투태세를
단단히 갖춘 독일군으로부터 강력한 공격을 받았다.
사다리가 없었던 대원들은 맨손으로 철조망을 붙잡고 협곡을 기어오르다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사상자가 속출하자 지휘관은 두 파로 나누어 포대를 공격하기로
하였으나 뜻 대로 되지 않았다. 어떤 대원은 포대의 왼쪽 지점으로 우회 접근하다가
목에 총탄을 맞고 해변으로 되돌아왔다. 잠시후 오스몬드 대위는 대원들을 이끌고
절벽 꼭대기를 가로질러 포대가 위치한 작은 마을 베르네발로 향했으나
독일군에 의해 즉각 저지당하고 말았다.
포대 맞은편의 피터 영대위의 부대는 보리밭에 고립된 채 적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영 대위는 포대 수비병력을 다른 쪽으로 전용되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독일군도 특공대에 접근하여 총격전을 벌일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팽팽한 대치
상태에 놓여졌다. 영 대위는 단 한명의 사상자없이 독일군 포대를 자신들에게로
집중시키는데는 성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독일군은 15cm포를 동원하여 특공대를 공격했다.
그러나 특공대가 너무 가까운 곳에 포진했던 때문에 포구 각도의 제한을 받아
포탄은 특공대원들의 머리 위를 통과하여 먼 곳에서 작렬했다.
독일군이 포구의 각도를 최대한 낮추려 노력하는 동안 탄약이 소진된 영 대위는
작전이 실패한 것으로 최종 판단하여 해변으로 후퇴하도록 명령했다.
lcp15의 정장 헨리 버키 중위는 대원 전원을 주정에 탑승시킨 후
디에프를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05시 30분,
디에프의 독일군 제302사단본부는 비상경보를 발령하고 폰 블르허 소령의
302 대전차대대를 베르네발로 보냈다. 블르허 소령은 산악 자전거 기병대대와
570연대 소속 보병과 공병대를 즉시 파견하여 특공대를 섬멸하도록 명령했다.
3특공대원들은 포대 근처에 접근도 하지 못한 채 총탄에 쓰러졌다.
강력한 공격을 당한 끝에 대원들은 해안으로 도주했으나 마찬가지로 공격당했던 상
륙주정들은 이미 해안을 떠났거나 수장되고 없었다. 대원 중 1명은 수영으로
먼 바다까지 도주하여 배에 옮겨탈 수 있었으나 120명의 대원 중 37명이 전사하고
82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전사자 중 미군 레인저 소속 에드워드 루스탈롯 중위는
제2차세계대전 중 최초로 유럽에서 전사한 미군으로 기록되었다.
옐로우1비치의 독일군 포대
lcp(l) 병력 상륙주정
오렌지 비치 / 제 4 특공대
오렌지 비치 상륙이 계획된 로드 로뱃 중령의 4특공대는 3특공대가 사용했던
lcp 주정보다 더 큰 lca에 탑승하고 있었다.
4특공대는 3특공대가 독일 함선과 마주쳐 해상 포격전을 치르느라 발생한
섬광을 03시 50분에 목격했으나 그대로 디에프를 향해 나아갔던 것이다.
로뱃 중령은 바렝지벨르의 "헤스 포대"를 공격하기위하여
오렌지1, 2 비치(퀴버빌)로 접근했다.
4특공대는 두 곳의 해안에 상륙하여 양쪽에서 포대를 협공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로뱃 중령과 164명의 대원들은 오렌지2비치에 상륙하여 포대를 향하고,
87명의 대원들은 오렌지1비치로부터 포대를 공격하고 아울러 적의 증원군을
차단하도록 계획되었다.
04시 53분,
로뱃 중령의 lca 4척이 해안에 접근하자 독일군의 조명탄이 해안을 환하게
밝힘과 동시에 기관총탄 세례가 퍼부어졌다. 대원들은 주정이 해안에 닿기 무섭게
육지를 향해 돌진했다. 방파제 꼭대기는 가시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로뱃 중령은 이에 대비하여 훈련을 실시했던 것이다.
대원들은 이미 훈련된 대로 가죽조끼를 착용한 대원들이 철조망에 몸을 던지자
그 것을 발판삼아 뛰어 넘었고, 다른 대원들은 코코넛 야자열매 섬유로 만든
깔개를 펼쳐 철조망을 넘었다. 순식간에 해변의 도로로 진출한 다음 수류탄을
투척하며 적을 빠르게 제압한 선두의 베시 중위는 병력을 이끌고 생마게리트 마을
동쪽 교차로로 이동하여 적 증원군에 대비하여 매복에 들어갔다.
번쩍이는 등대 불빛을 바라보며 오렌지1비치에 상륙한 대원들은 협곡 오른쪽을
이용하여 전진하기로 결정했다. c소대는 등대쪽으로 전진하면서 통신선을
절단하고 내륙 서쪽 포대를 향하여 전진했다. 뒤이어 a소대가 도착하여
생마게리트의 오른쪽 측면을 지원했다. 특공대는 전혀 발각되지 않은 상태로
포대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곳까지 접근하였다.
대원들은 계획된대로 사격이 개시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다.
계획대로라면 대원들은 약 35분 정도를 더 기다려야했는데, 헤스 포대의 해안포가
호송선들을 향해 포격을 실시하자 즉각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갑자기 포대 안으로 날아든 총탄이 몇 명을 쓰러뜨리자 포대의 독일군들은
어리둥절했다. 그들은 번쩍이는 영국군의 경기관총 화염을 발견하고는 경포로
사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특공대원들은 즉각 대전차총으로 반격을가해 포대를
침묵시켜 버렸다. 나머지 독일군들은 저격병의 총탄에 쓰러졌다.
미군 레인저 대원 저격병인 프랭클린 쿤스 상병은 미군 중 최초로
독일군을 저격한 병사로 기록되었다.
철조망 너머의 지미 특무상사팀은 박격포로 포대를 맹공격했다.
계속된 발포로 포대는 화재가 발생했고 이윽고 대폭발로 이어져 산산조각난
포대는 바다에 흩뿌려졌다. 1.6km떨어진 지점에서 이 대폭발을 목격한 래빗 중령은
박수를 치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f소대는 적 저격병과 전투를 치르는 동안 패티와드 대위가 전사하였고,
고든 웹 대위의 b소대는 포대 남서쪽 숲 근처에서 전투를 벌여 손에 부상을
당했지만 큰 피해는 당하지 않았다. 서쪽으로부터 전진하던 독일군 증원병력들은
생마게리트 마을 동쪽지점에 매복한 a소대에의해 전원 사살되었다.
6시 30분,
영국 공군 전투기들의 지원하에 b소대가 건물을 소탕하는 사이 f소대는
고사포대를 공격했다. 전진하던 팻 포테우스 대위는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으나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두 번째 총탄에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작전이 끝날 때 까지
계속 전투를 수행했던 그는 나중에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받게된다.
특공대원들은 포대를 가로질러 전진하여 수류탄을 투척하고 백병전끝에
독일군을 제거해 버렸다. 포대를 점령한 대원들은 대포들 주변과 지하 탄약고에
폭약을 설치하여 송두리째 날려버렸다.
주어진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한 제4특공대장 래빗중령은 대원들에게
오렌지비치로 철수를 명령했다.
적을 경계하며 해안으로의 철수를 완료한 4특공대는
예정된 시간에 도착한 주정에 탑승하여 전원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디에프 침공작전 중 유일하게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로드 로뱃중령의 제4특공대.
오렌지비치 공격후 독일군포로를 데리고 귀환하고있다
제4특공대 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