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활 Step. 2

다크킬러14 작성일 08.09.21 23: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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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다음 카페 this is total war의 다크킬러입니다. 전편의 반응이 의외로 뜨거워서 인지 선뜻 2편을 준비하기가 부담되더군요.^^. - 라고 쓰고 닥치고 귀찮았음 이라 읽습니다. - 자 그럼 거두절미하고 바로 스텝 2로 들어가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번편에서부터는 궁의 재료와 화살에 대해 알아볼 것이며 특히 후자에 좀 더 많은 페이지를 할애할 예정입니다. 그럼 ㄱ ㄱ ㄱ ㄱ

 

조선의 활 step. 2

 

전편의 뜨거운 성원에 힘입어 2편을 시작하게 되었다. 전편 안 읽고 온 독자는 두말 않겠다. 뒤로 가기 버튼 눌러서 필자 아이디로 검색 후 전편을 필독하기 바란다. 이번 시간에는 조선 활의 제작과정과 활의 종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 활의 제작

 

국궁의 제조기술은 다행히도 아직 실전되지 않고 여러 장인의 손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물론, 국궁이 스포츠화 되면서 전편에서 언급한 습사용 평궁(平弓)을 제외한 다른 종류의 전통 활 제작방식은 맥이 끊어졌다. 실로 조낸 안타까운 현실이나 어찌되었던 <조선의 궁술>을 참조하여 간략히 제작과정에 대해 짚고 넘어가보자.

 

1. 재료준비

 

● 물 소 뿔

 

물소 한 마리에서 나오는 뿔은 2개다. 기본상식이니 다 알 것이다. 이 2개를 활의 안쪽에 붙인다. 물소뿔에서 활채에 사용되는 부분을 양각(陽角), 즉 볼록하게 튀어나온 한쪽 면이며 나머지 부분은 사용하지 않는다. -국궁이가 편식이 심하다.- 물소뿔은 톱으로 양각 부분을 잘라낸 후 자귀와 줄로 깎아서 얇게 만든다.

 

● 대 나 무

 

현재 제작되고 있는 국궁의 활채는 대나무로 만든다. <주례>에는 활을 제작하는 데 사용되는 목재 중 대나무가 가장 하품이라고 했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군용 활에는 대나무 대신 산뽕나무를 사용했다. 하지만 대나무는 가공이 용이하고 궁력이 지나치게 강하지 않기 때문에 습사용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막말로 보급형, 데모판, 전편에서 언급했듯 개나 소나 사용하는 재료 되겠다. 국궁의 활채는 3년생 정도 되는 대나무를 사용하며 길이 80cm정도 되도록 대나무를 잘라낸 뒤 칼집을 넣고 불에 달구어 휘어놓는다.

 

● 산뽕나무

 

전편에서도 미친짓을 하면서 밝혔듯이 산뽕나무는 궁간목 혹은 궁간상(弓幹桑)이라고 한다. 혹여나 전편을 안본 독자는 닥치고 전편필독해서 왜 산뽕나무 설명하는데 이리 도입부가 긴지 알아보고 와라. 이 산뽕나무는 다른 재목과 달리 탄력성이 좋아서 휘어놓으면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온다. 조선시대의 군용 활은 산뽕나무로 활채 전체를 만들었으나, 평궁이나 현재의 국궁은 활의 양쪽 끝에 활 시위를 거는 부분인 고자에만 산뽕나무를 사용한다.

 

● 참 나 무

 

참나무는 활의 손잡이 부분에 덧대는 대림목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 한 뼘이 못되는 길이의 참나무를 잘라서 불에 달군 후 약간 휘어놓는다.

 

● 쇠 심 줄

 

쇠심줄은 일을 존나 많이 하는 황소 등에 있는 힘줄을 사용한다. 조낸 불쌍한 우리 소는 살아생전 까라면 까란데로 밭 갈고, 짐 끌고, 사람 끌고, 죽어서는 안심, 등심, 꽃등심, 안창살, 꼬리곰탕, 곰탕 등등등... 하여간 별걸 다 주고간다. 어쨌든 이 쇠심줄을 곱게 빗어서 활채의 바깥부분에 부레풀로 붙이면, 활시위를 당겼을 때 강한 힘으로 버티면서 활채에 복원력을 준다.

 

● 어 교

 

말 많은 어교가 나왔다. 서해안에서 잡히는 민어의 부레로 만든 풀을 어교라고 한다. 민어 부레에서 기름을 제거하고 잘 말려두었다가 도가니에 넣고 끓이면 어교가 된다. 어교는 접착력이 강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마른 후에도 실리콘과 같은 유연성을 유지한다. 복합재료를 사용해서 만든 국궁이 활시위를 풀었을 때 재료 간에 풀림이 없이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휠 수 있는 것은 어교를 사용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 화 피

 

화피(樺皮)는 산벚나무 껍질이다. 이 화피는 적당한 탄력이 있어서 변형이 심한 국궁의 표면을 씌우는 데 적합하다. 화피로 활의 표면을 씌우는 것은 방수를 위한 것이지만, 감촉도 부드럽고 안쪽의 재료들이 감추어져서 보기에도 좋다.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는 것이다. 물론 방수효과로는 옻을 처바르는 것이 가장 좋지만 생산 단가가 안 맞는다. 옻은 조낸 귀하단 말이다!!

 

● 소 가 죽

 

또 우리 소가 희생되는 대목이다. 정말 조선엘프의 활질을 떠올릴 때는 묵묵히 조국을 위해 제 한 몸 바쳐간 한우와 듣도 보도 못한 반도까지 제 뿔을 기증한 물소 때들에게 묵념이라도 올려야 할 것이다. 소가죽이 사용되는 부분은 활시위를 거는 부분인 세코와, 화살이 스치고 지나가는 부분인 출전피, 그리고 활시위 매듭과 활채가 마찰이 되는 부분인 도고자 부분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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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 이미지자료를 올려줬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다시 올린다. 어느 부분이 어떤 명칭으로 불리는지 잘 알아두자.

 

● 실

 

뭣 도 아닌 것 같지만 실도 중요한 재료이다. 국궁의 활시위는 비단실이나 면실을 여러 겹으로 겹치고 여기에 밀랍을 발라서 만든다. 활시위의 중간 조금 윗부분에는 화살 오늬를 걸기 위해 붉은색 실을 감아서 절피를 만든다.

 

● 기 타

 

삼베는 활채의 중간에 손으로 잡는 부분인 줌통에 감는다. 줌통의 안쪽에는 종이나 코르크를 넣어서 손으로 잡기에 적절한 크기로 만든다.

 

◎ 활의 조립과정

 

조립과정은 매우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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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채의 조립 → 부각 : 뿔대기 → 쇠심줄 대기 → 화피 단장 → 줌 만들기(손으로 잡는 줌통제작을 뜻한다.) → 고자 만들기(이 고자가 그 고자가 아니다.)

 

◎ 화 살

 

과거 인류가 나무방맹이 하나 들고 ‘우워어~~’ 라며 샤우팅을 하고 다닐 적에는 사슴새끼 한 마리 잡을라 쳐도 칼루이스가 부럽지 않게 부족 청년회가 조낸 뛰어야 했으며 호랭이, 곰, 사자, 맘모스, 네크로, 오크, 등등 하여튼 지역구에서 발톱 좀 간다는 옵하들 튀어나오면 마을 청년회가 사라졌다.

 

그렇던 어느 날 청년회 중에서 성깔 더럽고 짜증 많이 내기로 소문난 ‘던져블라’ 가 사냥을 나갔다가 또 호랭이를 만났다. 던져블라는 생각했다

.

‘아니 시발 저새끼는 해도 해도 시발 적당히 해야지. 또 우리 청년회를 갈아버리고 마을 아동회나 노인정 노인네들이 사냥하게 만들라나?’

 

라고 대의적인 생각을 잠시 한 후 죽음에 초연해 졌지만 그 성깔 어디 못 버린다고

 

‘시발~옆집 딸 “존나이뻐” 랑 한 번도 못했는데..’

 

라는 부분에 생각이 미치자 짜증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야이 십숑키야!’

 

라며 제 분을 못 이기고 들고 있던 창을 던져브렀다. 날아간 창은 저 새끼가 먼 질알 이여 하면서 까락잡고 서있으시던 호랭이 정수리에 제대로 꽂히시면서 인류역사상 최초의 장거리 원샷 원헤드를 성공한 영웅을 만들어냈다.

 

이 사건이후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던져대다 보니 마을 주면 맹수들 씨가 말라갔다. 어쨌든 그래서 결론은 이렇게 막 던지다가보니까 사람 손으로 던지는 것보다 도구를 이용하면 더욱 정확하고 멀리 그리고 더 강력하게 살상무기를 투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신석기시대에는 돌이나 뼈로 만든 촉을 화살대에 꽂거나 혹은 화살촉 밑을 오목하게 파낸 뒤 화살대에 난 홈에 끼우고 끈과 접착제로 고정시켜서 화살을 만들었다. 청동기시대에는 청동제 화살촉이 등장했지만, 화살 한번 쏠 때마다 청동이 사라지는 결과를 초래하여 결국 이때까지도 뼈와 돌을 애용했다.

 

철기시대에 이르러서야 뼈와 돌을 대체하여 금속제 화살촉이 자리를 잡게 된다. 고구려는 광대싸리나무 화살대를 사용했으며, 화살촉은 용도에 따라서 송곳처럼 길고 뾰족한 것부터 도끼날 모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제작했다. 신라와 백제는 화살대로 대나무를 사용했으며, 화살촉은 고구려와 비슷한 형태로 만들었다.

 

다만 끝이 y자 모양으로 생긴 독특한 화살촉이 백제에서 발굴되었는데, 이는 갑주를 입지 않은 적에게 큰 상처를 주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y’ 모양의 화살촉이 인체에 명중했을 경우 아우....... 뽑을때는 ...아시바.......하... 말을 말자.

 

<고려도경>에 따르면, 고려의 화살은 버드나무로 만들며, 멀리 날아가는 대신 위력은 작다고 했다. 하지만 고려 초기에 견훤이가 왕건에게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선물한 사실이 있고, 고려가 금나라에도 대나무 화살을 보낸 기록으로 미루어 당시에도 대나무 화살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전설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열손가락으로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종류의 화살이 사용되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우리민족은 궁시의 소질이 예부터 남달랐으나 조선은 아니었다.

조선은 인류역사상 남달랐다.

 

구 분

편 전

유 엽 전

착 전

대 우 전

조선초기

편전(片箭)

통전(筒箭)

동전(童箭)

유엽전(柳葉箭)

마전(磨箭)

장전(長箭)

착전(錯箭)

착전(鑿箭)

대우전(大羽箭)

대전(大箭)

호시(虎矢)

(노시, 동시)

조선후기

편전(片箭)

장전(長箭)

대우전(大羽箭)

호창(虎韔)

특 징

화살의 길이가 짧아 통아를 이용하여 발사한다.

화살촉이 가볍고 화살깃이 작다.

화살촉이 끌처럼 길고 뾰족하다.

화살촉이 무겁고 화살깃이 크다.

 

<세종실록>에는 전투용 화살 종류로 편전과 유엽전 두 가지만 나타나지만, 세조 때에 이르러 화살촉이 길고 뾰족한 착전이 추가됨으로써 조선 전기의 전투용 화살은 모두 세 종류가 된다. 화살깃이 큰 대우전은 주로 사냥에 사용되었으나, 우리 엘프족 성계옵하야는 대우전을 전투시에도 즐겨 사용하여 막말로 사냥을 하고 댕기셨다. ㄷㄷㄷ

 

후기에는 편전과 유엽전이 계속 사용되었으며, 착전은 임진왜란 이후에 점차 사라졌다. 원래부터 사냥용으로 널리 사용되었던 대우전은 조선 후기의 기록에는 군사용으로 사용된 흔적이 없다.

 

기타 무과시험용은 목전(木箭)과 철전(鐵箭)이 있었고, 신호용인 효시(嚆矢)와 영전(令箭)이 있었다.

 

○ 화살의 종류

 

1. 편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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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전(片箭)은 통전(筒箭), 동전(童箭), 변전(邊箭) 혹은 애기살이라고 불리는 짧은 화살이다. 뭔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경배해라 나왔다. 사기아이템! 핵(hack)음모론의 원흉인 바로그 편전이다.

 

편전은 조선 초기 ‘오례의’ 기록에 따르면 주척으로 1척 2촌(25cm)라고 했으나, 나중에는 점차 그 길이가 길어져서 현종 13년에는 포백척 8촌(32cm)의 길이로 정해졌다. 부츠의 기록에는 편전 화살대의 길이는 18인치(45.7cm)이고 화살촉의 길이는 1과 1/3인치(3.4cm)라고 했다. 뭐 당시 규정이 있었겠으나 쏘는놈 맘인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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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식으로 쏜다.

 

편전은 원래 <융원필비>의 그림처럼 단순한 원추형이었던 것이 성종 23년(1492)에 이극균이 화살촉이 길고 아래 끝단은 끌처럼 생긴 편전을 만들어서 바쳤으며, 성종은 이를 널리 제작하여 사용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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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사진에 나온 편전 중 윗부분은 <융원필비>에 그려진 편전으로 당시의 일반적인 편전의 모습으로 사료되며 아래의 사진자료는 부츠가 남긴 자료인데 적마편전(荻磨片箭)으로 보인다.

 

다 알다시피 편전은 길이가 짧기 때문에 활만으로는 쏠 수 없으며, 위 사진자료들에 나온 대나무 통 즉, 통아(桶兒)에 넣어 발사해야 했다. 통아의 한쪽 끝에는 작은 구멍을 뚫어 노끈을 을 묶고 이 노끈을 팔뚝(조선 전기)이나 오른손 셋째 손가락(조선 후기)에 맨다.

 

통아에 화살을 넣고 시위를 놓으면 편전이 통아를 현재의 총강처럼 이용하여 발사가 된다. 이때 비숙련자들의 경우 발사된 화살이 총강으로 사용되는 통아를 뚫고 팔뚝에 박히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하였는데 개나소나 다 쏠 수 있는 아이템은 아닌 렙제가 걸린 아이템이란 걸 여기서 알 수가 있다.

 

편전의 유래에 대해서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앙엽기(盎葉記)에 ‘고려시대에 중경유수 김강신이 원나라 군사들에게 포위되어 병기가 다 떨어졌을 때 엽전으로 화살촉을 만들어 사용하다가 원병의 화살하나를 얻으면 넷으로 잘라서 통편(筒鞭)을 사용해 쏘았으니, 이것이 편전의 시초다’ 라고 적고 있다.

 

편전의 위력을 증명해주는 유명한 문구가 하나있다. 바로 부츠의 인터뷰내용인데, 구한말 군사가 말하기를 ‘통아는 적에게도 보이는데, 화살이 발사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화살이 보이지 않게 날아와 자신을 꿰뚫을 때까지도 그는 여전히 궁사를 보고만 있는다.’ 라고 했다.

 

실제로 복원된 편전의 경우 스펀지에서도 실험결과가 나왔듯이 장전에 비해 빨라 날아가는 궤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성종 22년 기록에도 북방의 야인들과 싸울 때 처음에는 장전으로 쏘니, 펄적거리며 피하고 날아간 화살을 주워서 다시 쏘았지만, 편전으로 쏘았더니 피할 수 없어서 두려워 했다고 한다.

 

편전은 크기가 작아 무게가 가볍고 공기저항이 적기 때문에 일반 화살에 비해 사거리가 두배에 달한다. 태종 13년의 기록에는 유효사거리가 200보(252m)라고 했고, 세종 27년에는 약한 활로도 300보(378m)는 나간다고 했다. 물론 세종 27년의 기록은 유효사는 아닌 것 같다.

 

부츠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인 학자가 증언하길 임란당시 편전은 무려 500야드(457.2m)를 날아갔다고 한다. 바로 전설의 대행성간 궁시 500m샷이 이것이다. 또한 화살이 짧아 통아 없이는 사용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적이 다시 되쏠 일도 없었다. 관통력 문제는 국내 대부분의 자료에서는 매우 뛰어나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맞는 말이나 우리가 알다시피 관통력은 질량 * 속도이다. 단지 속도만 빠르다고 관통력이 뛰어나다고는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근거리에서는 장전이, 일정거리 밖에서는 편전이 관통력이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편전은 위에서 말했듯이 고도의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함으로 일반 잡군이 사용하지는 못했고 군관급이나 숙련된 사수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특수무기인 셈이다. 따라서 모 병맛나는 작품에서 선보인 편전군 2만 이딴 개소리는 사양하겠다. 그리고 편전으로 기사(騎射)를 한다는 기록은 인조 5년에 딱 한번 나오는 것으로써 일반적으로 기사(騎射)에 편전을 사용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자 그렇다면 또 이쯤에서 편전의 재미난 일화를 아니 듣고 갈 수가 없다.

 

이수광선생의 지봉유설 기예부 잡기조의 기록

 

『유붕수(柳鵬壽)란 사람이 있으니, 이는 나의 외서숙으로 활을 잘 쏘았다. 사신 최황을 따라서 중국에 갔었는데, 이때 오랑캐가 크게 몰려와 산해관을 포위한지 14일이나 되었다.

그러나 중국 장수는 성을 닫고 나가지 못했다. 붕수가 편전을 가지고 적을 쏘아 맞히어 죽이니 오랑캐들은 크데 놀라 말하기를 "고려 군사가 왔구나"하고 모두 도망해 버렸다.

이에 황제가 칙서를 내려 비단을 주게 하고 그를 상주었다 최간역의 글에 "전에 우리나라의 무인로서 사신을 따라 요동에 나갔던 자가 오랑캐가 성을 포위하는 것을 보자 한두 개의 강한 화살을 쏘아 수만 명 군사를 물리쳐서 지금까지 유명하다"라고 한것이 바로 이 사람이다.』

 

요약하면, 북방 오랑캐 옵하들이 중국애들 조낸 발르면서 재미보고 있던 차에 몇 놈이 편전 맞고 죽는걸 보고 ‘엄허나 *! 치트군 소환했네?’ 하며 튄 것이다.

 

또 한가지, 조선 후기 조총의 보급으로 사수의 실력이 현격히 저하되어 편전의 존패설이 대두되고 있을 때쯤 서구열강들은 허구헌 날 먼 바다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안보에 심대한 위협을 주고 있었다. 본 필자의 ‘거문도’편을 한번 참고하길 바란다. 중요한건 어쨌든 그래서 하루는 이 외세 서구열강의 함대 하나가 육지 근처로 가깝게 접근한다.

 

그리곤 조선 해안포대의 집중포화를 당한다. 당시 지휘관은

 

‘내가 살다 살다 이리 많은 포화는 본적이 없어요 후덜덜덜~ ㅡㅡ’

 

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수천 발 이상 쏴 갈겼으나 단 한발도 제대로 명중한 게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추후 필자가 조선의 화포를 다루며 설명하겠지만 님히....하여간 후기는.... 하~~

 

쩝 그래서 미 함대인 것으로 기억하는 그 함대의 지휘관이 선미에서 조낸 비웃어 재끼는 상황에서 왠 모기 한 마리가 귓전을 스치고 날아갔다. ‘쒸~잉’ , ‘따~악!’ 그런가 보다 하고 다시 웃어 재끼려는 순간 등골이 좀 싸~했다.

 

어느 나라 모기가 ‘에에~엥’ 도 아니고 ‘쒸~잉’ 거리며 날아간단 말인가 ㅡㅡ; 그리고 뒤에 들린 ‘따~악!’ 이라는 둔탁한 소리에 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급히 자세를 낮추며

 

‘get down! get down! sniper!~~!'

 

라고 소리 지르기에는 조금 시대가 앞서고 하여 그냥 뒤를 돌아보니 웬 나뭇조각하나가 적 포사격에도 버티게 만들어놓은 강력한 상갑판을 뚫고 손가락 1마디 반 정도 깊이로 박혀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작은 나뭇조각이 박혀있었다.

 

힘주어 꺼내보니 깃이 달려있고 촉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왠지 모르게 흐르는 식은땀을 닦고 주위 사람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그것을 주머니에 챙기며 머릿속으로 수만번 마인드컨트롤을 시도했다.

 

‘이건 나무 조각일 거야.’

‘이건 나무 조각일 거야.’

‘이건 나무 조각일 거야.’

‘이건 나무 조각일 거야.’

‘이건 나무 조각일 거야.’

‘이건 나무 조각일 거야.’

‘이건 나무 조각일 거야.’

‘이건 나무 조각일 거야.’

‘이건 나무 조각일 거야.’

‘이건 나무 조각일 거야.’

‘이건 나무 조각일 거야.’

 

this is 편전.

 

2. 유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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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엽전(柳葉箭)은 화살촉이 가볍고 화살깃이 작은 전투용 화살로서, 조선시대 내내 편전과 함께 가장 주된 전투용 화살로 사용되었다. 화살촉이 가볍고 화살깃이 작은 유엽전은 우리민족의 궁시개념상 긴 사거리를 신봉하였기에 과거부터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유엽전은 버들잎처럼 생긴 화살촉을 가지고 있다. <세종실록>에는 이 유엽전을 마전(磨箭)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화살의 길이가 긴 화살 중에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화살이므로 이를 장전(長箭)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혼동을 막기 위해 부연설명을 하자면 유엽전 = 장전 = 마전이라고 할 수 있다.

 

시 기

화 살 대

화 살 촉

슴 베

비 고

세종 12년

3척 8촌

3척 6촌

장작/중작

(주척)

세종실록 오례의

4척

3척 8촌

화 살 대

단종 1년

1촌 5분

철전

(주척)

세조 10년

1촌 8분

1촌 7분

유엽전/팔방통화

국조오례의

1촌 7분 3리

1촌 5분

소신기전

 

위의 각 기록들을 통합하여 유엽전의 전체 길이를 산출해보면 화살대의 길이는 4척(84cm) 혹은 3척 8촌(79.8cm)이며, 화살촉은 1촌 8분, 슴베는 1촌 7분이니 전체 길이는 83.4~87.8cm로 오늘날의 죽시 길이와 거의 일치한다.

 

유엽전의 화살대는 대나무로 만들고, 꿩깃 3개를 부레풀로 붙이며, 오늬는 싸리나무로 만든다. 유엽전의 화살촉은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는데 조선 전기의 화살촉 유물이 흔치 않은 관계로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허나, 조선 전기의 유엽전은 <무비지(武備志)>의 유엽전과 같이 화살촉의 폭이 중간 정도 크기였다가,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살상력을 높이기 위해 조금 무거워지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다시 갑주의 효용성이 사라진 후기에는 조총과의 사거리 경쟁 때문에 상당히 가볍고 폭이 좁은 쪽으로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유엽전이 뜻하는 의미도 달라지게 되는데 중종 이후에는 마전이라는 명칭은 사라지고 유엽전 혹은 장전이라는 명칭만이 사용되었으며, 효종 2년에 유엽전 사격이 무과시험 과목으로 채택되자 유엽전이라는 명칭은 무과시험에 사용하는 끝이 사각형인 화살을 지칭하게 되었다.

 

1798년에 간행된 <재물보>에 의하면

 

‘원래의 유엽전은 화살촉이 버드나무 잎을 닮은 비자전(鈚子箭)이지만, 지금 속칭 유엽전이라고 하는 것은 촉이 가늘고 단면이 네모난 화살이다’

 

라고 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에 이미 현재의 죽시와 같이 화살촉 끝이 직사각형인 습사용 화살을 유엽전이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3. 대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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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전(大羽箭)은 화살깃이 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화살깃과 비례관계에 있는 화살촉도 상대적으로 크고 무겁다. 화살촉이 무겁고 화살깃이 크면 사거리가 짧아지지만, 정확성이 높아지고 위력이 강해진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대우전은 사냥용 화살이지만 우리 태조 이성계옵하야는 이 대우전을 주로 사용하여 무용을 뽐냈고 성종 26년에 이르러서는 마전(磨箭)은 가벼워서 관통력이 떨어지는바 호전(虎箭) 모양으로 화살을 만들자는 말까지 나온다. 호전은 대우전의 일종인데 사거리문제로 인해 군사용으로 대거 사용되지는 못했다.

 

물론 그 이전부터 이미 대우전은 사냥용과 의례용으로 사용되었다. <세종실록>에는 화살깃과 살촉이 큰 화살 종류로 붉은색의 동시(彤矢)와 검은색의 노시(盧矢)가 나오는데, 이것들도 모두 대우전 혹은 대전(大箭)의 일종이다.

 

추가적으로 <성호사설(星湖僿設)> 병기편을 보면, 대우전은 군중(軍中)에서 쓰이며 호창(虎韔)이라고 부란다고 했다. 이 화살은 독수리 날개로 화려하게 치장되었으며 일반 화살에 비해 가격이 10배에 이르지만 사거리는 100보에도 못 미쳤다고 한다. 지휘관의 뽀대용으로 보인다.

 

 

 

사진자료 및 참조자료 출처 : 민승기 저 조선의 무기와 갑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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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리즈부터는 짧게 여러 편으로 나누어 가기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지나치게 긴 문장이 되어버리면 작성자나 독자나 모두 힘들기 때문이죠; 그럼 다음 편부터는 나머지 화살과 화살의 제작과정을 다뤄 보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어서 정말 너무 감사해용;

 

그럼 빠른시일내에 다음 편을 들고 나오도록 불철주야 노력하는 다크킬러가 되겠습니당..

(ㅡ.ㅡ 제발 그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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