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그라드 전투사

짠짠짠_ 작성일 08.10.26 03: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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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의 한 임시 엄체에서 진로를 살펴보는 독일군 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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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완전히 끝난 1943년 2월 2일 붉은 기를 들고 스탈린그라드 도심 광장을 내려다보는 소련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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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의 붉은 10월 공장에서 벌어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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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을 받아 불타고 있는 스탈린그라드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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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11월에 스탈린그라드의 소련군 제62군의 지하 벙커 전투 지휘소에서 제13근위소총사단장 로딤체프(맨 우측)에게

  전투명령을 내리고 있는 츄이코프(좌측에서 2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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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 육군 제6군을 지휘한 파울루스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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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시 남쪽에서 포사격을 하는 독일 포병 부대. 멀리에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최대 격전지 중 하나

  였던 곡물 창고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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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한 뒤 곡물창고를 지나쳐 가는 독일군 포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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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고그라드의 마마이 고지에 세워진 스탈린그라드 전투 기념물들. 고지 정상에 52미터 높이의 "나라의 어머니"가

  칼을 빼들고 서 있다.

 

러시아의 전쟁을 이해하는 열쇠는 러시아라는 나라 자체의 이해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독소전은 러시아의 전쟁만은 아니었다. 러시아 제국, 그리고 그 뒤에 세워진 소비에트 연방은 복잡한 민족 지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1940년에 러시아인은 소련연방 인구의 58%만을 차지했다. 러시아인말고도 기타 주요민족만 20개나 되었다. 그중 가장 영향력이 컸던 민족은 우크라이나인과 백러시아인이었으며 독소전의 대부분이 바로 이들의 영토에서 치러졌다.

 

 

전쟁은 러시아와 소련 문화의 많은 특징을 보여줬다. 그들이 위기에 강하고 굳센 것, 그들은 남자든 여자든 간에 혹독한 기후와 극단적인 노동 조건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단지 그러한 혹독하고 모진 인생 경험만이 독소전에서 러시아인과 그밖의 민족들이 보여준 놀라운 단결력을 설명해주진 않는다. 보통의 사람들은 역사 및 지리, 이 2가지에 기반을 둔 전통을 보여주었다. 과거에 대한 존중과 예술에 대한 사랑, 자신의 뿌리에 대한 자긍심과 소속감이 얼마나 소련에 보편적이었는지는 독소전 당시 여러 이야기 중 오룔(Orel)시에 있는 투르게네프(Turgenev)박물관의 이야기를 들 수 있다.

 

 

투르게네프 박물관의 관장은 1941년 소련군의 후퇴 때 독일의 공격을 받기 전에 소장품을 포장해서 열차에 실었다. 러시아의 위대한 문학가들이 앉아서 문학에 대한 위대한 심상들을 떠올리던 낡은 소파들이 사람들 대신 피난열차에 실렸다. 열차가 역에 설 때마다 무시무시한 독일군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동쪽으로 가려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열차

 

 

 

에 오르기 위해 아수라장을 벌였다. 성난 피난민들은 박물관장에게 욕설을 하고 역플랫폼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박물관장은 이 물건들은 위대한 투르게네프 박물관의 것이라고 설명했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순순히 열차에 오르는 걸 포기했다.

 

 

이것은 소련대중이 예술에 얼마나 애착을 가졌는지 말해준다. 소련의 물리,수학자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강제수용소에서도 슈베르트의 작품을 부르고 즐기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독소전을 알기전에 소련 사람들의 삶에 있는 이런 요소들을 무시하면 독소전은 이해할 수 없다. 수많은 소련인들이 2차대전에 휘말린 나라중 가장 처참한 통계를 내며 전쟁터에서 쓰러져갔다. 현재 일부 소련 학자들이 많게는 43,000,000~47,000,000으로 추산하는 인적 손실은 단순히 위로부터의 억압과 테러로 설명하기엔 너무나 큰 숫자이다. 러시아의 얼과 넋은 단순한 감상의 도구가 아니었다. 러시아의 얼과 넋은 보통 사람들에게조차 너무나도 중요했던 것이었다.

 

 

1942년 가을에 소련 인민들은 투쟁을 위해 정신적으로 스스로 무장을 했다. 모스크바에서 여름에 나타난 공황은 누그러졌다. 스탈린은 몇 해전만 해도 생각할수 없었던 애국심 소생의 선두에 섰다. 스탈린그라드는 이제 1년전 모스크바가 했던 역할을 해야했다. 스탈린그라드가 생존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군사적,경제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스탈린그라드는 로스토프의 재앙 뒤에 되살아난 도전적인 민족주의의 새로운 정신을 상징했다. 그 도시는 스탈린의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내전기 당시 차리츠인으로 불리던 소도시를 구해내는데 스탈린이 한 역할을 기념해서 고마움을

 

 

 

표시하는 동료 공산주의자들이 1925년에 준 선물이었다. 그 후 10여년 사이에 볼가강의 한적했던 항구가 번창하는공업도시로 변해서 기계와 트랙터를 생산해 내는 거대한 공장들이 들어섰다. 그 공장들이 바로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가장 치열한 전선이 되었던 붉은 10월공장,바리카듸 공장, 트락토르 공장 등이다. 소련은 우크라이나를 잃음으로써, 카프카즈지역에서 나오는 석유와 식량이 볼가강을 통해 흘러나와 북부의 공업 도시들을 먹여살리는게 아주 중요해졌다. 따라서 이 지역은 소련의 전쟁 수행 노력에 매우 중요했다. 물론 스탈린그라드와 남부를 잃은 뒤에도 러시아의

 

 

 

나머지지역에서 계속 싸울수 있었지만 승리의 전망은 어두웠을 것이다. 양측은 이것을 알고 있었다. 방어자와 공격자 모두 스탈린그라드를 둘러싼 싸움이 독소전쟁의 결정적 전투 중 하나가 될것이라고 보게 되었다.

 

 

 

7월에는 독일이 매우 우세했다. 스탈린은 남부를 1942년의 주요 싸움터로 보지 않았다. 막대한 소련군 병력은 훨씬 북쪽이 있었으며 따라서 남부전선의 세력 차이는 공격자인 독일에게 유리했다. 소련군과 독일 및 그 동맹국 군대의 전력 대비를 보면 병력은 187,000명 대 250,000명 탱크는 360대 대 740대, 항공기는 330대 대 1,200대였다. B집단군은 거침없이 진격해서 돈 강을 건너 스탈린그라드로 향했다. 그곳에는 끝없는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 황량한 지형을 가로질러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Friedrich Paulus)장군이 지휘하는 독일 제6군이 달려갔다.

 

 

 

소련군의 통신망이 무너지면서 소련군 지휘관들은 전투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갔다. 7월 느지막이 스탈린은 스탈린그라드 전방에 방어선을 구축하려고 애쓰고 있던 티모셴코 원수를 해임하고 고르도프(Gordov)장군을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7월 23일에 독일 제6군은 치르(Chir)강을 따라 스탈린그라드에서 80마일 떨어진 곳에서 고르도프 휘하의 2개군 ,즉 소련군 제62군과 제64군과 맞추딪혔다. 이 2개군 앞에는 앞으로 넉달동안의 격심한 전투가 기다리고 있었다.

 

 

 

고르도프의 부대는 중무장 기동군에 맞서서 거의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메마른 초원은 독일 지휘관에게 편했다. 붉은 군대는 날이 갈수록 스탈린그라드 쪽으로 밀려났다. 8월 19일까지 파울루스는 카프카즈의 A집단군에서 파견된 제4기갑군의 지원을 받아서 스탈린그라드에 첫 공격을 가할 태세를 갖추었다. 8월 23일에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북쪽의 볼가 강에 이르러서 강변을 따라 5마일 너비의 돌출부를 만들었다. 같은 날 독일군 부대가 도시 근교에 이르렀다. 독일공군이 폭격기 600대로

 

 

 

스탈린그라드를 폭격해서 도심 전역을 활활 타오르는 불지옥으로 만들었다. 소련측 추산에 따라면 이때 거주민 40,000명이 죽었다. 그 거주민들은 군 보급선을 막지 말고 도시에 머물러 있으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가 독일군 폭격에 희생됐다. 파울루스는 자신만만하게 며칠 내에 스탈린그라드를 장악해서 볼가 수로를 끊어 북부로 가는 지원로를 막으리라고 생각했다.

 

 

 

스탈린은 재앙에 직면했다. 쥬코프는 스탈린이 이번에는 부하들을 탓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스탈린이 드디어 전쟁 첫해의 모든 결점을 자신의 책임으로 인정했다. 8월 27일에 쥬코프는 수도를 방어하는 서부 전선군 사령부에서 호출되어 모스크바로 갔다. 그는 그날 저녁 늦게 크레믈에 도착했고 그곳에서는 스탈린이 국가 방위 위원회와 위기를 논의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쥬코프에게 직접 스탈린그라드로 가서 상황을 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 다음, 쥬코프가 최고 사령관 대리가 될 것임을 알렸다. 쥬코프는 새 직위를 받아들이고 스탈린과 차를 마신다음 스탈린그라드를 향해 떠났다. 쥬코프는 8월 29일에 남쪽으로 비행기를 몰아 볼가 강변으로 갔다. 그는 스탈린의 신임 참모 총장인 알렉산드르 바씰레프스키를 만났다. 두 사람은 전선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에 착수했지만 병력과 탄약이 너무도 부족했다.

 

 

 

9월 12일에 쥬코프는 다시 모스크바로 날아가 직접 보고를 했다. 바씰레프스키를 대동한 그는 스탈린에게 기존 병력으로는 전선을 지킬수 없다고 했다. 예비 부대가 필요했다. 스탈린이 자기 앞에 펼쳐진 지도를 심각하게 쳐다보았다. 스탈린은 스탈린그라드를 구하기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필요한지 명확한 구상을 가지고 다음날 오라고 지시한 뒤 두 사람을 돌려보냈다.

 

 

 

다음날 두사람은 크레믈로 지도 한 장을 가지고 와서 탁자 위에 놓았다. 말은 쥬코프가 했다. 그는 스탈린그라드를 향한 독일군 공세에서 기다랗게 노출된 측면을 가로지르는 반격을 가해서 파울루스를 포위하고 독일군의 전선을 깨뜨릴 것을 제안했다. 현실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예상되던 독일군의 모스크바 공격에 대비해 스타프가가 모아 두었던 전략 예비 병력을 이용해서 이루어지는 반격을 준비하는데는 45일이 소요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소련의 작전은 독일군 후방을 멀리서 꿰뚫어 파울

 

루스와 나머지 독일군 전선 사이에 있는 강고한 회랑을 확실하게 열어야만 했다. 스탈린은 그 작전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 작전은 이점이 많았다. 진격한 독일군의 측면에는 취약한 루마니아,이탈리아,헝가리 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 사단들은 독일군 부대보다 무장이 빈약했고 분기로 가득한 붉은 군대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식의 대결을 벌일 의욕이 적었다. 그들은 돌출부 가장자리를 따라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고 돌출부에는 이제 예비 병력이 거의 없었다. 독일군 자체가 힘이 달리고 있었다. 독일군은 이용할 수 있는 철도선 단 하나를 통해 보급 체계가 씨름을 했다. 연료와 예비 부품의 부족으로 독일 탱크와 차량의 운행을 유지하는게 힘들었다.

 

 

 

항공기는 거친 잔디밭 임시 활주로에서 뜨고 내려야 해서 연료소모율이 높았다.카프카즈에서는 A집단군이 신속히 전진하여 석유도시 그로즈늬이 전방의 전선에서 멈추었다. 독일군은 카프카즈 산맥의 통로에 이르렀지만 더 멀리는 전진하지 못했다.

 

파울루스는 도시 안에 있는 소련 제62군의 병력 부족에 시달리는 10개 사단에 맞서서 25개 사단을 운용했다. 그런데 타당성있는 논지를 통해 소련이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1942년 후반기에 소련은 네 배나 더 많은 강철을 가진 독일보다 더 많은 탱크,항공기,대포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42년과 1943년 소련의 군사적 소생은 난타당한 공업 경제의 회복에 있었다. 소련의 전쟁 수행 능력은 1941년 독일군의 공격을 받은 지역에서 기계,설비,인력이 극히 경이로운 대탈출을 했기에 복구할 수 있었다. 채 걸어서 몇시간이 안걸리는 거리에서 독일군이 몰려오는 상황에서도 수천 명의 기술자와 노동자들이 개미처럼 공장에 달라붙어 기계를 뜯어내고 설비와 주요물자를 가장 가까운 철도 수송 종점으로 운반했다. 이것들은 우랄 산맥,카자흐스탄,또는 시

 

 

베리아에 있는 목적지에 이르러 재조립되었다. 러시아 학자들은 1941년 후반기 동안 동쪽으로 옮겨진 기업체의 수가 최하 2,593개인 것으로 추측한다. 최종적인 총계는 거의 틀림없이 더 높았을 것이다. 25,000,000명이나 되는 많은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공장과 함께 갔다. 이것은 역사상

견줄만한 예가 없는 인간의 대탈출이었으며 소련의 공업 경제와 농업 소생에 극히 중요한 요소였다. 이러한 유입으로 우랄공업지역의 노동력이 36%늘었으며 시베리아 서부와 볼가 분지에서는 증가율이 25%에 달했다.

 

 

천왕성 작전이라는 암호명이 붙은 소련군의 공격 계획은 한 가지 결정적인 요인에 성패가 달려 있었다. 그 요인이란 쥬코프가 전역을 조직하는 데 필요한 45일 동안 스탈린그라드의 방어자들이 버텨 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에는 가능성이 거의 전무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9월 초순 스탈린은 하루나 이틀 내로 스탈린그라드가 함락되어

 

 

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남쪽을 꿰뚫고 소련군의 방어를 쪼개서 다시 한번 볼가강에 도달했으며 도시 안에서 강을 등지고 배수의 진을 친 소련 제62군이 독일 항공기와 포병에게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았다.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교외에 연결되는 깊은 골짜기를 거쳐 전진하여 도시의 구역들을 차례차례 봉쇄하고 점령했다.

 

 

9월 3일에는 독일군 일부 부대가 볼가 강에서 단 2마일 떨어져 있었다. 소련군은 북쪽의 노동자 거주 지구와 공장들, 중심 지대의 중앙 철도역과 강 선착장 주위 지역, 그리고 스탈린그라드 한가운데에 솟아 있는 작은 구릉인 마마이 고지로 몰렸다. 폭격과 포화로 건물들이 뒤틀리고 벌거벗은 잔해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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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화로 불타오르고 있는 스탈린그라드 시 전경>

 

 

전장을 지탱할 수 없어서 소련제62군 사령관 알렉산드르 로파틴 장군은 부대원들을 볼가 강을 건너 동쪽 강변으로 소개시켰다. 그의 상관들은 이것을 직무 유기로 보았고 로파틴은 면직되었다. 그리고 바씰리 이바노비치 츄이코프(Vasilii Ivanovich Chuikov)장군이 9월 12일에 제62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지위관을 잃고 뿔뿔이 흩어진 병사들을 한데 모아 더 효율적인 전투 부대로 묶어 내었으며 항상 독일군의 습성에서 배우고 그들의 약점을 연구했다. 그는 거칠고 건장한 사나이였으며 웃으면 줄지어 있는 금니가 드러났다. 그는 부하들이 견뎌 내는 것을 견뎌 냈고 머뭇거림 없이 죽음과 맞섰다.

 

 

그가 도착한 9월 13일에는 파울루스가 소련군을 최종적으로 강 쪽으로 밀어붙이기 위해 휘하 부대를 모아 놓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에 도착한 츄이코프는 경악한 나머지 "도시의 거리는 죽어 있다. 나무에는 푸른 가지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모든 것이 화염에 싸여 무너져 있다."고 썼다. 그는 군사령부가 들어서 있는 마마이 고지의 비탈에 급조된 엄체로 갔는데 거의 곧바로 전투에 휘말렸다. 독일군이 언덕으로 돌격해 오자 츄이코프는 어쩔 수 없이 차리차천이 볼가 강과 만나는 지점의 강둑으로 철수해야 했다.  그곳에서 그는 후텁지근하고 통풍이 안 되는 지하벙커에 군 지휘 본부를 급히 만들었다. 그의 생명선은 볼가강이었다. 작은 나룻배의 선단이 식량과 탄약, 그리고 증원군을 실어왔고 부상병을 가득 싣고서 다시 돌아갔다.

 

 

9월의 전투에서 붉은 군대는 볼가 강의 가장자리로 내몰린 동시에 인간이 가진 지구력의 한계 밖으로도 내몰렸다. 9월 13일에 시작되어 사흘동안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독일군은 중앙 기차역과 마마이 고지로 진격했다. 중앙 기차역은 15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 하지만 볼가강 저편에서는 이제 보내줄 것이 거의 다 떨어져가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스탈린은 소연방 영웅 알렉산드르 로딤체프가 이끄는 제 13근위사단에게 빨리 달려가서 스탈린그라드를 구조하라고 명령했다. 제13근위사단은 전선 몇마일 뒤의 메마른 초원에 세워진 철도 종점에서 내려 탱크 15대와 한줌밖에 되지 않는 병력으로 독일군을 막아내고 있던 츄이코프를 구하기 위해 볼가강을 건넜다. 제13근위사단은 거의 100%에 가까운 인력손실을 입었지만 정말 필요한 때에 스탈린그라드로 투입되었다. 소련 제62군은 이들과 함께 볼가강 서쪽 강변의 얼마 안되는 지역을 계속 움켜쥐고 놓지 않았으며 스탈린그라드는 구원을 받게 되었다.

 

 

로딤체프의 부하들이 투입된 싸움터는 마치 대지진의 진앙지 같았다. 전 지역에서 불타 버린 건물에서 나온 짙고 거무스름한 재가 흩날렸고 포탄이 쿵 하고 떨어질 때 마다 달표면에 쌓여있는 회색 먼지같은 잿더리가 피어올랐다. 불타는 살에서 나는 악취가 날렸고 집중 포격이나 폭격이 새로 시작될 때마다 폐허가 다시 뒤틀렸다. 전선에는 분명한 테두리가 없었다. 소련군과 독일군의 사이는 수류탄 투척 거리를 넘지 않았다. 소련 군인들은 지하벙커를 통해 독일군 진지선 뒤에 갇힌 채로 전투를 계속 했다. 소련군은 거의 전원이 부상을 입었지만 경상자는 더 이상 전투에서 열외되지 않았다. 많은 중상자들은 그 자리에서 누운채로 죽었고 그들은 강물처럼 흐르는 쥐떼의 먹이가 되었다.

 

 

츄이코프는 부하들에게 적이 자기편을 타격할까 무서워서 우세한 공군력과 포병 화력을 전개하지 못하도록 최대한

독일군 진지선에 가깝게 붙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아도 9월 하순 무렵에는 독일군 부대들이 볼가강변에서 불과 몇 백 야드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떨어지고 싶어도 떨어질 수 없었다. 한편 강 너머에서는 소련군이 날리는 집중 포격과 로켓이 끊임없이 강을 건너 독일군 진지를 가격했다. 독일군은 곧 도시에서 벌이는 싸움이 초원을 가로질러 빠르게펼쳐지는 항공 및 탱크 작전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독

 

 

일군은 짜증나도록 잡기 어렵고 독한 적과 싸워야 했다. 소련 편에 선 강인한 시베리아사람들과 타타르 인들이 칼과 총검을 사용해서 백병전에 능하지 못한 독일군을 공격했다. 낮이면 저격병들이 앉아서 독일군 측에서 움직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노렸다. 베를린에서 저격수의 위협을 무력화할 명사수들이 왔지만 그들도 붉은 군대의 제물이 되어 쓰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월 하순에는 시 중심 구역 대부분이 함락되었다. 소연방 영웅 광장에 있는 초대형 백화점 지하실에 숨어 있던 소련군인들은 백화점을 지키다가 죽음을 당했다. 파울루스는 백화점을 본부로 삼았다. 남쪽에서는 거대한 곡물창고에서 58일간의 농성이 벌어졌다. 독일군 탱크와 대포가 곡물 창고를 뒤틀린 골조로 만들자 각 층마다 소련군 수비대가 버텼다. 9월 25일에는 파울루스가 소련 제62군 잔존 병력 대다수가 포위되어 있는 북쪽 공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원이 모자라는 독일군 3개 보병 사단과 2개 기갑 사단이 3마일 길이의 좁다란 전선을 따라 공격해서 하나를 제회한 모든 공장에서 소련군을 몰아냈다.

 

 

살아남은 소련군 부대는 바로 강변에 있는 바리카듸 공장으로 몰려들었다. 츄이코프의 다른부대들은 볼가 강변을 따라서 작은 여러 고립지역에 달라붙었다. 붉은 군대가 스탈린그라드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군사적 설명이 불가능하다. 붉은 군대는 스탈린그라드에서 말 그대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초월적인 인내를 보였다.

 

 

츄이코프는 끝까지 부하들사이에 남아 그들을 격려했다. 그의 본부에 폭탄 공격이 가해지고 불붙은 석유가 밀려들어오는 위기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츄이코프는 부하들 사이에 남았다. 그의 결연함은 다른 이들에게도 퍼져 나갔다. 츄이코프는 스탈린그라드가 겪는 혹독한 시련을 견디지 못하는 자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전투 동안 정규 군인과 비정규 군인을 가리지 않고 13,500명 가량이 용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겁쟁이였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츄이코프는 결연한 사명감을 보여 주었고 이것은 그의 지휘를 받은 부하들의 사기에 반영되었다. 모든 나라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소련군도 자기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 알고 자신의 리더를 신뢰할 때 더 큰 힘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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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볼가강 건너편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으로 개칭된 돈 전선군이 굳센 우크라이나 사람인 안드레이 예레멘코 장군의 휘하에 있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싸웠던 50대 남성부터 18살먹은 소년들까지 가리지 않고 모두 볼가강을 건너게 했다. 예레멘코는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후방의 취사병과 정비병까지 내보냈다. 그들중 25%가량이 강기슭에서 몇 백야드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전선에 가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하지만 살아남아 전선까지 간 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그 어떤 전투보다 더 치열한 전투 속에 본능적으로 강인한 생존 본능을 개발했고 이들은 곧 훌륭한 군인이 되었다.

 

 

비록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츄이코프의 제62군은 혼자가 아니었다. 남쪽에서는 독일군에 의해 츄이코프와 분리된 소련 제64군의 잔존 병력이 독일군의 측면에 맞서 적극 방어를 유지했다. 강 너머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의 포격과 다연발 로켓 발사 장치, 즉 카튜샤(Katiusha)의 지독한 공격이 계속됐다. 독일군은 카튜샤를 두려워했다. 카튜샤는 각각 10에이커의 면적에 4톤가량의 폭약을 일제히 날려버릴수 있었다. 날아가는 동안 소리를 내지 않아서 소리를 듣고 피할 수 없었고 일단 발사된 로켓은 로켓에 장전된 폭약을 아주 불규칙하게 흩뿌려서 어디가 공격받을지 예상하기 힘들었다. 10월 무렵에는 소련 공군이 가담하기 시작했다.

 

 

한편 쥬코프와 바씰레프스키는 천왕성 작전을 마무리 손질하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숱한 인명이 쓰러져 가는 희생을 치르면서 쥬코프는 자신이 가진 예비 병력을 스탈린그라드에 밀어 넣어 츄이코프를 구하고 싶은 유혹을 몇 번이나 이겨야 했다. 10월과 11월 동안 예비 병력,장비,군마를 양성해 내어 독일군의 기다란 돌출부 북쪽과 남쪽에 대한 전선을 강화했다. 붉은 군대는 병력 1,000,000명 이상, 중포 14,000문 탱크 979대 항공이 1,350대라는 대군을 배치시켰다. 다행히도 그 대군의 전개는 독일 첩보 기관에 걸리지 않았다. 독일 첩보 기관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예비 병력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오판을 하고 있었다.

 

 

11월 초순 소련군 총사령부는 작전의 정교한 세부사항을 놓고 토의했고 그 결과는 일선 지휘관과 사단 지휘관들에게 전달되어 작전 계획에서 자신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히 파악하게 하였다.  11월 13일 쥬코프와 바씰레프스키는 스탈린을 찾아가 천왕성 작전의 최종 계획을 내놓았다. 스탈린은 모든 것에 동의했고 작전 개시일을 쥬코프의 재량에 맡겼다. 최종 점검을 한후 쥬코프는 북쪽 측면 공격일자는 11월 19일로, 남동쪽 공격일자는 11월 20일로 잡았다.

 

 

츄이코프는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츄이코프가 사생결단으로 싸우게 하기 위해 이 모든것은 츄이코프에게 극비리로 진행됐다. 천왕성 작전이 개시되기 까지 며칠간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결정적인 날들이었다. 히틀러는 파울루스에게 빨리 스탈린그라드전투를 끝내라고 재촉했고 결국 11월 9일 도시를 점령하기 위한 마지막 공세를 펼쳤다. 독일 육군 참모 총장 차이츨러(Zeitzler)는 히틀러에게 스탈린그라드를 포기하고 독일군 진지선의 길이

를 단축시켜야 한다고 요청했지만 히틀러는 "나는 볼가 강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나는 볼가 강에서 물러서지 않는다!"라고 고함쳤다.

 

 

파울루스는 11월 9일 이른 아침 시간에 7개 사단을 전진시켜서 소련 제62군을 다시 한번 쪼개는데 성공했다. 독일군 부대는 500야드 너비의 회랑을 뚫고 볼가 강에 도착했다. 이 부대는 강 반대편에서 쏘는 맹렬한 포화에 노출되어 공격받았다. 시 북쪽의 작은 교두보들이 독일군에게 포위되었고 마침 볼가 강을 덮기 시작한 얼음들로 말미암아 보급

 

 

마저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소련군이 거의 포기상태에 이를 무렵, 소련군은 독일군에게 가까스로 구원을 받았다. 11월 12일 무렵 사흘간의 전투로 인해 기진맥진해진 독일군이 공세를 늦춘 것이다. 힘이 빠질대로 빠진 양측은 참호를

파고 들어갔다. 붉은 군대는 서서히 공단과 건물을 하나둘씩 되찾았고 이로서 스탈린그라드 전투 최대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리고 11월 19일, 드디어 천왕성 작전이 시작되었다. 바투틴의 남서부 전선군과 로코소프스키의 돈 전선군이 이동 전진해서 루마니아 제3군과 약간의 독일 예비부대를 덮쳤다. 루마니아 군은 몇시간만에 무너졌고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소련 기갑 부대는 얼어붙은 초원을 가로지르며 지난번 독일군이 보여줬던 모습을 재현했다. 루마니아군은 공황에 빠졌고 11월 21일 항복했다. 27,000명의 루마니아 군이 포로가 되고 남쪽에서도 역시 소련 기갑 부대의 강력한

공격을 받은 루마니아 제4군이 똑같이 빠른 속도로 무너졌다. 나흘만에 소련군의 집게발 2개가 스탈린그라드에서 약 60마일 서쪽에 있는 돈강에서 만났다.

 

 

독일군 남부 전선은 혼란에 빠졌다. 붉은 군대는 초원을 스치듯 지나쳐 나아가서 폭 100마일이 넘는 회랑이 파울루스,독일 제6군,제4기갑군의 잔여 부대 등 총 330,000명이 넘는 병력을 독일군 전선과 갈라놓았다. 첫 반응은 탈출하려고 시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파울루스에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위치를 사수하라고 명령했고 히틀러와 함께 있던 헤르만 괴링은 항공기로 하루 500톤씩 보급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와 함께 폰 만슈타인 원수에게 회랑을 뚫고 스탈린그라드로 가서 포위된 군대과 육로로 접촉할 길을 만드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소련군 참모진을 이를 예상하고 있었다. 소련군 참모진은 파울루스를 둘러싼 원에 60개 사단과 탱크 1,000대를 채웠다. 12월 12일, 만슈타인이 비와 진눈깨비가 몰아치는 가운데 그 원을 공격할 때 그는 진격하

 

 

기 쉽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포위망을 뚫으려고 하는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쪽으로 40마일정도 전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련군은 예비 기갑 사단을 가지고 되받아쳤고 거꾸고 24일에는 만슈타인의 부대가 포위당할 위기에 쳐했다. 만슈타인은 서둘러 퇴각했고 파울루스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독일 제5군은 제4기갑군 일부와 이탈리아 군 및 루마니아군 잔존 병력과 함께 스탈린그라드의 고립지대에 같혔다. 구조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도 항복하면 안된다는 히틀러의 고집때문에 그들은 계속 싸워야했다. 이곳으로 독일 공군의 수송기들이 보급품을 가지고 갔지만 스탈린그라드 상공에서 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신세대 고성

 

 

능 소련 전투기들이 개발되었고 이 전투기들은 소련군에게 제공권을 쥐어줬다. 독일 공군의 손실은 수송기 448대, 승무원 1,000명 이상이었다. 보급 작전은 실패했고 괴링이 약속했던 500톤의 보급품은 공급되지 못했다. 독일군이 받은 보급품은 하루 평균 100톤 미만에 불과했다. 12월과 1월의 악천후에는 이보다 훨씬 밑으로 떨어졌다. 파울루스는 가지고 있는 것으로 싸울수 밖에 없었다.

 

 

이제 전세는 역전되었다. 지금부터는 독일군이 당할 차례였다. 그들은 끊임없는 소련군의 포격,로켓,비행기의 공격을 받았다. 탄약과 예비 부품이 모자랐고 스탈린그라드의 1월은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혹한이었다. 온기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찢어 낸 천 조각을 발과 다리에 두르고 무엇이든지 손에 잡히는 것으로 어깨를 덮었다. 식량 배급은 최소한도로 삭감되어 하루에 빵 2온스 설탕 0.5온스만이 배급되었다. 독일군 사이에서 사람고기를 먹는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한편 소련군은 독일군이 항복하지 않자 항공기 300대와 탱크 179대로 보강된 47개 사단병력으로 포위망을 조였다. 소련군은 공격 개시 이틀전에 파울루스에게 항복 조건을 전달했다. 하지만 독일군은 그것을 거절했고 전쟁중 가장 맹렬했던 포격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흘만에 소련군은 초원을 지나서 시 전방에 이르렀고 소련군의 맹렬한 포격으로 눈으로 쌓였던 하얀 초원이 검은색과 회색으로 변했다. 1월 17일 무렵 고립지대가 원래 크기의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파울루스는 다시 항복을 종용받았다. 하지만 히틀러의 지시가 없었기에 파울루스는 다시 거절했고 독일군은 뒤로 밀려나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독일군은 츄이코프의 부대가 썼던 방법을 이용하여 소련군에 맞섰다.

 

 

1월 22일에는 소련군이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재집결했다. 어떤 독일군 부대들은 항복이 죽음보다 나쁘지는 않기에 항복하기 시작했다. 독일군 수중에 있는 마지막 비행장인 굼락(Gumrak)에서 안전한 곳으로 가는 마지막 비행기에 타기 위해 자리를 차지하려는 광란의 쟁탈전이 벌어졌다. 장교들은 뇌물을 주고 자리를 매수했다. 붉은 군대는 도시 구역을 하나하나 차례로 고립시키면서 조여 들어갔고 1월 26일에는 드디어 전위부대가 바리카듸 공장 근처에서수개월 동안 고립되어 싸운 소련 제62군 병사들과 만났다. 두 부대 병사들은 서로 눈물을 흘리며 얼싸안았다. 병사들은 마지막 밀어붙이기를 하면서 혁명 영웅 광장으로 갔다. 소련군은 사로잡은 독일군 장교들을 통하여 1월 31일 점령된 혁명 영웅 광장 한쪽에 있는 백화점 건물에 파울루스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백화점 건물에 포격이 가해지고 화염 방사기가 불을 뿜었다. 독일군 참모 장교 한명이 건물 입구에 나와서 젊은 소련군 장교 표도르 옐첸코 대위에게 신호를 보냈다. 다른 군인 2사람과 함께 옐첸코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지하실에서 더럽고 냄새나고 겁에 질린 독일군 수백명을 발견했다. 여기에서 옐첸코는 독일군의 항복에 대해서 파울루스가 아닌 그의 참모진과 합의했다.

 

 

드디어 그는 본부 뒤에 있는 어느 방으로 들어갔고 수염을 깎지 못하고 기분이 언짢은 파울루스가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옐첸코는 파울루스에게 "자,끝났습니다."라고 말했다. 파울루스는 그에게 애처로운 눈길을 주면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뒤 차가 한대 달려와서 파울루스를 태우고 로코소프스키의 돈 전선군 본부로 갔다.

 

 

스탈린그라드 시 북쪽에서는 2월 2일까지 광적인 저항이 계속되었지만 그 후로는 별다른 저항이 없이 시는 잠잠해졌다. 항복 소식에 히틀러는 충격을 받았다. 2월 1일에 히틀러는 파울루스의 항복에 분통을 터뜨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평시에 독일에서 한 해에 18,000명이나 20,000명 가량 자살을 선택했지. 심지어 그런 처지에 있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자기 부하들 5,6만 명이 끝까지 용감하게 자기를 지키다가 죽는 것을 보는 사람이 여기 있어. 그런 사람이 어떻게 볼셰비스트들에게 자기 몸을 넘겨줄 수 있을까!"

 

 

독일 제3제국 전역에 의기소침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다음날 독일 라디오는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에 나오는 지크프리트의 장례 행진곡을 되풀이해서 틀었다..

 

 

소련이 승리를 위해 치른 대가는 컸다. 붉은 군대는 또 500,000명을 싸움에서 잃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독일군의 손실도 전사 147,000명, 포로 91,000명이라는 파국적인 수준에 달했다. 이로서 독일군은 불패라는 평판을 상실했다.

 

 

전투가 끝난 뒤 며칠 동안 도시에서 가장 이상한 일은 고요함이었다. 새로 내린 눈이 폐허를 덮었다. 꽁꽁 얼어붙은 시체들이 여기저기서 으스스하게 눈에 띄었다. 독일군 패잔병들이 지하실에서 나와 잡혔고 소련군 병사들은 저격병과 부비트랩을 수색했다. 전투가 끝난지 며칠 뒤 첫 전쟁 기념물이 시가 내려다보이는 절벽들 중의 한 곳에 세워졌다.

그 기념물의 기초는 독일군 포로들이 만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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