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산성 전투를 신라의 배신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한가?
대부분의 시각이 관산성 전투를 신라의 배신행위로 보는 경향이 많은데 이는 백제의 시각에서 봤을때 이야기일 뿐이다. 신라시각에서 본다면 국익을 우선시한 전략적 선택이다. 당시 신라는 국제적 동향을 면밀히 관찰하여 국익에 가장 효과적인 상대를 선택한 것이다. 신라국익에 백제가 유리하냐 아니면 고구려가 유리하냐는 문제에서 고구려를 선택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산성전투를 말할 때 신라의 배신행위라고 말하는 이면에는 무의식적으로 약자를 편드는 심리가 내재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겠으나 보다 냉철히 볼때는 망한나라를 두둔하는 이상한 꼴이 되어 버린다. 이것은 회사경영을 잘못해서 부도난 회사는 두둔하고 생존을 위해서 악착같이 살아남은 회사는 욕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삼국시대의 고구려 신라 백제는 자국의 이익과 자국의 생존을 위해서 합종연횡을 하던 때이다. 한마디로 생존경쟁에서 이기기위한 전략을 배신이라는 단어로 치부하는 것은 냉엄한 국제관계를 모르는 단편적인 시각이다. 특히 군사적 측면에서 볼때는 배신을 당했다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정보력과 전략전술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국제역학구도에서 배신당했다는 것은 오히려 치욕에 가까운 것이지 두둔 내지는 동정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철저히 국익을 우선한 신라 - 전략파트너를 바꾸다
현대의 국가간에도 엄연히 계약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는 불가침조약이라든가 상호방위조약, 평화협정 등등해서 여러 형태로 존재하지만 사안에 따라서는 무시되기도 하고 또 역사적으로는 순식간에 깨져버리곤 했다. 대표적으로는 독소불가침조약이 그랬고 영국의 체임벌린 수상이 독일 히틀러와 맺은 뮌헨평화협정등이 그랬다.
철저하게 국익우선의 원칙이 작용한 것이다. 물론 여기선 개인간의 계약파기와는 다른 측면이 있다. 개인간에 있어서 계약파기는 법적 절차에 따라서 보상책이 있지만 국가간의 계약파기는 철저하게 힘의 논리가 작용하게 된다.
힘이 있는 국가는 계약을 파기했을 때 그에 따른 제약요소를 극복 할 수 있지만 힘이 없는 국가는 계약을 파기했을 경우 그에 따른 보복을 감당할 수 없다면 쉽게 계약을 파기할 수 없게된다. 즉 현대에도 국가간에 정식으로 맺은 조약도 경우에 따라선 휴지조각에 불과할 뿐인데 하물며 고대국가간에는 다반사였다고 봄이 합당할 것이다. 따라서 국가간에 계약은 언제든지 파기될 수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동서고금을 통해서 항상 존재했던 상항이다. 특히 공동의 적을 상대로 한 동맹관계에선 더더욱 변화무쌍하다. 흔히 영원한 동맹도 또 영원한 적도 없다 하지 않는가?
원래 동맹이라 함은 공동의 적을 상대로 해서 함께 전쟁을 치루어 나가는 것인데 그 공동의 적이 바뀌게 되면 언제든지 동맹관계는 와해될 수 있다. 한마디로 공동의 적이라는 관점을 공유하지 못하면 동맹으로서의 가치는 상실하게 된다. 바로 이 측면에서 관산성 전투 직전의 백제 신라 고구려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국제역학에서의 핵심이라 할 것이다.
백제의 패배요인은 백제 내부에 있었다.
흔히 관산성전투에서 신라의 배신이라고 말할 때는 속칭 신라의 뒤통수 치기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과연 백제는 전혀 무방비로 당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원래 뒤통수 맞다는 표현은 전혀 예상치 못하다가 일격을 당할 때 하는 표현인데 이 점에 대해서 백제가 신라로부터 일격을 당한 것은 무엇일까? 물론 그것은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어렵게 되찿은 고토인 한성 옛땅을 신라의 기습으로 빼앗긴 것을 말한다. 이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그러나 기록을 면밀히 보고 그것을 군사적 관점에서 재구성 해보면 백제는 신라의 동태를 알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사진설명 ; 초기 한성백제의 왕성이었던 풍납토성. 멀리 보이는 아파트단지 뒤가 당시 고구려의 진영이었던 아차산성이다.
백제가 한성 옛땅을 잃어버린 것은 개로왕때 고구려의 장수왕 침공이 있은 475년이다. 본격적인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백제는 한성땅을 잃고 웅진으로 그리고 사비로 천도를 하게 되고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서 신라와 공동전선을 편것이 바로 나제동맹이다. 이 나제동맹은 신라가 한성에 신주를 설치하게 되는 553년에서 결정적으로 와해되는데 기록을 보면 백제는 신라의 이런 변화를 전혀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알고서 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림 : 고구려 전성기때의 동아시아.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백제의 한성위례성은 고구려에 점령당하고
개로왕은 참수된다. 그 후 백제는 한성옛땅을 고구려에 내주고 웅진성으로 천도하게 된다(475년).
고구려의 강력한 남진정책으로 위협을 느낀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에 대항하는 나제동맹을 결성하게 된다
나제동맹이 잘 가동되던 백제 동성왕 23년인 서기 501년에 탄현에 목책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신라의 진출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관산성 전투가 있기전 성왕 28년인 서기 500년에 백제가 고구려와 도살성과 금현성을 놓고 서로 공방하고 있을때 양국이 지친틈을 타서 신라가 도살성 금현성 공격하여 빼앗고 병사 1000명을 주둔케 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다. 일종의 신라가 어부지리를 얻은 셈이다.
또 고구려는 신라에게 빼앗긴 지역에 대해선 반격을 하지 않은 반면에 백제에 대해선 공방을 계속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로서는 병력의 출혈이 거의 없었지만 백제로서는 고구려와의 공방으로 출혈이 심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볼때 상식적으로나 또 군사적으로나 고구려와 신라의 행동을 보고 백제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면 이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이미 이때 백제는 신라의 변화를 감지했다고 봐야 한다. 실제로도 백제는 신라와의 동맹관계가 무너짐을 간파하고 고구려와 신라의 밀약까지도 눈치챈 기록이 일본서기 흠명천황조에 전하고 있다.
“지금 고구려가 신라와 화친하고 세력을 합하더니 이제와서는 우리 백제와 가야를 멸하려고 도모하고 있소. 그래서 먼저 불시에 저들을 공격하고자 하니 군사지원을 해주기 바라오” 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이 고구려가 신라와 화친을 도모한다는 말인데 이 의미는 곧 고구려가 나제동맹을 깨뜨리기 위해서 신라에 대해서 모종의 제스츄어를 쓰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흔히 나제동맹의 파기는 그 주체가 신라로만 아는데 백제 성왕의 국서를 보면 고구려가 소위 이간책을 구사했음을 은연중에 알려주고 있다.
이런 사항은 삼국유사에도 언급되어 있다.
553년 고구려가 나제동맹의 공격으로 북쪽으로 밀려난 뒤 한강유역은 중상류는 신라가 그리고 하류는 백제가 차지하면서 양분하고 있었다. 이때 백제 聖王은 수세에 몰린 고구려에 결정타를 가할 목적으로 나-제 연합군의 계속적인 북진을 신라 측에 제의했으나 신라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백제는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 정벌을 원했다. 그러나 신라 진흥왕이 말하기를, 『국가의 존망은 하늘에 달려 있다.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찌 그것을 바랄 수 있으랴』 라고 전하고 있다.
다시 해석한다면 하늘이 고구려 편인데 굳이 신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속내를 은연중에 비추고 있는 것이다. 이 사항에 대해선 추후 언급하겠지만 신라의 거칠부가 고구려의 혜법사를 통해서 고구려 지휘부와 내통하였다고 유추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어째든 진흥왕의 발언은 「국익을 위해서는 영원한 친구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전략적 사고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백제의 왜에 대한 문화전파도 군사적 실리 추구의 방편
또한 552년에 백제성왕과 왜의 관계는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이때 백제는 역사과서에도 나와 있는 “노리사치계의 불교전파”부분인데 불상과 불경을 왜에 보내서 왜에 불교를 전파한다는 내용이다. 당시 불교는 지금같은 하나의 종교차원을 넘어서는 선진문물이자 중국과의 교류의 통로이기도 하기에 한마디로 학문적으로나 정치사상적 그리고 외교적으로 한차원 올라설 수 있는 밑바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서기에도 이내용이 매우 비중높게 다루어지고 있는데 당시 왜왕인 흠명천황은 백제 성왕이 보낸 불상과 국서등을 보고 뛸듯이 기뻐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런 내용을 우리 교과서에선 마치 백제가 왜에 특별한 시혜를 베푸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그렇게만 이해한다면 제대로 된 역사이해가 아닐 것이다.
사진설명 : 무녕왕능 발굴 이후 최대의 발굴로 평가되는 백제 금동 대향로. 백제 능산리고분 인근의 왕흥사터에서 발굴되었다. 백제성왕의 아들 태자 여창(위덕왕)이 세운 왕흥사절터에서 발굴되었기에 백제성왕을 추모하는 유물로 판단하고 있다. 어찌보면 관산성전투가 낳은 걸작품인지도 모르겠다.
사진설명 : 백제 대향로 발굴당시의 모습
태자 여창은 자신의 아버지인 백제 성왕이 잘신의 잘못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관산성전투 패전후 승려가 되려고 하였다. 그러나 백제중신들의 만류로 출가하지 못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 백제대향로가 발굴된 바로 근처에서 창왕(위덕왕)의 명문이 세겨진 백제사리감도 발굴되었다. 백제 공예품의 진가를 알수 있는 그런 유물(국보)이다.
그림설명 : 일본 쇼토쿠(聖德)태자 초상화. 백제의 아좌태자가 그렸다고 알려진 그림. 아좌태자는 위덕왕(여창)의 아들로 백제성왕의 손자가 된다. 일본 쇼토쿠 태자는 고대일본의 체제를 완비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로서 그 무게감은 첫손가락에 꼽는다. 우리에게는 백제 아좌태자가 쇼토쿠태자의 스승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백제왕들은 태자시절을 일본에서 지낸 왕들이 많다. 백제와 왜의 군사정치적 관계에서 일정부분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모름지기 세상살이에 공짜가 없듯이 특히나 국가간의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자선을 베푸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항상 복선이 깔려있고 뒷 배경은 따로 있는데 백제는 항상 왜에 불경이나 역박사등의 고급기술을 전해주면서 반대급부로 군사지원을 받아내었다. 552년 노리사치계를 보낼 때 역시 백제는 앞으로 전개될 군사행동을 설명하면서 왜의 군사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왜는 흔쾌히 수락하였는데 지금식으로 말하면 상호 비교우위에 있는 선진문물과 군사를 서로 맞바꾸는 일종의 무역을 한 셈이다. 노리사치계가 왜에 건너간지 바로 이듬해인 서기 553년 정월에도 백제는 상부(上部)의 덕솔 과야차주(科野次酒)를 보내서 재차 군사지원 요청을 하게 된다. 그만큼 삼국간의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슴을 보여주는 간접자료이다.
즉 이와같은 여러 정황을 고려해 보면 백제는 나제동맹의 붕괴를 예측하고 있었다고 봄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가 관산성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내부결속을 이루지 못한데 그 첫번째 원인이 있다.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참수되었을 때도 그랬고 관산성전투 패전후 100여년이 지나서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끝내 멸망당한 데에도 백제 내부의 결속력 붕괴가 중요한 요인이었다. 특히 왕과 귀족의 지배층의 분열은 치명적이었다. 지배층의 단결과 국가결속력은 국가발전의 핵심이다. 그런면에서 백제의 국가모델은 국제경쟁에서 살아남는데는 맞지 않는 모델이다. 역사를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민족은 멸망한다는 교훈을 다시 곱씹어 볼 때이다.
지금까지 .. 저를 보시고 뭐 이런사람이 다 있어 ^^ 하시면서
끝까지 애독 해주신 짱밀리 가족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다음에는 고구려 광개토태왕에 대해서 올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대해주세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