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 둘리틀 특공대...1편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11.03 22:5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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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을 공격한 일본은 믿어지지 않을정도의 빠른 속도로 웨이크 섬,

싱가폴, 홍콩을 점령하고 급기야 미국령 필리핀을 공략하고 있었다.  

1942년 1월4일,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죠지 마샬, 핸리 아놀드,

어네스트 킹 제독등 군수뇌부들과의 백악관 회의에서 가능한한 빨리

일본에게 반격을 가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내라고 요구했다.

 

루즈벨트는 진주만 공격이 후 모든 미국민의 힘을 결집시켜 일본을

굴복시키는데 매진하자고 호소했다.

 

일본의 비열한 기습에 분노한 국민들은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주긴했으나 정부로서는

떨어질대로 떨어진 국민들의 사기를 북돋아줄 수 있는 기폭제가 절실히 필요한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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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네스트 킹(Ernest J. King)제독

 

어느날, 어네스트 킹(Ernest J. King)제독의 잠수함대

참모 프랜시스 로우(Francis S. Low) 대령은

중형 폭격기들이 항공모함에서 이륙할 수 있는지,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일본본토를 공격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이것을 보고받은 킹 제독은 행여 실현 가능한지

확인해보고자하여 즉각 항공참모

도날드 던칸(Donald B. Duncan)대령에게

조사를 명령하게된다.

 

던칸 대령은 육군 중형폭격기들 중 항공모함에서 이륙이 가능한 기종을 찾기위한 조사에

착수했다. 그는 여러 가지 데이터를 종합한 결과 노스아메리칸 사의 B-25 경 폭격기가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것은 각 항공사에서 제공한 제원만을 가지고 평가한 것이어서 킹 제독에게

제출한 보고서에는 최우선적으로 발진 테스트를 실행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적었다. 던칸은 폭탄을 적재한 폭격기가 약 214m의 육상활주거리 내에서 이륙할

수만 있다면 항공모함에서의 발진도 가능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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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칸과 제임스 로우는 1월17일 아놀드 장군을 만나 자신의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던칸은 이자리에서 버지니아 노포크 해군공창에 들어와있던 항모 호네트

함상에서 B-25 미첼 폭격기의  발함 테스트를 건의하였다. 

폭격기가 착함은 할 수 없을지라도 발함은 가능하리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해군으로부터 이같은 대담한 계획을 전달받은 아놀드 장군은 극히 위험하지만 만약

성공한다면 일본 국민에게는 심각한 심리적 타격을, 반대로 미국민에게는 엄청난

사기진작 효과를 가져다 줄 것이라 생각했다.

 

아놀드 장군은 일찌기 뛰어난 묘기비행과 스턴트 비행사로서 유명한

제임스 둘리틀 중령에게 이 막중한 임무를 맡기기로 결정했다.

아놀드와 둘리틀은 아주 친분한 사이였다.

예비역이었던 둘리틀을 다시 현역으로 불러들인 것도 그의 능력을 높히 평가한 아놀드였다.

2차대전이 발발하자 둘리틀을 영국으로보내 전쟁상황을 파악토록 하려했으나

진주만이 공격받자 취소되었다.

 

둘리틀 중령은 MIT 공대의 공학박사학위를가진 우수한 장교로서 워싱턴에 근무하고 있었다.

아놀드는 둘리틀 중령에게 폭탄을 싣고 함상에서 발진할 수 있는 폭격기를 찾아내어

테스트를 실시 하도록 지시했다.

결국 나중엔 알게되지만 이 때 아놀드는 둘리틀에게 조차도 작전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철저히 비밀을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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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둘리틀 중령(James H. Doolittle)은 1896년 출생으로 청소년 시절엔

로스엔젤레스에서 주먹이 빠르기로 유명한 스트리트 파이터였다.

1908년 부모가 이혼하여 어머니를따라 캘리포니아로 들어간다.

나이에비해 키가 작았던 둘리틀은 집이 가난하다고 비웃는 자들을

모조리 때려 눕혔다. 복싱도 곧잘하여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나 그는 막 싸움에능한 싸움꾼 이었지 결코 기술적인 파이터는 아니었다.

그는 포레스 베일리 선생을 만나 인격적으로 성숙한 선수가된다.

선생은 그에게 복싱기술과 더불어 철저한 인성교육을 시켰던 것이다.

경찰서를 드나들던 그는 아마추어 복싱선수로 변신하여 1912년 미 서부지역

고등부 아마추어 플라이급 복싱 챔피언이 되었다.

 

대학을 다니던 그는 1917년 미육군 항공대에 입대했다.

1차대전후 그는 묘기비행과 스턴트비행사로서 명성을 날렸다.

 

1923년7월, 메셔추세츠 공대에 입학, 항공학 공부를하여

메셔추세츠 공대의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40년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여 항공기 생산 관리관으로서 일했으며

 B-26 머로더 폭격기가 매우 안전하고 훌륭한 기체임을 증명하였고

조종사를 교육하기도 했다.

둘리틀은 여러기종을 분석한 결과 B-25B 미첼 폭격기를 개조하면

장거리 폭격이 가능하리라 판단했다.

 

122572008267913.jpgB-25B폭격기 조종석에 앉은 둘리틀 중령의 도쿄공습성공  홍보용 사진

 

 

B-18폭격기는 연료와 폭탄 적재량이 불충분했고  

B-23은 날개길이가 길어 항모 아일랜드에 부딪힐 위험의 문제가,

그리고 B-26은 활주거리가 너무 길다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항모갑판의 가용한 폭은 약 23m였고 B-25는 날개 폭이 21m정도였기 때문에

 B-25는 연료탱크를 대폭 개량하면 가능할 것같다는 최종 결론이 내려졌다.

 

일본 공습의 최초 계획은 도쿄를 비롯하여 요코하마, 고베, 나고야등의 도시에 공습을

가한다음 중국동쪽해안지방이나 소련의 블라디보스톡으로 비행하도록 결정되었다.

도쿄에서 중국동부까지는 1920km를 비행해야했지만

블라디보스톡은 그 절반인 960km만 비행하면되는 잇점이 있었다. 

미국은 소련과 교섭에 들어갔으나 일본을 의식한 소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스탈린은 독일을 상대하기에도 괴로운 마당에 미국을 도와줘 일본의 분노를

사서는 안된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장개석도 처음엔 미군 폭격기의 착륙을 허가하려하지 않으려했다.

잔인한 일본군의 습성을 익히알고있었던 그로서는 틀림없이 중국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보복이 따를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연합군의 승리를 확신한 그는 결국 착륙을 허가함과 아울러 특공대의

신변 보호도 약속했다. 이같은 결정은 중국에서 맹활약하고있던 플라잉타이거즈

비행대장  클레이어 센놀트의 조언도 한몫했던 것이다.

 

결국 블라디보스톡은 제외되었으며 이에 따라 폭격기에게 요구되는 비행거리는

필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총 2000파운드의 폭탄을 탑재하고 3200km이상을  

주파할 수 있는 폭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을지닌 경 폭격기는 지구 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자살행위와도 같았으나 둘리틀은 일본본토 공격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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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폭격기대의 동부해안 순찰임무를 맡은B-25A 폭격기가 급유를 받는모습.

 

B-25 C 미첼 경 폭격기

 

 

 

 

고속 기동부대의 항공모함은 대략 15대의 폭격기를 탑재하여 일본 본토로부터

730km지점까지 들어간 다음 폭격기를 발진시키고 고속으로 회항한다.

폭격기는 저공으로 비행하여 일본의 5개 도시를 공습한 후 중국으로 날아간다는

작전계획이 마련되었다.

 

 

중국으로 날아간 폭격기들은 제10 공군에 배속되어 중국, 버마, 인도 (CBI)전선에서

활동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본토에서 약 1000km 이상의 해상까지 경계망을 설정하였기 때문에

도중에 항모기동부대가 발각될 위험은 매우 컸다.

던칸 대령은 일본쪽 항로의 기상상태와 일본해군의 해상활동에 대한 정보를 수집

하기위해 잠수함을 급파했다.

 

일본기습의 맨 첫번째 숙제는 항공모함에서 육상폭격기의 발진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였다.

던칸은 버지니아 노포크로 날아가 항모 호네트 함장 마크 앤드류 미처 소장을 만났다.

그는 작전에관한한 일체언급 하지않은 채 항모에서 폭격기를 띄울 수 있겠는가 고 물었다.

1942년 2월2일, 3대의 B-25 미첼 폭격기가 크레인으로 항모 호네트에 올려졌다.

1대는 엔진문제로 포기하였고 2명의 해군 조종사가

버지니아 노포크 부근 해상에서 경량의 폭탄을 적재한

2대의 B-25B를 항모 호네트 함상에서 이륙하는데 성공해 내었다.

 

 

일본 본토 공습작전의 책임자인 둘리틀 중령은 폭격기에 조종사, 부 조종사, 항법사,

폭격수, 정비사겸 기총사수 이렇게 총 5명이 탑승하도록 계획했다.

둘리틀은 제17 폭격단에서 제공된 총 24대의 폭격기외에 펜들턴의 제10폭격단과

제89수색비행대의 3개 대대 중에서 지원자를 차출하는 작업에 들어갔는데

병사들 거의 대부분이 앞 다투어  자원했다. 

지원자 중 최종선발작업을 마친 140명의 승무원들이 2월 마지막 주에

훈련장소인 플로리다에 집합했다.

 

 

3월3일, 플로리다 에그린 비행기지에 도착한 둘리틀 중령은 140명 전원을

소집하여 연설을 하였다.

 

"나는 둘리틀이다. 나는 작전계획 책임자로서의 임무를 부여 받았다.

그리고 여러분은 스스로 자원하였다.

여러분은 이제 여태까지 자신이 해왔던 모든 일들 중 가장 위험한일을 하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도중에 떠날 수 있으며 그에대한 어떠한 비난도 하지 않겠다."

 

둘리틀이 잠시 말을 멈추자 아무도 숨을 쉬지 않는 듯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때 누군가가 무슨임무를 맡게될지 알려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미안하게도 여러분이 맡게될 임무가 무엇인지 말해줄 수가 없으며,

훈련 중에도 여러분이 자신의 아내나 가족을 비롯한 그 누구에게도  

지금부터 하는 모든일들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싶은 사람 있나?"

자원자 중 그누구도 떠나려한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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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 비행대의 B-25폭격기(1941년 7월. 워싱턴 펠츠비행장)

위의 사람은 에드워드 요크(Edward J. York)대위로서 둘리틀 특공대원으로 자원

하여 일본공습에 참가하였다가 연료부족으로 소련의 블라디보스톡에 착륙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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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기 개조 기술자들과 둘리틀 중령

      2편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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