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 사진은 진보 계열의 사람들이 끈질기게 보수 계열을
공격할 때 써먹은 사진으로 다카키[高木],
또는 오카모토[剛本]중위라는 일본 이름을 가진
박대통령의 만주군 시절 모습이다.
이 분에 대한 나의 개인적 느낌이 어떻든 지금 이분의
친일 행각을 비판하자고 글을 올린 것이 아니다.
단지 그의 구 만주군 복장에서 보여 지는 일제 군용품을
군장을 하비스트 입장에서 한번 분석해 보려고 하는 것이니
만주군 - 장비는 거의 일본군과 공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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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 자신 군장 전문가는 아니니까 부족 한 것은
이 분야의 전문가들의 조언은 전적으로 환영하겠다.
우선 철모를 보자.
구형 미군 철모와 같은 화이버가 없고 라이너만 있다.
프랑스의 철모를 모방했다고 하는데 동 시대의 미군이나
영국군의 비행 접시형의 철모보다는 모양은 다소
근대적으로 보인다.
일본군 [만주군] 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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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에도 복무했었고 한국군에도 복무 하신 분의 말씀에
의하면 이 일제 철모가 미제 철모보다는 더 무거웠다고 하셨다.
일본군들은 철모를 데쓰 가부토라고 불렀는데 한국군에도
이 말이 전파되어 일군 출신 장교들이 훈시중에도
이 일본어를 버릇처럼 쓰기도 했었다.
데쓰는 철(鐵), 가부토는 옛날 전국시대 무장들이
쓰던 투구의 명칭이었다
철모 내부 라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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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박정희 씨가 손에 들고 있는 군도를 보자.
이것은 서방측 군 전문가들이 도저히 이해 못할 무기였다.
19세기의 전장도 아닌데 일본군은 이 거추장스럽기만 한 전세기의
무기를 전쟁 끝까지 버리지를 않았었다.
돌격대 앞에서 지휘관이 칼을 휘 두르며 앞장서는 모습은
장렬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근대의 자동화기 앞의 칼은 그저
나무 막대기에 지나지 않았다.
박정희씨가 휴대한 군도는 일본군도의
마지막 모델인 94식인 듯하다.
1934년도에 제식으로 확정된 것으로
일군과 만군에 가장 많이 지급된 것이다.
칼의 전체 모양은 전형적인 일본도로서 칼집은 강철로 만든 것이다.
19세기 서양의 군도들이 한손으로 휘 두를 수 있는 기병도,
일명 샤베르라고 하는 것으로서 가벼운 것인데 일본 군도는
일본도의 변신이라서 두 손으로 쓰는 것이고 상당히 무겁다
94식 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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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도는 양산(量産)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일본도 전통 제조 방식이
접쇠 방식이 아니라 주물 방식으로 생산된 것이지만 날카로웠고
질이 좋았다.
만주군에게 지급된 군도는 일제가 만주를 접수하고 건설했던
안산 제철소[소화 제철소]에서 만주산 철광석에서 뽑은 강철로
만든 만철도(滿鐵刀)라는 군도일 가능성이 크다.
박정희 씨가 가진 망원경을 보자.
제식 명을 알아내지를 못한 것이 유감이다.
망원경은 6x24이다.
6X24 망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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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율 6배에 앞 대물 렌즈의 직경이 24mm라는 뜻이다.
이 망원경은 위관급 장교들과 하사관들에게 주로 지급되는
망원경이었다.
소좌급 이상의 고급 장교나 정밀한 관측이 요구되는 부대에는
7x50 망원경이 지급 되었다.
일본 해군은 7x70이라는 대형 쌍안경을 사용했다.
이 쌍안경은 성능이 좋아서 진주만 공격 해군 항공대가
진주만의 목표를 확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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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군사적으로 광학에 대한 기술축적이 절실함을 깨닫고
1920년대부터 광학이 제일 발달했던 독일에서
기술자들을 초빙해서 광학 산업을 육성했었다.
[쓰시마 해전의 함대 사령관 도고 제독도 독일제
짜이스 망원경을 사용했다]
독일 기술자들을 채용한 광학 회사 중의 하나인 일본 광학이라는
퇴역 장교가 만든 회사에서 박정희 중위가 가진 6x24 망원경을
생산했었다.
이 회사는 나중에 오리온 광학으로 이름을 바꾸고
지금까지 활발한 생산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중일 전쟁이 진행되면서 다른 광학회사에서도
같은 모델을 생산했다.
같은 기간 독일군이 사용했던 6X30 짜이스 실바마[Silvamar]
망원경은 대단히 성능 좋기로 유명했던 제품이었다.
이 제품에 비하면 일본제 6X24 망원경은 무게가 가벼운 것도
아니면서 대물 렌즈의 직경이 작아 시야가 좁았으나
야전에서 쓰기 좋게 튼튼하게는 만들어졌다.
6X24 망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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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장교들은 망원경은 물론 군용장비 일체를 장교 소비조합
(皆行社)에서 대금을 지불하고 개인이 구입 할 수있었다.
그리고 개인이 구매한 군용 제품에는 관급 제품에 비교해서
사매 제품(私物)이라는 뜻을 가진 사(私)자가 쓰여 있다.
오늘날 사제 폭탄이니 사세 총기니 하고 언론에서 사용하는
단어도 일제가 한국군에 남겨준 일본군 용어 중에 하나가
사회로 넘어 온 것이다.
권총도 살 수 있어서 브라우닝 권총이 많이 팔렸다.
일본 전범으로 처형된 전 수상 도조 히데키가 미 헌병에게
체포되기 직전 자살을 시도했던 권총도 브라우닝 권총이었다.
박정희 씨가 가지고 있는 망원경도
개인 구매 사제품인지 관급품인지는 이 사진으로는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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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 렌즈를 덮고 있는 것은 비 가리개[rain guard]로서
독일 군용 망원경에는 필수적으로 부착되어 있는 것이다.
현재 미 육군이 쓰는 독일제 스타이너 망원경에도
이 비 가리개가 붙어있다.
일본도 이를 모방했던 것 같다.
군수용의 필요때문에 일본이 광학산업의 집중적인 육성에
기울인 노력은 결실을 가져왔다.
품질의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던 것이다.
이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전쟁 기간 중 사용된 각국의
망원경 평가에서 일제 망원경들이 독일제 보다는 못하지만
미국 것보다는 품질이 낫다는 평을 들었다.
독일인들에게서 입수한 광학 기술로 일본은 전후 세계 카메라
시장에서 대폭 성장하더니 지금은 발달된 전자기술과 광학 기술을
기반으로 세계 디카 시장을 휩쓸고 있다.
다시 박정희 씨의 군장을 보면 가슴에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하게
둘러친 가죽 끈이 보이는데 일본군이 가께 반도라고 말하는
X 밴드[웨브 기어]이거나 방독면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X밴드는 아닌 것 같다.
뭔가 둘러매고 있고 그 둘러맨 것을 등 뒤로 돌려져 있는 것이
육안으로도 확인이 된다.
그렇다면 방독면일 텐데 방독면도 아닌 것 같다.
끈이 너무 가늘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보건데 이것은 당시 야전에 임하는 일본군이나
만주군의 장교들이나 하사관들이 휴대하던 도낭(圖囊)이라고
부르는 지도 가방일 가능성이 크다.
체코군의 지도 가방
덮개를 열어 놓은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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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는 MAP CASE라고 부르는 것으로 접은 지도들은 물론 작전도를
그리기 위한 투명지, 자, 연필 등을 잘 정리해서 넣어 놓을 수가 있다.
더해서 업무 노트나 나침판 등을 넣어서 휴대할 수가 있다.
지도 가방은 미군에도 있었지만[거의 캔바스 천으로 만들었다.]
차량화가 잘 되어있는 미군들은 잘 쓰지 않았다.
큰 지도 판을 아예 차에 싣고 다닐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군이나 소련군에서는 야전에 임하는 지휘관들은
필히 지녀야했던 필수품이었다.
이 지도 가방은 숄더 백처럼 어께에 매거나 요대에 차고
다닐 수가 있다.
사진에서 보는바와 같이 체코제 지도 가방은 덮개가
완전히 덮여 있으나 일제 지도 가방은 덥개가 2/3정도만
덮여 있어 표시가 난다.
일본군에 복무한 조선인 병사들은 이 가죽으로 만든 지도 가방을
그 색깔에 때문에 X가방이라고 불렀다.
나는 한국 근대사에서 이 일본군 지도 가방이 나타난 사례를
딱 두 번 보았다.
일제 군용 제품이지만 사용자들은 좌익 계열의 사람들이었다.
한번은 연길에서 나온 항일 열사 이홍광의 기록에서였다.
그는 이 가방에 필사 도구를 넣고 다니다가 새로운 지방에서
작전하게 되면 꼭 지도를 그려서 보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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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광은 만주 일대 유격대 활동에서 김일성보다 선배다.
본명이 이 학규로 고향은 경기도 용인 지역이다.
만주 지역 공산당 활동의 주역인 중국인 양 정우나
주보중과 거의 같은 위치로서 김일성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있었다
김일성이 소련으로 도주해서 소련군의 지시를 받던
88여단에 있었을 때 주보중은 단장이었고 김일성은
그 아래 대대장이었다.
이홍광은 일본 관동군과 만주군, 지방 경찰 토벌대와의
많은 전투를 했었고 전공도 김일성을 압도한다.
그는 1935년 전사했다.
이홍광
몇 년 전 국내 신문에서 중국에서
그의 묘소가 발견 되었다는 보도를 본바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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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두번째 경우는 이태 지음 남부군에서 나온다.
진안군 백운면 백암리에서 머슴살이 하다가 공비 간부가 된
박 판쇠가 항상 흰 모자를 쓰고 일본군의 지도 가방을 메고 다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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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리 출신이라고 해서 지리산 공비 사회에서는 백암 동지로 불렸다.
그는 배움이 없는 처지였는데도 천부적인 리더십으로
지리산의 공비 소부대들을 이끌면서 전쟁이 끝나고도 토벌대에
저항하다가 1955년7월19일 정읍에서 경찰 토벌대에 사살되었다.
그 때 그의 직책은 제 1유격대 지도부장이었다.
10여 년 전 진안 백운면을 방문 한 길에 동네 어른들께 박 판쇠를
정체를 수소문 했지만 아시는 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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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뒤의 배경이 천막으로 추측되고
철모의 위장망, 그리고 지도 가방들로 판단해보면
그가 야전 훈련, 또는 실제 작전 중에 찍은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