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도라!도라!(태평양전쟁) ....2편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11.25 23:05:05
댓글 4조회 2,219추천 0

122762130675565.jpg

 

태평양전쟁의 발발 2

 

플라잉 타이거즈

 

1929년. 미국은 육군통신정보국 SIS(Signal Inteligence Service)를 설립하였는데

그 규모는 보잘것 없었으며 또한 그 존재를 아는 사람도 거의없었다.

이들의 임무는 통신을 감청하고 해독하는 일이었다.

국장인 윌리엄 프리드먼은 제1차대전 중 미국최초의 원시적 정보부대인

MI8의 창설임무를맡은 암호해독의 전설적인물 허버트 야들리에게 발탁되어

정보임무에 몸을 담았던 사람이었다.

자신의 아내도 암호해독에 해박하여 함께일했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그는 다시 자신의 전공인 유전학을공부하고자했다. 

그때 미국전신전화사(AT&T)가 자신들이 개발한 암호해독기를 시장에 내놓기에 앞서

우선 시험삼아 프리드먼에게 이 기계를 한번 해독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해온다.

몇 달 후 프리드먼은 이 암호기계가 만들어내는 모든 내용을 완벽히 해독하였고,

이 사실을 알게된 육군은 그에게 다시 돌아오도록 설득하여

그의 아내와함께 SIS를 설립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다 불행하게도 1929년,

헨리 스팀슨 국무부장관이 감청행위는 비 신사적인 것이라하여

당시 허버트 야들리가 운영하던 통신감청해독반인

블랙 쳄버(black chamber)를 해체시켜버렸다.

그리하여 블랙 쳄버의 모든업무가 SIS로 이관되었다.

육군은 프리드먼이 직접 사람을뽑아 SIS에 쓸 수 있도록하는 권한을 주었기 때문에

그는 뛰어난 수학자들을 모아 미래의 적이될 수 있는 일본과 독일의 암호해독에 들어간다.  

 

그 와중에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게된다.

블랙 쳄버가 해체되자 직장을 잃게되어 궁핍해진 야들리가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써내어 순식간에 베스트셀러로 만들어버렸다.

이 책을 읽어본 일본은 경악하여 독일의 에니그마보다도 더 정교한 암호기를

만들려고하였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타자기 97이라는 이 기계는 아주 난해한

암호문을 만들어냈다. 그러자 프리드먼은 코드명 퍼플이라 명명하여 해독이 극히

어려워진 새로운 일본 암호문과 근 10년 간에걸쳐 펼쳐질 지루한 싸움에착수한다.

 

세월이흘러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프리드먼은 전 직원에게 퍼플제작에만

메달리도록하였다. 그리고 결국 1940년 중반에 일본의 타자기 97과 거의 흡사한

해독기(퍼플)를 발명하였고, 일본의 암호문 90%정도를 해독해내는 엄청난 개가를올린다.

이 암호해독 작업을 코드명 매직작전으로 명명하였다. 

매직작전은 나중에 독일의 소련침공까지도 해독하여 소련에 그 중요한

정보를제공하지만 스탈린이 믿지않아 결국 무방비로 침공당하게되기도한다.

 

122762133198620.jpg
허버트 야들리(Herbert O. Yardley 1889~1958). 

                 그의 베스트셀러 아메리칸 블랙 쳄버

 

122762136915772.jpg
윌리엄 프리드먼(William F. Friedman 1891~1969). 
미국의 암호해독기  SIBAGA. 미군은 ECM으로 부르기도했다.

 

 

 

일본에서는 새 내각이 탄생하여 고노에 후미마로가 수상이되었고

육군대신은 매우호전적이며 면도날이라는 별명을가진  도죠 히데키 중장이 맡았다.

도죠와 마쓰오카 요스케 외무장관이 독일, 이탈리아와 3국동맹을맺자

미 국무장관 코델 헐은 해독된일본의 비밀 통신문들을 바탕으로 일본이

평화보다는 전쟁준비에 더 열중하고 있다는 의심을하게되었다.

또한 일본이 독일에 점령된 프랑스 비시 괴뢰정부에게 일본군의 인도차이나 주둔을

인정하라는 협박을하고 있음도 암호해독을 통해 미국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일본이 1941년 7월에 인도차이나로 진주하자 미국은 일본에게

인도차이나와 중국에서의 철수를 요구하였고, 일본은 당연히 이를 거절하며

오히려 미국의 중국지원을 중단하라 요구하였다.

미국과 일본은 숨 막히는 대치상태에서도 평화를위한 협상의 끈은 놓지 않으려했다.

일본외상은 마쓰오카보다 좀 더 온건한 도요다 데이지로로 교체되어 미국과 협상에나섰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이 제안한 고노에 일본수상과의 회담에 관심을 가졌으나

국무장관 헐은 이에 강력히반대했다. 매직작전에서 얻어진 모든정보들은

일본이 동남아의 더 많은 국가들을 침략할 것이라는 징후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헐은 결코 일본이 침략을 멈추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국 수상 처칠은 루즈벨트에게 절대로 일본에 굴복해서는 안된다고

요구하였고 미 육군과 해군장관도 강경한 태도를 보이도록 루즈벨트와 헐 두사람

모두에게 요구하였다. 거기에다 워싱턴의 여론은 친 중국 로비스트들의

활발한 활동에 힘입어 중국 쪽으로 기울어져있었다.

중국의 장개석총통이 미국에 원조를 요구하여 4500만달러에 해당하는

차관을 얻어간데 이어 루즈벨트 대통령과 하버드대학 동창생이었던

장개석의 처남 송자문이 미국정가의 로비스트로 활동하여 추가로

2500만달러의 원조를 얻어낼 수 있었다.  

 

11월에접어들어 일본군 대선단이 동지나 해에 집결하였으며

아마도 네덜란드 령 동인도제도를 목표로하는 것같다는 첩보가 올라오는등

양국의 긴장상태는 점점 더 불행한 방향으로 이끌려갔다.

평화적인 해결을바라던 루즈벨트는 마침내 태도를 바꾸어 중국과 만주,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이 철수하고 독일, 이탈리아와 맺은 3국동맹을 폐기한다면 대일본 석유수출금지를

포함한 모든 제재를 철회하겠다는 제안을내놓게된다.

 

더 이상 타협의 가능성이없는 강경한 미국의 제안과 영국, 네덜란드의 석유수출금지는 

일본을 불안하게만들었다. 석유자원과 모든공업기반자원이 전혀없는 일본으로서는

지금까지 얻어놓은 것들을 모두 내놓고 여기에서 물러날 것인지 아니면

자력으로 동남아의 천연자원을 얻어낼 것인지 양자택일의 기로에놓였다.
이토록 팽팽히 맞서왔던 미일양국은 전쟁으로까지 치닫게되는 사태를 

원하지는 않았으나 양국간의 전쟁은 이미 중국에서는 진행 중에 있었다.

122762140557835.jpg
송자문

 

중국 국민당 외무장관이며 장개석 총통부인

송미령의 오빠인 송자문은 유능한 로비스트였다.

 

중국은 1940년까지 공군력의 극심한 열세로 일본의 무자비한 폭격에 제대로 대항하지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하자 공군력강화를 꾀하게되었다.

 

이를위해 송자문은 중국공군을 책임지고 있던 군사고문 센놀트와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끈질긴 로비활동을펼쳤다.

그는 미국의 지인들을 교묘히이용하여 미국 조종사를 중국으로 데려가도 좋다는 약속을 루즈벨트에게서 받아내게된다.

 

 

중국 군사고문으로서 공군을 책임지고 있던 클레이어 센놀트는

비밀리에 조종사들을 뽑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미국이 공식적으로 전쟁에 개입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조종사들은

모두 항공기 정비회사인 CAMCO (Central Aircraft Manufacturing Company)의

기술자들로 신분을 위장하게 되어 있었다.

이회사는 항공기구입을 위한 위장된 수입회사였던 것이다.

 

센놀트는 육,해, 해병대 모두에서 110명가량의 조종사들을 선발했으며

아주높은 급료와 일본기 격추에대한 보너스지급이 약속되었다.

그들에게 약속된 한달급료는 초봉이 600달러였으며

당시 승용차 한 대를 살 수 있는금액이었다.

그리고 일본기 1대격추당 500달러의 보너스가 지급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원자들 중엔 그저 전쟁에 참가하기위해 지원한 모험적 전쟁광들이 적지않았다.

이들은 임무를마치거나 혹시 잘못을 저질러 해임당하더라도 다시 본대로 복귀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리고 약 200명의 기술하사관도 모집되었는데 이들은

항공기정비의 마술사로 불릴정도로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플라잉타이거즈 조종사가 필요로하는 그 무엇이든지 만들어내게 된다.

센놀트는 영국에서 정략적으로 100대의 P-40을 구입할 수 있었다.

 

122762143584691.jpg
클레이어 리 센놀트 (Claire Lee Chennault 1893-1958)

 

센놀트. 그는 1917년 미국육군항공대에 입교하여 오랫동안 비행교관으로

근무해왔지만 도무지 진급은 되질 않았다. 그는 육군항공대의 골칫덩이였던 것이다.

1930년대 당시 팽배해있던 전투기 무용론과 폭격기 맹신론에맞서

전투기의 효용성을 강력히주장했던 그였다.

 

폭격기 중시자들은 앞으로는 더 빠르고 그 항속거리가 더 늘어나게되는

신형의 고속폭격기를 전투기로서는 도저히 격추할 수 없게될 것이며,

이렇게 쓸모없게될 전투기 개발보다는 폭격기 개발에 더 투자해야한다는 논리가

팽배해있었다. 이렇게하여 미국은 고성능전투기 개발을 소홀히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센놀트는 언제나 전투기의 근본문제는 1차대전 때부터 쓰여져왔으며

지금도 육군항공대에서 정식교육과목으로 채택하고있는, 마치 개가 자신의 꼬리를

물기위해 빙빙 도는 것과 같은 선회비행전투방식 때문이었다고 반박하고 다녔다.

 

그는 개인위주의 전투보다는 팀을이루어 화력을 집중하면 그 효과가 높을 것이라

주장해왔다. 그는 그 효과를 입증하기위해 다른 조종사 2명과함께 공중곡예의 3인

이라는비행 팀을 구성하여 미국각지에서 여러가지 멋진묘기를 보여 보는이들로 부터 

대단한 박수를받았다. 

센놀트, 루크 윌리엄슨과 빌리 맥도넬 이 세사람은 나선식으로 항공기를 비틀며

하강을하고 다시 공중제비를돌아 횡전하는등 현재의 대표적미국 곡예비행대인

썬더버드가 하는 묘기를 일찌감치 선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항공관계자 대다수가 이미 폭격기로 치우쳐있었고,

육군항공대의 분위기는 그를 시대에 뒤떨어진 고물조종사로 낙인찍은 상태였다.

독불장군이며 쓴소리를 거침없이 해대어 육군항공대에서 차라리 없어져 버렸으면 하고

냉대를받아오던 센놀트는 1937년, 47살의 나이에 대위계급을 끝으로 예편하게된다.

센놀트는 평소 카멜 담배를 즐겨피운 애연가였기에 몇년동안 기관지와 폐가 좋지않아

고생해왔다는 이유로 군대는 센놀트를 전역시켜버렸던 것이다.

실제로 그는 1958년 7월 27일에 폐암으로 죽기는한다.

 

122762146782116.jpg
AVG비행대의 상징이되어버린 뱅골산 날개달린 호랑이               플라잉 타이거즈

 

 

 

센놀트가 군복을벗자 그의 전투기에관한 기술적 명성을 전해들은 중국이

군사고문이되어줄 것을 요청하여 센놀트는 1937년 5월에 중국에 도착하였다.

그의 중국도착을 환영하러 마중나온 사람은 장개석 총통의 부인이었다.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은 훗날 육군인 죠셉 스틸웰 장군과 센놀트사이에서

벌어지게되는 심각한갈등과 대립에서 센놀트에게 많은도움을 주게된다.

 

대위로 전역한 센놀트에게 중국은 대령으로서의 대접과지위를 부여하였다.

막상 중국에 도착한 센놀트는 중국공군의 모습에 너무나 실망하였다.

서류 상에 등재된 항공기수량에 비해 실제 보유하고 있는 항공기는 그 절반도 안되었다.

부패한 관리들이 항공기 구입자금을 착복한 것이었다.

또한 조종사의 질은 엉망이어서 그나마 보유하고 있는 항공기들마저도 온전하지못했다.

중국공군을 제대로된 부대로 만들어볼 결심을 하게된 센놀트는

자신의 모든정열을 중국공군에 쏟아부었다.

 

센놀트가 중국에 부임하고 얼마되지않아 중국과 일본의 격렬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센놀트는 온갖 수단을 총동원하여 중국군을 훈련하여 일본기에 맞서게하였다.

중국군 조종사를 훈련시키고 작전에 투입하는등 어느정도 체계를 잡았으나

일본기에 대적할만한 고성능의 항공기도입이 절실했다.  

이에 장개석 총통이 미국제 항공기구입과 숙련된조종사를 데려오기위한 노력을한 끝에

조종사와 P-40 전투기를 도입하는 결실을 보게된 것이었다.

 

토마호크를도입하고 조종사를 교육하면서 전투준비를 해온 끝에

1941년 12월 첫 주에는 약 60여대의 토마호크가 출격할 수있는 준비를 갖추게되었다.

괴짜조종사들은 아프리카 전선의 영국 비행대인 제112비행대를 본따 상어이빨을

그려넣었으며 날개달린 뱅골 호랑이그림을 그려넣어 플라잉타이거즈로 이름 붙였다.

이그림은 미국화가가 직접제작하여 선물한 것이다.

122762149477745.jpg
장개석 총통부부와 센놀트

122762152550072.jpg
중국공군휘장과 신분증.

격추되더라도 이 신분증을 제시하면 중국인의 도움을받을 수있었다.

 

 

 

센놀트는 조종사들에게 기동력이 우수한 일본기와는 1대1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반드시 2인 1조로 일시에 하강하면서 공격하도록 교육하였다.

센놀트는 저고도형이지만 튼튼한 구조와 강인한 힘을가진 P-40의 장점들을

잘 살려낼 수 있는 방법들을 꾸준히 고안하여 조종사들을 훈련시켰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한 직후, 버마에 주둔한 센놀트의임무는

버마(지금의 미얀마)공로와 랭군으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철도와 교량등을

일본기의 공습에서 보호해야하는 것이었다.

센놀트는 기습에 대비하여 중국의 곤명에 1개의 비행대를 배치시켰다.

 

1941년 12월 20일. 인도차이나의 하노이에서 호위전투기도없이 발진하여

곤명으로 폭격임무를 수행하기위해 비행하던 일본군 폭격기 조종사들은

기수에 상어이빨을 히죽거리며 갑자기 나타난 전투기들의 공격을 받고는 혼비백산했다.

그도그럴 것이 일본군 폭격기 조종사들은 여태까지 실시해온 중국폭격임무에서

자신들을 요격하러날아오는 중국전투기는 거의본 적이 없었던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느때처럼 호위전투기도없이 유유히 비행하다

이런 날벼락을 맞게되었으니 혼이빠질만도했을 것이다.

폭격기는 폭탄을 투기하고 도망치기 시작했으나 플라잉타이거즈가

그냥 보낼리는 만무하여 순식간에 3대가 불탔고 적어도 15명의 일본군을 죽였다.

1대는 하노이를 향해 황망히 도주하였으며 플라잉타이거즈는 모두 기지로 귀환했다.

그 중 한대가 연료가 바닥나 동체착륙을했다.

 

이사건은 태평양전쟁 중 첫 번 째 승전보였으며 불패를 자랑하던 일본기의

첫 패배이기도 하였다.

미국 유력 시사주간지들은 센놀트와 American Volunteer Group (AVG)인

플라잉 타이거즈에대해 보도하여 모든이들에게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전달해주었다.

일본은 미국의 깡패들이 중국에서 조종사로 활동한다며 비난하고

만약 잡히면 게릴라의 죄명으로서 총살하겠다고말했다.

 

122762155754089.jpg

에이스 로버트 닐(Robert H. Neale)탑승기. AVG에서 13대를 격추하고

해산된 후에도 여러대의 일본기를 더 격추시킨다.    122762158587064.jpg

보잉턴(G. 'pappy'  Boyington)이 자신의 토마호크에 탑승한 모습.
 AVG에서 활약하다 태평양전선에서 명성을떨친 VMF-214 검은양 비행대의

보잉턴도 6대의 비공식격추기록을가지고 있다. 

 

122762164830737.jpg
 제 14공군소속 조종사들과 센놀트

 

 

센놀트는 자신의 부대를 곤명에 집결시키려 했으나 장개석 총통은

버마공로를 통하여 모든 전쟁물자가 전달되었기 때문에 이를위해 랭군을

방어하는 영국군에게 플라잉 타이거즈의 제3비행대를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8명의 조종사가 18대의 토마호크와함께 랭군에 배치되었는데

여기서 그들의 기량을 최대로발휘하여 12월 20일의 일본기격추가

결코 우연이 아님을 증명해주게된다.

 

12월 23일부터 25일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일본군이 160대가 넘는 항공기로 랭군을공격하자

영국군 측에서도 요격을위해 발진하였다.

플라잉 타이거즈는 9대가 발진하여 20대가넘는 일본기를 격추시켰다.

그들은 17대의 추락하는 일본기를 보았으며 낙하산으로

탈출하는 자가 약14명이었다고 보고하였다. 

플라잉 타이거즈는 2명이죽고 3대가 격추당했다.

 

다시 일본군이 약200대가량의 항공기로 랭군을 폭격하자

플라잉 타이거즈는 아군의 피해없이 일본기 18대를 격추시킨다.

이전투에서 일본군은 90명이 전사했는데 그 대부분이 폭격기승무원이었다.

또한 유명한 불패의 일본군 비행대인 64항공대 소속기가 플라잉 타이거즈에게서

첫 번 째 재앙을 크리스마스선물로 받았던 것이다. 

그들은 랜딩기어가 접혀있는 항공기를 격추하고는 기지로돌아와

2대의 제로기를 격추하였다고 보고했으나 사실은 나카지마 Ki-43 하야부사였다

 

 

122762167757021.jpg

플라잉 타이거즈는 조종사들 대부분이 말썽꾸러기와 괴짜였다.

군복도 제대로 착용하지 않고 부대규율도 엉망으로 만들었으며

심지어 호랑이사냥을 위해 버마까지 간 사람도있었다.

근무가 없는날에는 술집 등에서 한껏 마시고 놀았으나

전투에 돌입하면 그야말로 최강의 전투기 조종사가되는 것이었다.

 

정비사들은 공기저항을 줄이려고 동체에 왁스를 발라 속도를 올리기도했으며

폭탄투하 장치도 즉석에서 만들어내는등 열악한 보급사정 속에서도

최상의 상태로 기체를 유지시켜주었다.

그들은 일본기의 기습 속에서도 온갖 아이디어를 동원하여

조종사들이 하늘을 날 수 있도록해주었다.

총탄에 맞은 연료탱크는 껌으로 막아 응급조치를 취했다.

플라잉 타이거즈는 적의 눈을 속이기위해 나무로 만든 전투기를 만들었으며

무선 조작과 항공기의 번호를 바꾸는 식으로 일본군을 속였다.

때문에 일본군은 플라잉 타이거즈가 보유하고 있는 항공기 수를

200대이상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122762170323700.jpg

1942년 7월, 플라잉 타이거즈가 해산되어 정규부대로 편입되기까지

약 7개월정도의 전투에서 296대와 153대의 공식, 또는 비공식적인 격추기록을 가지며

또 약 1000명의 일본군을 전사시키고 자신들은 4명의 조종사를 잃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미국이 정식으로 참전했기때문에 정규항공대를 운용하기위해

그 지휘관인 센놀트는 현역으로 복귀하여 준장계급을 달게되었다.

 

센놀트는 자신의 부대인 제14항공대를 마음대로 지휘하게되었다 생각했으나

워싱턴에서는 예전의 그의 좋지못한 평판때문에

그를 제10공군 사령부 휘하에 배속시켰다.

사령관은 폭격기중시론 때문에 자신과 옥신각신하며 다퉜던상관인 클레이튼 비젤이었다.

전쟁내내 그는 버마, 인도, 중국전선 총사령관인 스틸웰장군과 다투게된다.

조종사들은 정규부대가 편성되자 각기자신의 부대또는 아시아에남아

수송기조종사로 활약하였으며 그 중 5명은 센놀트와함께했다.

전쟁초기부터 일본군에 밀리기만하던 연합군에게 플라잉 타이거즈가

가져다준 대승리의 심리적가치는 이루 말할 수없이 큰 것이었다.

 

122762172888800.jpg

 

 

커티스 P-40

122762174999968.jpg

상어 아가리등 어떠한 노즈아트도 잘 어울렸던 커티스 P-40E      (Lou Drendel)

 

 

 

커티스 P-40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고성능 전투기가 못될 운명을 갖고 탄생하게되었다.

미국은 본토방어에 있어 적국에의한 공중으로부터의 공격가능성을 배제하였기

때문에 바다를 통한 육상으로의 공격에대비한 항공기를 필요로하였다.

그래서 고공성능보다는 저공에서의 기동성과

육상 및 해상에서의 공격에대비한  튼튼한 골격을 갖추면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투기 대 전투기의 공중전을 염두에 두지 않은

공격기의 성격이 짙은 것이라할 수 있겠다.

 

그래서 P-40은 1930년대에걸쳐 팽배했던 폭격기 중시분위기에서

고고도의 고성능 전투기개발을 등한시한 결과로 생겨난 항공기였다.

특히 P-40 원형이 개발되어지는 해인 1937년 당시에는 더 심해져서

항공관련 고급장교들의 폭격기 중시론이 지배적이었다.

 

122762178775012.jpg

육군명칭 P-36 Hwak (커티스 명칭  호크 75-0)

영국은 가볍고 재빠른 P-36A를 순종혈통의 경주마에 비유했다

P-40의 베이스가되는 커티스 P-36은 소형 전투기로서 주로 해외에많이수출되었다.

위의 기체는 아르헨티나 공군에 판매하기위한 전시용 기체이며

875마력 GR-1820-G3 공냉식엔진을 탑재하고 랜딩기어는 고정식이었다.

아르헨티나, 중국(75H), 태국(75M)등의 규모가작은 공군을보유한 국가들에 수출되었다

 

 

 

P-40은 P-36에 앨리슨 빅 V-1710-19 수냉식 직렬엔진을 탑재한 XP-37로부터 시작된다.

이 기체는 전기식 터보과급기를 사용하였으며 조종석이 먼 후방에 위치한 특징을가졌다.

그 후 13대의 테스트용기체인 YP-37이 제작되었고

이 후 원형기가되는 XP-40이제작되었다.

무장은 기수위에 2정의 50구경(12.7mm)기관총과 주익에 30구경(7.62mm)기관총을

각 1정 씩 장착하였으며 오일 냉각기는 기수 하부에 설치되었다.

너무 뒤에 위치했던 조종석은 다시 제자리를 찾아왔으며

주익아래에는 20파운드 폭탄을 장착할 수 있게했다.  

 

테스트파일럿 에드워드 엘리엇에의해 XP-40의 첫 비행이

1938년 10월 14일에 이루어졌는데 최고속도가 480km/h에 못 미쳐

기대이하의 성능을보이자 다시 개량작업에 들어간다.

다시 행해진 테스트비행에서 XP-40은 고도 12200피트에서

최고속도가 550km/h정도되었는데 이 속도는 독일의 BF 109E보다 느렸으며

영국 호커 허리케인보다는 조금 빠른 것이었다.

그러나 더 높은 고도에 도달하면 엔진이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지만 

별 문제될 게없었다. 어차피 저 고도용으로 개발돠었기 때문이었다.

 

122762181765670.jpg

여러항공기 제작사들이 각자의 시제기종으로

(록히드 : XP-38, 벨 : XP-39,  

세버스키(리퍼브릭) : XP-41(AP-2)와 XP-42(AP-4),  

커티스 : H75R, XP-37, XP-42)

치열한 경합을 겨루는 중간에 XP-40이 끼어있었는데

이 기종은 P-39를제외한 다른 항공기의 성능에 못미치는 

저고도형으로 제작되었으나 가격이 싸고 이미 그 성능이 증명된 기종을

베이스로하였기 때문에 대량생산에 유리했다.

또한 전쟁의 기운이 감돌자 미군은 안정적인 기체를 선택하려 하여

그 결과로 524대의 대량발주를(발주금액 1천2백87만 2천8백98달러) 

1939년 4월 26일에 내었다

 

 

122762184793336.jpg
P-40

 

 

그리하여 생산되는 P-40( 커티스 모델명 81)은

D엘리슨 1040마력 V-1710-33(C-15)엔진을 탑재한 것외에는

XP-40과 다를게 거의없었다.

 

주익의 바퀴가 완전히 뒤로젖혀져 동체내에 수납되었고

뒷 바퀴또한 동체내에 수납되는 형식이었다.

P-40양산형 기체(No 39-156)의 첫 비행이 1940년 4월 4일에 있게된다.

이 때 속도가 15000피트 상공에서 570km/h를 넘었으며

15000피트 상공까지 도달하는데는 5분 20초가 걸렸다.

 

양산된기체들은 1940년 6월부터 부대에 배치되게된다.

초도분량인 200대의 P-40의 첫 번 째 수령부대인 버지니아의 제33, 35비행대와

제8추적비행단소속 제36추적비행대를 시작으로해서 P-39를 시험하던 비행대를

포함하여 하와이, 파나마까지 고루 배치되어진다.

 

122762187184973.jpg
P-36, B-17 등과함께 주기된 하와이주둔 제33추적비행대 소속 P-40B

 

 

 

 

 

3편에서 계속.......

 

 

 

 

 

 

 

 


 

 

 

 

 

 

 

슈퍼스탈리온의 최근 게시물

밀리터리 인기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