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제3 보병사단

dugue29 작성일 09.03.02 23: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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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아더의 정중한 항복 권고 방송 및 전단지 살포
  북으로 패주하거나 지리산으로 숨어들어간 북한군의 참혹한 실태
  중국의 경고, 마침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는 한국군, 국군의 날 제정!!
  쾌조의 진격을 보이는 한국군과 UN군, 중국 인민해방군의 은밀한 잠입으로 인한 통한의 후퇴
  국방력 강화와 정예 강군 양성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하는 1950년의 한국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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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전황을 역전시킨 대작전인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 직후 포로로 잡힌 북한군 병사들이 파괴된 T-34/85 전차의 잔해를 통과하고 있다.
  개전 당시 전차를 1대도 보유하지 못한 한국군을 상대로 충격력을 발휘해 전장을 낙동강까지 밀려내려가게 만들었던 T-34/85는 점차적으로 증원되는 미군 전차부대와 대전차 화기 앞에 하나 둘 격파되는 신세가 되었고 약 242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던 북한군 기갑부대는 동년 09월까지 약 239대라는 막대한 양의 전차를 손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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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최초로 38도선을 돌파한 제3 보병사단 "백골부대"의 상징인 백골 조형의 모습
  《 패주하는 북한군, 맥아더 원수의 정중한 항복권고 》
 
1950년 09월 28일, 서울을 탈환함으로써 자신감을 갖게된 맥아더 원수는 10월 01일 정오, 북한군에 대한 정중한 항복권고 성명을 발표했다.
  "귀측의 군대는 사실상 전쟁수행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전 전선에 걸쳐 극심한 붕괴를 일으키고 있다. 본인은 UN군 총사령관으로서 귀측 사령부와 예하 부대에 대하여 즉시 무기를 버리고 투항할 것을 요구한다. 본인은 이 의미없는 전쟁으로 더 이상의 인명과 재산피해를 막기 위해 귀측이 이 기회에 신속하게 결단을 내려줄 것을 기대한다"
  이 성명과 동시에 미리 인쇄된 약 250만장에 달하는 성명문이 38도선 일대를 기점으로 평양, 개성 등 북한 주요 지역에 살포되었다( 물론 공산권의 정보 통제가 워낙 엄격하다 보니 제대로 전달될 가능성은 제로였지만 )
  성명문의 내용만 봐도 맥아더 원수가 얼마나 자신감에 가득차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그만큼 북한군이 전 전선에 걸쳐 패주를 거듭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해준 셈인데 아니나 다를까 서울이 탈환되던 그 시각, 한반도에서 UN군이 동원가능한 병력은 지상군만 해도 미군 125,000명+한국군 101,000명+영국군 1,700명 등을 포함해 총 23만명에 달했다( 병참부대 12만명 제외 ) 12360045008482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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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전선의 붕괴와 인천 상륙작전 성공 이후 북진이 시작되면서 점차적으로 북한군의 손실은 급증했고 결국 북한으로 무사히 복귀한 병력은 겨우 25,000여명에 불과했다.
  전차만 해도 미군이 수송해온 1,326대를 제외하더라도 북한군에 비해 월등했고 야포나 항공전력은 더욱 말할 것이 없었다.
  공군의 경우 미 극동공군 36,000명+미 극동군 59,000명으로 총병력 약 44만명이라는 대군이었다.
  문제는 맥아더 원수가 이처럼 대규모 병력을 지휘해본 경험이 없다는 점
  하지만 자세한 상황이야 어찌되었던 1950년 07월 초부터 09월 말에 이르기까지 UN군의 피해는 경미한 반면 북한군은 이 기간 동안 지옥에 떨어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만큼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 지리멸렬 패주하는 북한군의 참혹한 신세 》
 
  당시 한반도 남부에 전개된 북한군의 상황은 절망 그 자체였다.
  우선 제1 군단 소속으로 전라도를 무혈 석권하고 "쌩쌩한" 건재를 유지한 채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완벽하게 쪽박을 찬 제6 보병사단은 사실상 궤멸당해 버렸고 약 2천여명의 패잔병들은 지리산으로 숨어들어가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사실상 제105 기갑여단을 포함한 개전 초반 승승장구했던 역전의 부대들이 살아서 38선을 넘어오지 못한 것으로 이는 북한군에게 내려진 사형선고 그 자체였다. 12360045115122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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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09월에 이르면 그나마 보유하고 있던 전차 전력을 완전히 손실하다시피한 북한군에 비해 UN군이 압도적으로 전차전력의 우위를 점했다.
  특히 M4A3E8 셔먼은 총 689대가 투입되어 M26 퍼싱, M46 패튼 못지 않은 활약을 펼쳤다.
  북한군 제7 보병사단의 경우 사단장 박성식 소장이 전사하고 패잔병 1천여명이 지리산으로 은거해 사실상 궤멸 위기에 처한 상태로 일부 인원들이 38도선을 향해 패주 중이었다.
  제2 보병사단과 제4 보병사단은 양 사단 합계 총 200명의 인원이 38도선에 도달하는데 성공했는데( 2개 사단 중 겨우 200명만이 살아온 것이다 ) 전차를 포함한 중장비는 모두 손실한채 전원이 경무장에 누더기가 다된 전투복을 착용한 유랑민의 몰골이었다.
  제9 보병사단과 제10 보병사단은 포위되어 완전히 전멸해버렸고 앞서 언급한대로 제105 기갑여단 및 추가로 투입되었던 기갑부대 중 38도선 이북으로 무사히 퇴각한 T-34/85 전차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제2 군단은 조금 사정이 좋은 편이라 제3 보병사단의 잔여 병력 1,000명이 철원 방면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했지만 제1 보병사단과 제13 보병사단은 사실상 궤멸되었고 특히 제13 보병사단의 경우 참모장 이학구 대좌를 포함한 연대장 3명 전원과 예하의 대대장, 군의부장 등 고위장교들이 투항했다.
  제8 보병사단과 제15 보병사단은 각각 1천 여명의 잔여병력이 무사히 38도선을 넘어 귀환하는데 성공했지만 제12 보병사단은 너무나도 피해가 엄청나 결국 타 사단의 낙오된 패잔병들을 배속시켜 간신히 3,500여명의 병력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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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모하게 공세를 감행했다가 격파당한 제4 보병사단 예속 107 전차연대의 T-34/85 전차 잔해 부근에서 경계 임무를 수행 중인 M26 퍼싱 전차들
  한국전쟁 초반 M24 채피 경전차들의 희생으로 번 시간을 이용해 한반도에 투입된 M26 퍼싱 전차들은 중전차답게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해냈고 북진의 선봉자리를 M46 패튼에게 내주기 전까지 맹활약했다.
  통계를 내자면 북한군이 1950년 09월 초에 보유하고 있던 병력 98,000명 중 1만명 이상이 전사하고 13,000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지리산으로 숨어들어가는 등 게릴라 집단으로 변질한 이들이 약 2만여명, 남한지역에서 강제 징집한 병력 중 패잔병과 탈영병만 무려 4만여명에 이르게 되어 간신히 북한으로 복귀한 병력은 겨우 25,000명에 불과한 셈이다.
  이로써 북한은 공세의 실패는 둘째치고 투입되었던 전력의 90%에 가까운 손실을 입어 차후에 감행될 한국군과 UN군의 북진을 저지하지 못하고 자멸하게될 위기에 처했다.
  한편 UN군은 잔치집 분위기였든데 이 기간 중 노획한 북한군의 무기들만 봐도 당장 가동가능한 T-34/85 전차가 11대, Su-76 자주포 4문, 각종 야포 66문, 박격포 50문, 대전차포 22문, 탄약 463톤에 이르러 사실상 북한군이 중화기의 90% 이상을 손실하고 '맨몸'으로 퇴각했다는 추측이 가능했다. 123600454649833.jpg
 
◀ 북진하는 와중에 어린이들과 조우한 오스트레일리아군 병사
  간식거리가 넉넉치 않던 병사지만 아무래도 아이들에 대한 온정은 만국공통인 듯
  물론 맥아더 원수가 북한군에게 항복권고 성명을 발표할 당시 북한군의 참혹한 사정을 알 리는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북한군이 방어전구를 동부와 서부로 나누고, 신속하게 신편과 재편성과 사단들 중 개성 방면에 3개 사단을 집중배치했지만 이 전력이 당시 북한군 총 전력의 50%라는 점이었으며 그나마 대부분이 알보병으로 이뤄진 빈약한 사단들이었다는 점이다.
  《 북한을 압박하기 시작하는 UN군, 과감한 원산 상륙작전 준비!! 》
  맥아더 원수는 항복권고 방송을 마치기가 무섭게 제10 군단장 아몬드 소장에게 원산 상륙작전 준비를 지시했다.
  작전의 복안은 인천 상륙작전이 제8군을 낙동강 전선에서 북상시키는 한편 제10 군단을 인천에 상륙시켜 서울을 탈환한 전과를 거뒀던 점을 참조해 다시금 제8군을 북진시키고 제10 군단을 원산에 상륙시켜 서진하게 함으로써 평양을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맥아더 원수는 제10 군단에게 발송하는 명령서에 서명하면서 걱정스러워하는 눈빛이 역력한 참모장 히키 소장에게 말했다.
 
"반드시 일시에 점령해야 하네. 반드시 일시야!! 아몬드 소장에게 분명하게 전달하게"
 
그 시각 제10 군단장 아몬드 소장 역시 제1 해병사단에게 원산 상륙작전에 대한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앞으로 3일 후인 10월 03일까지 모든 준비가 완료되기를 바란다. 아! 상륙 예정일은 10월 15일이다"
 
맥아더 원수는 09월 29일, 서울 환도식이 종료된 후 원산 상륙을 10월 20일에 감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제1 해병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난리가 났다.
  "군단장님, 저는 제 부하들에게 평양에 첫 발을 내딛는 영광을 안겨주고 싶습니다. 만약 이대로 5일이 지연된다면 8군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는 격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런 스미스 소장의 우려는 얼마 가지 않아 환희로 돌아왔다.
  그 이유는 제8군의 북진 개시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북진 개시일이 10월 10일로 변경됨에 따라 제10 군단의 원산 상륙작전 개시일이 5일 앞당겨졌기 때문이다.
 
《 백골부대의 38도선 돌파와 저우언라이의 경고 》
  동시에 제3 보병사단 "백골부대"( 실제 백골부대가 된 것은 1950년 12월 15일 이후, 수도 기계화보병사단 예하부대였던 제18 보병연대가 배속된 이후였지만 독자분들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처음부터 백골부대로 통일했음을 알려드립니다 )는 10월 01일, 오전 11시 45분 제23 보병연대 예하 3대대( 대대장 : 허형순 소령 )를 비롯한 선두 제대가 38도선을 돌파하여 북진하고 있었다. 123600481582317.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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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진의 선봉으로 UN군 최초로 38도선을 돌파하여 북진하는데 성공한 제3 보병사단 "백골부대"의 마크와 38도선 돌파 기념 팻말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순간이란 말인가?
  김종순 대령의 제3 보병사단 23 보병연대는 북한군의 저항을 격퇴하며 양양을 점령했고 북진을 지속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UN군과 한국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 안타까운 일...
  중국의 저우언라이 수상은 10월 03일, 베이징 주재 인도 대사에게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전했다.
 
"중국은 한국군만이 독자적으로 39도선을 넘을 경우 개입하지 않겠다. 그러나, UN군이 38도선을 넘을 경우 결코 이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저우언라이 수상의 발언은 신속하게 인도, 영국을 거쳐 워싱턴에 전해졌고 도쿄의 맥아더 원수 총사령부에도 통보되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와 맥아더 원수는 "어디 한번 참전해보지 그래?"정도로 중국의 참전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부산 교두보에서 미군이 수세에 몰렸을 때와 인천 상륙작전으로 인해 미군 병력이 분산되어 사실상 전략적으로 매우 유리한 시점이었음에도 중국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는 것이 오판의 단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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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4A3E8 셔먼 앞에서 포즈를 취한 미군 병사들 123600456923432.jpg
  이 시기는 한국전쟁에 있어 미군에게 사기충천과 동시에 자신감으로 충만한 기간이기도 하다
  중국의 이와 같은 태도에 확신을 가진 맥아더 원수는 10월 02일, 정식으로 북진을 명령하는 UN군 명령 제2호를 발동했다.
  작전의 복안은 이미 결정이 되어있는 상태라 예정대로 제8군과 제10 군단은 평양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UN군의 진출 한계선은 정주, 군우리, 영원, 함흥을 잇는 이른바 맥아더 라인에 국한되었다.
  이 선은 압록강으로부터 90~170km 남쪽으로 북위 39도 40분에서 50분 사이였다.
  워커 중장은 제8군에, 아몬드 소장은 제10 군단에 각각 북진과 원산 상륙 준비명령을 하달했다.
  마침내 10월 04일, 아몬드 소장은 제10 군단의 원산 상륙 이후 미 제7 보병사단을 평양으로 진격시키는 작전 계획을 설명하는 한편 05일에는 수원에 주둔하고 있던 제7 보병사단을 신속하게 부산으로 남하시켰다.
  한편 제8군 역시 분주해져 제9 군단은 부산 - 서울의 수송로 경비를 담당하고 제1 기병사단과 제24 보병사단, 영국군 제27 보병여단은 대구에서 서울로 공수되어 임진강 서안으로 이동해 여기에서 제1 기병사단이 북상을 시작했다.
  북상한 제1 기병사단 예하의 제5 기병연대는 문산 부근에서 임진강을 도하해 북안에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 백골부대와 맹호부대의 쾌속 진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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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 보병사단에 이어 38도선을 돌파한 수도사단 "맹호부대" 123600457798202.jpg
  훗날 베트남에 파병되어 국위를 과시했고 수도 기계화 보병사단으로 개편되어 현재 K1A1 전차로 전환되고 있는 역전의 부대다
 
38도선을 최초로 돌파한 제3 보병사단 "백골부대"는 양양을 거쳐 진격을 계속했고, 뒤를 이어 수도사단( 훗날의 수도 기계화보병사단 ) "맹호부대"도 38도선을 돌파했다.
  다만, 진격은 제3 보병사단이 담당하고 수도사단은 뒤에 남은 북한군 잔당을 소탕하는 형태라 수도사단 병사들에게는 불만이 누적되었지만 제3 보병사단 역시 그렇게 진격이 쉬운 것이 아니었다.
  제3 보병사단 "백골부대"는 북한군 제5 보병사단의 저항에 봉착했고 향후 점령할 목표인 금강산 지구의 경우 전면에 수개소가 넘는 토치카와 진지들이 구축되어 있었다.
  그러자 제3 보병사단은 제23 보병연대와 제26 보병연대( 훗날 수도사단으로 예속 변경 )를 교차 투입하며 전진했고 너무 강력한 방어진지는 우회하는 방식으로 진격을 계속했다.
  그 결과 하루 평균 25km라는 쾌속 진격을 이룩할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병사들의 전투화는 밑창이 빠지고 수면부족으로 양눈이 붉게 충혈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어찌되었든 제3 보병사단과 수도사단은 10월 2일, 양양에 사단 사령부를 설치했고 제3 보병사단의 선두 제대는 10월 5일, 통천을 공략했다.
  동시에 중부 산악지대에서는 제2 군단의 선두부대인 제6 보병사단 "청성부대"가 38도선을 돌파했다.
  이에 따라 육군 참모총장 정일권 소장은 10월 07일 다음과 같은 육군본부 훈령 제86호 "북한 지역내에서의 국군 행동수칙"을 발령했다.
 
1. 북한 지역의 민간인은 적이 아니다. 해방된 우리의 형제 동포다.
  2. 장래 한국 국민이 될 이들의 권리, 사적의지, 공적 소유권은 존중되어야 한다.
  3. 국군은 북한 지역 민간인의 수호자이며 정복자가 아니다.
  4. 국군은 민주주의 국가의 군대이며 국민의 군대다. 국민을 강압하는 군대가 아니다. 국민들에게 신뢰를 받을 수 있는 행동을 해야한다.
  5. 국군 전장병은 민주주의의 사도들이다. 모든 장병은 훌륭한 행동과 친절함으로 민주주의 원칙이 공산주의 독재 하의 규율보다 우월함을 보여줘야 한다.
  이 내용은 사실상 전면적인 승리를 전제로 한 훈시로 당시 국군이 얼마나 전황을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 UN 결의안 채택, 한국군의 쾌속 북진, 중국의 경고 》
   
한국군이 38도선을 연이어 돌파하던 그 시각 UN회의는 찬성 47 : 반대 5, 기권 8의 압도적인 표차로 한국에서의 평화통일에 대한 8개국 의결안을 채택했다. 123600464254826.jpg
  결의는 바로 한국 통일정부의 수립을 요청하는 것으로 제2항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었다.
 
"UN군은 한국 통일정부 수립에 필요한 기간을 넘어서 한국의 어떠한 지역에도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이 규정은 사실상 UN군의 38도선 돌파를 승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일선에서는 선언문 자체가 UN군이 한국통일에 이를 때까지 한반도 어디에서든 작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로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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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에 이어 UN군마저 북진을 기세를 보이자 중국의 수상 저우언라이는 중국 주재 인도 대사를 통해 개입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 당시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제1 군단에 북상을 개시하도록 명령했지만 38도선 돌파만큼은 별도의 지시가 있을 것이라고 주지한 상태였는데 UN 결의안 채택 소식을 접하자 즉시 제1 군단장 밀번 소장에게 통보했다.
 
"즉각 공격준비가 완료되는 대로 38도선을 넘어 진격하라!!"
 
이 명령이 하달된 시각은 오후 05시 15분 경으로 당시 제1 기병사단 정찰중대가 38도선을 넘었다가 사단장 케인 소장의 퇴각 명령으로 복귀한 상태였다.
  제1 기병사단장 케인 소장은 부산 - 영등포 철도 구간이 아직 개통되지 않아 북진에 필요한 물자를 충분히 보급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북진에 회의적이었고 군단장인 밀번 소장도 이에 동의했다.
  "철도 개통은 앞으로 3~4일은 소요될 것이니 결국 남은 것은 시간 문제로군"
 
미군이 물자 보급 문제로 고심할 동안 10월 08일, 한국군 제6 보병사단 "청성부대"는 화천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12360046496838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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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41 155mm 자주포가 포격을 감행하고 있다.
  당시 이러한 기동 화기가 부족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북한군이나 중국 인민해방군은 제대로된 자주포를 보유하지 못했고 휴전 이후 대대적으로 122mm와 152mm 자주포의 생산과 배치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국군의 쾌속 진격으로 북한이 궁지에 몰리자 중국은 10월 08일, UN 8개국 결의안에 대해 경고성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군의 북진은 내전이기 때문에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북한이 외국군에 의해 침공을 받게 된다면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 인민은 평화를 사랑하며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행동이라도 감행할 것이다!"
 
동시에 중국 인민해방군도 행동을 개시해 약 9~18개 사단이 한중 국경지대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또한 김일성 역시 전 북한군과 주민들에게 철저한 항전명령을 평양방송을 통해 타전했다.
  그렇지만 이런 조치가 북진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 한국군 제3 보병사단과 수도사단의 원산 점령!! 진격하는 UN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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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26 퍼싱 전차에 가득 올라탄 보병들
 당시 중장갑의 퍼싱 전차와 패튼은 치열한 적의 사격으로부터 보병들을 보호해주는 든든한 수호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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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0월 09일, 맥아더 원수는 정식으로 북진 명령을 하달했다. 
당시 제1 기병사단은 10월 08일 북진을 개시한 상태였고 제1 해병사단은 인천에서 승선을 완료한 상태다.
  그러나 10월 11일 동부전선의 한국군 제6 보병사단 "청성부대"는 김화를 점령하고 미 제1 해병사단의 목표였던 원산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10월 11일에는 평강으로 진격했고 제3 보병사단 "백골부대"와 수도사단 "맹호부대"가 원산을 점령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한국군의 원산 점령으로 원산 상륙작전의 목적은 사실상 유명무실화되었고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상륙작전을 반대하는 한편 상륙작전에 투입될 제1 해병사단과 제10 군단을 평양 공략 전력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워커 중장은 한국군 제1 군단장 김백일 준장의 손을 잡으며 원산 점령의 공을 치하했다.
  "이것은 육군의 승리 그 자체다. 우리 육군이 이뤄낸 쾌거다!!"
 
워커 중장은 단순히 치하 외에도 군량미 20톤을 포함한 보급물자 130톤을 제1 군단에게 공급했다.
  한편 서부전선의 제1 기병사단은 김천 지역으로 집결 중인 것으로 추정되는 북한군 주력부대를 포위하기 위해 제8 기병연대를 정면에 배치하는 한편 제5 기병연대와 영국군 제27 보병여단을 우익에 배치하고 제7 기병연대를 좌익에 배치하면서 진격했다.
  제8 기병연대가 북한군과 조우하기 전에 제5 기병연대가 북에서, 영국군 제27 보병여단이 동에서, 제7 기병연대는 서쪽에서 북한군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하는 문자 그대로 전술교리에서 강조하는 포위 섬멸전의 정석을 보여주는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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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진을 거듭하면서 낙동강과 인천, 서울 방어전에 올인하다시피했던 북한군의 전력은 급격히 감소해 휴전 시까지 과거와 같은 수준의 전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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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에게 평양 입성의 선봉을 빼앗겨서는 안된다!!"
  열악한 조건 하에서도 충천한 사기로 쾌속 진격을 시작한 제1 보병사단 "전진부대"의 트럭들이 평양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특히 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평양 출신이었기에 더욱 미군에게 최초 입성의 자리를 빼앗길 수 없는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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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시에 한국군 제1 보병사단 "전진부대"는 백선엽 준장의 요청에 의해 북진 명령을 받았지만 준비가 지연되어 10월 11일이 되서야 고랑포 부근에서 38도선을 돌파해 북진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출발은 늦었어도 사기가 충천한 제1 보병사단 "전진부대"의 진격은 신속했고 야간 행군까지 감행하면서 10월 12일 저녁에 구산리 부근에 도착했다.
  그러자 제5 기병연대장 크롬베츠 대령이 백선엽 준장을 방문해 김천에서 북한군의 포위 공격 작전 수행을 위해 제5 기병연대를 먼저 진격시키자고 요청했다.
  이건 상당히 웃기는 요청이었는데 제5 기병연대는 제1 보병사단보다 2일이나 먼저 출발한 주제에 주변이 산악지대라 기계화된 자신들의 진격속도가 너무 느리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백선엽 준장은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대령, 그렇다면 차라리 트럭보다는 걷는 것이 빠릅니다"
 
결국 백선엽 준장은 제5 기병연대로부터 M46 패튼 전차 1개 중대( 약 21대 )를 배속받는 조건으로 제5 기병연대에게 진격로를 양보했지만 제멋대로 작전을 진행하는 미군에 불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어쩔 수 없었다.
  백선엽 준장은 제5 기병연대의 최후미 대열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자 배속받은 M46 패튼 전차에 올라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전진하라!! 평양을 목전에 둔 여기서 멈추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알겠는가?"
 
이처럼 한국전쟁의 첫 해, UN군과 한국군은 38도선 돌파와 더불어 쾌속의 진격으로 북한을 궁지에 몰아넣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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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중국 인민해방군의 개입과 통한의 1.4 후퇴, 서울 함락, 춘계 대공세, 전쟁 말기의 고지전, 휴전으로 이어지는 격렬한 전투를 지속적으로 치렀지만 이 시기만큼은 쾌조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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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 보병사단 "전진부대"와 미군이 평양을 점령하기 위해 진격하고 있을 그 시각, 중국 인민해방군 역시 4개군 병력을 은밀하게 북한으로 침투시키고 있었다.
  워낙 은밀한 기동으로 인해 워싱턴과 도쿄조차 눈치채지 못했고 결국 평양을 점령하고 북진해 압록강에 이르렀던 한국군과 UN군은 산악지대와 인해전술을 이용해 공세를 감행한 중국 인민해방군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통한의 1.4 후퇴를 해야했다.
  사진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길잡이 역을 수행하고 있는 북한 주민의 모습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불완전한 전력과 시행착오의 거듭이라는 난제를 극복하고 월등한 연합군을 격파하고 프랑스 전역을 석권한 독일의 전격전에 비할 수 있는 위대한 군사적 성과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러나 미군이 쾌속의 진격을 개시하던 그 시각, 펑더화이( 마오쩌둥은 초기 린뱌오를 총사령관에 임명하려 했으나 그가 건강상을 이유로 거절하는 통에 펑더화이가 임명되었다 )가 이끄는 중국 인민해방군 제38, 39, 40, 42군은 13~14일에 걸쳐 압록강을 도하해 북한 지역으로 잠입하고 있었다.
  워싱턴, 도쿄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잠입이었고 결국 이것이 중국 인민해방군의 공식적인 한국전쟁 개입이었다.
  결국 한국전쟁의 방향은 다시금 혼전으로 돌아간 셈이었고 우리는 북한을 붕괴시키고 통일정부를 수립할 수 있던 기회를 영원히 상실하고 현재의 휴전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여하튼 이 전역사를 소개하면서 60년 전, 38도선을 최초로 돌파했던 제3 보병사단 "백골부대"의 성과와 완전히 궤멸될 위기에 놓였다가 인민해방군의 개입으로 위기를 모면한 북한 정권의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며 국방력 강화와 정예 강군 양성의 중요성을 다시금 고뇌해 본다.
 
참고 문헌 : 12360047041967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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