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은 여기서 멈춘다 (The buck stops here.)

행동반경1m 작성일 09.05.07 21:4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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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4일 늦게 트루먼은 합동참모본부의 명령을 승인했다. "제20공군은 1945년 8월 3일 이후 관측폭격이 가능한 맑은 날씨가 되는 대로 첫 번째 특수폭탄을 투하한다. 그 목표물은 히로시마,고쿠라,니가타,나가사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합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가 투루먼 대통령에 의해 계획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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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격 바로 전의 모습이다. 사진에서도 긴장감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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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하 계획에 대한 브리핑을 듣고 있는 승무원들


 

1945년 8월 6일 새벽 2시 45분 12명의 승무원과 4.5톤의 폭탄을 실은 에놀라게이 호는 티니언을 떠났다. 약 15분 뒤 2천 1백m 고도에서 연속 총 11단계를 요구하는 섬세한 조립작업에 들어갔다. 승무원 가운데 어떤 중사는 아직도 임무를 확실히 모른 채 티베츠에게 "대령님, 질문이 있는데 우리가 혹시 원자핵을 분열시키려는 것 아닙니까?"하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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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격 대기 중인 에놀라 게이
                            
티 베츠는 그 중사를 뻔히 쳐다보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도 그 단어를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포로로 붙잡힐 경우 각자 자유재량으로 사용하도록 승무원들에 제공할 청산가리 캡슐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아무에게 말하지 않았다. '꼬마소년'의 플러그를 갈아끼우고 투하준비를 완료했을 때 비로소 티베츠는 기내 방송장치를 켜고 "우리는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을 수송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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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놀라 게이호의 승무원 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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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에 쓰인 원자폭탄  "little boy"

오전 7시 9분 히로시마 라디오 방송은 공습경보를 발령했다. 기상 정찰용 B-29의 접근을 경보한 것이었다. 에놀라 게이 호는 8시 12분 드디어 폭격개시점에 도달했다. 일본 레이더는 이것을 놓치고 히로시마 30km동쪽에 위치한 지상 감시소가 B-29기 접근을 보도했다. 폭탄에 지장을 초래할 일본 레이더의 전파는 없었다. 08시 15분 폭격수는 "폭탄투하"하고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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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놀라 게이호"가 아군기의 엄호 속에 투하를 위해 비행하고 있다.


순식간에 섬광이 나타나고 그 충격파 때문에 비행기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인형처럼 내던져졌다. 승무원 가운데 한 사람은 그 순간 녹음기록을 역사에 남겼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후에 생긴 버섯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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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의 원폭 투하 장면이다.

"연기 기둥이 급속히 솟아오르고 있다. 그 속에는 화염의 붉은 핵이 보인다. 자줏빛과 회색의 이글거리는 덩어리가 그 붉은 핵과 함께 보이고 있다. 그것은 온통 광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불길이 마치 거대한 용광로에서 내뿜는 화염처럼 솟아오르고 있다. 도시는 그 밑에 있음이 틀림없다."

오후 2시 58분, 에놀라 게이 호는 티니언 섬으로 무사히 귀환해 착륙했다. 이튿날 트루먼 대통령은 원자폭탄 사용에 관한 성명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만약 일본이 아직도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또다시 사용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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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루먼 대통령

 

 

원폭소식을 들은 히로히토 천황은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우리는 불가항력에 머리를 숙여야 하오. 과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우리는 가능한 한 속히 전쟁을 끝내야 하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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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히토

도고 외상은 포츠담 선언의 수락을 주장했다. 그러나 육군은 본토에서 최후의 자살적 백병전을 주장했다. 아나미 육군상은 평화제의를 거부하고 심지어 원자탄 투하 사실마저도 부정하고 나왔다. 사실상 일본정부는 원자탄에 관해 트루먼의 언급 외에는 아직 확증을 갖지 못했다.

그리하여 히로시마에 유명한 핵물리학자를 파견했는데, 그는 원폭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 내 군국주의자들은 좀처럼 굽히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리려 하지 않고 신문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애매하게 "히로시마에 신형 폭탄이 투하되었다."고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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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투하 후..일본에 의해 찍혀진 히로시마의 사진이다.

도고 외상은 소련 쪽으로 움직였다. 그는 사토 대사에게 긴급전문을 보내 소련측으로부터 즉각적인 회답을 얻어내라고 지시했다. 8월 8일 소련 외상 몰로토프는 사토에게 면담을 제의했다. 사토가 나타나자 몰로토프는 일본이 학수고대하는 협상중재 응답이 아닌 선전포고문을 전했다.

사토가 몰로토프의 사무실을 떠난 지 2시간 만에 160만 명의 소련군이 일본군 관동군을 상대로 싸우기 위해 만주국경을 돌파해 물밀듯이 쏟아져 내려왔다.

소 련 참전 소식은 일본정부에 원자폭탄보다 더 큰 충격을 주었다. 협상 중재 제의를 무시하고 배신으로 대답한 데 대한 충격이었다. 스즈키 수상은 즉시 최고전쟁지도회의를 열고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발언했다. 그러나 수락하더라도 조건을 달아야 한다는 식으로 회의가 흐를 뿐 쉽게 결론 내리지 못했다.

한편 워싱턴에서는 고위층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히로시마 참상이 나타난 정찰사진을 보자 합참의장 레이히 제독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원자탄을 비인간적인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암흑시대의 야만인에게 있었던 윤리적 기준을 채택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육군장관 스팀슨은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고 "이제 일본에 대해 보다 부드럽게 접근할 때가 되었다."고 말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달랐다. 그는 사진의 비참한 광경을 보고서, 자신의 책임은 통감하지만, 그래도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고 또 항복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했다. 따라서 제2의 폭탄을 8월 9일 투하할 것이고, 항복하지 않으면 제3, 제4의 폭탄을 사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티 니언 섬에서는 바로 제2의 폭탄을 실은 폭격기가 9월 03시 49분 이륙했다. 이 폭탄은 플루토늄 폭탄이었다. 최우선 목표는 규슈에 있는 병기공장 도시 고쿠라였다. 제2차 목표는 남서쪽으로 160km 떨어진 나가사키였다. 승무원들은 육안으로 목표를 확인할 때만 폭격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1차 목표상공에 가보니 극심한 연기가 깔려 있어 그것을 포기하고 오키나와로 가는 길목에 있는 나가사키로 가서 11시 01분 폭탄을 투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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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박스카의 기체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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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박스카의 승무원들이다

 

위의 글은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 "ENOLA GAY"의 원폭 투하일의 정황이다.

그리고 이 글의 제목인 "The buck stops here."은 투루먼 대통령이 일본에 대한 원자폭탄

의 사용을 허락하면서 전쟁의 끝을 알리는 유명한 한마디 였다.

원자폭탄은 모든것을 송두리째 없애버리며 길고 거대했던 전쟁에 마침표를 찍었지만..

다른 한곳에선 지옥의 시작을 뜻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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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의 여성 원폭 피해자의 사진이다. 

히로시마엔 우리 민족도 많이

있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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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전함 미주리호에서의 함상 항복 조인식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던 토머스 패러비 대령은 2003년 3월16일에 81세의
나이로 플로리다에서 사망했다. 패러비 대령보다 3일 후에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커미트 비한 대령은  1989년에 사망했다.

투루먼의 재가로 원폭이 투하됨에 따라 대전은 끝나게 되었지만,,

다른 전쟁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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