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그림자가 조용히 다가온다 .....................
제 12편
8월 중순까지 육군 참모들은 최종적인 남방 작전의 상세한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미 이 작전에서의 출동이 결정돼있던 해군 부대는 상륙작전 지원 연습을 하고 있었다.
해마다 도쿄 대학에서 모형 함선을 사용하여 실시되는 해군 도상연습은 여느때 같으면
11월이나 12월에 열리게끔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세의 중대함과 더불어 해군 군령부와
연합함대 사령장관의 권한아래 지령이 내려지고, 1941년도의 도상연습은 9월 중순으로
앞당겨지게 되었다.
3명의 해군 대장, 7명의 해군 중장, 6명의 해군 소장, 7명의 해군 대좌,
20명의 해군 중좌가 정해진 시간안에 도쿄로 모였다. 나가노 군령부 총장이 천황을
배알하기 사흘 전에 도상연습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9월 5일 야마모토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Z작전을 제시할 때까지 아무도 그의 진주만 기습 공격 계획을 알지 못했다.
육군과 협력하여 행하는 판에 박은 지원작전의 예행 연습 뒤인만치 야마모토는
자신의 작전계획이 큰논쟁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했는데 실제로 들어맞았다.
예비적인 토론 단계에서도 이 계획에 열의를 보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그것이 대담한
계획이라는 점에서는 거의 전원의 의견이 일치되었다. 계획 실시는 가능하다는 의견도
크게 대두되었다. 그러나 최대의 관심사는 이 작전에서 항공모함을 몇 척 상실하게
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손에서 주사위가 던져지고, 두 척을 잃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보통 도상연습에서 예측할 수 없는 전운을 점칠 때 일본 해군은 주사위로 결정하는
방법이 하나의 관례였다.
야마모토의 측근 참모급 이외엔 그와같은 모험에 찬성하는 자가 거의 없었다.
물론 상급 장성은 아무도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계획은 도상연습의 하나로써
추진하기로 합의되었다. 그리하여 참석자는 하와이 제도의 오아후 섬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에 관해서 토론을 시작했다.
이에 관해 지칠줄을 모르는 겐다 중좌는 3개의 가능한 루트를 생각해 내고 있었다.
첫째는 남방 루트로서 마샬 제도를 경유하는 것, 둘째는 중앙 루트로서, 미드웨이 남쪽을
지나는 것, 셋째는 북방 루트로서, 다른 함선과 만나게될 가능성이 가장 적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본 함선은 비교적 항속거리가 짧기 때문에 하와이에 직항하는데는
도중에 해상에서 연료의 재보급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북태평양의 가을과 겨울에는
폭풍이 심해서 크게 곤란해진다. 특히 구축함같은 비교적 소형의 군함일 경우에는
두 번이나 해상에서 급유를 받아야하는 어려운 점이있다. 이와같은 이유로서
나구모 제독은 첫째의 남방 루트가 바람직하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날씨는 우리를 편들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자 겐다 중좌는 "나구모 제독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미 해군 제독들도
그와같이 생각할 것입니다."라고 지적했다.
하는 수 없이 나구모 제독은 북방 루트에 따라 연습 하는데 동의했다.
또 북방 루트로서 알류샨 열도와 미드웨이 섬의 중간 루트를 채택하기로 했다.
연습을 위해 참가자는 두 개의 조(組)로 나뉘어 졌다. 청(靑)조는 일본을, 적(赤)조는
미국역할을 맡았다. 첫 번째 예행 연습에서 공격은 우선 실패했다는 심판이 내려졌다.
일본군의 첩보부가 미군의 동향을 예측하고 이에 따라 적조가 공격하는 날 아침
발견당한 나구모부대의 공격기편대는 미 전투기의 요격을 받았다는 가정이었다.
심판의 판정으로선, 계속적인 미군의 반격으로 나구모 부대의 항공기 반수는 격추,
항모 2척은 격침당하고 다른 함선도 막대한 손실을 입는 것으로 되었다.
두 번째의 도상연습은 대체로 성공했다.
함대는 신중한 계획에 따라 새벽 어둠을 이용하여 직접 북방으로부터 접근해 갔다.
미군 정찰기에 발견되지 않고 기습에 성공했다. 이번엔 심판이 미군측의 손실은 막대하고
일본측은 거의 손실을 입지 않았다는 판정을 내렸다.
이 결과로 Z작전에 대한 반대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제독들은 여전히 이 계획이 너무나도 위험이 크며 일본의 해군력에 최대한의 부담을
주리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군령부는 이미 전 함대를 남방 진공작전에 투입할 계획을
완료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군령부는 한덩어리가 되어 야마모토 제독의 모험에 반대했다
결국 야마모토의 작전 계획을 승인한 나가노 오사무 군령부 총장
특히 군령부 총장인 나가노 대장은 좀더 거시적인 견지에서 계획에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미국의 사기를 불러 일으킬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고 주장했다.
야마모토 제독처럼 그 역시 얼마동안 미국에서 생활하고 미 태평양 함대와 미국의 공업력을 잘 알고 있었다. 나가노는 "자바 공략에 전력을 집중하여 석유 자원을 확보하자. 그리고나서 미 태평양 함대가 우리 근해의 수역에 나타났을 때, 이것을 격멸하자"고 역설했다.
야마모토 제독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일본은 진주만을 맹타하고 동시에 자바를 공략하기에 족한 항공모함을 충분히 갖고 있다. 미 태평양 함대가 공격해 오기 전에, 어째서 양쪽의 작전을 단숨에 해치우지 않으려는가. 만일 우리들이 진주만에서 미 태평양 함대에 치명적인 일격을 준다면, 일본이 필리핀, 말레이, 동인도 제도를 점령하기 전에 미 태평양 함대가 벌써 재기할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군령부는 이 작전 계획에는 역시 도박의 요소가 너무 많다고 주장했다. 성공의 단 한가지 가망이 있다면 미 함대를 기습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기습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공격은 일본측에게 엄청난 재난이 된다. 이 같은 반대는 해전은 거대한 주력함끼리 맞부딪쳐 대결해야 한다는 거함 거포주의라는 해군의 전통인식이 깔려있었던 때문이기도 했다.
Z작전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항공기라는 비교적 새로운 병기에 의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적적 입장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항공 공격작전에 의한 성공의
예로써, 단 하나 영국군의 타란토 항 공격이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기동부대 지휘관으로 이미 임명된 나구모 중장(소장에서 승진)도 마음이 선뜻 내키지
않았으므로 다른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일본군의 항공모함을 중요한 석유 산지의
공략 지원에 투입해야 한다고 제의했다. 그리고 그는 최대의 항모라도 두 서너 발의
폭탄을 맞으면 행동 불능 상태가 될 것이라고 예언적 경고를 했다.
야마모토의 작전을 지지한 야마구치 다몬 소장
그렇지만 전원이 야마모토의 작전 계획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항공기에 관심이 깊은 야마구치 다몬 해군 소장은 열심히 이 계획을 지지했다.
만일 미 태평양 함대를 고스란히 그대로 남겨둔다면, 일본은 어떻게 남방 작전에 성공을 거둘 수 있겠느냐고 강력히 주장했다.
젊은 장교들은 이 계획이 대담하기 비할데 없다는 점에 감격하고 공공연하게 열의를 보였으며, 한결 더 작전 규모를 확대하기를 요청했다. 그들은 기습 공격에 이어서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진주만과 오아후 섬을 점령하자고 역설했다. 이 때문에 군령부와의 격론이 더욱 가열되었다.
군령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나 말레이 작전을 위해 수송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극히 위험한 작전을 위해서 한 척이라도 군함을 전용시킬 여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토론에서만은 야마모토 제독도 군령부 쪽에 섰다.
남방 작전 완료까지는 상륙용 주정을 차출하기란 불가능했고, 또 차출하더라도
아마도 한달은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또 오아후 섬에 상륙을 기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 때까지는 미군이 진주만 피습의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또 수륙양용작전부대 호송 선단의 속도가 늦기 때문에 상륙 작전은 바다와 하늘로부터의
적 공격에 부딪힐 위험이 극히 크다. 그 뿐만 아니라 설사 상륙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오아후 섬의 점령 부대를 유지하자면 보급이라는 절대 필요한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9월 한달 동안 군령부와 야마모토 제독의 연합 함대 사령부 참모 장교들은 한자리에 모여
회동, 내년의 전반적인 작전 계획에 관해 끝없는 토론을 거듭했다.
Z작전은 의견일치할 수 없는 문제로써 일단 보류될 처지에 놓였다. 도상 연습이 있은
뒤부터 오니시 다키지로 소장 마저도 이 작전의 지지에서 후퇴해 버렸다. 처음부터
내캐지 않았던 나구모 제독은 그와 함께 야마모토 제독에게 이 작전의 단념을 간곡히 충고했다.
Z작전을 관철시킨 야마모토 제독
10월 11일,
여러 가지 소문이나 토론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야마모토 제독은 기함에 간부 장교 일동을 집합시켜 회의를 열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저녁 식사가 끝나고 야마모토는 장교 일동에게 Z작전의 반대 의견을 기록에 남기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고 자유로이 발언하라고 말했다.
이 예외적인 아량에 용기를 얻은 반대론자들은 차례 차례 일어나서 계획에 관한 우려를 표명했다.
반대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이 위험한 작전에는 제국 해군 대부분의 함정이 투입된다. 만일 이 작전이 실패하면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일본은 이미 패배하게 될 것이다. 소련의 움직임도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 과거
몇 달 동안 정치 정세는 악화의 길을 치닫고 있기 때문에 미군측은 기습 공격에 대비하고 있을 것으로 예측된다. 만일 미군이 Z작전의 실현성을 간파하고 있다면 일본군은 스스로 적의 함정으로 뛰어드는 자살행위가 아니겠는가. 작전을 실시하게 될 시기의 태평양 상황으로 보아 목표지로 항진중에 각 함선에 연료의 해상보급을 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아마모토는 장교들의 계속되는 토론을 중지 시켰다.
그는 침착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모두의 의견을 잘 들었으며 아주 흥미 깊었다.
여기서 다루어진 문제점의 어떤 것은 적중했다. 그러한 문제점에는 유의할 것이다.
하나 장기간에 걸쳐 전략적 정세를 검토한 결과, Z작전은 일본의 대전략에는 불가결
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따라서 내가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 있는한 진주만 작전은
단호히 감행할 것을 명백히 밝혀두고 싶다."
이것으로 연합함대에서는 더 이상 토론의 여지가 없어졌다.
야마모토 휘하의 고급장교 전원은 미,일 양국의 외교관들이 현재 진행중인 교섭에
실패했을 때, 야마모토가 자신의 의도대로 작전을 진행시키고 제국 해군을 진주만 작전에
투입할 것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 해군 조직의 최상층부인 군령부는
여전히 작전을 반대하는 이유가 담긴 문서를 야마모토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나
야마모토는 구로시마 가메토 대좌에게 자신의 친서를 도쿄에 전달하도록 특사로
임명하여 파견했다. 구로시마 대좌는 Z작전계획의 승인을 받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던 것이다.
야마모토는 자신의 친서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하와이에 미 함대가 있다는 것은 일본의 목덜미에 비수가 겨누어진 것과 다름없다.
선전포고가 되었을 때부터 우리 측의 남방작전은 측면으로부터 미 함대의 중대한 위협을
즉각 받게될 것이다. 하와이 작전은 절대로 필요하다. 이것을 실시하지 않는 한 나는
사령관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자신이 없다. 작전에는 많은 곤란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가장 염려가 되는 것은 날씨이지만 해상에서의 연료보급이 가능한
날은 한 달 동안에 7일이나 있다. 그러므로 성공의 확률은 결코 낮지 않다. 만일 행운이
따른다면 우리들은 반드시 성공한다. 하와이 작전이 만일 실패로 끝난다면 무운이
우리들에게 깃들고 있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 뿐이다. 그 때야말로 단연 전 작전을
중지할 때인 것이다. 만일 이 계획이 실패한다면 이것은 전쟁에 패배했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군령부는 여전히 반대입장이었다.
군령부가 작성한 대표적인 다섯가지 항목의 반대 의견은 다음과 같다.
1. 작전의 성공은 오직 기습에만 달려있다.
2. 약 60척의 함대를 투입하는 대작전이다.
3. 이 함선을 개전 한달전에 출동시켜야만 하며 적의 주의를 끌기 쉽다.
4. 영국, 미국, 소련, 각국의 첩보망이 거미줄같이 확충되었다고 믿어진다.
5. 비밀이 보존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군령부의 반대는 계속 되었다.
하와이 작전에 참가하는 전 함선의 태반은 그 진격 도중 해상 급유를 받아야 한다.
구축함의 경우는 적어도 두 번의 보급이 필요하다. 또 기상 통계에 따르면,
북태평양에서는 해상에서의 연료 보급에 적합한 날씨는 한 달중 7일밖에 없다.
만일 연료 보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된다면 하와이 작전은 실패하고 참가한 전 함선은
다른 작전 계획에서 헛되게 전용한 것에 불과해진다. 한가지만 차질이 발생하면
차례 차례로 지장이 생기는 법이다. 해상에서의 급유가 곤란해진다면, 엄중히 금지된
무전을 사용해야만 하고 그렇게 되면 기밀이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군령부의 무전 첩보부는 미군이 매일 실시하고 있는 초계비행이 오아후 섬에서
약 2000km지점까지 확대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하와이 공격 기동부대가
미군기에 발견될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일본군의 각 항공모함은
공격기편대를 발진시키기 전에 진주만의 360km 이내까지 접근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미군의 반격을 받게될 위험은 매우 높은 것이다. 또 이와같은 작전계획이 추
진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이라도 누설된다면, 미,일 양국사이에 진행중인
외교 교섭은 즉각 결렬되고 만다.
아마모토의 특사로 군령부에 파견된 구로시마 대좌는
야마모토의 계획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 나는 야마모토 장관으로부터 자기의 계획이 채용되지 않는다면,
자기는 이미 연합함대사령장관으로서의 직책을 완수할 수 없다는 것을 통고하라는
명령을 받고 왔다. 장관은 사임하고 동시에 장관의 전 참모들도 모두 그만 두겠다는
결론이 내려졌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 사실을 전달받은 나가노 군령부 총장은 자신의 집무실 밖에서 결정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구로시마 대좌의 어깨에 손을 얹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작전 계획을 승인 하겠다."
나가노 군령부 총장으로선, 연합 함대의 사령장관 지위에 야마모토 제독을 앉히지 않고서
일본이 개전하는 비상사태를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어서 마지못해 승인했다.
이것은 1941년 11월 3일, 진주만 기습 35일 전에 일어난 역사적인 결정이었다.
미국과의 개전을 12월 8일로 한다는 비밀명령이 하달된 날인 1941년 11월 10일
기념촬영을한 야마모토 연합함대 사령장관(앞줄중앙)과 각함대 사령장관과 참모들
이미 공습은 시작됐다!
자료제공 :H/채널 (히스토리/20세기전쟁사편 중에서)
아이 여러분 오늘은 여기저기서 자료들 많이 메모해서 왔는데..
킁 여동생이 양념통닭을 사왔네요 ^^;; 쏘맥 한잔하고 하면 손떨려서 자료를 못 올려서 ㅡ,.ㅡ;;
죄송합니다 .. 음주 컴터를 안해서요 ^^
제주도는 비 엄청오네요 천둥치면서 잘 자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