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함대 아르마다 (Invincible Armada)의 침몰
서기 16세기 에스파냐는 세계 최대 강국이었으며, 영국은 조심스럽게 에스파냐의 자리에 도전하고 있었다.
당시 에스파냐는 중남미 대륙에 걸친 광대한 식민지를 지배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대서양과 지중해 일대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특히 아르마다로 불리는 스페인 전함은 무적함대로 불리우며, 유럽의 모든 나라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에스파냐의 극성은 펠레페 2세에 의해 의루어 졌는데, 1571년에는 오스만 투르크를 레판토 해전에서 대파시키고 유럽진출을 저지 시키기도 하였다.
나아가 에스파냐는 1580년 포르투칼을 통합, 포르투칼령 식민지까지 손에 너음으로써 남미의 모든 지역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에스파냐는 세계 최강의 부자나라이며, 최강의 해군을 보유한 나라가 되었다.
이에 비해 영국은 왕위상속 문제로 내분을 겪고 있었다.
우선 영국의 메리여왕은 펠리페 2세와 결혼하였으며 카톨릭을 옹호하는등, 에스파냐에 우호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하지만 메리 여왕이 병사하자 엘리자베스 여왕이 집권, 영국 국교를 장려하는등 에스파냐에 적대적인 정책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에스파냐의 막강한 해군력으로도 좀처럼 해결 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도저히 알 수 없는 해적들이었다. 특히 해적선장 드레이크는 에스파냐에게 악명을 떨쳤는데, 영국왕실에는 약탈품중 진귀한 보물들을 헌납함으로써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에 펠리페 2세는 영국 정부에게 드레이크를 처단해 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오히려 드레이크에게 기사작위를 줌으로서 본격적인 갈등을 빚기 시작하였다.
거기에 에스파냐 지배하에 있었던 네델란드의 독립운동을 지원해 주자 사태는 차츰 돌이킬 수 없는 수순으로 가고 있었다.
펠리페 2세는 급기야 엘리자베스에게 결혼을 신청하여 영국을 지배하고자 하였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란 유명한 답을 하며 그의 청혼을 거절하였다.
이후 엘리자베스는 펠리페 2세의 지원을 받은 메리 스튜어트의 왕위등극을 저지하고 그를 처형시킴으로써 마침내 두 나라는 대격돌을 하게 되었다.
1588년...영국과 에스파냐는 오직 하나밖에 있을 수 없는 세계 최고의 자리를 놓고 프랑스와 영국의 좁은 해협에서 대규모 해상전쟁을 벌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스파냐의 일방적인 승리를 예견하였다. 무려 130척이라는 엄청난 함대 규모는 물론이고, 배의 크기나 견고함면에서 도저히 영국 해군은 상대가 되어 보이질 않았다.
그러나 영국군은 오직 하나 스피드면에서 에스파냐 함대보다 앞섰다. 또 다른나라를 침략하고자 하는 욕심보다는,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애국심이 더욱 더 강한 결속력을 갖게 하기 마련이다.
7월 중순 2만 2000의 병력을 태운 130척의 에스파냐 함대는 라코루냐를 출항하여 영국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영국함대와 영국 해군은 제독 호워드(Howard) 의 지휘 아래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에스파냐 해군과 직접적인 전투를 피하면서, 사정거리가 긴 화포의 장점을 최대한 살렸다. 또 작은 함선의 기민한 움직임은 덩치가 큰 스페인 함대로써는 도저희 따라잡을 수 없었다.
포격전은 10여일이나 계속되었지만, 영국 해군의 기민한 치고 빠지는 전략에 에스파냐 함대는 차례로 화염에 휩싸여 침몰해 갔다.
결국 스파냐의 무적함대 아르마다는 100여척이나 되는 함선을 잃고 말았으며,이후 해상권을 장악한 영국은 대서양을 건너 태평양과 인도양에 걸친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제국을 건설하게 되었다.
[출처 역사의 천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