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때 학도소년병들의 전차중대 이야기VOL5- 두번째 전투

미연시다운족 작성일 09.08.11 01:00:39
댓글 0조회 2,791추천 0

124991980015952.jpg
이 회고록을 쓰신 오명섭 선배님의 전차장이셨던 김관동 중사님의 사진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뒤의 전차는 그럼 이 회고록에서 나오는 35호 전차일듯..


제 57 전차중대 소년전차병들의 이야기 - 315고지 이동, 그리고 복귀, 잠시간의 휴식

http://myhome.naver.com/boy_tank에서 발췌
이글은 만 16세와 17세의 지원 학도병으로 구성되었던 57전차중대의 이야기로서 소년전차병 홈페이지의 글입니다. 저작권은 소년전차병 홈지기님에게 있으며 관련 내용을 디펜스 코리아에 올려서 보다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하기를 허락받은 것임을 밝혀둡니다.



 315고지 전황


☆. 전사기록참조
《그리하여 2월초에 좌일선인 제15연대와 예비인 11연대와 교대케 하고, 종전에 우일선연대(12연대)의 일부가 임진강 좌안을 담당했던 것을 좌우일선의 전투지경선을 임진강으로 획정하였는데, 이로서 전선이 임진강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일선연대는 역곡천 남안의 어적산리 부근에서 임진강 동안 중사리에 이르는 남북의 진지를, 그리고 좌일선연대는 임진강에 접안한 Nori고지로부터 고왕산 서암에 이르는 서남방면을 맡게 되었는데, 이때 12연대의 CP는 》


1953 년 3월말

 

124991984822804.jpg
우리는 다시 야간을 틈타 이동하여 317고지가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벙커에 들어가니 미군의 식량이 남아 있어서 미군 전차부대가 머물다 간 곳으로 알았다, 그리고 남아있는 식량으로 배를 채웠다. 오랜만에 맛있는 식사였다.또한 우리 진지는 적과의 거리가 먼저 뱃드고지(배티)보다 멀리 있어 긴장감이 덜 들고 우측 적 가까이 설치된 써치라이트 부대가 있어 가끔 그 위치를 보고 포탄이 날아들 때도 있지만 우리는 그때 90MM 포의 직사사격으로 적의 벙커를 파괴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또한  얼마 후에 소식을 들었지만 31호 탱크는 포신이 갈라져 한 때 소동을 벌였다고 한다, 그 사건은 포를 사격하고 나면  포신 포구안에 이물질을 청소하는데 전우 한명이 청소 도구를 포신에 끼워놓고 깜빡 잊고 있다가 미 고문관이 온다기에 시범사격을 하다가 포신이 앞에서부터 쫙 갈라져 희생자가 날 뻔 하였으나 다행히 귀만 약간 상하고 말았다. (그후 후유증으로 정충섭 하사는 귀가 난청이 됨) , 다행으로 고문관이 웃는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다, 그리고 포신은 10 여일 만에 병기중대에서 수리할 수 있었다. (그때  이야기를 전우가 하면 가끔 박장대소를 한다 )


여기도  밤에는 계곡으로 적이 올까 싶어 긴장하고 있다가 저녁마다 일시에 낙하산 신호탄이 20~30초 떠오르면 모든 기관총을 동원하여 위협사격을 한다, 그 위세는 장관이다 불꽃이 지나는 탄도는 마치 그물망같이 퍼지고 너무나 아름답다 , 매일 밤 1시간 간격으로 사격한다,  우리는 때때로 기관총으로 함께 사격하기도 하지만 우리만이 적을 향하여 100여발 이상 사격하는 경우도 있다, 이제는 긴장감도 적어지고 전쟁을 즐기는 습관이 된 것 같다, 여기선 별로 중요한 사건도 터지지 않고  지냈다  


그리고 다시 예비소대가 되어 중대본부로 돌아 왔다, 봄이 오니 탱크의 모든 부분을 점검하고 한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1사단 15연대와 보전협동 작전을 했다 훈련 하는 동안 15연대 보병들을 보니 얼굴이 지쳐 보였다, 우리보다 연령이 모두 많다. 딱하게 보였다.  우리 소년전차병들을 부러워 하는 것 같이 보였다 우리 역시 훈련하고 오는 도중 쉬는 동안 배가 고파 허기진 배를 안고 풀밭에 펄썩 누웠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오직 배고픔만 ..그날 부대에 오니 부식비가 배로 올라 부대에 황소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한동안 기름진 식사로 배를 채웠다 그땐 정말 기뻤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전방에 진을 치고 있을 때가 편하다 소대가 함께 있으니 점호도 하고 군기가 엄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사이 외출도 했다 서울로.. 낮에는 전차 위에서 외출다녀온 전우가 있으면 새로운 노래를 배워와 노래를 배우기도 하고(그때 노래가 내가 배운 대부분의 노래들이다.  전선야곡, 비내리는 고모령, 가거라 삼팔선 등) 나도  어쩌다 외출 하면 권총을 차고 실탄을 서부 영화처럼 늘어트리고 폼을 잡고 집에 가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가운데 우리는 다시 최전방으로 출동하였다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124991988299429.jpg

 

제 57 전차중대 소년전차병들의 이야기 - 이태리고지 및 315고지에서의 전투


http://myhome.naver.com/boy_tank에서 발췌
이글은 만 16세와 17세의 지원 학도병으로 구성되었던 57전차중대의 이야기로서 소년전차병 홈페이지의 글입니다. 저작권은 소년전차병 홈지기님에게 있으며 관련 내용을 디펜스 코리아에 올려서 보다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하기를 허락받은 것임을 밝혀둡니다.


1953년4월중순경
戰史記錄 참조


《그러다가 3월 26일 04.00부터 우일선인 제12연대와 예비인  제15연대의 임무교대를 예정
하였으나, 이때 군단 좌익인 미 제1해병 사단의 Nevada 지역에 적의 공세가  들이닥쳐 분란을 일으키게 되었으므로 이 교대를 유예하였다가 4월 4일에 그 실시를 보게 되었다.
따라서 사단은 다시금 제15 연대(연대장, 송호림 대령)가 우일선이 되고, 제12연대(연대장, 정영홍 대령)는 동 제15연대의 예비진지에 집결하여 사단예비로 전환하였다》


우리는 다시 밤에 출동하였다 도착 후 여기서는 낮에 진지를 구축했는데 좌측 50미터 쯤 전차 진지에 영국군 전차가 있었다(사단간 전투지경선 지역인 것 같다), 영국전차는 우리 M36전차보다 신형이고 우리 전차는 구형이었다.  그러나 전차포만은 우리 포가 좋은 것이었다,


(당시 한국전에 참전한 영국군 전차부대는 1근위전차연대로서, 참전한 전차는 센추리온 Mark3이며 이 전차의 전차포는 20파운드 포였습니다. M36 전차가 보유한 포는 90mm 대전차포였습니다. 제가 찾아봤는데 불행하게도 17파운드 포는 유명해도 20파운드는 찾기어렵더군요. 20파운드는 영국군이 105밀리 전차포로 업건하기 전에 일시적으로 사용하였던 모양입니다. 원래 센추리온 초기형에 장착된 포는 17파운드 포였는데, 위력상의 문제로 20파운드 포로 개장하여 한국전에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90밀리 대전차포의 탄체무게는 12.3킬로그램으로 파운드로 환산하면 20파운드보다 7파운드 더 높고, 구경은 20파운드 포가 83.4mm로 역시 작습니다. 포구초속의 경우 20파운드의 자료를 못찾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전투가 보병지원을 위주로 했으니 대장갑으로서의 포구초속보다는 고폭탄으로서의 탄체무게가 중요했다고 친다면 아마도 90mm 포가 더 낳았다는 선배님의 말씀이 옳은듯.. 하지만 중공군 보병이 야간침투하는 상황에서는 대전차자주포에 탑승하신 선배님들이 영국 근위전차연대 전차병들을 부러워할 만 한 것 같습니다. 아 추가로 선배님들께서 말씀하신 유효사정 20000야드는 오기이신듯 합니다. 전차포 유효사정이 18킬로일리 없으니 2000야드를 오기하신듯..)


우리가 있는 곳은 우측1시 방향 317 고지가 보이고 앞 좌측으로 317 고지의 절반 높이의 이태리 고지가 정면으로 보인다, 그리고 계곡이 저 밑으로 길게 늘어져 있고 철조망과 지뢰밭으로 보강되어 있었다.


우리가 지원할 곳은 이태리 고지,  간간히 317고지 방향도 포를 쏘긴 하지만 주로 이태리고지에서만 싸움이 잦았다. 낮에는 아군이 점령하고 밤에는 중공군이 점령하는 되풀이되는 그런 상황이 자주 왔다. 그래서 밤에는 전 대원이 긴장 상태로 어느 때는 엔진을 걸고 후퇴할 준비를 갖추었던 때도 있었다,  다행히 아군 보병이 침투한 적을 방어하여 우리는 철수하지 않을 수 있었던 운좋은 경우도 있었다.


옆에 주둔한 영국 전차부대는 우리가 온 뒤 철수 했지만 함께 있을 적에는 그들과 통하지 않는 말도 서투른 영어로 대화도 하고 담배도 바꿔주면서 지냈다. 그들은 양담배보다 화랑 담배가 더 좋다면서..... 그러나 여기도 우리 전차를 보고 포탄이 간간히 쏟아진다 더욱이 5월16일 1소대장님이 전사하시고 대원이 부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슬픔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그날 밤에도 적의 공격으로 밤을 세웠다. 또한 나는 항상 후퇴할 수 있는 방향을 미리 고려하고 있었다. 우리는 전방으로 진격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에 유사시 후퇴명령이 내려지면 지체 없이 실행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동안  한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후에 알았지만 적이 올 때는 다수가 아닌 소수가 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 3소대는 1사단 좌측 전선에는 3개 지역을 모두 돌아다닌 것 같다.


그 후 어느 때인가 포탄이 심심치 않게 쏟아지던 어느 날 이동을 명받았다.

124991995733827.jpg
1953 년6월28일    사단 우일선으로 아래와같이 명령받음
《작전명령 제 99 호를 15.00에 하달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① 6.28. 01.00부로  배속된 해병 제1 연대전투단( 제3 대대)을
동시부로 제 11 연대 와 진지를 교대 하려한다.
②  제 11 연대
㉮ 6.28.001.00부로 현지역내의 방어임무를 해병 제 1 연대 전투단에 인계하고 사단예비진지에 집결한다. 동일시각부로 제 2 전차중대가 직접지원한다. 동중대는 D일 H시부로 15연대를 지원중인 해병전차중대와 임무를 교대한다.》

사진/글출처: DEFENCE KOREA 김수영님.

 

첫번째 전투가 끝나고 315고지로 이동하여 쉬는 제57전차중대 소년병들의 이야기와 다시 두번째 전투인 이태리고지 및 315고지에서의 전투의 수기입니다.^^; 

미연시다운족의 최근 게시물

밀리터리 인기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