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을 보면 상부장갑이 약식이나마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매우 얇아서 그랬는지 모래주머니로 보강해 놓은 상태입니다. 카할라니의 회고록에서 센추리온 전차가 무수한 포격에도 해치만 닫고 들어가 있으면 별 피해 없었던 것과는 달리 선배님들은 적군의 포격에 큰 위협을 느끼시면서 싸우셨을 것입니다.
제 57 전차중대 소년전차병들의 이야기 - 264 고지 일명 태풍전망대에서의 전투
http://myhome.naver.com/boy_tank에서 발췌
이글은 만 16세와 17세의 지원 학도병으로 구성되었던 57전차중대의 이야기로서 소년전차병 홈페이지의 글입니다. 저작권은 소년전차병 홈지기님에게 있으며 관련 내용을 디펜스 코리아에 올려서 보다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하기를 허락받은 것임을 밝혀둡니다.
264 고지 일명 태풍전망대
서기1953년 1월10일
《 ◇ 제2전차중대(소년전차병) 소대장 김능수 소위(57전차중대 제2소대장)
(1966.16 육본 작전참모에서, 소령)
당시 우리소대는 임진강 남안의 11연대 수색중대진지인 264고지에 소대전차 5대를 배치하여 주로 제11연대의 화력지원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진지변환을 하지 않고서도 제15연대의 Queen고지 일대에 대한 지원도 가능하였다.
6월18일부터인가 적의 포병이 기점사격과 요란사격을 실시하더니, 적 전방의 철조망 제거에도 무척 신경을 쓰는 듯하였다. 그 때 적의 포격은 산발적인 것이어서, 적진의 사격이 중지되는 틈을 타서 우리병력이 철조망을 다시 보수 하였는데, 그런 일이 일주일이나 반복되다가 朴고지에서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때 우리 전차는 4800yds(오기인가, 아니면 진짜인가? 대략 4.4Km의 거리, 이것도 추가로 찾아봤습니다. 풍산의 사이트에서 본 기록에 의하면 90mm 고폭탄의 유효사정거리는 17800미터에 달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철갑탄은 2500미터를 유효사정거리로 기록하고 있는데, 고폭탄의 경우 직사가 아닌 곡사(한국전 당시 사진중 인위적으로 흙둔덕으로 만들어 놓고 고각사격을 하는 전차도 있더군요.)의 경우인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서는 곡사는 아닌 것 같습니다.)를 놓고 사격하였는데 우리진지 옆 10m 되는 곳에 美포병의 FO가 위치하였다. 그래서 그 OP로 가서 상황을 알아보았더니,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소대원에게 전투준비를 갖추도록 하고 대기하였는데 잠시 뒤 FO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11연대를 지원중인 모든 화력은 15연대 쪽으로 집중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날 밤 우리전차는 이미 정해진 사표대로 밤새도록 포탄을 쏘았는데, 당시 소대가 확보한 포탄 1600발(트럭으로 다섯대분)을 다 쏘았다》
( 위 의 서술은 전사 기록에 의거)
육본작전 명령 의거 연천에 도착 4개 소대가 전선에 배치될 때 제57전차중대 1소대 2소대는 △264 (태풍)고지 주변에 탱크 진지를 구축 하였다, 그리고 적진지가 바로 눈앞에 놓여 있었다. 노리고지, 베티고지, 멀리 315고지가 보이는 그 곳은 1사단을 지원하여 적에게 사격을 가하여 가장 많은 피해를 주기도 하였으며 적으로부터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1소대 소대장(박승일 소위)님이 전사(1953년5월16일)하시고 다른 날 탱크 승무원 1명(김덕순하사)을 제외한 4명이 부상하여 후송된 곳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항상 적에게 타격을 많이 줄 수 있는 요새라고 할 수 있으며 우측 1시방향으로 멀리 queen고지와 朴고지, 제 1고지, 제 3고지가 있으며 그 곳은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1사단을 지원한 여러 부대가 함께 싸운 곳일 뿐 만 아니라 이 곳(노리고지)에서 김만술소위가 무공을 세운 곳이 바로 앞에 보이는 곳이 여기 이(△264)고지였다.
1953 년7월 15,16일 전투에서 우리57전차중대는 해병전차중대와 함께 많은 지원을 했다. 그리고 휴전을 맞았다
( 후에 태풍전망대가 될줄이야.......)
김덕순 씨의 7월27일날 의 증언(제2소대 26호 통신수)
제 2 전차소대 26호 단차 전차장 이성일 하사, 조종수 이지택 하사, 통신수 김덕순 하사, 포수 서동규 하사, 탄약수 양영환 하사, △264고지의 새벽5시 신호탄으로 시작하여 보병은 공격 대열로 전진하고 우리는 고지의 하단부부터 사격하기 시작하여 중단으로 사격하기시작하였다.
보병들이 공격하여 산을 오르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전차직사포(90mm)로 적진지 어디고 보이는 곳이면 2번이면 명중이었다
전차포의 위력이란 참으로 대단하였다, 보병이 중간 쯤 올라갔을 때는 상단으로 방향을 향하여 지원사격을 했다, 그 때 보병이 교통호에 뛰어들어 적군과 백병전을 하는 동안 사격을 중지하고, 그 때는 「쌍안경」으로 상황판단을 하면서 공격하는 것을 서로 주시하고 있을 때였다, 적군의 반격의 포문이 우리 진지를 향하여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몸을 피해 교통호로 내려가려는 순간 슛하는 소리와 함께 포탄이 우리주위에서 터진것이다. 우리 승무원 5명 전원이 쓰러졌다, 포탄은 비 오듯 떨어지는데 피할 사이 없이 모두가 피투성이가 되었다, 전차장, 조종수, 포수, 탄약수,는 수송되고 나는 머리와 오른쪽 무릎에서 피가 흘렀다 그러나 심하진 않았다 그대로 잔류하기로 하였다, 그날 우리와 같이 출동했던 노상호 하사도 부상으로 후송됐다, 그 후 우리 전차 26호에는 군번 첫자리 93으로 시작되는 조종수 문부산 일등병이 왔다. 새로운 승무원이 온 것이다, 병력보충을 받고 다시 최전방으로 가서 휴전되던 그 날까지 싸웠던 것이다, 휴전되던 그날 상부의 지시가 탄약을 전부 사격으로 소모하라는 지시였다. 그래서 하나도 남김없이 쏘았다, 90mm 대전차포, Cal 50mm, Cal 30mm를 적의 고지를 향해서 있는 힘을 다해 쏘았던 것이다.
어찌나 많이 쏘았던지 Cal. 30은 총신이 벌겋게 달아서 방아쇠를 당기지 않아도 그대로 나갔다. 도중에는 총알이 앞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 끝냈다, 7월27일 저녁10시까지 기관총을 쏘고 그 후에는 사격을 중지했다.
포탄과 기관총탄의 탄도는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을 내가 직접 했다, 모든 산이 총탄으로 불바다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중공군이 모두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아침이 되니까 하얗게 많은 중공군들이 나와서 중국 특유의 당가를 양 쪽에서 어깨에 매고 일을 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렇게 중공군이 많이 있을 줄은 생각 못했다
그리고 휴전직후 우리 제 2 전차소대는 20사단 60연대 와 함께 보전협동 훈련에 참가하였으며 [연대장 대령 채명신 전 주월사령관] 훈련규모가 컸다.
전국 대대장급 이상 각급 지휘관 내외귀빈다수 참석리에 시범훈련을 하였다 연대장님께서 잘했다고 감사장을 나에게 주었다 나는 그것을 보물인양 지금까지도 가지고 있다(2003.12.10)
이게 마지막 이군요.. 각각의 수기로서 한국전쟁 당시 학도소년병들의 전투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 한번 어린나이에 전투에 참가한 그들의 전쟁체험담을 제대로 볼수 있을 것이라 보여집니다.^^ 비록 제대로된 전차가 아니라 대전차자주포로서 전투를 치루며 나라를 지킨 대한민국 소년학도전차병들께 삼가 머리를 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