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천조국 공군의 위엄, 베를린 봉쇄

M2HB 작성일 13.05.17 12:5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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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봉쇄

1948년부터 49년까지 소련이 서베를린에 대해 단행한 전면적인 물자공급봉쇄조치. 의미를 확장하면 이 봉쇄조치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미국의 대규모 공수작전까지 포함한다.


소련의 봉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한 이래 승전 4개국(미·영·프·소)은 독일을 4개로 쪼개어 분할점령 및 통치를 하고 있었다. 그 중 베를린은 소련 점령지역 한복판에 있었지만 수도라는 특성상 역시 4등분된 상태였다.

그러나 대전 말기부터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동서 양 진영의 갈등은 46년 이후로 극에 달하면서 날이 갈수록 첨예해졌다. 소련은 마셜 플랜을 바탕으로 하는 미국의 유럽재건부흥계획을 탐탁치 않게 여겼으며,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3개국이 공동대응을 하는 것에 위기감을 느꼈다. 당연한게, 독일 영토는 승전국끼리 거의 비슷하게 나눠먹었는데 소련을 제외한 나머지 셋이 합쳐버리면 밸런스가 확 기울어버리니까….

이같은 소련의 우려는 1948년 3월에 현실화되었다. 미영프 3국이 자신들의 점령 지역에서 쓰이는 표준화폐로 독일 마르크화를 채택하며 서독의 경제단위를 통일시키자 소련은 연합국 공동관리위원회에서 탈퇴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뒤이어 마르크화가 서베를린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자, 소련은 4개국 공동 베를린 행정위원회를 폐지했으며, 6월 18일에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모든 도로와 철도를 봉쇄하고 소련 점령당국의 특별한 허가를 받지 않으면 통행을 엄금했다. 21일에는 미군의 군수물자 수송용 기차마자 회선시켰으며 22일 소련 점령지역에서 쓰일 새 화폐 오스트마르크화를 발표했다.

24일에 이르러서는 최소한적으로 이뤄지던 생필품의 공급마저 전면적으로 중단되었고, 동독 지역에서 서베를린으로 이어지는 송전도 일제히 차단되었다. 당연하게도 이 모든 것은 모스크바에 있는 강철의 대원수 동지의 결정이었다.

스탈린에게 있어서는 봉쇄는 매우 합리적이며 온건(…)한 정책이었다. 재래식 군사력의 우위가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핵개발을 하지 못한 소련으로서는 서방과의 새로운 전쟁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더군다나 지난 전쟁으로 2천만이 넘는 국민이 죽고 서부 국토가 초토화된 소련으로선 종전 3년만에 더 벅찬 전쟁을 치른다는 건 선택하기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그러나 향후 서방과의 관계나 독일 문제에 있어 연합국보다 우위를 차지할 필요성은 있었고, 때문에 서베를린을 봉쇄하는 평화로운(…) 대안으로 이를 관철시키려 했다.

이로서 인구 200만의 대도시 서베를린은 졸지에 굶주리게 되었다. 당장 서베를린에 있는 물자는 36일치의 식량과 45일치의 석탄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봉쇄 소식이 알려지면서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했다.


미국의 역습

봉쇄 사실을 통보받은 연합국은 매우 당황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와 영국 모두 독자적으로 뭘 어떻게 해볼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에 결국 연합국 진영의 맹주인 미국의 결단만을 기다려야 했다.
미국도 상황이 좋지 않다고 보고 있었다. 실제 백악관의 각료회의에서 대부분의 각료와, 합참의장 오마르 브래들리 대장마저 베를린 봉쇄를 피할 수 없으며 베를린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여기에는 미국 역시 소련과 전쟁을 할 상황이 절대 아니라는 점이 감안되었다. 당시 서베를린을 포위한 소련군 병력만 50만이었고, 동독에 전개한 소련군 전체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반면 미국과 영국은 종전 후 급속한 감군으로 병력 규모가 크게 줄어서 무력으로 봉쇄를 풀기 힘들었고, 무엇보다 서방 역시 소련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전쟁은 피하고자 했다.

대규모 공수작전이 대안으로 제시되었으나 일 평균 3,600톤의 물자를 서베를린으로 공수해야 한다는 보고에 다들 꿈도 희망도 잃어버렸다. 설사 공수작전을 감행한다 해도 필요한 물자를 충분히 공급할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였으며 수송기들이 중간에 소련기의 방해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해리 트루먼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베를린 공수 강행을 공군에 지시했다.


작전 개시

한편, 1948년 당시 미국 유럽공군사령관은 바로 그 악명높은 석기시대 매니아였다. 르메이는 다행히 소련과 동독을 석기시대로 만들라고 하진 않고 [그런데 만약 소련이 수송대를 방해하려 했으면 이 인간 진짜로 대대적인 폭격에 나설 준비 다 하고 있었다] 전세계의 C-54 조종사들한테 전한다. 지금 즉시 독일로 날아오도록!이라는 명언을 남기며 현장에서의 공수작전을 진두지휘했다.


르메이는 C-54라고 언급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작전 첫 날, C-47 수송기 32기가 제1차 수송에 나섰으나 그렇게 옮긴 물자가 꼴랑 82톤(…)이라 망했어요. 거기다 유럽공군 탈탈 털어 나오는 C-47 수송기는 달랑 100여대. 망했어요 망했어요.
르메이는 여유가 있는 모든 수송기들의 증원요청과 함께 본국에 더 크고 아름다운 대형 수송기 C-54의 대규모 투입을 요청했던 것이다. 아울러 자기는 이런 대규모 수송작전에 소질이 없다며 태평양 전선에서 같이 종군하며, 인도에서 중국으로의 항공수송작전을 총괄 지휘했던 윌리엄 터너를 적임자로 천거했다.
여튼 르메이의 요청을 받아들인 워싱턴은 가용 가능한 모든 수송기의 총투입을 약속, 7월 1일에 마침내 C-54의 첫 작전 투입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천조국 물량 전설이 시작되었다.
작전개시 단 1달만에, 작전에 투입된 미군 수송기는 1,000여 대에 육박하고 있었다.(…) 미국은 대전 후 쓸데가 없어서 퇴역시켜 창고에 짱박아두고 있던 수송기들을 모조리 꺼내고(…) 퇴역한 예비역 파일럿들을 재소집시키기 시작했다. 아울러 서독과 서베를린 지역에선 구 독일군 출신 정비병들까지 총소집해 작전중인 수송기의 정비활동을 지원했다.


7월 초가 되면 이미 미국의 1일 공중수송능력은 500톤으로 급증했고, 8월이 되면서 1천톤은 가뿐히 넘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를 같이 하여 르메이가 전략공군사령관으로 영전하며 소련을 석기시대로 만들 준비하고 윌리엄 터너가 유럽공군사령관이 되면서 효율성이 빠르게 개선되었다.


새해가 되면서 미국의 먼치킨적 물량은 소련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 넣었는데, 1월에만 171,000톤, 2월에 152,000톤, 3월에 196,223톤의 물자가 각각 공수되었다. 이 수치는 베를린 시민들이 생활을 하고도 남아서 비축(…)이 가능할 정도의 양이었다. 4월에는 극에 달해서 아예 부활절 단 하루동안 미국은 수송기 1,383소티를 투입해 서베를린에 13,000톤(…)의 물자를 때려박는 이벤트를 보여주었다. 이 시점에선 생필품이 아니라 쵸코렛과 사탕, 껌과 커피같은 기호품마저 덤으로 실려지는 판국이었으니…. 아예 애들 사탕 등 간식류만 수송해주는 수송기 소티마저 할당되어 있었다.(…)


이 어처구니 없는 물량전을 본 강철의 대원수는 어이를 상실했다. 미국의 공수를 방해하고 봉쇄를 유지하려면 전투기를 동원해 직접 요격하는 방법뿐이었지만 이 짓은 미국과의 전면전쟁을 의미했기에 도저히 선택할 수 없었고, 결국 5월 12일 봉쇄령이 해제되었다.
그럼에도 미국은 소련이 훼이크를 쓸지도 모른다고 생각, 공수작전을 다섯달이나 더 하다가 10월 1일에 공식적으로 작전을 종료했다.


결과

결국 베를린 봉쇄는 대실패로 끝나고 오히려 미국의 가공할 경제력과 동원력만을 재입증시켜주고 말았다.제6군에 200톤씩 보급해주겠다던 돼지랑은 비교가 안된다. 오히려 베를린 봉쇄로 인한 미국의 공수작전은 서방세계의 화려한 선전현장이 되었을 뿐이었다.


오히려 미국에선 이를 계기로 대소 강경파가 득세하기 시작했으며, 공수 기간 중 벌어진 1948년 대선에서 트루먼이 듀이에 대역전승을 거두게 되는 이유 중 하나로도 거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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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전기간동안 미국은 사고로 수송기 18기를 잃고 40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아래 사진은 당시 공수작전의 무대였던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에 있는 사망자 위령비.


그들은 베를린의 자유를 위한 1948~49년의 항공수송작전에서 목숨을 잃었다.
작전무대였던 템펠호프 공항은 통일 이후 이용객이 급감하면서 2008년 폐쇄되고 철거를 시작했다. 그러나 공항 철거에 있어서도 베를린 공수 당시의 의미있는 현장이라며 반대해 시민투표를 할 정도였고, 실제 공항이 폐쇄되는 날 마지막으로 공항을 이륙한 이벤트 기체는 공수작전 당시 투입된 기체 중 하나였던 DC-3 수송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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