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내생각]이영화 리뷰가 없다니!!! "오아시스" 한국영화의 최고.

레볼루션™ 작성일 06.05.03 20:2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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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내공 : 상상초월


소통공간의 중심인 오아시스





우리가 상식적인 수준에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오아시스는 사막 한가운데 있는 것으로 물과 숲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해주는 곳이다. 그러나 영화 '오아시스'에서 말하는 오아시스는 이 정도의 의미에 머물지 않는다. 영화에서 말하는 오아시스는 막힐 데로 막힌 세상을 소통시켜줄 수 있는 핵심이며, 가장 역동적인 움직임과 활기찬 생명력을 가진 곳을 상징한다. 세상이 사막이요 주인공과 그들이 있는 공간이 바로 오아시스라는 아무 평범한 출발에서 시작하여 세상을 소통시키는 원천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오아시스는 세상의 모든 것이 소통할 수 있는 원동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를 가리키며 그런 공간을 지칭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 오아시스를 통해서 소통하지만 세상은 그것을 모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아시스는 세상에서 버려지고 이용당하는 존재로 부각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모든 것이 막혀 있는 세상을 소통시켜줄 수 있는 핵심이 바로 '오아시스'에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말하는 막혀 있는 세상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20세기의 1.2차에 걸친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인류 모두가 겪었던 전쟁과 냉전이데올로기로 인하여 만들어진 서로에 대한 불신과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제국주의 등으로 인하여 막혀버린 현실을 말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문명의 발달로 인한 인간관계의 막힘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를 소통시켜 줄 수 있는 가능성과 힘을 가진 곳이 바로 영화에서 말하는 '오아시스'며 남.녀주인공이다.



우선, 이 영화를 볼 때 염두에 두면 좋을 것이 몇 가지가 있다. 첫째,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의 집을 찾아갈 때 항상 무엇인가 짐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이것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것이다. 둘째, 여주인공이 정상적인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 갖는 의미이다. 셋째, 경찰서에서 탈출한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의 집 앞 나무에 올라가서 나무를 톱으로 자르는 행위가 가지는 의미에 대한 것이다. 넷째, 여주인공이 처음에는 거울을 통해 빛을 비추다가 어느 시점에서 거울이 사라지고 마는데, 이 시점과 거울이 사라지는 의미에 대한 것이다.



첫째, 짐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은 '오아시스'를 정점으로 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거쳐간다는 것인데, 이것은 오아시스가 가진 소통공간으로서의 의미와 늘 움직인다는 역동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사막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오아시스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그곳을 통해 역동성을 얻게 되고 이를 중심으로 움직여 나간다는 것이다. '오아시스'가 소통공간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 소통을 통하여 세상을 움직이며 자신을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풀이된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오아시스를 정점으로 하여 삶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삶이 바로 오아시스에서 온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여주인공의 식구들과 그녀 때문에 여러 혜택을 보고 있는 옆집 사람들, 그리고 남주인공의 식구들이 바로 그렇다. 그들에게 있어서 남.녀주인공이 있는 오아시스는 이용대상일 뿐이다.

둘째, 영화에서 여주인공이 정상인으로 행동하면서 남주인공을 사랑하는 장면은 소통을 거부하는 세상과의 연결과 화해를 통하여 소통의 원천이 '오아시스'인 자신에게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장치는 넣지 않아도 여주인공이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것으로 작품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관중에 대한 감독의 지나친 배려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이 장면들이 나올 때 흐르는 음악이나 주인공이 부르는 노래들이 모두 작품의 진행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가진 사랑의 힘을 바탕으로 세상을 향한 소통의 몸짓이 이루어지는데, 여기에 보조 자료로 음악과 노래가 사용된다는 것이다. 여주인공이 부르는 노래나 라디오 등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음악, 여주인공이 하는 행위 등이 모두 보조장치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나무를 자르는 행위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 행위는 벽걸이에 비친 그림자를 없애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나무는 사막 같이 막힌 세상을 바탕으로 하면서 '오아시스'가 가지고 있는 소통공간으로서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존재이다. 그 그림자가 흔들거리면서 오아시스의 존재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나무 그림자는 바로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식구들과 주변의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남주인공이 나무를 잘라내는 행위는 세상의 소통공간이라는 성격을 본질로 하는 '오아시스'의 순수한 의미를 회복시켜줌과 동시에 세상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이것을 통해 비로소 '오아시스'는 세상과의 대화를 시작할 수 있게 되며, 참되고 순수한 본래의 성질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남주인공이 나무를 자를 때 여주인공이 라디오 음악으로 화답하는데, 이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보면 바로 예식장 선전 음악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나무를 자르는 행위는 두 사람이 완전한 결합을 했다는 것은 의미하는 것이다. 지켜보는 경찰과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잠을 깬 동네의 사람들이 바로 하객이다. 세상의 사람들이 하객으로 보는 가운데, 이 둘은 결혼식을 올리는 의식을 치른 것이다. 그러므로 그 때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이 바로 결혼식장 선전 음악이 되는 것이다.



넷째, 여주인공이 하는 거울을 통한 빛 비추기의 행위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여주인공은 거울과 반사된 빛을 통해서만 세상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남주인공이 나타나는 시간에 거울은 깨어진다. 그리고 깨어진 거울을 통해서 몇 마리의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여준다. 깨어지기 전의 거울과 빛은 막힌 상태의 세상과 오아시스 사이게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오아시스'가 소통공간으로서의 구실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겨우 가능한 것이 있다면 평화롭다고 까지 할 수 있는 하얀 새를 보여주는 정도이다. 그러나 세상은 거울을 통해서 보듯이 그렇게 평화로운 곳이 아니다. 그리고 거울이 깨어진다는 것은 남주인공의 행동을 통해 세상과의 소통이 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이다. 나머지 거울도 세상의 막힌 이치로 자신을 강간하려고 했던 그 시간 이후에는 사라진다. 그리고 남주인공을 통해서 여주인공은 세상과의 대화를 거의 직접적으로 시작한다. 이제 간접적으로 세상을 보던 거울은 필요 없게 된 것이다. 거울과 그를 통해 들어오는 빛, 하얀 새에서 남주인공의 얼굴로 옮겨간 빛, 거울의 깨어짐, 소통의 매개체로 오는 남주인공, 세상과의 대화 시도와 세상의 거부, 나무그림자의 제거, 창문을 통해 직접 들어오는 마지막 장면에 나타나는 환한 세상의 빛, 완전한 소통 등으로 이어지면서 영화는 진행되고 막을 내린다. 이것은 이 영화를 진행시키는 핵심적인 구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파악하지 못하면 그냥 평범한 사랑 영화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들을 마음속에 생각하면서 이제 영화가 말하려고 하는 의미들을 생각해보자. 영화에서 오아시스는 여주인공인 공주다. 그리고 남주인공은 오아시스와 세상을 소통시켜줄 사자인 매개체로 등장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장애자에 대한 사랑을 그리고 있는 그런 작품이 아니다. 세상을 구하고 소통시켜줄 수 있는 희망과 가능성을 보여 주기 위한 작품이다. 이제 영화를 따라가면서 하나 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남주인공은 사막 같이 막혀서 아무 것도 소통하지 못하여 반목과 불신만이 가득한 세상에서 버림받은 상처 입은 영혼이다. 형 대신 옥살이를 하면서까지 가족을 위해 헌신하지만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식구들에 의해서 늘 외면 당하는 존재이다. 형대신 옥살이를 하라고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가족 전체의 말없는 압박이 스스로 감옥으로 가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생일잔치에서 남주인공은 갑자기 방울새 이야기를 꺼낸다. 방울새 목에 방울이 달렸다고 한 이야기를 그대로 믿었다던 남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주변의 식구들이 남주인공에게 어떤 압박을 가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형이 화를 벌컥 내는 것이다. 소통이 안돼는 막힌 세상에서 그가 하는 행동은 모두 이상하기 때문에 늘 부딪혀서 깨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순수하고 맑다.

그리고 여주인공은 뇌성마비 장애자로 세상에서 격리되어 혼자 지내는 존재이다. 그녀 역시 주변 사람들에게 버림받는다. 장애자인 동생의 이름으로 국가에서 장애인 아파트를 분양 받지만 실제로는 동생을 데리고 살지 않으면서 동사무소에서 검사를 나올 때만 집에 데려다 놓는다. 그녀는 오빠와 올케에 의해서 철저하게 외면 당한다. 이러한 여주인공에게 세상과의 소통을 성사시켜줄 존재가 바로 맑은 영혼을 가진 남주인공이다. 결국 이들은 사랑으로 맺어지게 된다.



남녀주인공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많은 것들을 제공해주고 있지만 버려지는 존재이다. 그들이 버림을 받는 이유는 막힌 세상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여주인공은 신체적 장애 때문에, 남주인공은 영혼의 순수함 때문에 그렇게 된다. 그러나 이 두 사람에게 바로 세상을 소통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숨어 있다.

남주인공의 행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여주인공과 함께 있을 때 하는 행동과 세상 속에 있을 때 하는 행동이다. 여주인공과 함께 있을 때 하는 행동은 같은 맑음을 가진 상대에 의해서 금방 파악되고 여기서는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것이 두 사람 사이의 사랑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세상에 나와서 하는 그의 행동은 문제 투성이다. 달라진 것은 전혀 없지만 세상은 그의 행동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본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남주인공을 통해 많은 것들을 받는다. 그의 행동은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정상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 왜 그렇게 보이느냐 하면 세상이 불신과 갈등 등으로 완전히 막혀 있기 때문이다. 막혀 있는 상태에서 모든 것을 보기 때문에 내면의 진실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여주인공의 행동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의 행동은 움직임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표정과 어눌한 말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수용되지 않는다. 단절된 상태에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중심을 이루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오아시스'의 순수성과 맑음이 제대로 보일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오아시스'인 그녀를 이용만 한다. 장애자 아파트 제도를 악용하는 것에서부터 남주인공의 보호자와 돈으로 흥정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행동은 모두 이해관계로 점철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남녀주인공들에 의해서 세상을 소통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은 채 그것을 이용대상으로만 삼는 존재들이다. 막혀 있는 존재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가족은 소통의 수단이 없고 이해관계만 있기 때문에 만나면 부딪히고 싸우게 된다. 이것은 남주인공이 세상과 부딪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두 가족의 대표자들에 의해서 남녀 주인공의 수수함은 철저하게 외면 당하고 오아시스와 감옥이라는 두 곳으로 분리된다. 그러나 이 분리를 통해서 두 사람은 비로소 진정한 소통공간의 의미를 확보하게 되고 세상과의 화해를 시작한다. 여기서 영화는 끝이 난다. 여기에서 말하는 '오아시스'는 막힘이 전혀 없는 소통공간으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공간이다. 그곳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남주인공이 세놓은 방의 이미지와 같은 생명을 잉태하고 키워준 어머니의 자궁이기도 하며, 이상향이기도 하다. 그리고 '오아시스'는 세상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막혀 있는 세상과 그렇기 때문에 顚倒되어 이해되는 '오아시스'의 원래 의미를 회복하기 위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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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설명은 네이버에서 퍼온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개인적인 오아시스에 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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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저는 설경구와 문소리라는 배우를 처음 보는때였습니다.
그때가 중3이였던가.. 그럴텐데.. 사람들이 정말이지 한국영화중 이런영화도 있구나..라고 말하길래 보게 되었죠..
그때 당시 저는 철이 없었고 영화를 보는 내내 불쾌했습니다..
하지만 고3이 지나 대학생이 된 지금 그 불쾌감이 뭔지 알았죠.
그것은 각박한 사회에서의 두사람의 사랑이 아름다운듯 잔혹하게 비친것이 저에겐 불쾌했습니
다..
두사람의 사랑을 알아주지 않고 홍종두(설경구분)를 철장에 집어넣을때도... 저는 분노했죠..
이게.. 정말 우리가 사는 세상일까...
정말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 각박하다면.. 그 두사람의 사랑은.. 이런 매마른 사막에의 오아시스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영화광이시라면... 오아시스라는 영화.. 정말.. 추천합니다..
한국영화는 긴급조치19호, 성냥팔이 소녀의 제림, 선데이서울 이런 영화만 있는게 아닙니다..
한국영화의 오아시스.. 오아시스라는 영화를.. 진정한 영화인이라면 꼭 봐두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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